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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92
2월1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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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십니다!>
갑작스럽게 불어온 거센 돌풍, 기우뚱거리는 조각배, 넘실거리는 물결은 배속으로 들이치는, 참으로 절박한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당황스러웠던 제자들은 이러다 죽은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 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라고 하고, 뒷 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뒤 쪽에 누으셔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태평 예수님의 탁월한 유머감각이 다시 한 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볼멘소리로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복음 4장 38절)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복음 4장 39절)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 만 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복음 4장 40절)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산더미 같은 큰 파도 앞에 제자들은 주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 가운데 계시는 분의 정체를 잊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닥쳐온 현실의 높은 벽이 주님 존재조차 잊게 한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사형통할 때 사람들은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분의 존재를 기억하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시련의 높은 파도가 한번 우리네 삶을 휘감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우리의 뒷통수를 호되게 쳐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오로지 당면한 현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주님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점 한 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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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라>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습니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긴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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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맞서며, 인간의 것은 나약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여 일으켜 세우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작은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항해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라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거센 파도가 치는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인내심과 참을성을 지켜보시고, 죄인들의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그분께 열심히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함께 희생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니 그분은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분은 지치셨지만(요한 4,6 참조), 고생하며 근심하는 사람들의 안식이시다.(마태 11,28 참조) 그분은 잠에 무겁게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게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고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와 같이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을 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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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제가 아는 수녀님이 수녀원 입회 25주년을 맞아 소감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회한 날 저녁 식탁에 사과가 있었습니다. 각자 사과를 반쪽씩 먹었는데, 수녀님은 사과를 더 먹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봉헌의 삶을 살고자 수녀원에 들어왔는데, 그까짓 사과 반쪽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녀가 된 지 25년이 지났으니 제가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입회할 때처럼 저는 여전히 그 조그마한 것에도 마음을 빼앗긴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입회할 때에는 그런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러한 저를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부족함이 많지만, 이러한 저 자신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저 자신과 타협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권능을 더 깊이 헤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센 돌풍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던 제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넘실대는 파도를 넘어 하느님의 품을 향하여 항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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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래서 당신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제가 들어 아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담을 잘 하기 위한 두 가지 요령이랄까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담자의 고통과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내담자의 그 고통과 감정에 같이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우리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서도 안 되지만 급한 김에 무작정 뛰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건져준다고 덮어 놓고 물속에 뛰어들면 같이 죽을 수도 있기에 물에 빠진 사람의 위급한 상황에 신속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면서도 냉정해야 합니다. 줄을 던져 주던지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에 부닥친 사람에게 상담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해결해주려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겠지만 문제와 해결의 본질을 침착하고 냉정하고 꿰뚫어보고 정확이 해법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객관적 주관화 또는 동감적 냉정함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범한 사랑만이 이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다른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고, 겁이 나서 도망치고, 귀찮아서 도망치고는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자학하곤 하였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가 무슨 구세주인 양 여기도 나서고 저기도 나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돕는다고는 하였지만 같이 허우적거리다가 끝나고 만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를 창피해 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약함과 무모함은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제는 창피해 하거나 저를 자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이고 이렇지 않으시기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저의 구세주가 아니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다만 저의 약함 때문에 주님의 강한 능력을 더 믿고, 저의 고통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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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철현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침묵>
복음에서 어둠에 묻힌 호수를 건너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납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는 표현은 일행이 처한 상황이 얼마만큼 절박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서 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역경과 빠져 나갈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우리는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잠자고 있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합니다.
더군다나 처한 상황이 절박하고 긴급할수록 더 깊은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하지만 ‘잠자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재’나 ‘신은 죽었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자 예수님은 일어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침묵하는 하느님을 만나면 사람들은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자비로운 이유가 있음을 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생의 바람과 파도는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때때로 하느님이 나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그 때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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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바라보십시오. 주님만을…>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멸망을 앞둔 장망성이라는 도시를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여행하던 중 어느 주막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주막 가까이 가니 길 좌우에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겁하고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안내인이 말하기를 “겁내지 말고 자세히 살펴보세요. 저 사자는 쇠사슬로 묶여 있기에 길 한복판으로 가기만 하면 사람을 해칠 수 없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과연 사자들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길 중앙으로 지나가니 아무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운님들이 아무리 무서운 시련을 만났을지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고운님들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계속해서 많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셨습니다. 이에 반해 고운님들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처럼 삶의 자리에서 불평과 불만을 던지면서 염려하고 도망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겁내지 말고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주님만을….
오늘 복음을 보면, 거센 돌풍을 만난 제자들도 겁을 내면서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을 깨우며 불평과 불만스러운 말을 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과 한배에 타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거센 돌풍이 일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겁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 후에, 제자들은 자기들과 한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고 있는데도 배 안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가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제자들은 거센 돌풍 속에서 배를 구해 보려고 모든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다 했을 것입니다.
물론 시련과 곤경에 처했을 때 고운님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잊어버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믿음이 있는 고운님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고운님들은 위기의 순간에 전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순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항상 고운님들과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삶의 자리가 이쁜 고운님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8장 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폴란드에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 어느 유대인이 쓴 글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밝은 빛을 볼 수 없지만,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미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으로 간직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의 소리입니다. 길은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물은 길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니 길이 생깁니다.
“물처럼 삽시다. 물처럼 삽시다. 물처럼 삽시다. 물은 길이 없다고 멈추지 않는다.”
저 두레박 사제도 영적 일기와 시편 공부를 물처럼 멈추지 않고 가고 또 가면서 기도와 미사 중에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과 함께 소망하는 모든 일을 이루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어떤 시련과 곤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늘 고운님들과 함께 해주셨음을 믿고, 고운님들이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 찬미 드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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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94)
♧♧ 시편 72편 11절…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통치 영역이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미칠 것임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민족들과 여러 나라들이 온 누리의 임금(만왕의 왕)이신 메시아께로 돌아와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창세기 27장 29절. 즈카르야서 1장 2절. 참조)
♧♧ 시편 72편 12-13절…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합니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이 구절은 2절과 4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재차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구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세운 임금은 마땅히 정의로 백성들을 다스려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아모스서 5장 24절. 참조) 사회로부터 착취당하고 멸시당하는 이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
‘가련한 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 핍박과 박해를 받는 이, 또 신앙적으로 경건한 이 모두를 포함합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약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보살피며,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도와주는 것(4절. 참조)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구현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재산과 권력이 없는 불쌍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롭지 못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불쌍한 이들의 인권조차 무시당하기 일쑤이지만,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에서는 불쌍한 이들에 진정한 위로와 도움이 베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 시편 72편 14절…
"그가 억압과 폭행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에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 억압과 폭행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리니...
억압과 폭행은 의인들을 핍박하는 악인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메시아의 구원 사업의 성격을 나타내 줍니다. 실제로 메시아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루카 복음 4장 18절. 참조)
* 그들의 피가 그의 눈에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인들로부터 억압과 폭행을 당하는 의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피’는 의인들의 생명을 뜻합니다.(창세기 9장 4절. 참조) 비록 악인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경시하며 무고하게 해치려 하기를 서슴지 아니하지만, 참새 한 마리조차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인 인간들의 생명을 최고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대리자인 이 땅의 통치자들도 악인들로부터 위협당하는 이들의 생명을 지켜 보호해 주는 것을 통치자의 마땅한 도리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강조하고자 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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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미국의 사격선수 매슈 에먼스는 몸 상태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금메달을 먼저 획득한 후 2관왕을 노리며 남자 소총 50m 3 자세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이 경기에서도 그는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 다른 선수를 큰 점수로 앞서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발이 남았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에먼스의 금메달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큰 실수만 하지 않아도 금메달은 확실했으니까요. 드디어 마지막 한 발을 쐈습니다.
그런데 화면에 ‘0’점이 표시되는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맞춘 과녁은 10점이었지만, 그가 맞춘 과녁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옆 선수의 과녁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크게 낙담한 것은 당연했지요.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반려자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 해설을 보던 여자 사격선수 카데리나 쿠르코바가 찾아가 위로해주다 사랑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실수를 매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 남의 목표를 쫓다가 절망에 빠질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둠에서도 빛을 끌어내시는 주님께서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안내해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게 됩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가을에 이런 폭풍이 종종 불어 닥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하게 주무십니다. 정말로 주님께서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주무셨을까요? 주님께서 거룩한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제자의 믿음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그 풍랑이 절망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면서 주님을 곧바로 깨웁니다. 그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의 믿음 부족을 탓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워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너무나 쉽게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 안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을 깨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명령하시면서 나의 상황을 희망의 자리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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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하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오늘 복음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대가 욕을 듣는다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화가 치민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면 배가 위험에 빠지고, 그대 마음도 위험에 빠져 일렁입니다.
욕을 들으면 그대는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즐기면서 복수를 했다면 그대는 파선한 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대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깨우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우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유혹이 생기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대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그리스도를 깨우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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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광야에서 하루 지냈습니다. 잠시 머물면서 기도하기는 했지만 하루 밤을 지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베두인들이 지내는 천막을 순례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지만, 사막 한 가운데서 머무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별을 보는 행사가 있어서 참여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200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우리의 손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 전부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할 건 예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바둑 용어 중에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있습니다. 작은 걸 얻으려다가 큰 걸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순례 중에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물이 불어서 신발에 물이 들어올 것 같았습니다. 물을 피하려다가 자칫 크게 넘어질 뻔했습니다. 신발에 물이 스며들면서 편하게 물길을 걸으니 마음도 편했고, 발도 시원했습니다. 오늘 예언자 나탄은 비유를 들어서 다윗 왕의 잘못을 비난했습니다. 소와 양이 많은 부자가 자신의 걸 아끼려고 손님을 위해서 가난한 농부의 암양을 빼앗는 다는 비유입니다. 나탄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미 부인이 있음에도 이방인 출신인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리고 벌을 받을 거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거친 파도와 사나운 날씨’를 만나게 됩니다. 선원들은 잔잔한 파도와 맑은 날씨를 기대하지만 바다는 선원들에게 시련과 도전의 대상입니다. 만일 늘 잔잔한 파도였고, 맑은 날씨만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선박 기술의 발달은 없었을 것입니다. 선원들은 거친 파도를 견디기 위해서 더욱 견고한 배를 만들었고, 거센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 돛을 만들었습니다. 시련과 도전은 아픔과 고통을 주었지만 강한 정신력을 키워주었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다윗은 비록 잘못을 하였지만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시면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워하고, 겁을 먹었습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 앞에서 무기력해 졌습니다.
한 학생이 했던 묵상이 생각납니다. 풍랑에 겁을 먹던 제자들을 묵상하면서 그 학생은 자신도 예수님 옆에 누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편안해지고, 겁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쩌면 다른 것들을 더욱 신뢰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자존심, 욕심, 재물, 명예’와 같은 것들을 따라가면, 우리는 언제나 삶의 풍랑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곁에 있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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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회개와 믿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된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이어집니다. 참으로 곳곳에서 믿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감동합니다. 어제는 배밭 산책중 묵묵히 일하던 두 형제들과 세분의 자매들이 강복을 청해 드렸습니다.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이요 강복을 드리면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됩니다.
어제 저녁 금요 강론후의 따뜻한 분위기도 잊지 못합니다. 게시판에 붙은 34년전 제가 유기서원 1년차 3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세 분 수도선배들과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 정말 밝고 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많이 변했지만 한결같이 모두 '믿음으로' 살아 온 수도형제들이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하느님께서 감동하시는 것도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것도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품의 아름다움과 향기도 그대로 믿음의 아름다움이요 향기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뭐가 남을까요?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뿐일 것입니다. 하여 제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온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이다. 이 우선 순위가 바뀌어선 절대 안된다. 노욕老慾, 노추老醜를 극복하고 노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우선적 조건이 하느님 믿음이다.”-
-“몰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여 혈연관계보다 하느님 믿음 관계인 신연神緣관계가 때로 훨씬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신연관계의 수도공동체를 이뤄 형제들로 살 수 있는 것도 순전히 믿음 덕분입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형제들이요 하여 아랫집 숙소의 명칭도 ‘형제들의 집’입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날로 성장, 성숙되어 주님과 깊어지는 믿음의 관계로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사실 주님과 믿음의 관계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의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나탄과 다윗의 대화가 흥미진진합니다. 나탄 예언자는 정말 하느님의 이야기꾼임입니다. 한 사람의 부자와 한 사람의 가난한 이를 참 적절히 예로 들면서 다윗의 호기심을 유발시킵니다. 부자의 가혹하고 몰인정한 처사를 부각시키자 다윗의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대화가 박진감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탄 예언자의 용기가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어지는 나탄의 다윗의 죄의 결과에 대한 엄청난 재앙을 예고 합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즉각적인 회개의 반응이 그대로 다윗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바로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의 위대한 점도 “내가 잘못했다(I was wrong)!”의 명수였기 때문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정말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고맙다, 감사하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구구한 변명이나 핑계보다는 잘못을 흔쾌히 인정하는, 하여 감정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는 “잘못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진솔한 고백일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있는 믿음의 행위가 공동체의 분위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러니 이런 즉각적인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다윗이 죄는 용서 받았지만 보속의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이런 지난한 보속의 과정을 묵묵히 믿음으로 견뎌냄으로 다윗의 믿음은 더욱 정화되고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회개와 보속을 통해 믿음은 정화되고 심화되어 다윗의 삶은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죄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믿음의 성장의 계기로 삼는 다면 복된 죄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죄를 지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즉시 회개를 통한 믿음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죄의 회개를 통해, 또 묵묵히 죄를 보속함으로 주님과의 관계도, 삶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표현이 어제에 이어지는 화답송 시편 51장입니다.
다윗처럼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성인’은 없다 합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한 회개의 영적 효소가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만드는 반면, 죄에 대한 영적 감각의 상실로 회개가 없을 때 악취나는 부패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회개의 일상화를 이루어 주는 기도와 일이 조화된 회개의 시스템같은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와 믿음이 없는 현 인류의 무지와 교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인지도 모릅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못지 않게 고약한 것이 부패인생으로 만들어가는 참으로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더해지는 믿음의 은총만이 영적 유해한 바이러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자 예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역시 곤경에서 벗어남으로 회개의 계기가 됐을 것이고 제자들의 믿음도 한층 성장, 성숙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없어 그들 삶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잊고 부끄럽게도 방황한 제자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예수님께서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아주 고요해집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의 힘, 믿음의 힘, 주님의 힘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현재’로 우리 삶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내외적 두려움과 불안의 풍랑을 고요케 하시고 참 좋은 믿음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회개와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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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 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조급하게 허둥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전히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어서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느냐고 하소연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침몰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야속하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애쓴 이들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더 누리고 사니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래도 당신의 섭리를 믿어야 하나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위업은 너무나 훌륭하고 그분의 모든 분부는 제때에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이게 무어냐? 어찌된 일이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제 때에 풀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이 모여들고 그분의 말씀으로 한마디로 그 물이 저수지가 된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 39,16-1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겁내지 말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주님과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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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영성생활의 길잡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8)
예수님 주변에 아직 군중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데도 떠남을 선택하신 그분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비록 스쳐가는 언급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하느님"보다 "일"에 더 몰입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기가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일"과 "사람"에 파묻혀 있으면,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현장을 떠나는 게 마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식별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절박해 보이는 일거리를 눈앞에 펼쳐놓고 '나 아니면 안돼, 일단 끝내고 보자, 하느님은 나중에 잠시...' 하는 생각을 불어넣는 유혹일 확률이 크지요. 악의 바람은 오직 하나,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것뿐입니다.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마르 4,36)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이 뒤따르지요. 우리가 "일"을 끊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 군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 군중은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과 손길을 기다리던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주님을 선택해 따르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그런데 하필 거센 돌풍이 불어 물이 배에 들이칩니다. 방금까지 으쓱했던 군중과의 교감에 미련이 남은 제자들에게 '이러느니 그들에게 봉사하며 뭍에 더 눌러있는 편이 나을 뻔 했다'는 불만과 후회가 몰려들기도 했을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내적 외적으로, 안팎으로 돌풍에 휩싸인 겁니다. 말하자면 통제가 안 되어 당황스런 상황에서 마음도 들쑤셔진 것이지요.
그러니 천하태평 주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제자들의 말 안에는 "당신께서 하라시는 대로 했다가"라는 볼멘 후회가 행간에 스며 있는 듯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 4,39).
외부적 상황은 물론 내면의 소용돌이도 내가 아무리 되씹고 곱씹은들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때 치료가 필요한 경우와 믿음이 필요한 경우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내적 고통이 후자에 해당한다면 이를 잠잠히 만들 수 있는 힘은 주님의 현존 뿐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말씀으로 외부적 상황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내면에 대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그 안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데도..." 하시는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고요를 체험합니다. 언제 그랬는지 싶게 모든 격정이 가라앉았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시련과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늘 담담하고 자신만만하다면 이미 성인 경지에 든 것이거나, 아예 영성생활을 시작조차 못 한 것이지요. 나약한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내외적으로 폭풍에 갇히면 그간 주님과 쌓은 신뢰와 경험도 백지처럼 되어버려, 번번이 두려움에 전복되어 휘청대고 무너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의 숨은 죄악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들추십니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2사무 12,10)
"몹시 업신여겼으니"(2사무 12,14)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특히나 더 사랑하고 총애하는 이의 죄이기에 당신 스스로 무시당했고 업신여김 받았다고 느끼시는 겁니다. 사람에게 범하는 죄가 결국 하느님께 범하는 죄임을 알겠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다윗의 범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이 한 마디로 모든 내외적 폭풍이 사그라집니다. 다윗에게 퍼부으시는 하느님의 격노는 물론 다윗 내면에서 들끓던 오염된 양심의 불안도 잠잠해집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죄의 고백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히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폭풍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외부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병, 실직, 이별, 사고, 손실, 박해, 오해, 소외, 상처, 두려움... 그런데 고통이 나름 이유 있는 사건을 통해 오는 것 같더라도, 많은 경우 하느님을 오롯히 향하고 사랑하려는 우리를 시련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이럴 폭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이 된 우리보다 주님이 더 안타까워 애태우십니다. 그분은 결코 손 놓고 우리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함께 출렁대며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폭풍을 잠재우고 고요를 회복하는 힘은 주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우리 믿음의 콜라보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건너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폭풍 한가운데에선 늘 처음인듯 두렵고 힘겹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까지 주님의 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라도 기억나도록 영혼 깊숙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 하루 전인 2월의 첫 날,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이 말씀과 함께 귀하고 값진 봉헌의 날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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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
<교회라는 배>
믿음이라는 작은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항해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라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거센 파도가 치는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여러분의 인내심과 참을성을 지켜보고 계시고, 죄인들의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기도하며 그분께 열심히 나아가십시오
-오리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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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일에서 경험하는 ‘의미와 목적의 결핍’
일터에서의 이러한 좌절감에 관하여 공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한 사람은 정치 운동가이자 심리학자며 랍비인 마이클 라너였다. 그는 직장인들의 관심사에 대하여 30년 동안 연구했고, 그 결과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임금이나 수당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가장 깊은 관심사는 일에서 경험하는 ‘의미와 목적의 결핍’이었다. 그래서 라너는 미국인의 삶의 핵심을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의미와 돌봄과 연민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의미의 정치’라고 불리는 운동을 시작했다.
- 「무엇을 위해 사는가」중에서
♣“행복의 궁극적 목표는 매일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며 주어진 삶에 가치와 의미를 더한다.”
“인생의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안에 의미를 담는 것을 상실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상실함은 신체뿐 아니라 우울증,
자살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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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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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도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요, 현존하신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시편작가처럼,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곧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편 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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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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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흔들리는 믿음>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다니며
먹고 자고 하니까 예수님을 너무 편하게
맘만하게 여기는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처럼 지켜주시며
든든한 보루가 되시어 함께 머무르고
계시는데, 자기안에서 일어난
불안을 예수님 탓인것처럼 투사시킵니다.
흔들리는 믿음이 특기인 우리들,
한번씩은 혼나야 정신이 바짝 납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가진 나로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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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 41)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시키는
믿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세상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내어맡김의
이야기입니다.
바람과 호수에서
우리를 이끌어
고요와 믿음을
체험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쓸모없는 시간은
없습니다.
거센 돌풍의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매순간이
죽은 믿음이 아닌
살아있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깨우십니다.
믿음의 순간이
가장 위급한 상황에
다시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바람과 호수까지
주님께로 가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은 믿음은
주님께 기꺼이
복종하고 기쁘게
순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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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의 믿음을 깨워주시는 주님께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결코 교만과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용기와 함께 걸어갑니다. 주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님이라는 하나의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우리의 두려움까지도 봉헌하게 됩니다. 오히려 거센 돌풍이 우리의 믿음을 움직입니다.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돌풍이 우리의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믿음은 아파야 성장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이란 진실된 믿음을 되찾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바람을 꾸짖듯 우리의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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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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