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흐르는 아침> 우물가 향나무 민구식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구자*네 집 앞 공동 샘물 길으러 가면 이야기란 이야기는 다 퍼내서 까르르 거품 일며 흐르는 이야기 담았었다 눈먼 구자 눈 뜨는 것이 소원인 구자 엄마 굿판 세 번 벌리면 보인다는 말에 없는 살림 축내서 정월 보름 다음 날 절골 무당이 온다는 이야기 들었다 사람들 비집고 맨 앞에 앉았는데 좀은 무섭고, 좀은 신기한 작두 날 위 무당 춤 침 꼴깍 넘기며 보다가 더 놀란 것은 무당의 예쁜 딸을 본 것이다 엄마 시중을 들며 한쪽에 비켜서 있던 애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작두 날처럼 반짝 빛이 났다 흘끔흘끔 마주친 시선과 살짝 미소 진 보조개에 가슴을 떨며 굿이 끝나도록 그 애만 쳐다보았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굿판이 다 끝나도록 말도 못 걸어보고 굿판도 못 보고 반짝이는 눈만 쳐다보다가 애만 태우고 엄마 손 잡고 하현달 속으로 가버렸지 밤길 떠난 뒤 모습을 담배 건조실 모퉁이에서 숨어 보고 있었음을 알았을까? 구자의 눈은 안 떠지고 내 눈만 떠진 날이었다
*구자 : 이웃에 살던 친구 동생, 태생 장님이었다
<시작 노트> 고향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에서 논밭을 일구면서 노동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고, 그 사연들은 개인만이 아닌 공동체의 사연이 되어 공유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쪽을 선택한다. "눈먼 구자"를 위한 굿판에서 우연히 본 무당의 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애를 굿판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화자는 잠깐 스쳤던 짧은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민구식 2011년 월간 『조선문학』 시 부문 및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가랑잎 통신』, 『자벌레의 성지』가 있음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학부 졸업 포항 문인협회 회원 우리시진흥회 회원 시산맥시회 특별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