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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
제1장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 아프리카로 간 만득이
2. 정체성 문제
(1) 테세우스의 배
(2) 정체성과 주체성
(3) 집단의 정체성
3. 한국의 정체성
(1)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
(2) 한국의 정체성 탐구 방법
4. 결론
제2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1. 보편성은 없다
(1) 보편성은 이름뿐이다
(2) 바다는 파랗지 않다
(3) 보편적인 것이 가능하다면?
2.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1) 홍콩 영화의 성공 비결
(2) 한국의 특수성
(3)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3. 결론
제3장 정체성 판단의 기준
1. 고유성
(1) 원조 콤플렉스
(2) 이중 잣대
(3) 고유성의 의미
2. 창의성
(1) 창조적 수용이란 무엇인가?
(2) 토착화의 의미
3. 정체성 판단의 기준
(1) 현재성
(2) 대중성
(3) 주체성
4. 결론
맺는말
들어가는 말
처음으로 도회지에 나온 시골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할것이다.
처음 보는 자동차 떼와 커다란 건물들, 많은 사람들과 넓고 긴 도로, 모든 것이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도회지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 소년은 시골에서의 자신과 도회지에서의 자신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시골에서 미덕이었던 여유는 도회지에서는 게으름이고, 시골에서 공부 잘하던 모범생이 도회지에서는 공부 못 하는
천덕꾸러기다.
자신을 어떤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삶의 방향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개항 100년이 지난 한국도 이 소년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말이 개항 100년이지 한국은 그 동안 세계사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고 지금도 변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아시아에는 중국, 일본, 인도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외국인들이 대다수이다.
우리가 세계와 본격적인 교역을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변방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고 교류하면서 우리는 역사이래 처음으로 우리의 것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즉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중국외의 다른 나라와는 별 접촉이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따져볼 필요가 없었다.
주목할 만한 문화적 충격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한국적인 것' 혹은 '한국화'의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변방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 속에 노출되었으며 다른 나라와의 교류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구조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논하지 않고 세계 속에서 우리를 확립하기는 어렵다.
어떤 형태로든 정체성을 확립해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의 정체성에 관한 탐구이다.
즉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이다.
모두 세 장으로 구성했는데, 제1장은 정체성이란 문제가 어떤 성격의 문제인가를 다룬다.
즉 정체성이란 형이상학적 문제이며 개인의 동일성과 같은 부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동일성이 아닌 한국이란 집단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 탐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이지 한국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은 아니다.
두 가지 문제가 다루는 영역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의 여러 영역, 즉 음악, 미술, 언어, 건축, 역사, 스포츠 등에 나타난 한국적인 특성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고찰은 문화인류적, 종교적, 문화적 관점 등에서 접근할 때 가능하다.
이규태의 한국인 탐구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급한 성격이 한국인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성격이라 해도 조급성이 한국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정체성 탐구 방법으로 한국의 각 분야의 공통 속성 내지는 공통 특성을 찾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할 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중 하나가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이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면 우리는 한국의 특수성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특수성은 보편성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받는다.
즉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 긴장이 형성된다.
보편을 향하지 않는 특수는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보편을 향하면서 특수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압박과 긴장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로 해소하려 한다.
나는 제2장에서 과연 이런 구호가 타당한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기본적인 입장은 보편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이름뿐이며 미국의 위장명이라는 것이다.
즉 지금 보편성의 기준은 미국이며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며 곧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영화가 세계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막연히 말하지 말고, 미국적인 것을 한국 영화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것이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하려 하지 말고 세계적인 것 즉 미국적인 것을 한국적인 것에 담아내는 것이 세계 시장 공략에 더 바람직한 전략이 된다.
그럼 미국적인 것이 섞인 것을 한국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제3시장에서 답하고자 한다.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침대에서 자는 우리를 어떤 의미 혹인 어떤 기준에서 한국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 밑에는 한국적인 것의 판단 기준이라는 문제가 깔려 있다.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단지 열린 자세와 보편성 지향이 기준이 될 수는 있을까?
나는 한국의 정체성 판단 기준으로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의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우선 시원(처음 시, 근원 원)이 정체성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시원을 따지는 습관이 있다.
시원을 곧 정체성 판단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원은 정체성 판단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
문제는 현재이다.
현재 우리 한국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한국의 정체성 판단을 위한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것도 재현되어 현재에 존재한다면 현재의 것이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시원을 탐구하여 우리의 것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재현된 과거만이 현재이고 우리의 정체성 판단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비롯되었든 일본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현재 한국에 존재한다면 일단 우리의 것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대중의 지지와 호응이 없다면 한국적인 것이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의 한국인이 즐기고 부르는 판소리가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조용필의 노래가 더욱 더 대중적이므로 조용필의 노래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서편제'보다 '쉬리'가 더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성과 대중성 외에 주체성이 정체성 판단의 한 기준이 된다.
우리가 아무리 외양에서 미국인과 비슷하다고 해도, 즉 같은 종류의 햄버거를 먹는다고 해도 우리는 미국인과 다를 수 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미국 문화를 수용했다면 그 문화는 외양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주체적 태도는 정체성의 중요한 기준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한국에 대한 비판은 거의 언제나 '당신도 한국인 아니냐'는 힐난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미래의 발전도 있을 것이다.
제1장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아프리카인이라는 것과 한국인이라는 데는 무슨 차이가 없다.
다를 것이 없는 원주민이다.
옐로우 니그로, 그것이 우리들의 초상이다.
우리들 더러 민족 예술이자 인류의 문화 유산인 배뱅이굿이나 무당 푸닥거리들, 그리고 역사 철학으로서의 정감록과 개인 철학인 토정비결을 문리과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라고 권하는 서양사람이 곧 나설 것이다.
옐로우 니그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들이 사실은 해야 할 일이니까.
-최인훈의 '회색인'에서
외래어 간판으로 뒤덮인 종로 2가 거리를 걷다가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우리의 전통이 나타난다.
전통을 파는 가게들은 도심의 한복판에 외로운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것도 아주 좁은 면적만을 차지하고서, 왜 우리는
생활전반에서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우리의 전통을 만날 수 없을까?
인사동 골목처럼 전통적인 것이 고립되어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전통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인가?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이 만나고 충돌하는 곳에는 언제나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전체성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 장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정체성이란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국적인 것'이란 문제는 정체성의 한 예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정체성의 사례들을 먼저 들고, 정체성의 문제가 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형이상학 문제에 속한다는 것을 논한 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한국의 정체성이란 집단의
정체성 문제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을 구별할 것이며,
다음으로 집단으로서의 한국의 정체성 탐구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1. 아프리카로 간 만득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전에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상상해보자.
첫 번째 경우는 초강대국이 된 대한민국의 국민 만득이가 아직 개발도상국가인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이고, 다음은 만득이가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이며, 마지막은 밤길에서 낯선 존재를 만나게 된 만득이의 상황이다.
모두 정체성이란 개념과 관련되어 있지만 조금씩 그 의미가 다르다. 그럼 자세하게 살펴보자.
'A'
만득이가 아프리카의 한 소국을 방문한다고 가정하자(아프리카의 소국을 예로 들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만득이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로서 세계 최강국인 조국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한 소국에 도착하고 보니 공항의 건물이 모두 한옥 양식이다.
만득이는 약간 의아스럽다.
이 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는데 왜 자신들의 고유한 건축양식을 포기했을까?
그는 의구심을 가진 채 호텔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탄다.
택시기사는 한국어를 구사하려고 애쓴다. 만득이는 한편으로는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이므로 기사가 한국어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사가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에 다시금 의구심이
생긴다.
여기는 기사의 나라가 아닌가?
기사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에서는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가 신나게 흘러나온다.
기사는 짧은 한국어로 설운도가 이 나라에서 최고의 인기 가수라고 말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이 나라를 방문하여 유력한 후보를 만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만득이는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린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디자인도 한국의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거리 곳곳에는 한정식이란 간판을 단 고급 식당이 눈에 띈다.
만득이는 여기가 과연 아프리카의 한 구석인가 하고 의아해한다.
택시가 모퉁이를 돌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한국놈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휩쓸 태세이다.
그들은 주체적 국가와 주권 사수를 맹렬히 외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한복을 입고 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막걸리와 한국산 소주를 가장 좋아하며, 한국 가수인 조용필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한국 사람이라면 단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나라에서 취직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만득이가 보기에 이 나라는 의식주 모두가 거의 한국화 되었고, 음악, 이술, 영화 등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득이는 과연 이 나라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B'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만득이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카프카의 '변신' 그대로이다. 외양이 모두 변해서 평소에 그를 알던 사람들도 만득이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그의 외모는 이전의 모습과 전혀 유사하지 않다.
하지만 만득이는 자신의 외모가 변한 것에 스스로도 얼마나 놀랐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가 벌레로 변하기 전의 기억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을 여전히 예전의 자신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예전과 동일한가?
'C'
어느 깊은 밤, 만득이가 산길을 걷고 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떤 물체가 어른거린다.
만득이는 겁에 질려 묻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사람이면 어서 나오고 귀신이면 물러가라."
어둠 속의 물체가 앞으로 나선다.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한 만득이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라고 요구한다.
문제의 물체는 자신의 이름을 대며, 신분증을 내놓는다.
그것은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그 사람의 얼굴은 일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주민등록증이 위조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주민등록증이 위조되었다면 어떻게 그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위의 경우를 하나씩 검토해 보자.
우선 'B'를 보자.
이것은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개인의 동일성 Identity 문제이다.
'Identity'는 흔히 정체성 또는 동일성으로 번역되는데, 'B'는 동일성의 문제이다.
과연 벌레로 변한 만득이는 이전의 만득이와 동일한 인간인가?
그러나 여기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문제 제기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만득이는 외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연속성과 동일성이 보장되므로 동일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는 실존과 본질의 합으로 볼 수 있으므로 실존이 상실 혹은 완전히 변형된 경우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이와 반대의 경우로, 몸은 이전 상태와 똑같지만 정신의 동일성이나 연속성을 상실한 사람, 즉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이전과 동일한 인간인가? 이것은 개인의 동일성에 대한 논의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개인의 동일성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 문제이다.
따라서 'B'는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개인의 동일성 논의는 집단의 정체성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신라시대의 김유신과 현대의 만득이가 같은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역사 시간에 김유신이 우리의 선조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를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인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에게 복장이나 외양에서 지금의 만득이와 유사한 점이 있는가?
김유신은 만득이처럼 청바지를 입지 않고, 만득이 또한 김유신처럼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
따라서 김유신과 만득이 사이에 외양상의 동일성 또는 유사성이 유지된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정신 세계는 어떠한가?
김유신은 불교를 신봉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미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 만득이는 기독교 신자이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정신 세계에서 어떤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가?
외양과 정신 모두에서 동일성 혹은 유사성을 발견하기 힘든 이 두 사람을 우리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같은 한국인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굳니 역사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동시대인의 동일성 역시 같은 종류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한국인이라는 동일 한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득이는 기독교도이고 양복을 주로 입지만, 사오정은 회교도이고 생활 한복을 주로 입는다.
이들 모두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 무엇으로 그들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가?
아주 단순히 답하자면 여권을 보면 된다. 즉 여권에 적힌 국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여권의 국적난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다면, 그 여권의 주인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답인가? 이 답은 다소 공허하다.
프랑스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한 이다 도시의 정신까지 한국적인가?
더욱이 'C'에서 복 수 있는 것처럼, 여권이 위조된 경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권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서류가 아닌 어떤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많은 음악인들이 있다.
분명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을 빛냈다는 이유로 포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음악인은 국악을 하지도 않고, 해외 공연시 자신의 국적을 대한민국이라고 적지도 않는다.
그는 엄연히 미국인이다.
그런 그가 과연 한국의 무엇을 상징하며 무엇을 빛냈다는 것인가?
그런 한국계 미국인을 왜 우리는 융숭히 대접하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A''B''C' 세 가지 경우는 각각 성격을 달리한다.
'A'는 집단의 정체성 문제이고, 'B'는 개인의 동일성 문제이며, 'C'는 정체성 확인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A'의 문제, 즉 한국의 정체성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집단의 정체성과 개인의 동일성을 구별했다.
여기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은 정체성을 확인할 방법이 선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C'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 같지 않다.
더욱이 외세의 거센 정치적, 문화적 공세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그럼 한국의 정체성 탐구를 위해 정체성이란 어떤 문제인가를 고찰해보자.
2. 정체성 문제
(1) 테세우스의 배
정체성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어떤 사물이 변화를 겪으면서고 여전히 그 사물로 인식되거나 존재할 수 있다면, 즉 우리가 변화된 사물은 변화를 겪기 전의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것이 전통적인 정체성의 문제이다.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성이 유지된다면 그 동일성을 우리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사진을 꺼내놓고 보자.
돌 사진부터 지금의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나이별로 늘어 놓아보면, 돌 때의 모습과 지금 모습간에는 거의 유사점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사진 속의 인물을 동일한 사람으로 여긴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런데 'A'에서 제시된 문제는 개인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이 아닌 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단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우선 정체성의 확보가 가능한가를 검토해보자.
현재 우리는 물밀 듯이 밀려드는 서구 문화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채 그에 압사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득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득이의 국적은 한국이고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자랐다.
그러나 만득이는 햄버거를 즐겨 먹고 침대에서 잠을 자며 청바지를 자주 입는다. 또한 힙합과 재즈를 좋아하고, 피카소가
최고의 화가인 줄 알고 있으며, 고전음악 하면 바흐나 모차르트를, 그림 하면 수채화나 유화를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만득이에게 이런 것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의심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득이는 외적인 것보다는 재적 정신 상태가 중요하며 그것만이 정체성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정체성 확립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은 외적인 면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내적인 면을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만득이의 주장이다.
이러한 그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정체성 확립은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한국의 구성원 각자가 한국인이라고 자각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예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옷차림, 언행, 사고방식에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 따라서 그다지 특별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예수라고 믿고 있다는 이유로 끝까지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한다면 그 누가 이 사람을 예수로
인정할 것인가?
한국이란 집단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외적인 혹은 정신적 특징의 차이 없이도 구성원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신을 각각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제외라고는 외양, 행동, 사고방식 등에서 별다른 차별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다.
이 경우 한 사람은 중국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어떻게 각각 중국인, 일본인의 정체성을 확보하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득이처럼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한국인이 되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한국적인 특질에 의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답은 매우 형식적이다.
왜냐하면 그럼 한국적인 특질이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고, 그 답으로는 한국을 다른 나라와 구별해주는 그 무엇이라 고
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순환의 논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 순환을 멈추게 하려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맹이 있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 알맹이가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럼 개인과 집단의 유추를 이용하기 위해 편의상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살펴보자.
개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외양이나 정신 한 가지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외양과 정신의 합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
다시 말해 정신적으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한국적인 외양까지 갖추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곧 한국적인 외양이 무엇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된다.
알다시피 우리의 처음 질문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였다. 결국 전혀 진척이 없는 셈이다.
이런 곤경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체성의 문제가 형이상학적 난제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를 생각해보자.
백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테세우스의 배가 있다.
그런데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다른 조각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분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결국엔 백 조각 모두를 다른 조각으로 대체 했다.
이 경우 새로 보수된 배는 원래의 배와 동일한 배인가, 아닌가? 즉 모든 조각을 대체했음에도 원래의 배는 정체성을 유지하는가의 문제이다.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자. 테세우스의 배를 한 조각씩 옮겨서 원래의 배와 동일한 순서와 구조로 재조립했다면 그 배는 원래의 배인가, 아닌가?
그리고 한 조각씩 옮기면서 그 자리에 다른 조각을 하나씩 붙여놓았다면 그 배는 원래의 배가 지녔던 정체성을 유지하는가, 상실하는가? 이것이 정체성 혹은 동일성의 문제라 불리는 전형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이쯤 하면 누구나 이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의 난제이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한 채 한국의 정체성 문제를 논해온 것이 사실이다.
정체성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로 여긴 나머지 정체성이란 용어를 언급하면서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정체성의 위기'라는 말은 일상어가 되었으며 '국적 없는'이란 표현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영화 '서편제'를 볼 때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두고 한국적인 미와 정서를 논하지는
않는다.
이는 정체성 문제의 본질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인이 만든,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이야기이다.
국악이나 조선시대의 풍물, 혹은 6,25 동란을 소재로 하면 무조건 '한국적'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가?
우리의 정체성 논의가 언제나 빈 껍데기로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극히 난이도 높은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점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것이 상당히 난해한 문제임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한국적인 것을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정체성과 주체성
정체성이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주체성과 구별해야 한다.
정체성과 주체성을 혼돈하는 경우를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본 노래 표절 시비를 예로 들어보자.
모 가수의 노래가 크게 히트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노래가 일본 가요의 표절곡이라는 주장이 피시 통신에 올라왔다고 치자. 이쯤 되면 사실 확인과 함께 대중의 엄청난 비난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비난은, 지적 재산권의 침해나 표절 사실을 숨겼다는 부도덕상의 문제를 넘어서, 왜 하필이면 일본 노래냐는 식의 감정적 측면으로까지 비화되기 일쑤다.
일본이 개입하면 곧바로 주체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우리 나라에 좋은 노래가 많은데 자존심이 상하게 왜 하필 일본노래를 표절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원곡이 일본 노래임을 밝히고 번역 혹은 번안하여 불렀다면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이때의 문제는 번안된 일본 노래가 과연 한국 가요의 영역에 속하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멜로디, 분위기, 정서 등 모든 측면에서 볼 때 그 노래는 한국어로 불려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의심할 바 없는 일본 가요
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다 한국어로 불렀으므로 이 노래를 과연 한국 가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다.
도대체 '한국'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C'에서 우리는 어떤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물체에게 사람인가, 귀신인가를 물었다. 이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그
물체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누구냐를 물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정체성의 문제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에게 주체적으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질문이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주체성인 아니고 정체성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를 확실하게 구별짓게 하지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 혹은 위성 발사 문제에 대해 우리는 주권 운운하면서,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와 동시에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배격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숙고해보면, 그 바탕에는 북한의 정체성 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북한이 우리에게 적인지 동족인지를 먼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북한의 정체로 보아야 하는가?
북한이 우리의 적이라면, 미사일 개발에 적극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우리의 동족이라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극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주체성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앞서 정체성을 먼저 논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는 논의의 대상을 정체성 문제에 한정하고자 한다.
주체성 문제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정체성 문제가 주체성 문제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는 항상 한데 섞여 등장할 위험이 있다.
흔히 말하듯 우리의 문제는 서구화, 산업화의 급격한 변혁 속에서 야기되므로 미처 이 두 문제를 구별할 겨를이 없는 까닭
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작가 복거일은 영어 공용어론을 제기했다.
여기에는 정체성과 주체성의 문제가 혼재한다.
영어와 한글을 함께 쓰면 한국어의 정체성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택했다면 우리의 주체성이 훼손된다는 비판도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 논란에서 주종을 이룬 것은 주체성의 문제였다.
주체성보다 정체성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정체성과 주체성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개념에 포섭하려는 시도가 있다.
즉 '자생성'이란 개념으로 정체성과 주체성을 모두 함의하려는 것인데, 최근에 발간된 '한국미술의 자생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자생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한 명작을 만들어낸 한국적 미의식과 정체성에 작용하여 방향을 지시하는 관성이 바로 자생성이다.
즉 우리 미술의 특성을 유지하려는 관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생력이 있는 미술은 모든 외부적 요소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내놓는다.
자기화할 수 있는 힘, 그 힘이 바로 우리 미술의 자생력이다.
여기에서 자생성은 분명 정체성과 구별된다.
즉 자생성이란 정체성에 방향을 지시하는 관성 다시 말해 힘이다.
그럼 이 힘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우리의 자세나 태도를 뜻하는 주체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주체적 태도를 뜻할 것이다.
자생성이 정체성과 구별되어 정체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이 책의 영문 제목 'Identy of Korean Art'는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3) 집단의 정체성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우선 한국인이라는 개인과 한국이라는 집단을 구별한 필요가 있다.
집단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보다 더 막연해 보인다.
변화를 겪은 만득이는 어떻게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만득이라고 생각하느냐를 해명하는 것도 지난한 과제이지만,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만득이는 어쨌든 눈에 보이는 존재이니까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국은 물리적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의 정체성 확보를 통해 유비적으로 한국의 정체성 확보를 생각해보자.
정체성 확립의 어려움 중 하나는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속성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C'를 확장시켜보자.
만득이와 맞닥뜨린 어떤 개체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속성을 갖는다.
그 개별자가 사람이며, 남자이며, 의사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이며, 동네 테니스 동호회 회장이며, 영화광이라고 하자.
그 정체를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그 중 어떤 것이 그 개별자의 본질을 이루는 속성이 될까?
만약 문맥과 상황에 따 라 그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결정된다면, 그에게 정체성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문제의 개별자가 이 모든 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선택의 경우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이 속성들 가운데 어는 하나가 정체성을 이루는 진정한 속성이다.
둘째, 이 모든 속성이 정체성을 구성한다.
셋째, 정체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의 연속 혹은 다발이 존재할 뿐이다. 과연 이 가운데 어떤 경우를 택해야 개인의 정체성 탐구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개인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집단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 개인의 정체성 확보 문제가 집단의 정체성 확보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가?
그것은 공통되는 성직이 개인의 정체성에는 적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과 구별되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그 무언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쨌든 한국적인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개인의 정체성 확보의 경우,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 구별되는 여러 속성들 가운데 어떤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한국의 정체성 문제에서는, 여러 속성들 중 공통 속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정체성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위의 개별자의 경우, 남자, 의사, 아버지 사이에 공통되는 속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의사와 아버지가 어떤 공통 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즉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자식을 낳고 기르는 사람인데 두 속성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개별자가 갖는 각각의 속성은 관념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구별된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공통 속성으로 답하기란 매우 힘든 것 같다.
개인에게 굳이 공통속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외모의 닮음 정도일 것이다.
돌 때의 모습과 환갑 때의 모습 사이에 공통점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
이런 닮음을 공통되는 성질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란 집단의 정체성을 논할 때는 한국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의 공통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는 문학, 건축, 음악, 미술, 의상, 영화, 서예 등 여러 분야가 있다.
이들 각각은 개별자가 아니라 범주이다.
따라서 범주간의 공통 속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건축과 한국 음악은 표현 양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기법이나 정신 혹은 작품의 정서나 분위기 측면에서 공통 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아직 그 공통 속성이 무엇인지는 모를지라도 공통 속성의 존재 가능성을 용인할 수는 있다.
우리의 논의 주제가 한국 사람 개인의 정체성이 아닌 한국 집단의 정체성인 이상, 위의 문제를 좀더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란 집단 역시 근본적으로는 각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각 개인의 정체성이 곧 집단의 정체성은 아니므로 양자의 관계를 좀더 명확히 밝혀 우리의 과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3. 한국의 정체성
(1)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
월드컵에 출전할 대표팀을 구성한다고 하자.
최강의 팀을 만들기 위해선 각 포지션별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각 포지션의 최고 선수로 구성된 대표팀이 구성되었다. 이름하여 드림팀.
이들은 예선을 출중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본선에 진출한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형편없는 졸전의 연속. 결국 이들은 썩은 계란 세례를 받으며 귀국한다.
패인은 무엇인가? 세계의 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아니면 팀 내분 때문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팀을
구성하면서 합성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각 포지션의 최고의 선수로 구성된 팀이 반드시 최고의 팀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선수 각각은 최고일지 몰라도 그 선수들로 합성된 팀은 팀워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삼류 팀일 수 있다.
이와 같은 합성의 오류가 한국의 정체성 탐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물론 안다는 것의 의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나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자신인 한국인이라는 사실 정도만을 안다고 하자,
정신 분석학에서 말하는 정체성의 위기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나는 나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
이러한 가정을 모든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자.
그렇다면 정체성이 분명한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인 한국의 정체성 역시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합성의 오류이다.
한국을 구성하는 개인 모두의 정체성이 분명해도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한국의 정체성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합성의 오류는 우리에게 국가와 개인을 확실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가령 미국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선하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으로서의 미국이 선하고 평화를 애호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 즉 미국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가장 흔히 제시되는 답은 아마도 제국주의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제국주의를 미국의 정체성의 하나로 본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그럼 미국인들도 모두 제국주의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즉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제국주의자가 아니지만 미국의 정책은 대체로 제국주의적이라는 뜻이다.
합성의 오류와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오류가 분할의 오류이다.
즉 전체의 속성을 부분이 그대로 갖는다고 추론할 경우, 분할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시카고 불스가 최강의 농구팀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팀을 구성하는 선수 개개인이 각 포지션에서 최고의
선수는 아니다.
만약 최강의 선수들이 모두 각 포지션의 최고의 선수라고 추론하면 분할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분할의 오류의 또 다른 예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상반된 그리고 조금은 혼란스런 감정을 갖고 있다.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한 제국주의 국가였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은 나쁜 나라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보낸 사람들의 회고록이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대개 예의 바르고 호의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신대 문제가 나오면, 우리의 태도는 일변하여 일본의 침략성과 야만성을 거세게 규탄한다.
언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인 스승에 대해 예를 갖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을 증오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느냐며 노골적으로 분개했다.
이들은 다름 아닌 분할의 오류를 범함 것이다.
즉 집단의 구성원이 집단의 속성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틀림없는 군국주의 국가였다고 해도 박정희의 스승은 여전히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좋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집단으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논제로 삼는다면 반드시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를 피해야 한다.
우리의 논제는 분명히 한국이란 집단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편의상 개인과 집단을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본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의 예를 드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것은 단지 비유를 위한 것일 뿐이다.
집단은 그 나름의 성격과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이 2차 대전 후에 탄생한 신생 독립국인가를 생각해보자.
이 문제를 편의상 자신이 적출인가를 고민하는 만득이에 빗대어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만득이의 고민은 사실에 근거한다. 즉 사실 관계가 확인되면 그것으로 만득이의 의문을 풀린다.
하지만 신생독립국의 문제는 사실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어난 사건은 일회적이며 비반복적이다.
사건의 발생 자체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8.15 해방을 통해 우리가 신생 독립국이 된 것이라면, 이전의 고려나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해석의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해석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한국의 정체성 탐구는 한 집단에 관한 논의이다.
하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조급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한국인의 가족 집단주의의 유래는 무엇인가, 한국인의 권위주의의 실상과 폐해는 무엇인가 등의 문제는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개개의 특성은 한국의 정체성 탐구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급하고 가족 집단주의가 팽배하며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또 다른 국가나 집단이 존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런 특성만으로는 한국을 다른 국가나 집단과 구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조급성이나 집단주의는 우연적 속성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국인의 성향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일시적 혹은 우연적 속성을 한국의 정체성 판단 기준으로 삼기는 곤란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의 성향은 근대화 전에는 자연귀의적이었지만 현재의 한국인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산업화, 정보화가 이루어진 시대에 자연귀의적인 특성이 한국인의 주요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까?
이 책의 관심사는 어떤 특성이 한국이란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별시켜주며, 그 특성이 정말로 한국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별했다.
하지만 양자의 구별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양자의 관계 해명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인과 한국적인 것을 두부 자르듯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득이가 한국인이라면, 한국적인 것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추론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이 만득이에게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 한국인이 한 명도 살고있지 않다면, 즉 땅만 있고 거주자와 어떠한 시설물도 없을 경우에 한국적인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또 땅과 건축물, 각종 시설, 문화공간 등이 남아 있을 경우, 즉 지금의 상황에서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경우는 어떤가?
나는 후자의 경우 여전히 한국적인 것이 남아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즉 한국인도 없고 한국이 만든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한국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은 한국적인 것을 만드는 주체이지만 무엇인가 만들어진 후라면 주체인 한국인이 없이도 한국적인 것은 존속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잉카의 문명의 흔적에, 잉카인이 사라진 후에도 잉카 문명의 특성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한국의 정체성 탐구는 한국인에 대한 탐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한국의 정체성 탐구 방법
한국인의 성향이나 특질을 탐구하는 것이 한국의 정체성을 밝히기에 적당하지 않다면 한국의 정체성을 밝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이 만든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한국이란 집단이 역사를 통해 공동으로 만들고 지금도 갖고 있는 것들의 특질을 분석한다면, 어떤 것들이
한국적인 것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을 다른 나라나 민족과 구별짓는 특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가.
하나는 한국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각 분야가 공통으로 갖는 속성이나 성질이다.
물론 한국어도 한국이 갖는 여러 공통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한국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이제 두 가지 기능을 살펴보자.
첫째, 언어이다.
국어야말로 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유일의 한글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글로 한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마치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원 확인에 주민등록번호를 이영하는 것은 그 번호가 다른 것과는 같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일성에 의한 구별 방식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유일한 표기 방식을 자랑하는 한글이 이 번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외양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이 아마존 오지 여행 중에 비행기 사고로
추락했다고 하자. 추락하면서 여권을 분실한 이들에게는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만한 서류가 단 하나도 없다.
이들은 모두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으며, 머리 모양과 피부색 또한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이 추락한 곳이 공교롭게도 식인종 마을이다.
식인종은 이들에게 한국인은 잡아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전에 이곳에 온 한국인이 마을의 역병을 쫓아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운명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증명하는 데
달려 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때 한국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훨씬 유리하다.
왜냐하면 모든 한국인은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어로 한국인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언어, 즉 한글이 한국의 정체성을 밝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 된다는 얘기다.
이 경우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면 어떻게 되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경우 구별할 방법이 없다고 답하겠다.
하지만 한글이 우리의 정체성을 식별해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어 보인다.
둘째, 한국과 관련된 각 분야에 공통 속성이 있는가를 검토하여,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방법이 있다.
즉 한국적인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것인가를 논의해보는 것이다.
집단의 정체성 탐구는 각 분야의 공통 속성을 추출하여 형상화함으로써 가능하다.
만득이나 철수를 탐구하는 것으로는 한국의 정체성을 알기 어렵겠지만, 광화문이나 백남준의 작품이나 윤이상의 교향악
에서 한국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건축에 한국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음악에도 한국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각 분야에서 한국적인 것을 일차적으로 발견하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공통되는 특성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러 작업은 작업의 성격상 추상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결과는 생각보다 빈약할 수도 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 우리가 듣는 음악은 크게 국악, 서양 고전음악, 대중음악이라는 세 가지 장르로 구별된다.
이 세 가지 사이에 공통 속성이 있는가? 국악의 가락은 서양 고전음악과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전통 가요라 불리는 트로트와 랩 사이에는 어떤 공통 속성이 있는가?
아무런 공통 속성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 세 가지는 그저 우연히 병존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적 음악이란 어떤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한국인이 하는 모든 음악을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다양한 형식과 장르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어떤 공통 속성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한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공통 속성이 곧 한국적인 것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한국적이라고 부르는 가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져야 한다. 그
렇다 해도 과연 공통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분야를 확장시켜보자. 음악이 아닌 미술은 어떠한가?
회화는 크게 서양화, 동양화, 한국화로 분류된다.
이 세 가지 유형의 공통 속성은 무엇인가? 한국인의 정서나 혼, 독특한 화풍 등이 그 후보가 될 것이다.
또 한국인이 그린 작품이라는 점도 미술에서 한국적인 것의 정의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미술에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이나 서예도 있지 않은가?
외연을 확장할수록 공통 속성은 더욱더 추상적으로 되어간다. 그리고 추상적일수록 내용은 점점 빈곤해지기 마련이다.
미술 분야에서 요행히 공통 속성을 찾았다고 하자. 그럼 음악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만약 음악과 미술에서 공통 속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공통 속성은 더욱더 추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 건축, 의상, 스포트 등으로 영역을 확대한다면, 알맹이 있는 답은 애초에 기대하지는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섣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의 각 분야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구가 아직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한 분야에서조차 한국적인 것을 찾기가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는 우리의 예측과 다를 수 있다.
미국에서 히트하지 않는 곡이 유독 한국에서만 인기가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막연히 우리의 정서라고 말하지 말고 과학적으로 음악적 요소들을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국악이나 민요와 조용필의 노래를 비교 분석한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도 이미 비틀스의 노래와 고전음악의 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
이런 작업이 성공적일 경우 한국의 문화 전반을 꿰뚫는 한국적인 특성이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공통적인 특성으로 한국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4. 결론
이 책이 한국의 각 분야가 지니는 한국적인 특성을 밝히고 그 특성들 중에서 공통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한국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런 작업의 토대와 근거,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장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성격을 규명했다.
이 문제는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문제인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속하는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한국의 정체성은 개인으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는 구별된다.
한국인의 성향을 분석하고 조사한다고 해도 한국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구축한 모든 문화와 제도, 건축물, 시설 모두를 지금 이 상태로 놔두고 한국인 모두가 사라진다고 해도, 다른 민족이나 외계의 존재자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한국이란 집단이 갖는 여러 분야의 공통된 특성을 찾을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한국의 정체성을 가장 확고히 보장하고 있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글이기 때문에 한글을 한국의 정체성의 표지로 제안했다.
한국의 정체성이 어떤 문제인지 파악할 수 있고 또한 한국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다음 과제는 과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를 논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체성은 타국과의 교류에서 파괴될 수 있고 변화를 겪을 수도 있는데, 세계화를 외치는 이 시대에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의미를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메아리인가?
아프리카로 간 만득이는 행복했을 것이다.
한국이 세계 최강국이므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의 나는 우울하다. 햄버거를 먹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언젠가는 '춘향전'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대신하는 러브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가능성을 없을까?
'춘향전'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대신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춘향전'대신에 우리의 고전이 될 가능성을 있어 보인다.
즉 면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국에서 유래했으나 지금은
우리의 고전이 된 작품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체성이란 문제가 형이상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 장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는 한국의 정체성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문제라는 점도 지적했다.
즉 이 장에서 주로 다룬 것은 '한국의 정체성'에서 주어체인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정체성'의 수식어 '한국의'에 관해서는 그것이 집단의 속성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는 '한국적인'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체성이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놓인 입장은 편안하지 않다. 선진국이라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이다.
모든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으므로 자기화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약소국이다. 또한 문화적으로 후진국이다.
문화적으로 후진국인 우리가 어떻게 더 강대하고 문화적으로 우월한 타국과의 교류 내지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돈 많은 사람은 돈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식한 사람은 지식이 오히려 인생에 해가 된다고 거드름을 피운다.
강대국이면서 선진국인 나라들은 문화교류가 세계를 하나로 묶는 지름길이라고 선전한다.
돈 없는 사람에게는 돈이 중요하고 무지한 사람에게는 지식이 절실하듯이 약소국이며 후진국인 우리에게는 문화교류에서 미국화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대원군처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열린 자세로? 열린 자세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제2장과 3장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한 정체성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 장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교류 특히 강대국과의 교류에서 흔히 빠지는 보편성이란 함정을 지적할 것이다.
제2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서양휴머니즘은 존재했지만 휴머니즘 일반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네프류도프공작이 영국왕이라면 영국으로 하여금 4백년 동안 인도의 식민지가 될 것을 주장했을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은 피지 않는다.--최인훈의 '회색인'에서
변방에 놓여 있는 우리 나라가 세계를 접하고 세계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여 년 전일 것이다.
그 전까지 한국은 세계사에서 주변국이었다.
해외 여행이 자유화된 것도 십수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였던 것이 사실이다.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세계로 진출한 우리는 결국 세계를 상대로 물건을 만들어 팔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세계화라는 구호가 한국을 뒤덮게 되었다.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자, 영어를 배우자라는 구호가 이제는 일상적인 상투어가 되었다.
이런 국면에서 세계화를 이끄는 지침으로 등장한 것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이다.
이 이데올로기를 거의 모든 문화계의 사람들이 인터뷰에서 반복하고 있다.
어떻게 세계적인 영화나 상품을 만드느냐? 방향 및 지침은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나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구별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1. 보편성은 없다.
(1) 보편성은 이름뿐이다
우리가 근자에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와중에 우리는 숭고한 가치인 윤리와 도덕을 상실했고, 나아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어 정신이 황폐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다.
즉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성 회복 운동은 휴머니즘을 지상 명제로 내세우는 임권택의 영화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는 휴머니즘 추구를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나 한국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더욱 차원이 높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휴머니즘을 추구한다고 한다.
이런 유의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인간성 회복"이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에 인간성 회복 운동이 벌어지며, '쉰들러리스트'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휴머니즘
영화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는 이 구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회복의 대상인 인간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 그럼 인간다움이란?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럼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원시인의 모습? 아니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지어주는 특성을 말하는가? 그럼 그 특성은 무엇인가?
이성적이라는 것, 지향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 도구를 조작한다는 것, 자의식이 있다는 것, 어느 것을 말하는가?
인간성이란 말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 이유는 인간성이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말하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인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철수, 영희, 만득이, 사오정 등 개별자이지 인간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본 적이 있고 겪어본 적이 있는 철수의 인간성에 대해서, 더 정확히는 철수란 개체의 속성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추상명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할머니가 손자의 안내를 받아 대학 구경을 왔다. 손자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여기가 강의실, 여기는 도서관, 이곳은 본관, 저곳은 체육관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상세히 설명한다.
대학 교정을 한 바퀴 둘러본 할머니는 손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대학은 어디에 있냐?
이때 할머니는 범주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즉 대학이란 추상명사를 체육관과 같은 구체명사와 혼동하여 체육관을 보는
것처럼 대학도 보기를 원한 것이다.
대학은 추상명사이므로 대학 자체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며 눈으로 볼 수도 없다.
그럼 인간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철수, 영희, 만득이와 같은 개별자뿐이다.
이런 개별자는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다.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런 개별자를 한 단계 추상화한 남자, 여자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람직한 남성상 혹은 여성상을 논하지만,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추상적 논의이다.
마치 마음으로 정해 놓은 이상형 남자의 모습처럼, 바람직한 남성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남자를 현실의 남자로 착각한다면, 정도에 따라서는 정신질환자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은 남자, 여자를 한 단계 더 추상화한 것이다.
남자, 여자의 공통 속성을 우리의 머리 속에서 추상화한 것이 인간의 개념이다.
따라서 인간의 개념은 매우 모호하며 짐작하기 어렵다.
이상적인 남성, 이상적인 여성상도 생각하기 어려운데 이상적인 인간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추상화된 인간의 성질에 관해 우리가 정말로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무 혹은 저 나무의 성질이나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무는 감각의 대상이므로 그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도로 추상화된 인간의 성질에 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말한다면, 자신의 바람을 투사하는 것이 아닐까?
즉 이러저러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인간성이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추상명사라면,
인간성이 들어간 모든 발언은 단지 추상적 의미만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인간성이란 단어를 쓰고 있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것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인간성 회복을 외쳐도 세계가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이란 말이 사실은 세계에서 아무런 위치도
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창원을 찾아라"라는 구호는 실제로 존재하는 신창원이란 개별자에 관한 구호이므로 우리에게 내용을 전해준다.
즉 우리는 이 구호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즉시 알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신창원을 확인할 방법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하게 되므로 이 구호는 공허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구호는 메아리 없는 텅 빈 구호이다.
어느 누구도 이 구호를 보고 그 뜻을 알아차리고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바다는 파랗지 않다.
어렸을 때 나는 언제나 바다를 파란색으로 칠했다. 왜냐하면 기억 속의 바다는 파란색이었고, 또 바다는 파랗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 동해 낙산사에서 바다를 볼 때마다 나는 바다가 여러 가지 색을 띤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일 때의 바다는 검은 회색이었고, 눈이 부시게 하늘이 푸른 날의 바다는 푸른빛이었다.
바다는 시시각각 하늘의 색에 따라 변했다.
나는 더 이상 바다 색이 파랗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바다의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이 시각 이 바다의 색이 무엇이냐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이 색 혹은 바로 이 바다 색이 될 것이다.
나는 세계가 개별자의 집합일 뿐 보편자의 예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의 근본적 존재자는 개별자이다. 존재자의 기본 단위는 개별자이다.
개별자들의 세계를 임의로 혹은 편의에 따라 분류하기 위해서 우리는 추상 개념을 도입한다.
즉 추상 개념을 사용해 세계를 분류, 정리한다.
정리된 세계는 우리에게 질서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선물을 주는 추상 개념에 개별자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보편 개념은 추상 개념으로서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바다의 색은 시시각각 변하며 어떤 특정한 색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편의상 바다는 대체로 파란색이라고 말할 뿐이다.
사실은 이 바다와 저 바다의 색이 다르며, 이 시각 저 시각 또한 다르다.
우리는 단지 편의상 추상 개념을 사용한다.
세계가 개별자들로만 구성되었다면, 보편자 혹은 보편성의 지위는 명백해진다.
보편자는 개별자들로부터 추상화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책상, 나무와 동일한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 속에만 존재한다.
나는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유명론자이다.
유명론에서 보편자는 이름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실제 구성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뿐이며 선언되면 구호가 될 뿐이다.
세계가 개별자로만 구성된다는 것이 옳다면, 인간성 회복이라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 대신 개별자, 즉 "철수를 사람
만들자"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물론 이때 "사람 만든다" 말의 의미 또한 추상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좀더 손에 잡히는 구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자가 이름뿐이라면, 이름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조상은 지나칠 정도로 이름에 집착했다.
지금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작명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석"이라고 이름 짓는다고 하자.
그럼 그 아이는 자라서 "만석꾼"이 되는가? "순정"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는 언제나 "순정적"인가?
아무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편적 가치가 생기는가?
인류 모두의 공통된 염원을 담은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보편성"이란 말이 존재하므로 실제로 그런 것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보편성이란 이름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3) 보편적인 것이 가능하다면?
몇천 년 동안의 철학 논쟁에서 보편적 가치나 덕목이 무엇일지에 대해 합의에 이른 적은 없다.
또한 철학자들이 합의를 이끌어낸 근본적 존재자도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나 둘쯤은 있었음직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논쟁만 계속될 뿐이다.
근본적 존재자가 무엇인가의 문제는 이제 철학자의 손을 떠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대 물리학이 물질의 근본 존재자를 밝히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기본 입자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물리학의 문제가 아닌가?
여기에 철학자들이 끼여든다고 해도, 잘해야 해설자가 될 뿐이다.
인식론은 어떠한가?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며 어떤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가의 문제는 벌써 자연과학의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시대에 철학자가 말하는 인식의 방법과 정당성에 어느 누가 진지하게 관심을 갖겠는가?
또한 인식론이 그토록 정열을 바쳤던 진리론의 경우, 어떤 진리 조건이 보편적 조건으로 동의를 얻었는가?
그럼 윤리학의 사정은 어떠한가?
어떤 윤리적 덕목이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승인된 적이 있었는가? 윤리적 덕목에 대한 정당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런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면 인간의 사유 방식이나 형식에 관한 보편적 탐구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20세기 논리학의 다양한 분화와 영토 다툼은 단 하나의 논리학의 성립 가능성을 부인한다.
여기에 동양의 논리학을 개입시키면 논리학에서 보편성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철학에서 보편성을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 보편성의 가능성은 폐기되는가?
나는 자연과학에서 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데, 한 물리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페이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이 자연의 불변 질서야말로 유일한 보편적인 일관적 질서이며,
둘째로, 과학적 이론이 존재하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그 밖의 어떤 것도 그 불변질서의 한 결과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다른 형태의 질서(법률, 종교, 경제, 사회, 문학 그리고 예술)는 원래 자연의 물질적 질서의 결과가 아
니며, 우리는 그것들을 설명하는 어떤 과학적 이론으로 표현된 숨은 불변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기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 인간적으로 창조된 질서는, 인간 의식의 변화하는 의도적인 시스템(믿음, 소망, 생각 그리고 감정)을 반영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영원한 자연 질서와는 달리).
그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이며,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이해된다."
그는 자연과학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인문학의 보편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 주된 이유는 인문학은 과학과는 달리 역사성을 갖는 인간 의식의 시스템을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즉 누구나 죽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인간 죽음의 의미는 보편적이지 않다. 국가에 따라, 종교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역사에 따라 그 의미는 찬차만별이다.
왜 죽음이란 현상은 보편적인데 죽음의 의미는 보편적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 나는 페이겔스의 견해대로, 의미는 역사를 갖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즉 의미는 언제나 개인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역사를 갖는다. 더욱이 역사는 집단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로 구별되며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각 개인은 서로 다른 역사를 갖기 때문에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의미는 각 개인데 따라 다를 수 있고 또한 실제로 다르다.
역사를 갖는 의미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이 어떻게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철학은 과학과 달리 세계의 구조를 직접 작업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철학은 세계의 의미를 작업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미 분석철학자들이 착안한 점이었다.
즉 의미를 담는 도구인 언어를 분석하면, 철학 문제들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들이 배운 것은 언어가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유연하며 잡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언어 분석을 통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를 명료하게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철학의 작업 도구인 언어가 사실은 우리의 탐구 영역 밖에 있음을 깨달은 그들은 다른 분야, 특히 과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이야말로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보편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물리적 기반을 갖는 것이다.
의미가 물리적 기반, 즉 신경 세포의 상태에 토대를 둔다면, 표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신경 세포 상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물"과 "water"의 지시체는 동일하지만, 역사성 때문에 그 의미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동일한 신경 세포 상태에 있다면, 두 단어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물"과 "water"가 동일한 물리적 상태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
리의 뇌의 상태를 살펴보자. 뇌에는 10의 11승에서 10의 12승개 정도의 신경 세포가 있으며, 이들 각각은 몇 개에서 수십만 개 정도의 시냅스Synapse들을 갖고 있다.
이들 시냅스들은 다른 신경 세포들과의 연결을 만들며, 보통 수천 개씩의 시냅스들이 하나의 신경 세포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각 뇌에는 약 10의 15승개 정도의 시냅스들이 있으며, 각각의 시냅스들에 존재하는 최소한 두 개의 상태(억제
하는 또한 자극하는)를 가정하면, 우리는 2의 10승의 15승개의 뇌의 상태가 가능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엄청난 숫자는 가능한 서로 다른 뇌 상태들의 총수를 나타내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른 경험들의 실제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이 수는 우리 우주의 지평선 내에 있는 원자들의 어림수를 훨씬 능가하며, 거대한 슈퍼컴퓨터 내에서 가능한 상태 수보다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의미의 보편성을 물리적 상태를 토대로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위의 논증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가치란 결국 의미의 문제이며 의미는 물리적 토대에 기초하지 않고는 보편적일 수 없는데 그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논할 때마다 그 짝으로 세계적인 것 혹은 보편적인 것을 논한다.
그리고 한국적인 것을 노하는 것은 결코 국수주의적 태도가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결론에서는 꼭 보편적 가치에 동참하는
한국적인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위의 논증이 옳다면 이런 유의 주장은 아무 쓸모 없게 될 것이다. 존
재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상투적인 결론(한국적인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킬 때 한국적인 것이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이
우리에게 구체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가?
차라리 보편성을 부정할 때 한국적인 특수성이 드러날 것이다.
2.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1) 홍콩 영화의 성공 비결
보편성이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아름다움 역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꼴이다.
"세계화"를 예로 들어보자.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세계화라는 말을 흔히 쓰고 있다.
그런데 세계화란 말이 보편성을 뜻하므로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를 갖지 못한다고 한다면, 사실상 실체적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의미로 세계화란 말을 쓰는가?
몇 년 전 우리 나라의 국정 지표는 세계화였다.
그때 세계화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심지어는 "세계화"라는 단어의 영어 표기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즉 "세계화"를 "Segyewha"로 표기하느냐 아니면 "Globalization"으로 표기하느냐의 논쟁이었다.
논쟁은 세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세계화란 개방을 뜻하는 것 아니냐는 견해가 우세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면 지금까지의 쇄국 정책에서 과감한 개방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해석과 함께, 우리의 것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자는 의미도 포함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풀 것은 풀지만 우리의 것을 적극적으로 세계로 내보내자는 구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세계화란 구호는 새마을 운동의 구호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와는 달리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구호의 추상성에서 양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세계화"가 추상적인 만큼 "잘산다"는 말도 추상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을 잘산다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이 구호를 이해했다.
즉 그것은 돈을 많이 벌어 배불리 먹고 등 뜨뜻하게 자자는 뜻이었다.
어느 누가 선전하지 않아도 그 구호의 의미에 당혹감을 느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럼 왜 세계화는 그런 편안함을 주지 못했는가?
세계화는 제한적 의미의 보편성을 갖는다.
보편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라면 세계화는 일단 시간을 유보한 것이다.
세계화는 공간, 즉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영화 감독은 흔히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시대와 인종과 지역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우선 시대는 접어두고 인종과 지역에 제한 없이 명화로 인정받아야 한다. 즉 세계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 다음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한다.
즉 다음 세대에도 이 작품이 인정받는지의 여부를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더라도 감동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은 모든 시대에 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시대는 현재,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포함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벤허'가 불후의 명작이란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나
중세의 수도사가 보더라도 감동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이것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당대에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세계성이다.
그럼 지역을 뛰어넘는 세계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홍콩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홍콩 영화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에 뒤져 있었다.
신상옥이 한국-홍콩 합작 영화를 감독했고, 신영균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홍콩 영화에 출연했다.
한마디로, 홍콩은 한국 영화를 흠모하고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와서 홍콩 영화가 한국 극장가를 휩쓸기 시작했다.
주윤발을 앞세운 홍콩 액션영화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은 제작되지도 않은 홍콩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웃돈을 얹어주고 계약을 맺을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홍콩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홍콩은 지역적으로 매우 협소한 곳으로 특별한 배경이나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갖고 있지
않다. 홍콩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면세 혜택을 누리는 쇼핑에 관심을 쏟을 뿐 그곳의 역사적 유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홍콩이란 조그만 땅에는 현대식 빌딩의 금융가와 중국인들의 오래된 낡은 주거지만이 있을 뿐이다.
홍콩이 이런 환경에서 택한 전략은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소재를 발굴하여 특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홍콩 영화가 택한 품목은 액션이었다.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소재는 섹스, 액션, 사랑, 모험 등이다 여기서 홍콩이 액션을 택한 이유는 경제적 제약과 문화적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 제약이란 제작비를 말한다. 즉 홍콩은 대작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적은 제작비가 소요되는 장르를 원했다.
그리고 섹스가 배제된 이유는 섹스 영화 상영이 제한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홍콩은 대륙의 전통 중 하나인 무술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를 주력 상품으로 삼기로 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무협의 나라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그 많은 무협지는 모두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므로 무술은 문화 인프라로 홍콩에 내재해
있었고 그것을 무대 전면으로 끌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전략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즉 홍콩의 액션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영받았고, 이제는 홍콩 영화 하면 액션 영화를 연상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소룡과 성룡은 정말로 "세계적" 스타가 된 것이다. 이소룡과 성룡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상징과 같다.
즉 홍콩 정체성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물론 홍콩의 정체성이 액션 영화에 의해 확립되지는 않는다.
홍콩은 많은 속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중 어떤 것이 혹은 어떤 것들이 홍콩의 정체성을 정립하는가는 논의의 대상이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른 홍콩
영화가 액션이란 소재를 홍콩 영화의--적어도 영화상으로--정체성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콩의 특수성 중의 하나인 무술을 정체성 정립의 요체로 삼아 세계 시장을 공략했고, 멋지게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특수성 중 어떤 것을 특화하여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섰는가?
그런 시도를 한 적은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성과는 어떠했는가?
흔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한국의 특수성
요즈음 우리 문화정책의 기본 전략이 되다시피 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를 분석해 보자.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란 구호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적인 것이라면 세계적인 것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떤 것이 한국적이다'가 '어떤 것이 세계적이다'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보면 이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의 매듭 양식이 한국적이라고 해서 곧 세계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또한 가야금이 한국적인 악기라 해서 곧바로 세계적인 악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를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의 충분조건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둘째, 논리적으로 느슨한 이 구호는 논리적 관계가 아닌 우리의 염원을 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한국적인 것을 잘 개발하거나 특화하여 세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다. 즉 '한국적인 것을 잘 개발하거나 특화하여 세계
시장에 팔릴 수 있도록 하자는 권유 내지는 희망을 나타내는 구호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 시장에 진출해야 살 수 있는 우리가 택한 전략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적인 것 중 어느 것을 특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세계적인 것의 기준을 설정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상호 연관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차례로 검토해 보자.
한국적인 것 중 어느 것을 특화할 것인가의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과연 한국적인 것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적인 것이 있다면 그 중 어떤 특성을 내세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국적인 것의 존재 여부는 앞으로 논의될 것이므로 우선 여기에서는 한국적인 특수성이 있다고 전제하자.
앞서의 논의에서 우리는 보편성이란 이름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특수자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논의의 대상이 한국이란 집단이 된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은 엄밀히 말해 특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수자는 한국을 구성하는 개인들, 즉 철수, 영희 등과 철수, 영희가 그린 이 그림, 저 그림 혹은 아무개가 부른 이 노래,
저 노래 혹은 아무개가 만든 이 영화, 저 영화 등이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의 특수성을 논하려면 제 1장에서 논한 것처럼 한국의 각 분야의 공통 속성을 찾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공통 속성이 있다면, 그리고 여럿 존재한다면, 어떤 공통 속성이 한국의 특수성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흔히 거론되는 후보는 "한"이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한국의 정서는 한이라고 배웠다.
민요, 판소리, 문학작품 등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한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소월의 시는 우리의 민족 정서에 아주 잘 부합하는데, 소월 시의 특징은 우리의 한을 잘 표출한 데에 있다는 것
이다.
하지만 우리의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서울 올림픽 식전, 식후 행사가 보여준 한국의 정서는 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란한 북소리와 화려한 부채춤에서 한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사물놀이패의 장단에서 한을 느낄 수 있는가? 김홍도의 그림은 어떠한가?
나는 김홍도의 그림에서 한보다는 해학과 풍자를 느낀다.
즉 한을 내재화시킨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자신을 벗어던진 자유를 느낀다.
그 속에 풍자가 숨어 있지만 그것을 한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나한 검토하다 보면 각 분야의 공통 속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세계화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어느 세월에 합의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원리상 합의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세계 시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속성, 즉 세계적이라고 생각되는 속성을
우리의 것에서 찾아내어 특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적 속성을 알아내서 역으로 그것을 한국적인 것에서 찾는 것
이다. 즉 한국 속에 숨어 있는 세계적 보편 속성을 발굴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에 숨어 있는 세계적인 것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방안일 것이다.
우리 영화가 세계 진출에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방향은 잘못된 것이다.
홍콩의 예처럼 세계적인 것을 홍콩의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다.
우리는 막연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도 옳은 면이 있다.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국적인 것, 즉 특수자뿐이므로 특수자들의 공통 속성이나 성향을 세계화하자는 것은 일리가
있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 즉 우리의 특수성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우리도 모른다.
이 상태에서 이 전략이 어떻게 성공을 거둘 수 있겠는가?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세계적인 것의 속성을 한국적인 양식에 담아내는 전략의 성공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언제나 한국의 정신이나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국적 특성을 말해왔다.
그 하나의 예가 "한"이다. 하지만 한국의 특수성은 정신이나 정서와 같은 내용뿐만 아니라 표현 양식과 같은 형식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 특유의 표현 양식이 한국의 특수성를 담아내는 그릇인 동시에 바로 한국적인 것 자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용 못지 않게 형식을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애니메이션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중국에서 1950년대에 할리우드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의 애니메이션이
탄생된 적이 있다.
내용은 물론 중국의 전통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더욱 주목을 끈 것은 표현 양식이 중국적이라는 것이었다. 그
것은 수묵화 기법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붓으로 흑과 백의 농담 차이를 극대화시킨 작품이었다.
이런 영화는 그 내용을 떠나 우선 표현 양식이 강한 중국적 냄새를 풍겼다.
이와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 동안 한국적인 것을 내용에서만 치우쳐 찾으려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흔히 등장했던 영화 소재가 샤머니즘이나 인고하는 여인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즉 소재가 잠깐 호기심을 끌었을 뿐, 세계 영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표현 양식이 한국적인 것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한국의 특수성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에서 발견될 수 있으나,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본질과 실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제이다.
즉 본질이 완전히 구현되면 본질은 사라지고 실존만이 남는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적인 것의 내용이(그것이 있다면) 완전히
구현되면 표현 형식만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가 느끼는 난감함은 내용의 불완전한 구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용과 형식의 어정쩡한 타협이 내용과 형식간의 갈등을 야기한다.
우리가 "한국적인 것"을 끊임없이 논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적인 내용이 완전히 구현된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진한 그 무엇을 해설로 메우려는 안쓰러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3)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앞에서 나는 세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것을 한국적 양식에 담아내는 것이 더 성공적인 세계화 전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에서 누누이 "세계적"이란 표현은 이름뿐이며 실체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세계적"이란 말은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특수자만이 존재한다면 세계적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성은 앞의 논의대로 부분적으로 보편성을 띠고 있으며, 보편성은 추상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적이란 말은 추상적이며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적이란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의 문제는, 실체가 없으므로 그 말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알아
보는 방법으로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계가 160여 개국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우리는 세계적이란 표현을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 보편적이란 뜻으로 쓰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세계적"이 어떤 특정한 국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특정한 하나의 국가가 아닌 일부 지역을 뜻할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한 국가가 세계의 표준이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의 특정한 국가란 현실적으로 가장 강대한 국가를 뜻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강대한 국가의 의사 결정이 세계를 움직이고 지배하며 초강대국의 의지가 곧 세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날 세계 최강국은 어느 나라인가? 말할 나위 없이 미국이다.
미국은 현재 유일한 초강대국이며, 따라서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은 낯설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적인 것이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 우리는 미국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미국에서 인정받으면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 된다.
우리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어린 학생의 말을 자주 듣는다.
이런 희망을 말하는 학생은 정말로 세계를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구 전체에서 다 알아주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 콩고, 몽골 그리고 아마존에서도 알아주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과학자가 있기는 한가? 아인슈타인만 해도 아프리카의 말리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할 것이며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말을 한 학생이 자라서 정말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미국에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뜻도 따지고 보면, 일부 미국 과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린 학생의 희망을 정확히 해석하면, "나는 미국의 유명한 일부 과학자들--아직 이름은 모르지만--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계화란 미국화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세계화란 보편화라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란 미국화라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즉 세계화란 미국화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미국적인 것이 미국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특수성은 무엇이며 특징은 무엇인가?
한국이 특수성을 갖는 것처럼 미국도 특수성을 갖는 것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특수성이 세계 보편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즉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미국의 특수성은 무엇일까?
여기에 우리가 답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지적할 것은 미국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일까를 고민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특수성이 어떻게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는 항상 특수성과 보편성의 긴장 해소를 생각해야 한다. 다
시 말해서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간의 조화를 이룰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문 받는다. 그리하여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미국적인 것을 찾으라는 주문으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적인 것을 찾는 일과 다른 하나는 미국적인 것을 찾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어 미국적인 것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의 공통 속성을 찾아
내어 구현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이런 일에 별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미국학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미국학은 미국적인 것에 대한 탐구이다.
우리는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미국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듯하다.
미국학은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낯선 학문이다.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는 프랑스인보다 한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더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미국학은 학과조차 없다.
우리는 세계화 즉 미국화를 지향한다. 그런데 미국학을 전공하는 학과가 없는 것이다.
그럼 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연구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한국학 사정도 별로 다르지 않다.
최근에 한국학과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한국학 연구가 꼭 한국학이란 명칭의 학과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학의 연구 방향에는 의문이 많다.
우리는 사태를 명확히 보아야 한다. 즉 세계화란 미국화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하고, 미국화가 마음에 안 들면 프랑스화라든지 일본화라든지 아니면 중국화라고 말해야 한다. 세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화란 결국 미국화의 위장 명칭이란 사실을 보았다.
세계화란 구호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화가 세계화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지니는 문제점을 논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란 구호의 의미를 분석해 보았다.
결국 이 구호는 단지 희망을 담고 있거나 세계화의 전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은 세계화 전략으로서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결국 아무 내용도 없으면서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는 이 구호가 한국의 특수성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구호를 되뇌면서 우리는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
저 위로만 받은 것은 아닐까?
한국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움으로써 한국적인 것을 발견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3. 결론
우리는 이 장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한국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그리고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구별했다.
나는 세계에는 개별자만이 존재한다는 유명론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다는 파란색이 아니며 그 어떤 색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보편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철수, 영희 복동이가 존재한다.
보편적 가치나 보편적 세계관이란 우리가 편의상 쓰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에 귀속되고 보편성을 향하는 한국적인 것을 발견하려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거나 세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실체는 미국적인 것이다.
미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미국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것으로서의 미국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것의 존재는 용인하기 힘들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고 철수와 영희가 존재하듯이 보편적인 것 혹은 세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한국적인 것이나 미국적인 것이 존재한다.
비 오는 날 차창의 유리에는 부옇게 빗방울과 김이 서린다.
그 차창을 헝겊으로 닦아내면 맑은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 혹을 세계적인 것과 분명하게 구별한다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이념의 문제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냉전체제하의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의 이념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우리를 짓누르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종류의 이념만이 아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공자에 대한 논란도 공자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성 차별과 남성우월주의 역시 이데올로기이고, 스포츠가 국력의 지표라는 생각도 이데올로기이다.
개인을 억압하면 무비판적으로 우리의 삶을 제어하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거리를 보라. 육교, 건물, 벽 등 현수막을 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어김없이 철따라 사안따라 현수막이
걸린다.
거의 모든 국민이 의무교육을 마친 이 나라에서 국민을 계몽해야 할 일이 그토록 많다는 것인가?
거의 모든 가정에 있는 텔레비전은 무엇에 쓰나?
나는 우리 나라가 이데올로기의 과잉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결정짓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장에서 다룬 보편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언제나 결말은 보편에 닿아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이 나라의 풍토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다.
보편을(보편이 있다면) 한국적인 특수성에 녹여 표현하면 왜 안 되는 것인가?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 하지 말고 세계적인 것을(구체적으로는 미국적인 것이든 일본적인 것이든) 한국적인 것에 흡수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
존재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하면 어설픈 타협이 생긴다.
복원된 남대문과 창덕궁을 보라. 기와 위에 올려진 흰색 콘크리트가 한국적인 것을 지키고 표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세계는 개별자(철수, 영희, 이 지우개, 저 지우개, 이 나무, 저 나무)의 세계이다. 한국적인 것이 있다면 개별자에 모두 구현될 것이다.
제3장 정체성 판단의 기준
한국의 사람으로서 자기 주체(주인 주, 몸 체)를 반성하는 사람보다도, 그쪽의 시민권을 얻는 데 만족한 사람이 더 많은 게 사실 아닙니까?
외국서 돌아온 예술가들은 미국 문학의, 불란서 문학의 선전원 자격으로 돌아온 것이지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마음먹고 돌아온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 꼴이 아닙니까? 그게 당연했을 겁니다.
그 압도적 에너지. 그 방대한 전통의 압력. 샅샅이 그물을 친 전통의 체계. 그 속에서 백의민족이 되라는 게 무리니까요.
--최인훈의 '회색인'에서
한국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이 책이 "한국적인 것은 이것이다"라고 손에 쥐어줄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발견하려면 한국의 각 분야의 공통된 속성을 조사하여, 과연 공통속성이 있는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많은 시일을 요하기도 하겠지만 각 분야에서 공통 속성을 찾으려면 무엇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를 판단할 기존을 설정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의 내용 탐구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앞의 두 장에서 한국의 정체성의 본질과 한국의 특수성이란 무엇인지를 논했다.
이 장에서는 한국적인 것의 판단 기준, 즉 한국의 정체성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를 논할 것이다.
이런 기준을 제시하기에 앞서 고유함과 창조적 수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고유성
(1) 원조 콤플렉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탈춤이 우리의 고유한 민속이라고 배웠다.
탈춤은 우리 고유한 것으로 주로 양반 계급의 위선을 풍자하는 데 쓰였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홍콩 영화를 한 편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성룡이었는데, 영화 속에서 그는 사자 모양의 큰
탈을 쓰고 경연한다.
그가 쓴 탈은 우리 나라의 탈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그러면 우리의 탈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탈을 우리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설사 탈춤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그것이 변형되어 창조적으로 발전되었다면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탈춤이 사실상 우리 나라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파된 것임을 밝혀 우리 탈춤의 우월성과 고유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고찰할 때면 언제나 시원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시원은 고유성의 기준이 되는가?
시원이 고유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답이다.
시원을 고유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인류가 지금 갖고 있는 문화나 문명의 고유성은 인류 최초의 문명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프랑스의 고유성, 영국의 고유성 중국의 고유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시원과는 관계없이 각국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이다.
흄은 이미 200여 년 전에 "프랑스가 포도나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후를 가진 나라지만, 포도나무가 그곳에 이식된 것은
2천 년이 되지 않았다.
3백 년 전까지만 해도 말, 소, 양, 백조, 개, 옥수수는 미국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늘날 포도주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흄에 의하면, 포도나무가 프랑스에 이식된 것은 2천여 년 전일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포도주는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는가?
그것은 포도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배하여 그들만의 방식으로 양조, 보관, 관리,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도나무가 다른 나라에서 넘어왔다고 해도 프랑스 포도주의 고유성은 지킬 수 있다.
즉 포도주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고 소개되었을 때, 후자가 포도주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발전시킨다면 포도주는 오히려
전자가 아닌 후자의 정체성의 한 상징이 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이미 조지훈이 고견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사상이 따로 없다는 견해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오해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문화 내지 사상이란 말의 본질에 대한 오해요, 다른 하나는 고유라는 말과 민족적 개성이라는 어의에 대한 오해
인 것입니다.
첫째, 문화라든지 사상은 이동하고 복합되는 것이 본질이고, 그 이동하고 복합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민족문화의 개성적 성격을 '고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화 또는 사상이란 것은 인류 일반의 생활과 사고방식의 민족 개성적 양식화란 뜻에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고유'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본디부터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것과 같으면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다른 곳에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을 고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유사상은 본디부터 있는 사상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개성적으로, 주체적으로 있게 된 사상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 일반사상의 한국적 존재양식 또는 한국 민족의 같은 풍토적 환경에서, 같은 역사적 환경에서 공동의 집단생활을 영위해오는 동안 공동으로 발견돼, 사물에 대한 공동의 사고방식을 우리는 한국의 고유사상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지훈의 이 정의는 흠잡을 데 없다.
고유성은 시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성의 문제이다.
그들만이 갖는 독특함, 개성이 바로 고유성이다.
고유성이 시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성의 문제라면, 즉 독특함이 바로 개성이고 고유성이라면, 한국적인 것을 판단하는 데
시원의 문제를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원조가 어디인가 또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성인 독특함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원조 콤플렉스에 시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우리가 개성과 독특함을 불어넣고 또한 갖게 했다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장충동 족발집 동네에 난무하는 '원조'라는 말이 붙은 간판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원조...'란 간판이 사라질 때
우리의 원조 콤플렉스도 사라질 것이다.
(2) 이중 잣대
고유성이 다른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성을 뜻한다면, 우리는 고유성을 정체성과 동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결국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유성에 대해 이중의 잣대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고유성이란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유성이 남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개성이라면 우리가 고유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 때, 고유성 개념이 뚜렷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적 환경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는 시기이다.
첫째의 경우, 우리의 문화나 사상은 많은 부분 중국에서 비롯되었거나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즉 중국의 관제나 풍습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우리 것으로 변형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는 백제나 고구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중국에 대한 태도와 일본에 대한 태도는 일관되지 않아 보인다.
즉 중국에서 받을 문물과 문화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했으므로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전해준 문물과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므로 한국에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일본이 은혜를 모른다고 비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국호 1호는 백제의 하사품이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태도가 돌변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측우기가 한국의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중국은 측우기에 적힌 연호를 근거로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중국의 영향이 있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독창적으로 발명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의 많은 문물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꽃피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중국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즉 문화가 중국에서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면, 그래서 한국이 일본에 감사를 강요한다면 한국도 중국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즉 이중의 잣대를 사용하고 있다.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것은 정체성 탐구에 방해가 된다.
둘째 경우,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곧이어 미국의 영향에 놓여 있었던 시기를 보자.
우리는 개화와 함께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주로 일본을 통했다.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쨌든 일본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명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물론 어떠한 감사의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일본에서 간헐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발언이 나오면 즉각 망언이라 규탄한다. 그럼, 미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미국은 1945년 8월 15일에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했다.
그 후 미국은 세계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고, 또한 남한을 미국화시켰다.
우리의 교육제도를 비롯한 많은 제도와 풍습이 미국을 통해 들어왔다.
즉 미국을 통해 우리는 세계 문화의 주류에 접하게 된 것이다.
일부의 반미 구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다. 하지만 선진 문물을 전해준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개심을 갖고 있다.
그 차이가 식민 지배와 점령군 통치의 질적 차이에서 유래하는가?
도대체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좀더 세련된 방식인가 아니면 지배자의 마음가짐인가?
나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단지 세계의 조류에 따를 뿐이다.
2차 대전 후 식민지는 거의 없어졌으므로 과거와 같은 식민 지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일본과 미국의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고 그 후 일본이 점령군으로 입성했다면, 우리는 미국에 증오하고 일본에 감사했을까?
나는 미국과 일본은 그 순서에 관계없이 한국에 대해 동일한 정책을 취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에 대해 동일 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즉
동일한 잣대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중의 잣대를 갖고 있다.
카멜레온이 자신의 고유색을 갖는가? 환경에 따라 색을 달리하므로 카멜레온의 고유색을 정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하지는 않지만 이중의 잣대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같은 종류의 현상에 하나의 잣대를 적용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일은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이중의 잣대를 사용한다며, 정체성 파악은 수시로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의 색을 정하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야 할 유일한 잣대는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한국 모드 해당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특함, 개성이다.
일본이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소화해 자신의 개성으로 가꾸었는가의 여부가 중요할 뿐, 문물을 우리가 전해주었다거나 혹은 문화가 우리에게 비롯되었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일본에게 빚 준 것이 있다면, 우리 역시 중국에 빚지고 있다. 그럼, 개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3) 고유성의 의미
고유성과 개성이 동의어로 쓰인다면, 정체성 탐구란 고유성이나 개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개성이란 개체만의 특성이다.
한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 개체만이 갖는 성질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모든 개체는 수적 동일성만을 갖는다.
즉 자기 자신하고만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이란 집단의 정체성 즉 집단의 개성을 논의하려는 것이므로 수적 동일성이 아닌 집단의 정체성을 탐구
해야 한다.
그럼 한국의 개성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속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조선의 산수화는 중국의 산수화와 거의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국 산수화만이 갖는 특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대만 국립박물관에서 중국의 산수화를 보았을 때, 나는 이곳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보면, 중국과 한국의 산수화는 모두 중국의 계림을 그렸다는 세평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수화를 중국의 산수화와 구별짓는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특징은 내용 면에서 혹은 기법 면에서 발견될 것이다.
어쨌든 한국의 산수화에는 중국의 산수화와 구별되는 속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의 산수화가 고유성을 갖는다거나 개성을 갖는다고 말할 때 단순히 이와 같은 구별짓는 속성만을 뜻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즉 다른 하나의 측면, 디시말해서 일정 수준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할 것이다.
많은 모창 가수가 있다. 조용필의 모창가수는 조영필이다. 조용필과 조영필은 수직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음색이나 창법이 매우 흡사해도 조용필의 노래와 조영필의 노래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조영필이 노래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영필에게 개성이나 고유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영필의 노래는 의식적으로 조용필의 노래를 모방했을 뿐만 아니라 조용필의 노래만큼의 미나 멋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창이라 해도, 어느 수준의 미를 창조하거나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노래를 개성이 있는 곡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차중락이 부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비록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번안한 것이지만 나름대로의 미가 있기 때문에 그 노래를 차증락의 대표곡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개성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속성인 동시에 일정 수준의 격조나 미를 말한다.
그럼 구별하기 힘든 위조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해외 토픽에서 우리는 종종 유명 박물관에 전시된 대가의 작품이 위조품으로 판명 났다는 기사를 본다.
전문가도 속을 정도로 유사한 속성을 갖는다.
물리적 속성에서 거의 동일하므로 미적 감흥도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일정 수준의 격이나 미를 갖춘 것이다. 이 위조품은 개성이 없는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복제된 그림은 원품과 비교할 때 단지 원작자가 그리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그럼 원작자가 그린 것인가의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가? 그렇다는 것이 대체적인 답변일 것이다.
나도 이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좀더 확장해 생각해 보자. 앞서 우리는 고유성이 시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즉 누가 처음 만들었느냐의 여부는 고유성과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복제의 경우, 누가 그렸는가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가 그렸는가의 여부와 상관이 없이 문제는 위조품이 원품과 구별되는 속성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복제품은 원품과 최대한 동일하게 만든 작품이므로 원품과 구별되는 속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복제품이 일정 수준의 미를 갖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원품과 구별되는 개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복제품은 자신만의 개성이 없다.
한국은 복제품 왕국, 표절 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복제품을 만들거나 표절을 하는 행위가 범법임은 물론이다.
즉 도둑질이다.
따라서 남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도둑질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의 문제 때문에 복제품 제작이나 표절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창가수 조영필은 모창 가수인 한, 평생 자신이 개성을 가질 수 없다. 언제까지나 조용필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모조 구찌 핸드백을 메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어떤 국산 핸드백을 살까 고민할 기회를 앗아간다.
즉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개성은 남과 구별되는 속성이다.
그런데 남의 것을 그대로 흉내낸다면, 어떻게 개성이 생길 수 있겠는가? 개성이 없다면 정체성도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일제 잔재를 정산하지는 구호가 드높은 반면 일본 문화 표절에는 한없이 너그럽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은 훼손된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의도로 보인다.
즉 우리는 일제에 강점 당하기 전까지 정체성 즉 개성을 유지해왔는데 일본이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비롯한 일본화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우리의 정기도 희미해지고 미풍양속도 사라지게 되었으니 일제 잔재를 청산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의 영화, 노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표절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노래의 상당수가 일본 노래의 표절이라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많은 영화 히트작이 일본영화의 표절이다.
방송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여 한국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 대부분은 일본 프로그램의 표절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앞에서는 쓰레기 치운다고 빗자루를 동원하여 열심히 청소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뒷마당에서 쓰레기차가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버리고 있다.
표절과 베끼기는 그 자체로 범죄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 고찰의 기회를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아무리 반복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창의성
(1) 창조적 수용이란 무엇인가?
고유성이 시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성의 문제라면, 그리고 일정 수준의 미나 격을 가주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창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어떤 것이든 창조적으로 수용, 발전시키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즉 외래 문화를 겁낼 필요가 없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걸러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외래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역량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문화는 물과 같아서 언제나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고이면 썩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적 수용이란 무슨 말인가? 이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어떤 것이든 한 지역에서 다른 문화권이나 지역으로 옮겨가면 변화는 불가피하지 않은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단순한 변화와 창조적 수용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보자.
바둑은 중국에서 처음 창안되었다.
아마도 매우 오랫동안 중국에 세계 최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바둑을 둔 것은 몇백 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바둑은 일본에서 재창조되었다.
새로운 바둑 규칙이 정해졌고 새로운 포석이 나왔으며, 기전이 정착되었다.
무엇보다도 바둑은 일본에서 한낱 잡기에서 도로 승화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공적이다.
일본은 바둑의 기본 틀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바둑 두는 기풍을 일으켰다.
물론 새로운 수를 많이 창안해 내긴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둑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나는 창조적 수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잡기를 문화의 하나로 끌어올려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 이런 것이 창조적 수용의 모범 사례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바둑은 아직도 기본적으로는 잡기다. 물론 프로 바둑이 성행하고 실력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지만, 여전히
바둑인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조훈현이 사망했다고 하자. 그럼 국장은 고사하고 사회장으로라도 대접받을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바둑은 아직은 잡기다.
문화가 국경을 넘으면 변화한다는 것은 바둑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바둑은 일본에서 도로 격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풍도 달라졌다. 즉 중국의 바둑이 세력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의 바둑은
대체로 모양을 중시한다. 반면 한국 바둑은 전투력을 중시한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기풍의 차이일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둑이 일본에서 잡기나 여가 놀이가 아닌 도예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적 수용의 예이다.
물론 모든 문화가 이와 같이 격상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유교를 예로 들어보자. 유교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공자가 시조인 유교는 중국에서 여러 단계의 발전과 변화를 겪는다. 우리가 여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유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변모, 발전했는가이다.
한국에서 유교 특히 성리학의 발전은 지금도 세계의 자랑거리다.
하지만 일반 사회나 제도에서 유교는 인간을 억압하는데 유효한 도구였다.
유교에서 말하는 예는 허례허식과 가식을 낳았다.
"공자 왈" 하는 태도는 자유로운 토론을 원천 봉쇄하는 권위주의의 한 징표가 되었다.
내용이 아닌 명분에 치우쳐 경제를 천시하고 문을 숭상하면서 무를 소홀히 하여 국방은 관심사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유교의 원래 가르침, 즉 공자에서 비롯된 유교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계없이 한국에서 유교는 사회 통제와
인간 억압의 유용한 이데올로기였다.
예를 들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구호를 보자. 이 구호는 흔히 '가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정치를 한다고
나서나'라는 명제를 정당화시켜주었다.
우선 자신을 수양하고 나서 가정을 다스리고, 그 후에 국가 경영에 착수하며, 그런 연후에야 천하를 통치한다는 것이 이
수호의 대략적 의미다.
여기에 근거하여 첫 단계인 자신도 수양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감히 국가 경영 단계에 도전하느냐라는 식의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 구호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공자도 80세가 되어서야 겨우 세상과 어긋나게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시인한 바 있다.
이것도 공자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보통 사람이야 평생을 가도 수신에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같은 범인이 언제 수신 후에 제가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는 공자 당대에 이미 사람의 그릇은 제각기 다르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국가를 경영할 사람의 그릇과 천하를 다스릴 사람의 그릇이 다르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수신과 제가를 동시에 하며, 혹자는 수신, 제가, 치국을 동시에, 또 혹자는 평천하까지 동시에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중국에서 공자의 지위는 제가백가 중은 한사람일 뿐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큰 위치를 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자는 석가, 예수와 비등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조선조에서 억압의 도구로 쓰였다.
이것이 문화가 변형, 타락한 예의 하나일 것이다.
그럼 문화의 창조적 수용과 퇴락의 기준은 무엇인가?
위의 예를 통해 보면, 보편적 가치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로 보인다.
바둑의 경우 잡기보다는 도예가 더 높은 가치이며 보편적이다. 또한 유교에서 인권은 탄압하는 것보다는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더 높은 보편적 가치이다.
문화의 현상적 차이와 구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경험론자의 입장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나 흄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희랍인들은 남색을 권했다.
흄은 이것이 "우정, 공감, 상호애착 그리고 충실함의 원천으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남색 자체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지만, 남색의 바탕이 되는 성질들 즉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리고 충실함은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에서 존중받는 것"이자. 이런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지금까지의 관찰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보편적 가치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로 이름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정하거나 평가를 할 때 편의상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쓴다.
창조적 수용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적 수용의 기준은 인류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일반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지훈처럼 도 닦는 자세로 바둑을 두는 개별자가 존재한다.
인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억압받는 개인은 존재한다.
(2) 토착화의 의미
창조적 수용의 기준이 보편적 가치의 구현 여부라면, 우리는 보편적 가치와 맞서는 토착성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토착화 문제는 유신시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즉 '한국적 민주화'란 구호가 몇 년 동안 전국을 휩쓸었다.
이 구호가 뜻하는 바는 자명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으므로 한국의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데, 시급한 경제 개발을 이루고 북한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인권에 대한 제약이 불가피하여,
선거에 많은 비용을 소요하는 것은 낭비이므로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유신체제는 물론 독제체제였으므로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이 구호의 '한국적'이란 말이 토착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토착성 문제는 우리가 정체성 문제와 함께 지금도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김동리는 이 문제를 소설 '무녀도'에서 제기한 바 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두 가지 체제의 충돌이다.
무녀인 어머니의 샤머니즘과 아들의 기독교의 충돌이다.
기독교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샤머니즘 역시 세계관을 갖고 있다. 문제는 양 체계의 코드가 맞지 않는 데 있다.
그럼 어떤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인가?
이 소설은 살인이라는 물리적 사건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문제가 이렇게 간단히 해소되지 않는다.
기독교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기독교계는 희생을 순교하고 부르지만 토착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침략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외래문화인 기독교가 원형 그대로 우리 나라에 상륙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토착문화와 어떤 형태로
뒤섞이게 되는가 이다.
즉 김동리 소설에서와 같은 죽음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 받아들이되 토착화하려 한다.
토착화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겉모습은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내용을 토착화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외래종교인 기독교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신도 천만에 이르는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잡았다.
매주 일요일마다 큰 교회 앞에 넘쳐나는 차량들로 인해 경찰은 교통정리로 애를 먹는다. 또한 기독교계는 방송국과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성직자의 영향력도 크다.
기독교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예수 탄신일인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기독교사 안방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내용은 어떠한가?
서구식 건물과 예배 순서, 사제 제도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가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신자들이 교회에 가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가정이 편안하고 사업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헌금을 한다. 따라서 가족 중 누군가가 사고를 당하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이내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된다.
천국에서의 보답보다는 현세에서의 성공과 즉각적인 보상이 더 좋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가족 사랑으로 변했다.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은 '너희가 구원을 얻으면, 네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기독교에는 초월이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복신앙화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의 토착사앙인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샤머니즘이 기독교를 잡아먹은 것이다.
겉모습은 기독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지만 실상 그 내용에는 샤머니즘의 승리다.
조지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문명에 잠재해 있는 이 샤머니즘으로써 우리의 사고방식의 오리지낼리티를, 그리고
외래사상 수용과 변성의 방식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말하면, 한국사상과 한국문화는 도, 불, 유는
물론 기독교까지도 샤머나이즈해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담긴 내용보다 형식의 토지화에 열중하는 경우이다.
최근 기독교계에 찬송가를 우리 전통 가락으로 부르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므로 서구의 노래 형식으로 경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락을 사용한 작곡, 연주로 찬송을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해서 거문고나 가야금을 이용한 작곡과 연주가 시작되었다. 또한 건축 양식에도 우리의 전통적인 양식을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기와 지붕으로 된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도 몇백 년이 지났으므로 우리의 고유의 양식으로 예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복장도 한복으로 바꾸고 빵이 아니라 떡을 만찬에 쓰자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형식을 토착화하자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토착화는 보통 함께 진행되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토착화의 주체인 기존의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앞에서 샤머니즘을 한국 문화의 내면을 장학하고 있는 터줏대감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샤머니즘은 원래 동북아시아의 시베리아 지방에서 생겨난 것으로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
샤머니즘의 시원은 우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샤머니즘이 한국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가?
시원이 문제가 아니라면 세월이 흘러 천 년 후쯤에는 기독교정신이나 이슬람의 정신이 한국 문화의 터줏대감이 될 수도
잇다.
이처럼 토착화의 주역이 되는 정신이나 문화는 가변적이다.
주역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주역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역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정신이나 이념 혹을 속성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한국의 문화를 꿰뚫고 있는 것은 샤머니즘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깊게 샤머니즘에 물들어 있는지는 새삼 상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 왜 샤머니즘이 승리자로 살아 남아 있는가?
이것은 순환 문제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 답을 요구한다.
샤머니즘이 한국에서 살아 남은 것은 그것이 한국의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즉 뭔가 한국인에게 들어맞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한국인은 샤머니즘을 받아 들였는가? 그것은 샤머니즘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질문과 답이 동일하다. 즉 샤머니즘이 살아 남은 것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기 때문이고, 한국인의 정서가 샤머니즘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이 순환을 끊으려면, 샤머니즘의 어떤 면이 특히 한국에서 환영받았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샤머니즘의 여러 특징 가운데 특히 한국에서만 꽃을 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국인 정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부감을 주는 문화나 정서가 수천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에 대해 더욱 깊고 넓게 연구할 때 한국의 정체성의 한 면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3. 정체성 판단의 기준
(1) 현재성
고유성의 기준과 고유성의 판단의 기준은 다르다.
그것은 척도의 기준이 자인 것과 자의 기준이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길이가 얼마인가를 재는 기준은 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자의 기준이 무엇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유성과 창의성의 기준에 대해 논했다.
앞으로 논의를 위해서는 이런 문제 외에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정체성은 개성이며, 개성은 고유성과 창의성의 합이라고 본다면, 고유성과 창의성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곧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의 정체성 탐구를 위해서 우선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출발하고, 현재의 현상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정체성 판단의 기준의 하나는 현재성이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의미나 중요성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 현상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현상이 고찰의 주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25 동란 전 이북에서 금송아지를 안 키웠다는 사람이 있는가? 과거 금송아지를 키웠다는 것이 지금과 연관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과거의 금송아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뿐 단지 과거에 우리가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만 과거의 역사가 우리의 논의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현재와 연관이 없는 과거사 논의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철학이라면 당연히 한국의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하러 한국에서 철학을 하는가?
하지만 한국철학이란 명칭 아래 행해지는 한국 철학의 내용은 원효, 퇴계, 불교, 유교, 도교 등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현재 관심사는 한국철학에서 논의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이 안고 있는 고민과 문제는 한국철학 강좌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원효, 퇴계의 찬란한 업적과 불교, 유교, 도교의 유입 및 발전 과정 등이다.
그런데 원효나 퇴계의 사상과 철학이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동양 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모두 원효나 퇴계의 바탕 위에서 철학을 하는가?
그렇다면 원효나 퇴계의 철학은 지금의 철학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원효와 퇴계 철학의 현대적 의의는 학회라도 열어 찾아야 할 처지이다.
원효와 퇴계의 철학이 현재의 한국 철학에 내면화되었다면, 구태여 현대적 의의를 애써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와 업적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 논의에서 제외된다.
우리가 겪는 역사의 단절은 정체성 확립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정체성 판단 기준의 하나가 현재성이라면, 금속활자의 경우는 우리를 난처하게 한다.
국사 시간에 우리의 선조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배운다.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몇 년이나 앞섰는가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따라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된다.
장한 일이다. 하지만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현재성으로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활자는 대체로 일본에서 개발, 보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야 우리 나라에서 개발된 활자체가 사용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정 교과서의 활자는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일간지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만든 인쇄기로 찍고 있으며, 물론 글자체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다.
그럼 우리의 문자 매체의 활자체 대부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되는데, 이런 현실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과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난감하다.
우리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속활자의 발명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오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사용되었고, 그나마 지금의 활자와도 연관이 없어 보인다. 즉 단절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은 사실 아닌가? 북에 두고 온 금송아지와 같은 처지인가?
하지만 금속활자의 경우 단절을 메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현재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역사에는 일시적인 단절이나 공백이 늘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단절에 대해 너무 요란스럽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활자체가 잊혀지고 금속활자의 발명이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면, 지금 살려내면 되지 않겠는가?
용비어천가에 쓰인 활자체를 일본에서 만든 활자체 앞에 놓고 대등하게 경쟁시키면 된다.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하는가는 다음 문제이고, 어쨌든 우리는 단절을 메우고 현재성을 지킬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
하나는 원형을 그대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복원된 과거는 현재이다.
용비어천가의 활자체가 원형 그대로 지금 발행되는 책의 제목이나 본문에 쓰일 수 있다. 즉 원형의 재현이 한 방법이 된다. 다른 하나는 원형을 본으로 삼아 창의적으로 발전시키거나 변형시킨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근본은 과거의 활자체지만 현대 감각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으며, 사실상 두 가지가 모두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원된 과거가 현재라면, 복원된 과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재의 우리의 문화는 풍요로워진다.
정체성에 대한 모든 논의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현재성의 의미이다.
현재성의 의미는 중요하다. 우리는 훈고학적 태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종래의 한국에 대한 연구는 너무 과거의 역사나 유물 탐구에 치우쳤다.
그것을 흔히 전통에 대한 연구라 불렀는데, 나는 전통이 현재성을 상실한다면 훈고학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모든 논의를 현재와의 관련성에서 시작하자.
(2) 대중성
현재성만으로는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것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므로 어떤 조건이 추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대중성이 그 다른 조건 중 하나가 된다. 물
론 우리는 현재의 모습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어떤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나는 대중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중적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뜻이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수가 선호하는 것이 대다수의 특히 어떤 집단의 정체성 판단에 크게 기여한다고 보기 어렵다.
수준을 떠나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을 좀더 잘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궁중악이었던 아악과 백성들이 부르던 민요 중 어느 것이 한국의 정체성 탐구를 위한 우선적인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아악이 당시의 지배 계층이었던 왕실의 음악이었으므로 더 비중이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지금의 우리는 민요를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민요에 한국인의 정서와 숨결이 훨씬 많이 숨어 있다고 여긴다.
또한 민간의 설화나 전설이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해명하는 자료로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대중성의 문제로 본다.
즉 대중과 유리된 상층의 고급 문화 내지 특권층 문화는 집단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대중성이 확보된,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현상이 우리의 탐구 대상으로 적절할 것이다.
소수가 즐기는 것이 정체성 판단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하나의 단서가 있다.
즉 소수가 즐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원형 그대로든 변형된 양태로든)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수에 의해 향유되었지만 시간이 흐르거나 어떤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된다면 대중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문화는 이런 단계를 밟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서 대중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
거기에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무엇인가가 있다. 즉 시대의 정신이 녹아 들어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의 대중문화 푸대접은 우려의 수준을 넘어섰다.
몇 년 전 세종문화회관 대관 문제 때문에 운영위원들이 사퇴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 음대 교수인 그들은 이미자 같은 대중가수에게 고귀한 예술의 전당인 세종문화회관을 대여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사퇴를 결정했다.
그들이 하는 음악은 대부분 서양의 음악이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부르는 것들인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클래식은
예술이지만 이미자의 뽕짝은 딴따라의 것이다.
따라서 예술을 수호한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다.
나는 어느 것이 예술인지 잘 모른다. 나의 관심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자의 노래가 음대 교수의 아리아보다 훨씬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동네 아주머니는 이미자의 열성팬이며, 젊은 세대들도 이미자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 이미자는 국민가수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인정하며 즐기는 노래가 한국의 정체성 탐구의 주대상이 되어야 한다.
소수가 즐기는 클래식이 한국의 정체성 탐구를 위한 주대상이 될 수 없다.
50년이나 100년 후쯤 초등학교 교과서에 어떤 노래가 실릴까?
이탈리아 가곡이나 오페라의 아리아가 실릴 가능성이 적다는 데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아마도 동요나 한국 가곡이 실릴 가능성이 크지만 민요 혹은 대중요라는 이름으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노래의 생명력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까지 수십 년 동안 사랑 받아온 것을 보면 그때까지 살아 남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왜 두 곡이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인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멜로디, 가사. 창법 등 모든 면을 분석한다면 한국인이 좋아하는 노래의 특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구의 팝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팝송이 우리 음악시장에 차지하는 비중은 클래식보다 크다.
따라서 대중가요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클래식보다는 더 대중적이다.
대중성이 정체성 판단의 기준이 된다면, 팝송도 판단의 대상이 된다.
아마도 50년 후나 100년 후에도 여전히 사랑 받는 팝송이 있다면, 예를 들어 비틀스의 '예스터데이'가 그렇다면 역시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상응하는 분석이 뒤따를 것이다.
시원에 관계없이 대중성을 확보한다면 그 무엇이든 우리의 정체성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중성이 정체성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애써 어떤 것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보존하는 것이 무의미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즉 판소리의 맥이 끊어지면 한국 고유의 정신이 사라지게 되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고 언론이 후원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옛것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므로 환영할 일이다.
더욱 많은 선택지를 갖는 것이 제한된 선택지를 갖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옛것이 지금의 취향에 잘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어느 정도의 후원을 하는 것은 경쟁의 공정함을 지키는 방편이 될 것이다.
문제는 마치 이것이 없어지면, 즉 계승되지 않으면 한국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이 상실되는 것처럼 과장하는 데 있다.
잃어버린 우리의 옛것을 찾아 한국의 전통 문화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까지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이 지배적인 문화, 우리의 것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판소린가 대중적인가? 판소리가 소개된 적이 없어 인기가 없는 것인가?
판소리에 대한 탄압이 있는가?
나는 판소리가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한국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다면, 판소리가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한국음악에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다면, 판소리를 한국의 정체성 탐구의 주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소리가 계속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판소리는 한국의 소리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지 않은가? 우리는 다른 것을 향유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한국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주체성
현재성과 대중성 외에 고유성과 창의성 판단의 기준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주체성이다.
그럼 주체성을 무슨 뜻인가?
그것은 표면적 현상이 아닌 현상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똑같이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가곡을 전공한
두 사람이 있다.
귀국하여 무대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도 같고 창법도 같다. 그럼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도나 의식에서 다를 수 있다.
즉 한사람은 자신이 이탈리아 노래를 될 수 있는 한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여기에 외국 콩쿠르 입상
경력까지 있다면 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이 이탈리아 사람을 닮아 가는 데에, 그리고 서구문화에 더
가까이 가는 데에 흡족함을 느낀다. 한마디고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비록 이탈리아 노래를 부르지만 특별히 이탈리아 사람이 되고픈 바람이 없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이탈리아 가곡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음악계를 좀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즉 이탈리아 가곡을 우리 문화에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한국음악에 관심이 있다.
두 사람의 태도 차이를 나는 주체성의 문제라고 하겠다.
어떤 문화나 제도를 수용하는 태도는 정체성 판단의 한 조건이다.
미국인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몸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아이가 있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람을 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은 정체성을 문제이다.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 즉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탈무드의 답은 이렇다. 한 머리를 꼬집어서 그 머리가 울 때 다른 머리가 같이 운다면 한사람인고, 울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차이를 말한다.
즉 정체성을 판단할 때는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태도의 차이 즉 주체성이 정체성 판단의 기준이긴 하지만, 실제로 주체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의는 한국이란 민족 혹은 국가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사실상 민족이란 집단의 주체성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집단이 의식을 갖고 있는가?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주체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현대 유니콘스 팀은 주체적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팀은 독자적으로 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을 '현대 유니콘스 팀 선수들은 주체적인가?'로 바꾸어야 한다.
즉 연봉 협상에서 각 선수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해 우리는 주체적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즉 주체성은 개별자의 태도이지 집단의 태도는 아니다.
주체성이 집단의 속성이 아니라 개별자의 속성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주체성을 정체성 판단 기준의 하나로 삼는다면,
우리는 집단의 구성원 각각의 주체적 태도를 살핀 후에 그 집단이 주체적인가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드러난 현상만으로는 주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현상으로는 어떤 사람이 주체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지 구별하기 힘들다. 같은 교재를 쓰고, 같은 선생님 밑에서 같은 시간에 공부하며, 평가에서도 거의 같은 성적을 얻는다.
주체적 태도를 구별하기 위해선 각자의 의식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좀처럼 겉으로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일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의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면 좋다고 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른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후자가 주체적이다.
이렇게 한사람씩 주체성을 조사했다고 하자. 놀랍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주체적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집단 혹은 국가는 주체적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하면 앞서 말한 합성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구한말 대부분의 한국인은 주체적으로 사고했다. 즉 대다수의 한국인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기를 원했고,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후대에 사학자들은 조선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지금도 우리는 외교 문제에서 주체적이지 못할 때 걸핏하면 지금의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즉 주체성 상실이 나라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한국민 대부분이 주체적이었으나 한국은 주체적이지 않았던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이처럼 민족 또는 집단의 주체성을 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집단의 주체성을 논할 수 있는가?
나는 한국의 주체성을 성향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성향이 실재하는가 라는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성향의 일반적 의미는 별로 도전 받지 않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향이라는 말은 '대체로 이러이러한 성향이 있다'는 식으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통계적 의미를 가진다.
즉 개별자 하나 하나를 조사하면, 대체적으로 이러이러한 성향이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향을 개별자에게 잠재하는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논쟁의 여지가 많고, 나는 성향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상에서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즉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라는 말은 '브라질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을 보면 축구를 좋아한다고
생각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축구를 좋아함이란 속성이 브라질 사람 개개인에게 잠재적 혹을 현시적으로 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브라질의 기질을 말하면서 반드시 축구 애호를 포함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집단으로서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축구 애호가가 브라질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주체성은 집단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집단은 여러 가지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현상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4. 결론
이진우는 최근의 저서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인은 없다'는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정치가 우리와 다른 집단, 안과 밖을 구별함으로써 폐쇄적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자 한다면, 정치는 무엇에 호소하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내용'이 아니라 동일한 문화와 민족에 속해 있다는
'감정'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한국인이 없다는 것은 한민족에 속한다는 감정적 연대감만이 존재하지 우리의 정체성에 긍정적으로 기여
하는 이성적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집어 표현하면, 우리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자존심만이 난무하지 바깥으로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긍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이진우는 자긍심을 내세울 수 있는 '내용'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리하여 '한국적'이란 형용사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은 후, 결국 '정'이 그 내용이라고 답한다.
이진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민족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 정을 고귀한 가치로 생각하는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정--그것은 한국인의 성격과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진우는 계속하여 정이 감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은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바람직한 인간성에 관한 우리의 고유한 해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진우는 "정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한국인인 것이다."라고 결론 짓고 있다. 즉 한국인의 정체성은 정으로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진우의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관한 탐구는 정을 그 내용으로 제시한다. 적절한 지적인가?
만약 알래스카 문화를 우리 문화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정이란 이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알래스카인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체성이란 다른 민족과 우리를 구별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과연 정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논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에는 정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적인 것이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허전한 그 무엇이 남아 있다.
가령 자신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다 해도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민족적 자존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민족적 자존심이란 어떤 것인가?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태도나 전략은 무엇인가?
정체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러한 문제는 한국의 주체성을 다룰 다음 책에서 논해보겠다.
맺는말
철학은 빵을 구울 수 없다고 한다. 철학의 무용함과 비현실성을 지적한 말이라 짐작한다.
사실 철학은 빵을 구울 수 없다. 하지만 왜 빵을 구워야 하는지, 더 나아가 왜 빵을 먹어야 하는지를 말해줄 수 있다.
철학이 꼭 빵을 구워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빵을 굽는 이유, 빵을 먹는 이유도 알아야 한다.
철학 일반이 무용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의 비현실성을 질타하면, 철학자들은 흔히 철학은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현실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본질
이므로 어느 정도의 현실과의 간격이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나는 이런 주장이 근본적으로는 옳다고 여긴다.
물리학이 그렇듯 모든 학문은 현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일정 거리 확보가 객관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철학은 현장 조사를 하지 않는다. 고고학자처럼 유적을 직접 파헤치지 않는다. 화학자처럼 실험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통계학자처럼 여론 조사를 하지도 않는다.
철학자는 근본적으로 남의 자료를 재료로 삼아 사유를 하는 부류에 속한다. 즉 사유가 철학자의 주종목이다.
실험이 없고, 밖으로 현장 탐사를 나가지도 않으며, 조각가처럼 철골 구조와 씨름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사유에 잠긴 것이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현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유하는 지금의 한국 철학자들의 모습이 철학자 일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라면 어느 정도 현실에 어둡고 고지식하게 사유의 영역에 머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철학자 일반의 모습이 아니라 철학자 사유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자가 사유하는 내용이 어떤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 철학계는 이 내용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즉 수입 오퍼상 같은 철학을 집어치우고 이 땅에서 우리의 문제로 철학을 하자는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본 궤도에 진입한 느낌이다.
이 책에서 나는 한국의 정체성을 고찰했다.
한국의 정체성이 지금 우리의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어떤 철학 부류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 서양철학은 아니고, 동양철학도 아니고, 그럼 한국철학?
하지만 한국철학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지금 우리는 한국철학을 국악이나 한국화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철학의 위상이 국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한국철학의 정체성의 혼란도 미술에서의 한국화의 쓰임새의
혼란과 같다고 여긴다.
현재의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한 고찰이 어떤 철학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답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심지어 김재권은 "물론 서양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듯이 서양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
그러므로 우리들이 역사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면 '한국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철학'을 역사적 의미에서 한정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
김재권도 보편성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보편성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강대국의 전도사가 된다.
김재권 역시 미국의 전도사이다.
나는 한국철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의미에서가 아닌, 또한 한국에서의 철학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국의 특수성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드러내는
철학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철학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이다.
이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키는 철학이 있다면, 시원에 관계없이 한국철학이다.
어느 새대나 세계주의자나 보편주의자가 있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은 약소국에서는 특정한 강대국에서 수입된 철학이 보편 철학처럼 행세하기 마련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통해 수입된 독일 철학이 보편 철학 행세를 했고, 해방 후에는 미국철학이 수입되어 독일철학과 자웅을 겨루고 있다.
왜 우리가 남의 철학을 가지고 대리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프리카의 한 소국을 방문했던 만득이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의심했다.
그래도 철학에서는 정체성이 지켜질 것으로 생각한 만득이는 철학회에 가본다.
철학회에 가보니 철학자들은 한국의 성리학에 관해 열띤 논쟁을 하고 있다. 주기론과 주리론 중 어니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논란을 벌인다.
어떤 이는 자신이 한국에 유학하여 퇴계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것을 내세워 압도하려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국의
율곡 전문가와 매우 친하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며 자신이 한국철학에 더욱 정통하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또 어떤 이는 한국철학의 원류는 중국철학이므로 중국철학을 전공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철학 전문가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모든 원전을 누가 더 정확히 해석하느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논쟁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만득이는 생각에 잠긴다. 왜 이들은 남의 나라 철학에 그토록 열정적인가? 도대체 한국철학이 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절박
하고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떤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들은 여가생활로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이상을 추구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것일까?
만득이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는 더 이상 주기론, 주리론 논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문제가 아니라 언제라고 우리 자신의 지금의 문제라는 것을. 만득이는 지금도 자신의 문제로 씨름하는 철학자가 있다고 믿고 싶다.
주
1) '쉬리'의 성공에 대해 주인석은 '성공을 축하드립니다만'이란 제목의 비평에서 혹평하고 있다. 그는 "한낱 상업 영화에 불과한, 그것도 할리우드와 홍콩의 흥행작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 만들어놓은, 그곳도 이 햇볕정책의 시대에 냉전시대의 유령을 다시 불러내 상업화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데올로기로 무지를 과시하는 이 사구려 영화를"이라고 말한다('씨네 21' 제191호, 1999. 3. 9). 한마디로 상업위주의 영화에 왜 그토록 많은 관객이 몰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유의 평가는 같은 호에 실린 강한섭, 이명인의 평가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각각 "'유사 할리우드 영화'로 오리지널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실용주의 전략", "상업주의 전략을 완성시킬 줄 아는
장인들의 영화"라고 평한다. 이런 비평에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으나 나는 상업주의가 이 영화의 성공을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국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북한은 우리에게 동족인가, 적인가? 같은 민족이 이런 정체성의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의 특수성이다.
이 영화는 우선 이런 소재 면에서 성공적이다.
또한 '쉬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한국의 특수성이 과거의 전통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서편제'는 그야말로 옛것을 소재로 삼는다. 음악도 전통적 가락이 화면과 어우러진다. 한국적인 특수성이 판소리에 모두
녹아 있다는 신념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판소리를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한국적인 것의 사수를 외치는 한국영화
보호론자들의 스크린쿼터제 폐지 반대 시위처럼 비장하다. 하지만 한국의 특수성은 지금의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 점에서 '쉬리'는 뛰어나다. 또한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액션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외국에서 비롯된 것일 지라도 대중이 선호한다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선조는 정적인 아름다움은 즐겼을지 모르지만 대중은 액션을 즐긴다.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비롯되었든 홍콩에서 비롯되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쉬리'는 그런 영화들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상황에 맞는 액션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소 대다수의 관객이 그것을 좋아한다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유럽의 인상파 화풍은 일본 미술의 영향으로 탄생된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네의 작품을 '유사 일본화' 혹은 '싸구려 일본화' 라고 부르는가?
2) 개인의 동일성 문제에 관한 재미있는 예를 김재권이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화성인이 당신을 원자총으로 분해한 후 다시 결합한다면 당신의 동일성은 유지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분해된 후 다른 원소들로 재구성된다면 이전의 자신과 동일한가, 아닌가? 또한 그 사건이 수초만에 일어났는가 아니면 몇 년에 걸쳐 일어났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가? 김재권의 예는 다음과 같다. "한 무리의 화성인들이 다시 당신을 방문한다. 그들이 '원자총'을 쏘아 (A)[화성인이 당신이 잠든 사이 원자총으로 당신의 몸을 분해시킨 사건]과 같은 불행한 결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의 화성인들은 생각을 한 끝에 자기들의 행위를 미안하게 느껴 당신의 몸을 재구성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신의 몸을 구성했던 원자들은 은하계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려 복원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은 마루청에서 탄소원자들을 얻는 식으로 다른 원자들도 얻어 이 원자들을 초고도의 기술로 만든 '합성기' 속에 섞어 가동한다. 그러면 얏! 하는 사이에 당신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평안히 계속 잠들게 된다. 화성인들은 만족하여 우주선을
타고 떠난다." [김재권, '한국철학이란 가능한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집문당, 1989), 83--84쪽]
3) 정체성과 동일성의 구별은 편의에 따른 것이다. 즉 집단의 동일성 대신에 집단의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체성과 동일성은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변화 속에서도 남아 지속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이다. 즉 변화, 지속, 동일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체성의 과제이다. 이 책에서는 집단에서 동일성이란 표현보다 정체성이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구태여 구별한다.
4)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의 문제는 두 가지 물음, 즉 변화 속에 지속되는 어떤 것이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것들의 동일성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흄의 다발이론 이후에는 실체 없는 동일성 확보가 주요 과제가 되었다. 최근에 갈로이스는 아예 기회 동일성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Andre Gallois, Occasions of Identity:The Metaphysics of
Persistence, Change, and Sameness(Oxford:Clarendon Press, 1998)
참조
5) 우리는 '6,25 동란'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은 미국의 시각에서 붙여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식의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주체의식이 결여된 현지 고용인의 의식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6)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에서 지은이는 지구화 시대의 생존 방법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어 공용어론이 논쟁의 불씨가 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지은이에게 보편성에 관한 철학적 지식과 인식론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지은이는 보편성이란 함정에 빠졌으며, 미국과 보편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복거일이 생각하는 대로 미국이 세계의 표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이 보편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보편은 이름뿐인 것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복거일이 "우리도 그 국제어를 다듬어 발전시키는 일에서 우리의 몫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는 일본에 충성을 다짐했던 일제 시대의 지식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복거일은 언어를 안경과 같은 매개로 생각한다. 즉 언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 호환성이 높고 경제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비용을 절감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아니 다행히도)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본다. 고종석의 말대로 모국어가 우리의 감옥이다.
언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계는 이미 박이문이 복거일을 반박하면서 논한 바 있다.
복거일은 민족주의의 감정 과잉을 염려하고 있는데, 어설픈 논리로 미국의 전도사가 되기보다는 감정이 넘치는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참조
7) 한국미술의 자생성 간행위원회, '한국미술의 자생성'(한길하트, 1999), 6쪽
8) 2차 대전이란 용어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을 뜻한다. 하지만 왜 이것을 '세계' 대전으로 불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 전쟁은 전세계에 걸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 일부, 아프리카 일부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유럽 전쟁이다. 그런데도 이를 '세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럽 중심적 사고의 산물이다. 유럽이 세계는 아니다. 유럽은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9) 최준식,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사계절, 1977) 참조. 한국문화의 여러 성격에 관해 논하고 있는 이 책은 종래의 것보다 솔직하게 한국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비판과 충고가 이 책의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는 이 책이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문화에 대한 내 연구의 목적은 '한국인'뿐 아니라 소위 '한국적인 그 무엇'이 있는지, 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굳이 학문적 용어로 한다면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러한 나의 한국 문화 연구의 순례에서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한국인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 해명이 이 책의 '한국의 정체성' 탐구와 어떤 관계에 놓일지 궁금하다.
10) 한국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나는 한글 전용을 주장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은 주민등록증의 성명 표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의 이름은 한자 '탁석산(높을 탁, 돌 석, 뫼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탁석산'이란 한글 표기도 사용한다. 어떤 것이 나의 이름 표기인가? 둘 다인가? 둘 다 나의 이름 표기라면 영어표기 'Seoksan Tak'은 어떠한가? 나의 이름이 여러 가지 유형의 표기를 갖는 것이 과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가? 한자 혼용의 문제는 한국의 정체성이 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독립된 책으로 다룰 예정이다.
11) 전통적으로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자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개별자와 보편자, 실체, 관념, 영혼, 절대 정신, 사건 등이 그 후보로 등장했지만 그 어떤 것도 합의에 이른 적은 없었다. 최근에 진행 중인 사건 존재론이 한 예가 될 것이다. 데이빗슨은 사간이란 정신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도 아닌 어떤 것으로 기술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김재권은 사건을 [개별자, 속성, 시간의] 구조를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한편 치솜은 사건은 개별자와 속성으로 환원 가능하므로 사건이란 범주는 필요 없다는 무사건론을 전개한다. 과연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학자가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12) 하인즈R. 페이겔스, '이성의 꿈'(범양사 출판부, 1991), 216--217쪽
13) Nicholas Rescher, American Philosophy Today and Other Philosophical Studies (London: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Inc., 1994) 참조. 이 책의 제2장 '분석철학의 흥망'에서 지은이는 "교리적 프로그램으로서의 분석철학은 종점에 이르렀고, 실패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방법론적 원천으로서 그것은 자신이 엄청나게 풍요롭고 생산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그것의 유익한 영향은 현대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14) 페이겔스'이성의 꿈', 143쪽.
15)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은 아주 미미하다. 그것은 작품성은 차지하더라도 우선 흥행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가 세계
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은 1950년대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흥행작을 내놓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국 영화는 작품성에서도 별 인정은 받지 못했으며 흥행작도 없었다. 최근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용가리'도 선전과는 달리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해 보인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의 흥행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상대로 제작에 착수한 것이라서 흥행의 실패는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업적인 것 같다.
16) 여기에서 '보편적'이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즉 편의상 세계적인 보편적 속성을 말하고 있을 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뿐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보편적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특수한 국가 혹은 민족의 속성일 뿐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 특수한 국가는 미국이다. 또한 공통 속성과 보편 속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보편 속성이 시간과 공간이 제약을 받지 않는 반면, 공통 속성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한국에 관해서는 공통 속성이 존재할 수 있다. 즉 한반도란 지리적 공간과 한국의 역사란 시간의 제약 안에서 공통되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 속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해당되어야 하며 시간적으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겠는가?
17)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철저히 자국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예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카케무샤'는 일본의 특수성을 무기로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터키 영화 '욜'도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런 성공 사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런 영화들이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세계적 보편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국의 특수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결과, 부수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보편성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이름뿐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보편성은 뒤에 거론하겠지만 미국적인 것이다. 즉 이런 영화들은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미국적 취향에 맞았을 뿐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것, 즉 미국적인 것을 먼저 알고 그것을 자국의 영화의 특수성을 통해 잘 드러나는 것이 세계 시장 공략에 효과적이다.
18) 최근의 디즈니 작품인 '뮬란'은 내용은 중국의 것이지만 표현양식은 전통적인 디즈니의 것이다. 중국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로 분류되는 것은 제작자의 국적뿐만 아니라 표현 양식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윤이상이 만든 오페라 '심청전'은 그 내용이나 선율이 매우 한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코 큰 독일인이 심봉사나 심청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쩐지 낯설게 보인다. 윤이상의 경우,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이룬 음악가가 아니라 독일 음악에 새로운 요소, 즉 한국적인 것을 보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윤이상은 독일 음악가이다.
19) 샤머니즘을 소재로 하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 있다. 1980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ISDAP상을 수상했다. 또한 강수연은 19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배용균 감독은 1990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제42회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강수연은 전혀 세계적인 배우가 아니며, 이두용이나 배용균의 영화가 세계 영화의 흐름에 사소한 영향이라도 끼쳤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20) 거의 유일한 예외는 축구가 아닌가 한다. 월드컵 축구는 올림픽보다 몇 배 높은 수입을 올린다. 그 이유는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는 국가가 거의 190여 개국에 달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축구는 세계성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글자 그대로 세계적인 스포츠에 미국은 매우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축구는 결코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이 시대에 미국을 제외한 나라가 미국에 대해 자존심을 지키는 수단으로 축구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21)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일류 철학자들도 결국 미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활동은 명성에 대한 인준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아카데미 영화제에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있다는 것은 미국의 우월주의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칸 영화제나 베를린 영화제에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있는가?
22) 한국학 연구의 두드러진 특징은 박물관식탐구라는 것이다. 즉 주로 현대 이전까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뿐, 현대는 한국학 연구에서 별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 지향적 태도는 한국학의 생명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이런 태도는 유교에서 주나라를 이상국가의 원형으로 삼아 끊임없이 흠모하는 태도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는데,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이 땅에서의 우리의 문제이다.
23) 이런 점에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의 구호 '동방을 보라'는 적절하다. 여기에서의 동방은 한국과 일본을 가리키는데, 목표가 구체적으로 주어진 만큼 성과도 컸다. 막연하고 실체가 없는 우리의 '세계화' 구호와 대조된다.
24) 존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별자라는 입장에 서서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이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은 복거일이 제기한 영어 공용어론에 대해 '우리는 모두 개인이다'라는 입장에서 답한다. 그는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다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언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종석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개별자만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그의 발언은 사실상 정체성이란 그때그때의 정체성밖에 없다는, 앞에서 언급한 안드레 갈로이스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다. 고종석, '감염된 언어: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개마고원, 1999), 181쪽.
25) 데이비드 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학교 출판부, 1998), 63쪽.
26) 조지훈, '한국 사상의 모색', '한국학연구', 조지훈 전집 8(나남출판, 1996), 275--276쪽.
27) 한국이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본의 왕족이 백제와 고구려인에서 비롯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8세기에 건립되었다는 나라 동대사 본당의 양식과 규모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본당은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 건물로서 양식에 있어서 당시의 삼국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또한 14세기에 축조되었다는 오사카 성은 당시 조선의 건축양식과 조금의 유사성도 없지만 매우 뛰어나고 독특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어떤 근거로 문화적 우월감을 갖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역사 왜은
아닐지라도 역사교육 왜곡은 있었던 것 같다.
28) 복제된 인간과 원래의 인간은 질적인 면에서는 완벽히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에 수적으로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29) 한정희, '한국과 중국의 회화:관계성과 비교론'(학고재, 1999) 참조. 지은이는 조선 후기 회화의 독창적 성취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지만 진경산수화 형성의 배경에 중국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중국의 실학사상과 도선 사상이 그 배경이며, 조선후기 미술의 발전은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의식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전통보다 현실과 실제를 중시하는 중국의 새로운 사조 즉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논한다. 다시 말해서, 진경산수화의 등정은 범동아시아적인 예술사조, 즉 진경산수화와 문인화의 성행 그리고 풍속화의 발달과 같은 한, 중, 일 세 나라에서 두루 나타났던 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0) David Hume, Enquiries concering Human Understanding and concerning the Princciples of Morals, ed. L. A. Selby-Bigge, 3rd rev. end by P. H. Nidditch(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1975), 334쪽.
31) 최길성, '한국 무속의 이해'(예전사, 1994) 지은이는 한국 기독교와의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령운동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무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수적 증대보다도 신도 수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질병관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무당이 우환굿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치병은 그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아니고 종교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속에서는 치병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셋째, 감사에
대한 것이다. 교회에서 감사한 마음의 표현으로 '헌금'을 하듯이 무속에서도 '굿돈'이 있다. 목사는 감사 헌금에 '기도'해주고 무당은 별비에 '추원'해 준다.
32) 조지훈, '한국사상 논고', '한국학연구'(나남출판, 1996), 280--281쪽.
33) 조선우, '교회음악의 한국화 논의', '한국 카톨릭 어디로 갈 것인가'(서광사, 1997) 참조, 지은이는 교회음악의 한국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음악이 지나치게 서양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지은이는 이런 왜곡된 상황을 과감히 탈피하여 민족교회음악을 창달하고자 몇 가지 지적과 제안을 한다. 그 내용은
(가)한국 교회는 근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나)한국 교회는 교회음악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다)한국 교회는 경건주의적 교회음악관에 젖어 있다.
(라)한국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다.
(바)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어른 중심적이다.
(사)교회음악 창작을 위한 가사 문학이 빈곤하다.
지은이가 생각하는 교회음악의 한국화는 우리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공동 자산으로 삼아 주체적으로 창작하고 수용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주체적이라, 그 음악을 만들 수 있었고 오늘날 즐길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심성 연구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34) 대중성은 흔히 상업성과 동의어로 쓰인다.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과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물론 다른 개념이다.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이 상업성의 요체라면 동감대를 자극하는 것이 대중성의 요체이다. 대중성과 상업성이 동일시하는 것은 대중을 얕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깔봄으로써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에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에 대한 비평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김봉석은 '사랑 가득한 황무지, 무국적 일본성(순정만화 같은 동세대의 감수성), 그리고 일본적
세계'러브레터''란 글에서 이 영화를 작품이라기보다는 상품으로 여긴다고 주장한다('씨네21' 제230호. 1999. 12. 7). 그런데 김봉석의 글은 거의 횡설수설에 가까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렵다. 더욱이 마지막의 '예술과 예술 아님:차이가 뭔가'는 정말 뭔가? 이 영화가 단순한 '상품'에 불과하다면 그런 작위성은 결국 모든 예술작품에 공통적이므로 이 영화 또한 '예술'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지적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말장난으로 보이는데, 참고 읽기가 힘들다.
35) 축구의 스타일로 한 국가의 특징을 잡아내려는 시도는 드문 일이 아닌데, 김화성은 '한, 중, 일 축구 삼국지'라는 기사에서 한국 축구를 투박함으로, 중국 축구를 두터움으로, 일본 축구를 깔끔함으로 특징지었다('신동아' 1999. 6:www.donga.com/).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세 나라의 축구는 분명 스타일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를 구별 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중국 축구에 관한 평은 수긍하기 어렵다. 중국 축구를 두텁다거나 스케일이 크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중국 축구는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아직 미개발된 상태로 발전 중에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러한 무리한 분석을 하게 된 원인은 각 국에 대한 선입견을 여과 없이 축구에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축구를 통해 국민성이나 기질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주장을 하려면 충분한 분석과 근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36) 이진우,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민음사, 1999), 57쪽.
37) 김재권, '한국철학이란 가능한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집문당, 1989), 96쪽.
더 읽어야 할 자료들
고종석, '감염된 언어: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개마고원, 1999)
고종석은 언어학 특히 국어학 분야의 일급 에세이스트다. '언문세설'(열림원, 1997)은 고종석의 진가를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한글 자모를 소재로 한국어의 음운론과 의미론 그리고 화용론을 다루는 이 책에는 고종석의 진지함과 지식 그리고 약간의 치기가 있다. 읽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김봉석, '사랑 가득한 황무지, 무국적 일본성--순정만화 같은 동세대의 감수성, 그리고 일본적 세계 '러브레터'' '씨네21' 제230호, 1999. 12. 7.'러브레터'가 상업적이라는 비난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나왔다. 신토 아사코는 '아름다운 소비문화. "이와이 WORLD"'라는 글에서 이 영화가 철저히 상업적인 영화로 결코 영화사를 뒤바꾸어놓는 작품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www.geotitles.com/Hollywood/chateau/). '설사 모든 이에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단언한 후 이 영화의 의의는 위험 부담이 많은 작품을 제작하는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힘이 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이 상업주의적 영화의 성공을 기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본 사람 거의 모두가 감동을 느끼는 영화가 좋은 영화이지 예술영화나 좋은 영화가 따로 있는가?
김재권,'한국철학이란 가능한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집문당, 1989)
미국 브라운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김재권은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주로 심리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글은 거의 없다. 그 밖에 한국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으로 '문화철학'(철학과현실사, 1995)과 '문명의 전환과 한국문화'(철학과현실사, 1997)가 있다. 두 권 모두 한국의 일급 철학자들의 진지하고 장중한 탐구 결과를 담고 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출판사의 이름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철학'은 있으나
'현실'은 없다. 따라서 '철학과현실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글은 발표문이 아닌 논평문으로 '문명의 전환과 한국문화'에 실린 김혜련의 짧은 글 ''문화침투와 주체성의 문제'에 대한 논평'이다.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철학적 관점을 예리하고 명쾌하게 드러냈다.
김화성, '한, 중, 일 축구 삼국지' '신동아' 1999. 6.(www.donga.com/)
거칠고 깊이 없는 이 기사에 대해 신동일은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는 '[규탄] 한국축구의 질곡--언론이 유포하는 편견'이란 글에서 '요컨데 시스템이 문제이지 한국인들의 기질이 그렇게 되어먹었기 때문에 요모양 요꼴의 축구밖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ddanji.nets해.com/제20호. 1999. 7. 6).
신동일의 한국 축구에 대한 사랑은 충분히 알겠으나 한국 축구의 현행 시스템이 일본이나 미국의 강요가 아닌 우리의 선택에 의해 해명된 것이라면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구축한 한국인에게 문제가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언론이 유독 국가대표팀경기에만 광분하는 것도 사실이고 정치권이 축구를 이용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행의 승리 위주의 시스템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풍토의 산물이다.
선수촌을 만들어 대표선수들을 1년 내내 합숙 훈련시키는 나라가 전세계에 몇이나 될까? 우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혹시 북한은? 이것이 우리의 문화 풍토이다. 그리고 한국 축구의 활로를 축구 전문기자 양성으로 찾고 있는데, 이는 단견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우리 나라에 개인주의를 정착시켜 팀 전술보다 개인의 기량을 우선하는 축구를 하는 것이다. 한국 축구에 대한 일반적인 방향 제시는 전광민의 '우리 나라 축구 변해야 산다--투지에서 기술 축구로의 전환'으로 충분할 것이다(www.huhs-f.com).
데이비드 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학교 출판부, 1998)
복거일,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자유주의로 무장한 복거일은 거의 언제나 사회 통념과는 상반된 주장을 펼쳐오고 있다. 그 강도가 점점 심해져 요즈음에는 거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지나친 자유경제 신봉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복거일의 입장은 아마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자신의 책 '소수를 위한 변명'의 제목처럼 소수를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획일적 사고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의 의견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복거일은 소중한 존재이다.
이진우,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민음사, 1999)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는 이진우가 처음 대중을 상대로 낸 책이 아닌가 싶다. 이진우는 이 책의 제1장 '이 땅에서 철학하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한국적 철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제9장 '세계 체제의 도전과 한국사상의 변형' 중 조동일, 이승환, 조한혜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진우 역시 한국에서 철학함의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진우가 서양철학 특히 독일철학의 세례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진우에게 한국의 현실이 관념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으로 느껴질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조선우, '교회 음악의 한국화 논의', '한국 가톨릭 어디로 갈 것인가'(서광사, 1997)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없는 이 책은 조악한 조판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꽤 훌륭하다. 특히 개별 분야에 대한 탐구는 훌륭한 성과이다. 그 중에서도 조광호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한국화 방향--그 가능성의 탐구와 모색'은 매우 좋다. 한국화의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송수남의 '한국화의 길'(미진사, 1995)도 읽을 만하다. 체계적인 글은 아니지만 화가로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태도가 진지하자. 또한 한국음악의 정체성에 관한 책 중에서는 아마도 이성천의 '한국, 한국인, 한국음악'(풍남, 1997)이 최고일 것이다. 송방송의 '한국음악학의 방향'(예솔, 1998)도 좋지만 이성천의 책보다는 못하다.
이성천은 위의 책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정신을 화이부동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음악에 국한된 탐구가 아니다. 이성천은 매우 깊고 폭넓은 음악적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실전 경험도 풍부하다. 이 책은 보너스로 김지하가 주장하는 '율려'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준다.
조지훈, '한국 사상의 모색', '한국학연구', 조지훈 전집 8(나남출판, 1996)
주인석, '성공을 축하드립니다만:구보씨가 '쉬리'를 보고 느낀 것', '씨네21' 제191호, 1999. 9. 9.
일간지에 TV평을 기고했던 주인석은 합리적이고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주인석의 TV평을 좋아한다. 솔직하고 예리하고 따뜻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여태껏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중헌의 '우리 영화 살리기'(늘봄, 1999)는 신문에 실린 기사를 모은 것으로 거의 잡담 수준이다. 짧은 단상은 아무리 모아도 짧은 단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반면 김수남의 '한국 영화의 쟁점과 사유'(문예마당, 1997)는 영화철학을 담고 있어 읽기에 편하다. 특히 제 2장 '한국 영화의 쟁점들'은 보기 드문 우리 영화에 대한 이론적 탐구이다.
한편 정종화의'자료로 본 한국영화사 1'과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 2'(열화당, 1997)는 작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한국 영화의 기본 자료집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진이 많이 실려있어 재미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최길성, '한국 무속의 이해'(예진사, 1994)
한국 무속에 관한 가장 짜임새 있는 책은 아직은 유동식의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연세대학교 출판부, 1975)이다. 한국 무속에 관한 연구에서 아쉬운 점은 연구가 너무 고고학적 연원 탐구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문화에 스며든 무속의 영향과 흔적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준식, '한국인에게 문화가 있는 가'(사계절, 1997)
이 책을 기존의 한국문화에 관한 책들이 갖지 못한 새로움이나 독창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규태보다 더 나은 관점이나 자료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솔직함과 구체적인 예들이다.
하인즈R.페이겔스, '이성의 꿈'(범양사 출판부, 1991)
현대의 물리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컴퓨터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꽤 어렵지만 재미있고 읽은 이를 매우 유식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로저 펜로즈가 쓰고 박승수가 옮긴 '황제의 새마음'(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상, 하권이다. 정말 흥미로운 책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한국미술의 자생성 간행위원회, '한국미술의 자생성'(한길아트, 1999)
매우 야심적인 책으로 한국미술의 주체성을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요구는 재대로 읽었으나 필자들의 역량 부족으로 기존의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매우 피상적인 고찰과 진부한 견해는 질 좋은 종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한정희, '한국과 중국의 회화:관계성과 비교론'(학고재, 1999)
매우 뛰어난 책이다. 최완수를 중심으로 한 간송학파가 진경산수의 독특함과 자생성은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 시대에 차분히 그리고 단호하게 근거를 바탕으로 진경산수와 중국의 관계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능력이 어우러져 좋은 책이 되었다.
Andre Gallois, Occasinons of Identity:The Metaphtsics of Persistence, Change, and Sameness(Oxford:Clarendon Press, 1998)
David Hume, Enquirie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and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ed.L.A.Selby-Bigge, 3ed rev. edn by P.H.Nidditch(Oxfordn:Oxford University Press, 1975)
Nicholas Rescher, American Philosophy Today and Other Philosophical Studies(London: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Inc. 1994)
감사의 글
누구나 질풍노도의 시대를 겪는다. 세상의 모든 것에 저항하고 세상의 모든 것에 절망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절망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시대가 누구에게나 있다. 세상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신감이 들다가도, 내가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아무 변화 없이 지속 될 거라는 허무감에 사로잡힌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물론 그런 시대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시작된 이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시대는 군복무를 마쳤을 때 비로소 지나갔다. 그 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 가운데 몇 권이 나의 인생을 형성하고 바꾸어 놓았다. 모두 잠든 깊은 밤 홀로 깨어 뜻도 잘 모르는 쇼팬하우어를 읽던 기억이 나다. 세상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수상쩍었다. 하지만 심각하고 어려운 책만이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아니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읽었을 때에는 너무 웃는 바람에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은 동양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삶의 향기와 여유를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특히 나의 관심을 끈 작품은 최인훈의 '회색인'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많은 부분이 주인공의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논문이나 시사 평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인훈이 제기한 문제는 추상적이고 머나먼 남의 나라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의 특수성, 한국문화의 억압성, 약소국 국민이 치러야 하는 대가, 서양위주의 시각에서 비롯된 현실 왜곡 등이
나의 정신 세계를 사로잡았다.
논리적이고 담대하며 솔직한 시각, 선지자적인 예언들, 냉소적인 비웃음, 그러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삶에 대한 애정.... 주인공 독고준은 엉성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언제까지나 생생한 인물로 남게되었다.
이 책은 '회색인'에 대한 응답이다.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여러 가지 예민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한 문제 제기만으로도 이 소설은 가히 놀라운 작품이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 예언자적이고 냉소적인 문제 제기에 압도되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 제목 그대로 주인공은 '회색' 인간이며, 회색인은 어떠한 해결책도 모색하려 하지 않는 회의주의자를 의미한다. '회색인'이 나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후 세상살이에 바쁘고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차츰 나의 기억에서 희미해져갔다. 그런데 서양철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은 후에도 어쩐지 이것이 평생 매달릴 문제가 아니라는 자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의 문제를 주제로 책을 쓰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달 동안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여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날 문득 '회색인'이 생각났다.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갑자기 생각 난 것이다. 그날 밤 밤을 세워 20여 년 만에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옛날에 수십 차례 읽었던 책이지만 신기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다룬 문제들이 대부분 최인훈이 제기했던 문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몹시 놀라웠다.
나는 최인훈이 제기한 문제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새 내면화하여 끊임없이 그 해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회색인'에 대한 응답으로 바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나의 정신이 죽지 않고 고뇌를 통해 꾸준히 성장했다는 것이 기뻤다.
이 책은 20여 년에 걸친 훈련과 고뇌의 결과를 세상에 내놓는 나의 첫 작품이다.
앞으로 한국의 주체성, 한국어의 정체성, 주시경 평전, 교토 인상기 등을 차례로 쓰고 싶다. 언제나 도움만 받고 살아온 인생이다.
앞으로의 저작으로 지금까지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다. 특히 나를 위해 후원회를 구성한 김호택, 김준식, 박요삼, 박윤성, 박태민, 이충원, 조병철, 전병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저작을 내놓고 싶다.
탁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