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변에서 젊은 날에 외국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숱한 고생 끝에 그런 대로 삶의 터전을 가꾸어 냈다는 사람을 자주 본다. 그런데 그들이 노년에 이르러 고독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그 곳에 벌여 놓은 게 있으니 걷어치우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 그 곳에서 눌러 살자니 문화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돈벌이에 바쁘던 젊은 날에는 모르고 지냈다. 나이 들게 되어 일이 한가해지면서 외로움이 새삼 심각하게 고민거리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이민자뿐만이 아니다. 핵가족이 일반화된 선진국에서 노인들의 비참함은 고독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의기투합하는 말벗을 만나면 밤새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 그러나 정서와 감정이 다른 사람끼리의 대화는 지루하여 쉽게 권태를 느낀다. 아니면 감정 전이가 이루어지지 않아 얘기가 곧 끊기게 마련이다. 요즘,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대화를 할 때, 세대차를 느낀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은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어느 정도 죽이 맞는가를 보면 서로의 취향이나 의식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마주 앉아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싫증나지 않는 말상대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에로의 갈림길에서 첫째 관문이 될 것이다.
선진 문명 사회에서는 자연환경의 보존이 잘 되어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또 생활력이 없는 노인들에 대한 복지대책이 완벽하여 물질적으로는 노구를 거기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은 아니다. 일거리를 잃은 노년에 말상대를 구하지 못하고 혼자 앉아 있어야 하는 고독의 아픔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라. 살아 있어도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의 행복이란‘어떤 대화 상대를 가졌느냐에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질적인 행복 추구의 교과서라 할 종교의 경전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였으니 여기서 묵상이란 결국 절대자와의 영교(靈交)가 밤낮으로 이루어질 때 즉, 현세적 표현을 빌리면 대화가 잘 이루어질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쌍방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공동의 관심사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내세나 천국 시민들의 공동 관심사는 어떤 것일까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내세에서는 권력이 가치 없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내세는 현세처럼 정치적으로 조직된 통치 체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내세에서는 황금도 가치 없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현세처럼 불완전한 육체를 지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재화의
필요가 없을 터이고, 따라서 내세는 부의 축적을 필요로 하는 경제 체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내세에서는 현세의 지식 역시 가치 없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현세의 과학, 현세의 문명 생활이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의 정치·권력·경제·사업·문명 등은 화제의 주된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주된 관심사일지 모른다. 가령, 천국 가까이엔 지옥이 있어 거기 있는 이들을 위하여 천국 시민은 밤낮 없이 눈물을 흘릴는지 모른다. 지옥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외면한 채 당장의 자기의 평안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일 리 없다. 천국에서는 이산(離散)의 괴로움은 없을 터이다. 그들은 지옥 불에 떨어진 죄인들과 동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원죄의 천벌을 받고 고생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봉사와 사랑을 베푸는 것은 베푸는 이에게 위로가 되겠기에, 베풀고자 하는 자를 위하여 죄인들은 항상 그들 곁에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주 받는 자와 위로 받는 자가 동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육신의 탈을 벗은 영체(靈 )에 있어서의 천국 생활과 지옥 생활은 인지(認知) 체계의 틀의 다름에서 오겠기에 말이다. 천국과 지옥을 3차원 공간으로 별도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게다. 수만 금을 가지고도 물욕(物慾)에 목말라 하는 자, 충분한 사회적 신분과 명예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더 큰 것을 탐내어 잠 못 이루는 자는 특별히 열악한 물질적 환경이 아니어도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저주받는 자란 남들을 저주하는 자요, 위로 받는 자란 결국 남들에게 위로를 베푸는 자일 것이다.
내세에서는 평화, 소망, 사랑, 연민 등이 주요 의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들의 화평을 위한 노력, 그것을 이뤄 내기 위한 우리들의 소망, 이웃들의 고난을 외면 못하는 사랑, 이런 것들은 내세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필요한 것일 터이다. 그것은 소망과 사랑은 베푸는 자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하라.’함도 그런 가운데 절대자와의 사이에 가고 오는 교감이 생겨서, 다시 말하면 대화의 마당이 이루어져서 신앙이 바로 서고 성숙되겠기 때문이다. 천국은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 아니요,‘영이 교유(交遊)하는 하나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절대자와의 영적 교유가 자유로워진 상태, 절대자와 공동 관심사가 설정된 상태, 그것은 구원이요, 영원한 생의 획득일시 분명하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영적 성장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기에 앞서 천국 시민과 똑같이 사유(思惟)하고,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정서적 동질성을 갖추기에 힘써야 할 일이다
***************************남한산성 풀벌레
오늘도 남한산성 오솔길을 혼자 오른다. 벌써 여러 해를 일과(日課)처럼 걷는다. 바위에 앉아 뭉개 구름과 함께 지내는 멍청한 하루가 좋아서다. 거여동 쪽 산자락의 연병장(練兵場)에서 훈련받는 사병들의 함성이 왼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내가 군사교육에 시달리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사십 년이 흘렀다. 지금도 똑 같은 일이 지겹게 반복되다니 인간사(人間事)는 백년을 자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생각을 바꿔 수 백년을 거슬러 병자호란 때의 졸병이 되어본다. 갑옷에 전립(戰笠)쓰고 창검 들고 전통(箭筒)메고 이 산 등성이 누비다가 춥고 배고프고 힘들면 두고 온 고향산천 부모형제 그려보았으리라. 오랑캐에게 백기(白旗)를 들던 한겨울 추위의 굴욕의 그 날엔 적진 군영(軍營)으로 내려간 임금님의 안위를 염려했을 것인가, 그 보다도 석 달간의 농성에 군량이 떨어져서 아침을 굶은 뱃속의 일이 더 다급했을 것인가.
세월 가니 오랑캐 군사도 물러가고 망국의 치욕도 잊혀졌다. 왕(王)도 가고 졸병도 떠났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어도 숲 속의 풀벌레는 변함없이 철 따라 운다. 숲 속은 축소된 지구촌이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남태평양 이스터섬에서, 또는 중동 예루살렘에서 어디서나 말도 많고 일도 많다. 모두가 생사를 거는 싸움이오 흥정이다. 풀벌레도 생존을 거는 흥정과 교섭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덤불마다 나무마다, 응달진 골짜기에서 또는 높다란 고개 위에서, 작자글 작자글 난리법석이다.
귀 기울이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록의 오월엔 갓 깨인 애벌레가 연초록 풀빛을 닮아 가녀린 소리로 사르륵사르륵 이슬 젖을 빤다. 한 여름엔 짙푸른 나뭇잎 닮아 굵어진 몸집에 힘이 넘치는 큰 소리로 찌르륵 찌르륵 짝을 찾아 야무지게 운다. 백로 지나고 서늘바람 불어 나무 잎새에 물색이 곱게 들고 볕에서도 힘이 빠지자 끼르륵 끼르륵 쉰 소리로 더욱 거칠게 울어댄다. 짐작컨대 아직도 짝을 못 만났으니 일생은 헛것이 되겠다 하리라. 내 씨알은 어찌되란 말이냐, 내 사랑 어서 오라 하리라. 생존을 걸고 풀벌레가 숲에서 우니 듣는 내 마음도 가야금 줄이 된다. 곁에 있던 이끼 낀 성벽만이 지나간 천년을 되돌아보는지 말없이 웃기만 한다.
성벽 앞에 앉아 새 소리 벗을 삼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치욕의 삼전도(三田渡) 벌판을 내려다본다. 십만의 오랑캐 병사가 묵었다는 진지(陣地)는 흔적도 없고 번화한 도시의 빌딩 숲이 장관을 이뤘다. 모두가 부질없다. 계절이 또 한번 바뀌어 짧은 가을 지나면 눈이 내린다. 흰눈이 덮인 산, 빙벽 밑에 잠든 우주, 싸움을 하던 병졸은 그 속으로 간 것일까 자취가 없다. 숨어버린 풀벌레가 혹시 그는 아닌가. 춘하추동 가고 오는 자연과 더불어 변화를 반복하는 세상사, 내년에도 풀벌레는 다시 찾아오려니와 백년인들 천년인들 어찌 안 오랴.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그를 만나러 오늘도 남한산성 오솔길을 혼자 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