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사상수훈에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의 심리상 남을 비판하는 일들을 잘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온 세상과 환경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환경은 다 상대적이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이 있습니다. 때로는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정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비판하는 그 이유로 또 너희가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은 돌아서 자기에게로 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비판하면 그 대목으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
주님은 비판하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다른 사람을 비판했을 때 그 비판하는 대목으로 너희 자신도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판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노’라는 말인데 그 뜻은 ‘정죄하다, 재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는지 알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돌아서 나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만일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너는 성격이 왜 그렇는가?’라고 했다면 언젠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판단하기를 ‘너는 성격이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성경예화) 너희 빈 축복이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여 전도하러 보낼 때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집에 머물거든 그 집에 축복기도하라 그 집을 복을 받을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너희 빈 복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오늘날에도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는데 그 사람이 복을 받겠지만 받을 그릇이 못 되면 너희 빈 복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헛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멘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그 축복이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판하면 그 비판이 나에게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의를 눈감고 정의를 외면하라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불법에도 용납하고 외면하라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대에도 만일 직장생활을 한다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사가 부하에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부하직원들은 상사를 뒤에서 험담하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죠. 세상이 대부분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만일 좀 약한 학생이 있으면 더 도와주고 또 전학와서 적응이 잘 안 된 학생들은 잘 안내를 해주고 해야 되는데 오히려 왕따를 시키고 폭언을 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일삼는 일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특히 편부모 혹은 좀 약점이 있다면 더 그렇게 괴롭히고 약점을 소문내는 그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악의 사악함을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도 언젠가 도로 돌려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아림은 ‘측량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잣대를 대고 측량을 하듯이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잣대로 옳은 잣대이면 모를까 순전히 자기 중심일 수가 있습니다. 잣대는 성경이 캐논입니다. 성경이 절대적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절대적 잣대를 가지고도 타인을 비판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타인의 허물이 있을 때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 약점을 더 보완해주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특히 교회생활에서 그렇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교회에서 말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말이 많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습니다. 특히 복음과 말씀을 많이 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남을 비하하고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6:10 끝에 보면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욕하는 자’라는 말이 이전 개혁성경에는 ‘후욕하는 자’ 즉 험담하고 비방하는 자를 말합니다. 남이 없을 때 욕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또는 악의적으로 남의 약점을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남을 비판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와서 주님의 말씀을 배워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서로 약점을 포용해주고 서로 도와주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좋은 교회는 성도들이 한 형제처럼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서로 북돋아 주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늘 서로 힘이 되어주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둘째,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타인을 돌보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교훈할 때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 눈 속에 티가 들어가면 그것을 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눈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같이 큰 나무를 기둥 위에 걸쳐서 그 위에 지붕을 올릴 때 사용하는 것을 들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철근콘크리트를 길게 만들어서 그 위에 지붕을 올립니다.
사람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갈 리가 없죠. 이 말씀은 좀 과장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그렇게 큰 죄가 우리 안에 있었고 우리는 그런 죄인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은 죄에 빠져서 심판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물과 피를 쏟아 주셔서 그 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단지 주님을 믿었을 뿐이지 주님의 혜택을 받아들였을 뿐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안에 그 들보 같은 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비판을 한다면 나는 다시 그 들보를 내 눈에 집어 넣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로 용서받았음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은 타인을 그렇게 정죄하지 않겠죠.
그래서 주님이 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처럼 제가 크고 인간이 어떤 존재임을 너는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이치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4절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빼지 않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5절 말씀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스라엘이 헬라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였습니다. 그 때 헬라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엄청 박해를 했습니다. 심지어 안티우쿠스 에피파네스 때에는 이스라엘 성전에 제우스 신을 세우고 절을 하게 했습니다. 이 때에 유대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헬라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국을 이룹니다. 그것이 마카비 혁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를 지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애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꼴보기 싫다고 산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그들은 에세네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제국의 군대와 타협을 했습니다. 적당하게 세상적으로 타협하고 권력도 누리고 종교도 지키려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입니다. 어떤 경우 세상과 타협을 하지 않고 산에도 올라가지 않고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뜻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출발은 이렇게 좋았습니다. 거룩하고 신앙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키는 좋은 신앙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월이 수백년 지나면서 퇴색이 되어 율법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거룩하게 유지를 하고 또 세상에서 존경받고 권세를 누렸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진리를 외치는 자들을 외면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고 외면하고 박해하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로마군인들에게 팔아넘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엄격한 신앙과 율법을 지킨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좀 약한 사람들 좀 흠이 있는 사람들을 아주 비판하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흠이 있고 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죄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흠을 그렇게 비판을 하고 빼야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다니는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약한 성도들을 비방하고 비판한다면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비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하고 믿겠죠. 그러면 나 같은 죄인도 살려주셨는데 주님은 다른 형제들도 구원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서로 약점을 도와주고 보완해주려고 애를 쓰겠죠. 사람들은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다 성인이 됩니까?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성장하고 변화가 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착오도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보완하고 도와야 합니다.
또한 대채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약점은 생각을 합니다. 즉 잣대로 엄격하게 다른 사람을 측량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부족함은 당연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철저히 엄격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좀 너그러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십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도 주님의 은총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신앙이 성숙해 감에 따라 자신을 철저히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 합당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또 믿음과 말씀을 따라 살도록 그 발자취를 따를 것입니다. 아멘
그것이 제자도입니다. 아멘 내가 본을 보이고 앞서갈 때 사람들이 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변화되고 고침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