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의식의 깨어남’이란 말에 대한 음미
생사(生死)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지만,
오늘은 몸의 측면에서 생사를 임미해 보기로 한다.
육체의 생(生)은 없던 것의 생겨남 인데, 있던 원자 분자의 이합집산(離合集散) 중
이합(離合)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생(生)이라 보기 어렵다.
이미 있던 것(원자)에서 있던 것의 모듬(조건 따른)에 의한 변형이라 함이 더 적합해 보인다.
육체의 죽음은 몸을 이루고 있던 원자 분자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 활동 중
어느 임계시점에서의 이합집산 중 집산(集散)의 현상이라는 모습에 붙여 놓은 이름이 사(死)이다.
죽음 역시 있던 것의 완전 사라짐이 아닌 원자 분자로의 변형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진정한 죽음이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 눈에 어떤 이름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그것의 크기나 형태가 변했다고
그것을 죽었다고 정의 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매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몸의 세포만 보더라도 우리 눈에 안보여 그렇지 미세한 세계에서는
왕성한 생멸이 거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느 크기가 얼마마한 크기로 변형되는 시점을 변형으로 본다는
그런 기준도 경계선도 있지 않다.
막연하게 눈에 보이다 안 보이면 죽은 게 되고, 뻔히 죽고 살아도 우리 눈에 안보이면
그냥 무시하고 살아 있다고 하니, 현미경이 없던 시절이나 그런 마이크로 세계의 촬영이
불가능한 시대에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을 지라도 지금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육체의 죽음이란 인간의 눈으로 인식가능 해진 집산(集散)현상에 붙인
임시적 이름이라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게 된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합(離合)으로 조건이 맞아 모인 것은
반드시 집산(集散)으로 흩어지는데, 이때 이합집산(離合集散)하게 한 것은
몸 스스로가 아닌 단일의식의 자기수단을 이용한 작용이며
또한 단일의식의 깨어남(자각) 이었다.
그러므로 생사(生死)는 태어남과 죽음이라기보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의식의 깨어남이다.
태어났다는 깨어남, 죽었다는 깨어남, 그냥 온통 생사 무관하게 깨어남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깨어남이라는 표현을 듣게 되는 것 같다.
예전 강독을 듣기 전에는 죽음은 죽음이지 깨어남은 무슨 소리지?
하면서 잠깐 멈칫하는 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죽음이 깨어남이란 말이 자연스런 말로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나를 개인적 동기로 볼 때는 나의 몸이 사라지는 것만 보였기에
죽음은 곧 몸의 사라짐이었는데,
단일의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내 몸을 보니, 그저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깨어남이었네!!~
이렇게 보는 입장 차이 하나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여주니,
이런 걸 소위 '연금술'이라고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연금술 아닌 연금술'을 가리켜 주신 밥통 스피커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