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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맛타 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3)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중에서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 강의하고 있습니다.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아눗사띠(anussati)에서 사띠(sati)는 ‘거듭해서 상기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사띠를 3가지로 정리합니다.
3가지 사띠
① 선업(보시·지계·수행)을 지을 때 항상 들어가는 사띠가 있습니다. 선업 지을 때 들어가는 사띠. 마음부수 공부할 때 배운, 선업 지을 때마다 항상 들어가는 마음부수. 19개 중의 하나인 사띠라는 마음부수.
② 사띠에 기억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기억하는 거, 암기하는 거, 아난다 존자를 부처님이 사띠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사띠는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삼장을 다 기억하셨죠. 부처님이 설하신 법문을 다 암기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사띠빳타나 수행할 때의 사띠가 있습니다. 사띠빳타나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인데 사띠를 쌓아서, 사띠를 엄청 커지게 만드는 수행입니다. 그때의 사띠가 있습니다. 3가지 사띠가 다릅니다. 보통 사띠하라, 사띠하라고 하는데 그때 사띠하라는 건 아마도 “선업을 지어라. 좋은 업을 지어라. 잠시라도 좋은 업을 지어라”라는 뜻이겠죠.
사띠빳타나 수행할 때의 사띠, 위빳사나 수행할 때의 사띠는, 업을 짓지 않는 수행이 사띠입니다. 좋은 업도 짓지 않고, 안 좋은 업은 당연히 안 짓고, 업을 짓지 않는 사띠가 사띠빳타나 수행에서의 사띠입니다.* 업을 안 지어야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그만두겠죠. 그래서 사띠빳타나 수행할 때의 사띠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업을 짓지 않는 사띠입니다. 그 외의 두 가지 사띠는 좋은 업을 짓는 사띠입니다. 좋은 생에 태어나고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는, 거기서 또 하던 대로 늙고 병들고 죽게 하는 사띠입니다.
사띠빳타나 할 때 사띠는 그런 걸 만들지 않는 사띠. 그러니까 전혀 성질이 다릅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띠입니다. 사띠빳타나 수행의 사띠는 한 번도 우리가 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차원의 정신적인 활동입니다.
사마타 수행과 전혀 결이 다릅니다. 비슷한 것은 노력과 집중력, 집중력이 들어가는 것, 사마디가 필요하죠. 무슨 일이든지 사마디가 필요합니다.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세간에서 공부할 때도 그렇고 세간에서 일을 할 때도 그렇고 달리기를 할 때도 마음을 쓸 때도 집중력과 노력을 쓰죠. 사띠빳타나 수행할 때의 주 활동은 사마타 수행할 때와 다릅니다. 다르게 힘을 쓰는 거죠.
우빠사마눗사띠 = 고요함(열반)을 거듭 상기함
그래서 사띠는 이렇게 3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지금 말하는 아눗사띠는 기억하다는 사띠입니다. 거듭 거듭해서 상기하는 것, 거듭 상기하면 좋은 것이 10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지금 일곱 번째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 하고 있습니다. 우빠사마는 고요함, 고요함이라는 게 완전히 소진된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소진된 상태, 재도 남기지 않고 다 타버린 상태, 우빠사마입니다. 보통은 타도 재가 남죠.
북한 위쪽 만주 옆에 연해주가 있죠. 제가 듣기로 연해주에 사는 한민족의 집은 온돌이 방바닥만이 아니라 벽까지 온돌이랍니다. 벽도 따뜻한 거죠. 온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면 재가 남지 않는답니다. 장작으로 불을 떼면 하면 재가 남는데, 그 북쪽 나라는 어떻게 재도 남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재도 남지 않고 다 태운 상태가 우빠사마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우리가 아는 행복은 웨다이따 수카(vedayita sukha)이죠. 느낌으로 아는 수카, 편안하고 기분 좋은데, 기분 좋으면 들뜸이 있습니다. 들뜨고 흡족하고 뿌듯하고 고요하고, 그런 상태와 비슷하지만 그런 느낌이 완전히 없는 상태를 우빠사마라고 합니다. 그런 건 열반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빠사마눗사띠는 우빠사마(upasama. 고요함. = 열반)를 상기하는 거죠.
근데 열반을 보지 못한 범부가 열반을 상기하기가 어려우니까, “열반은 이런 것이다.” 물건을 사기 전에 광고를 해서 고객을 유혹하는 것처럼, 열반에 대해 알림을 하려고 하는데 사족(蛇足)이죠. 맛을 봐야 맛을 아는데 맛을 보지도 않고 이걸 사게 하려고 열반을 설명하는 겁니다.
우리는 느낌만 행복이라고 아는데 느낌이 없는 행복이 좋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색계 존재들이 마음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살면서 행복한 것, 그리고 아산냐삿따부미(asaññasatta-bhūmi. 무상천(無想天))에 사는 정신은 없고 물질만 있는 세상에 사는 범천들이 이런 행복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느낌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인 열반도 좋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는 행복은 그냥 느낌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주석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라한과 아나함의 마음
지난 번 강의 시간에 아라한과 아나함의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려다가 시간이 다 됐는데, 마음이 줄면 줄수록 편하다는 거죠. 마음의 개수가 줄면 편합니다. 필요없는 마음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데 줄이면 편합니다. 여행 갈 때 짐이 적으면 편하죠. 짐이 가벼우면 편한 것처럼 마음의 개수가 적으면 훨씬 편합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아나함이 가지는 마음의 개수를 봅시다. (대림 스님·각묵 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446쪽, 초기불전연구원, “도표 4.5 개인과 세상과 마음들” 참조)
아나함은 로바 8개 중에서 수다원이 되면서 사견과 함께하는 마음 4개가 사라졌죠. 4개 사라졌습니다. 4개 사라지고 사견있는 탐욕 마음 4개가 남아 있죠.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를 믿는 탐욕 4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아나함이 되면 그 4개에서 5욕락(kāma 까마)에 대한 탐욕이 완전히 사라지죠. 그 4개 안에서 감각적인 행복을 찾으려는 탐욕이 없어집니다.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려는 탐욕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성냄 2개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의심은 수다원이 될 때 이미 없어졌고, 그다음 들뜸이 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나함에게 남아 있는 불선업 마음은 다섯 개죠. 불선심(不善心) 12개 중에서 5개가 남아 있으니까. 색계와 무색계의 생을 원하는 탐욕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탐욕 8개 중에서 생을 원하는 탐욕 4개가 남아 있습니다. 아나함이 색계/무색계에는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즉 범천의 생을 원합니다. 아나함이 욕계는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욕계는 아주 혐오합니다. 전혀 좋아하지 않죠. 그리고 성냄이 완전히 없어졌고 들뜸이 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나함은 불선심이 5개가 남아있고,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에서 17개, 욕계 아름다운 마음 8개, 인간인 아나함이면 지혜와 함께하는 욕계 과보 마음 1개, 색계 선 마음 5개, 무색계 선 마음 4개, 그리고 아나함과의 마음 1개가 있습니다. 아나함도의 마음은 한 번 일어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나함이 멸진정에 들 때에는 불선심, 마하꾸살라도 없고, 색계·무색계 선정 마음도 없고, 아나함과의 마음도 없이 멸진정에 듭니다.
아라한이 되면 마음의 개수가 더 적어져서, 아나함에 있는 불선심 5개도 완전히 없어집니다. 마하꾸살라(mahā-kusala) 대신 마하끼리야(mahā-kiriya)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루빠끼리야(rūpa-kiriya), 아루빠끼리야(arūpa-kiriya), 아라한과의 마음이 있겠죠.
인간이나 천상계에 있는 존재들도 안전하지 않지 않습니까? 안전하지 않아서 불쌍하지 않은 존재, 가련하지 않은 존재는 아라한밖에 없죠. 완전히 안전해지는 존재입니다. 더러운 오물이 없는 거죠. 번뇌가 없는 거죠. 불선심이 없다는 것은 오물이 묻어있지 않다는 뜻이죠. 가장 깨끗하고 가장 가볍고 가장 안전한 존재, 할 일을 다 마친 존재.
다시 주석서의 내용으로 돌아오면, 우리 몸은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업과 기후와 마음과 그리고 먹는 음식 4가지 조건에 의해서 계속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계속 늙어 가는데 인간 각자가 짓는 업에 따라서 계속 새롭게 좀 다르게 좀 다르게 늙어가는 거죠. 주름이 생겨도 좀 다르게 생기고, 아무리 젊어지려 해도 계속 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는데, 조금 다르게 업과 기후와 마음과 음식에 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주름이 생기는 거죠. 업은 바꿀 수가 없고, 기후는 난방을 하고 에어컨도 틀어서 바꿀 수 있습니다. 미얀마 같은 나라는 진짜 기후를 있는 그대로 다 몸으로 다 견디면서 살아야 되죠. 몸이 건강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아주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기후를 잘 변환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구에 아주 악영향을 미치고 있죠.
기후에 의해서 몸이 바뀝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해서도 몸이 바뀌죠. 음식에 의해서도 몸이 바뀝니다. 우리의 몸이 이렇게 계속 바뀌는데, 니로다사마빳띠(nirodha-samāpatti. 멸진정)인 상태에서는 마음에 의해 몸이 변하는 것이 멈춥니다. 과의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과의 선정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몸이 있겠죠. 멸진정 상태에서는 이런 선정 마음에 의해 생기는 몸이 생기지 않습니다. 멸진정에 들어 있는 동안에는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업에서 생긴 물질, 기후에서 생긴 물질, 음식에서 생긴 물질만 생겨나 소진되며 7일 동안 몸이 유지됩니다.
그 물질의 작용이 다 멈췄을 때, 산띠 수카(santi sukha), 열반의 행복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책에 나옵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산띠 수카, 열반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관념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이것은 관념이죠.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할 때 '아까사(ākāsa)'라는 허공이라는 텅 빈 관념 대상에 집중해서, 우뻭카와 집중 선정의 요소 두 가지를 가진 선정을 얻습니다. 그때 그 정도의 “텅 빔,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죠. 우리가 아는 게 그 정도입니다. 최대로 아는 것, 욕계 중생들이 아는 것은 그보다도 더 못한 “없음. 텅 빔”, 이걸 아는데, 범천들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관념의 “허공, 텅 빔”을 알죠. 근데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열반에서 없다는 것은 그런 관념적인 '없다'가 아닙니다.
각자 스스로 알 수 있는 '열반'
그리고 또 열반이란 '많은 대중이 공유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계를 같이 공유하지 않습니까? 지구라는 이 땅덩이 위에서 같이 공유하면서 살죠. 이 지구라는 세계, 인간계 또는 은하계, 이런 세상 인간계 천상계 범천계라는 이런 세상처럼, 하나의 세계, 공간 이것을 같이 공유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열반이라는 것을 한반도라는 땅덩어리 위에 우리가 같이 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이 땅 위에 같이 공유하는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열반은 그런 게 아닙니다.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열반을 공유할 수가 없죠. 열반을 공유할 수 있으면 열반을 가져와서 공유하겠죠. 공유할 수 있었으면 부처님 거 줬겠지. 그렇게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기의 열반만 자기가 자기 안에 있으니까, 각자의 열반을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야(ariya. 성자)라는 고귀한 존재가 자기 몸이 분명하게 있을 때 자신이 열반을 대상으로 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팔라 사마빳띠(phala-samāpatti)라는 것은 과의 선정이고 열반을 대상으로 아는 것을 말하고, 열반을 보면서 선정에 들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과의 선정입니다. 그러니까 아리아들만, 열반을 본 각자 개개인들만 몸이 살아있을 때 각자가 본 열반을 각자가 볼 수 있습니다. 모닥불을 피워서 같이 쳐다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열반이 아니랍니다.
같이 법당에서 서른 명이 수행해도 각자가 보고 있는 게 다르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우리 때는 한 교실에 60명이 공부했는데 성적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는데 차이가 나죠. 법당에 앉아 있는 수행자들도 각자 다릅니다. 학교랑 비슷한 거죠. 속을 알 수가 없으니 학교는 성적표가 나오니까 “쟤가 나보다 잘하는구나.” 아는데 법당에 앉아 있는 일들은 진짜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열반만 각자 스스로 보고 과의 선정이 듭니다. 과의 선정에 들었을 때 열반을 보고 있을 때, 마음이 정말 행복하다. 그래서 테라(thera. 장로)와 테리(therī. 장로니), 비구, 비구니들이 자기가 본 황금의 나라 열반(<바사띠까> 책에 이렇게 쓰여 있음)에 들어갔다 나온 뒤에 오도송(우다나udāna)을 지었답니다. 너무 좋은 것을 보고 감상문, 각자가 본 열반에 대해서 각자의 오도송을 읊었다는 겁니다. 물질과 정신을 아주 흔쾌히, 거지발싸개 버리듯이 버려서, 아라한이 된 존재들은 물질과 정신을 버린 모습을, 자기가 버린 물질과 정신을 생각하면서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범부들은 심히 부끄러워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을 정말 미련 없이 흔쾌히 버리는 아라한을 보면서 물질과 정신에 묶여사는 범부들은 매우 부끄러워한답니다. 아주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물질과 정신에 묶여서 사는 게 부끄럽습니까? 저는 부끄럽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주]
* <깨달음의 구성요소 경>(A4:236)에는 칠각지가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즉, 출세간 도의 지혜와 번뇌가 함께하지 않는 위빳사나 지혜가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에 해당한다.
* 2023-06-14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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