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1요한 12,18-21 요한 1,1-18
착각이면 어떤가? 긍정적이라면.
‘인간의 두 얼굴’이란 EBS 다큐에서 ‘긍정적 착각’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착각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지 알지만 사실 긍정적 착각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되는 존재기 때문에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일들이 현실화 됩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야구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준결승전인 일본전에서 한국은 8회 말 터진 이승엽 선수의 극적인 역전 2점 홈런으로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홈런을 치기까지 극심한 슬럼프를 겪던 이승엽 선수는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머릿속에 자신이 홈런을 치고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라운드를 도는 상상을 했다.”
사실 우리는 부정적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긍정적인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만 믿으면 이 세상에서 물 위도 걸을 수 있다는 착각이 결국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은 착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이면 어떻습니까?
인간은 착각이 현실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제작진은 긍정적 착각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초등학생 4학년 150명을 대상으로 긍정적 착각도를 측정한 후, 긍정적 착각도가 가장 높은 아이들 5명과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 5명을 데리고 한 가지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각 5명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준비된 종이상자를 20분 동안 되도록 높이 쌓아야 한다.’는 간단한(?) 임무가 그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이 종이상자 쌓기는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작진이 아이들 모르게 계속해서 상자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금방 포기할 줄 알았던 아이들. 그런데 놀랍게도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미션 수행 도중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상자가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최선을 다해 상자를 쌓았습니다.
반면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은 똑같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자 쌓기 결과,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7층을 쌓은 반면, 평균인 아이들은 2층을 쌓는데 그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험 후 아이들의 인터뷰였습니다.
이미 쌓아 놓은 게 다 넘어졌다는 것이 너무 아깝지 않았냐는 질문에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시 쌓으면 되잖아요!”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실험외적인 요인에 대한 원망이나
불안 등에 대한 어떤 불신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아이들이 보여준 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협조,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잘 해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보여준 긍정적 착각이었습니다.
미국 UCLA대 셀리 테일러 교수는 ‘긍정적 착각이 동기 부여에 매우 효과적이며 장기적으로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생 때부터 등수를 먹이는 경쟁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아이들에게 지기 때문에 생각이 부정적으로 될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는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상대가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을 반드시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는 지나친 의무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밝혀내어 사람들 간의 사이를 벌려놓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착각들은 그냥 묻어두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굳이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 한 가지가 나옵니다.
바로 초대 교회 때 성행했던 종말 임박설입니다.
바오로도 그렇고 오늘 요한도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올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아마도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한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지금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파들까지 단 하루도
그리스도의 적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초대교회의 재림임박설에 대해 그렇게 착각하고 살도록 그대로 두었던 이유는 그런 착각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심판이 곧 닥쳐온다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의 교회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커다란 성당을 짓는데 돈을 쓰기 보다는 조립식 건물에 살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더 많이 돕겠고,
죄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또한 당장 오늘이 될 지도 모르는 심판 때문에 회개하여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하느님도 굳이 바로잡아 주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이 진짜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 강부자씨가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해 남편 이묵원씨의 외도를 알고도 모른 척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편이 나가서 사흘씩이나 어떤 여자하고 호텔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여자가 누군지 알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강부자씨는 “그는 방송국에 나랑 있다가도 다섯 시만 되면 그 여자와 사라지더라.
다 알았는데 이 남자와 더 이상 안 살 거면 떠들어도 된다.
하지만 난 이 남자와 끝까지 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말 안했다.
그 때가 우리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예를 들어 쥐를 쫓아갈 때 막다른 골목에 쥐가 부딪치면 노려보며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줘야하는데 남편이 바람피웠다고 몰아세우면 안 된다.
그냥 넘어가 줘야한다.
어차피 아들이 있는데 자기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지 뭐하겠냐” 고 넘겨 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강부자씨의 얼굴을 보면 평상시에도 근심이 많고 매우 슬퍼 보입니다.
아마도 많이 참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9명의 남자에게 대시를 받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강부자씨가 그 9명 중 선택한 한 명이 이묵원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외도를 했다면 아기를 키우는 아내 입장에서는 더 분통이 터졌을 터인데도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미 지긋한 나이가 든 부부로써 서로를 위해주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묵원씨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느껴서 가정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
강부자씨는 이묵원씨가 한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주면서 이묵원씨가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착각이라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요한 1,1-18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세월은 이토록 속절없이, 그리고 덧없이 흐르고 흘러, 또다시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튼실하고 뿌듯한 결실이 아니라 하찮고 초라한 수확 앞에 큰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듯 가슴이 시린 연말입니다.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하고 참담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온몸으로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강력한 대재앙 앞에서 우리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나약하고 부실한 존재라는 것. 때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제한적이라는 것.
이토록 암담한 시기, 길고도 지루한 대재앙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절실한 노력이 있습니다.
매일 하느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것. 부단히 그분의 크신 자비를 청하는 것.
하루하루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길고 긴 시련의 터널을 지나는 오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성경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 빕니다.”
(데살로니카 1서 5장 23절)
하늘의 성인성녀들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환난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완전하게 흠없이 지켜나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시편 작가의 한 말씀은 또 제 마음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젊은 시절의 허물과 죄악을 다시는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시편 24)
지난 한 해 천천히 되돌아보니 온통 잿빛입니다. 속 빈 강정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말로는 만리장성이라도 쌓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한 것 없어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꼼꼼히 돌아보니 주님의 은총으로 충만했던 한해였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보십시오. 그럭저럭 살아지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불안불안하지만 견뎌내다 보면 그럭저럭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 혹독한 시절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갈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당신의 큰 자비와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큰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이 한해와 작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사람이었음에>
2022. 12. 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요한 1,1-18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그저 사람이었음에>
사람으로 났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보이는 겉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도
오롯한 사람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 아닌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 아닌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일 수 없는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일 수 없는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사람이고
그래서 다시 사람이고
그래서 새로 사람입니다
아직은 사람이게 하신
다시 사람이게 하신
새로 사람이게 하신
하느님과 벗님들과 나에게
정성스럽게 마음 모아
한해 마무리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