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의 별
이용악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면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차의 지붕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시집 『이용악집』, 1949)
[어휘풀이]
-쟈무스 : 중국의 쑹화강(松花江) 상류, 러시아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도시
-초담배 : 잎담배
-뽈가 : 폴카(polka), 보헤미안의 경쾌한 무곡(舞曲)
-슬라브 : 슬라브 민족, 러시아인, 불가리아인, 체코인 등
[작품해설]
해방 이전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주된 제재로 하여 예술성 높은 다수의 작품을 형상화해 내었던 이용악이 해방 이후 갖게 된 관심사는 당연히 고국을 찾아 돌아오는 귀향 유이민들의 삶이었다. 이 시는 바로 해방을 맞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오는 귀향 유이민의 모습을 통해 해방기의 또 다른 비애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화자는 그들 유이민 중 한 사람이다.
유이민들 중에는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 남도 사람들과’ 시적 자아로 형상화된 ‘나라에 기븐 일 많아 / 울디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등 다양한 삶들이 있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제대로 된 객실을 얻지 못하고 고작 화물 열차의 지붕 위에 드러누워 서울로 향한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밤하는의 수많은 별들이 떠 있다. 그 많은 별들만큼이나 많은 간난(艱難)과 고초(苦楚)를 겪고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헐벗은’ 그들의 가슴을 달래 줄 어떠한 미래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내사 서울이 그리워 /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가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이 여행은 앞으로 전개될 해방 정국의 험난한 파고를 예견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유랑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 모두는 서로서로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을나누어 먹으며 동질성을 확인하지만,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 열차의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는 모두의 신세는 한결같이 처량하고 애처로울 뿐이다. 이용악의 시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38)에서 ‘죄인처럼 수그리고’ 떠났던 그 ‘설움 많은 이민 열차의 흐린 창으로 /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은 여전하고, 고향을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식민지 치하거나 해방된 조국 하늘 아랫니거나, 이들 유이민들의 삶은 헐벗기는 마찬가지이다.
해방이 되어 조국이 환희에 잠겨 떠들썩할수록 그들의 비애는 상대적으로 크지만, 시적 화자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차마 울지를 못한다. 오직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맛보고 점령군으로서 입성하는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 슬라브의 늙은 병정’뿐이다. 그들 유이민 모두는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하나씩 찾아보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해방 조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시는 이처럼 어둠과 빛, 유랑과 귀환의 이미지의 대비와, 수미상관식의 구조에 의한 시상(詩想)의 적절한 배치, 그러면서도 흥분하지 않는 감정의 절제를 통해, 해방의 감격 뒤에 놓여 있는 유이민들의 비애를 탁월하게 형상화란 해방기의 수작(秀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上智)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 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 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 1, 1949),
『이용악시선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첫댓글 좋은 시 잘 감상하고 이해했습니다
답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날마다 발전하는 글쓰기 공부 되시길 소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