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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세워진 백범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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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기념관 1층에 있는 백범석상의 정면. 청춘을 나라 독립에 다 바치고 늙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또 다시 분단의 아픔을 보고 통탄하던 백범김구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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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상의 옆모습.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은 언제 이뤄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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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에 백범의 뜻을 기리는 시민 한 분이 한동안 묵념을 드리며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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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의 무덤에 시들어가는 국화꽃다발이 놓여있다.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 때문에 아직도 편한 영면의 잠을 못들고 있을 듯 하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 말 1876년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맺던 해에 태어나 1949년 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동포의 총탄에 쓰러진 한민족의 지도자로 온 생을 바쳤던 백범김구선생 !
나라가 외세들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의 야욕에 발버둥치다가 결국 조선이 망하는 것을 보고,
그는 오랜 방황을 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는 혼자 잘사는 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일제가 병합해버린 내조국 조선땅을 건지기 위해 남의 땅 중국에서 하루 하루 끼니를 거르면서도
임시정부를 꾸리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길이 조선민족의 내일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시절과 장년을 모두 상해와 중경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보내며 여러차례 암살의 고비를 넘기고,
노인이 다 된 뒤에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본국과 해외 동포들의 성금으로 근근히 꾸려가던 광복군이 조국해방을 위하여
피나는 군사훈련까지 하였지만 그가 이끌던 광복군은 일본과 전투 한 번 못해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에 무조건 항복하게 된 상황이 너무도 야속했다.
광복군이 전투에 참여했었더라면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따로 정부를 세우는 민족의 분단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당당히 연합군의 일원으로 편성은 되었으나, 광복군은 전투준비를 다하고도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탓에,
남과 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점하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며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위해 청춘을 다 바쳐 이룩한 광복군의 노력과,
그동안 일본의 요인 암살로 이룩했던 존재감도 다 허사가되고,
민족의 피나는 성원의 결과물인 광복군이 갖고 있던 무기도 다 내려놓고,
그들은 그냥 빈몸으로 해방된 나라의 일개 백성으로 돌아와야 했고,
조국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범은 분단되어가는 한민족이 사상이 아닌 민족으로 다시 하나로 합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으나,
끝내 분단되어가는 남북을 막지 못하였고, 더구나 동족의 총탄에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는 언제나 민족의 가슴속에 남아 통일의 밑걸음이 될 것이고,
통일의 그날이 오면 또 다시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언제 통일이 현실 될지 알 수 없는 현실이지만,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과 그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우리 민족의 앞에 실현되기를 고대하여 본다.
한민족 통일의 필연성은 우리가 5000년의 멀고 먼 세월동안 거대한 중국의 곁에 있으면서도,
한민족으로서 한 나라와 한 문화로 살아왔기 때문이며,
지정학적으로 통일되지 않고 분단된 상태로는 이웃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그들의 호시탐탐 야욕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선생의 무덤은 별 장식도 없고, 크기도 일반인의 무덤 크기지만
그러나 그의 무덤가에는 한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꽃을 바치고
선생의 업적을 그리고 있다.
마치 백범이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을 실현해달라는 듯
묵념을 올리는 한 참배자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으면서 기자도 그런 마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