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용(龍)문화와 상징
2002년2월 북경의 수도비행장이 개장하는데 이방대한 건축물은 하늘에서 보면 용의 형상이다.
영국의 건축가가 설계했는데 중국의 선호색인 금색 홍색을 최대한 사용하였다.
중국인의 용문화는 대단하여 비약과 약동 존귀를 강조하는데 행사나 생활에서 용은 중국인에 필수적 동반자이다.
신비와 역량이 전설적 용의 특징으로 일종의 문화부호인데 용의 형상은 이상적 생존상태로 뿔은 사직과 장수를 매를 잡고있는 발은 용맹을 꼬리는 번성을 상징한다.
용은 허구의 동물로 수천년간 신비의 기세를 갖는데 한자가 오천년간의 상형 표의 문자로 상대갑골과 금문에 길상의 동물로 등장하는데 대만학자 나지량은 갑골과 상대의 옥룡형태를 대조하여 양자간의 일치성을 발견한다.
갑골문에는 용자의 표현이 70여종인데모두 동물의 형태로 형상은 다양하고 다리가 있고 입이크다.
설문해자에는 고인의 글자를 만들때 그림으로 도형을 그렸다. 하는데 이후 형체를 필획상 곡절로 변화 시킨다.
북방의 음산산맥에는 원고시대 구석기시대의 암화가 수만개가 있는데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 그렸고 암화를 그린 목적은 고난의 생활조건에서 거대한 정력과 열정을 투입한 이유는 예술과 무술의 분리가 안된 상태에서 원시무술의 흔적이 남아있다.
암화의 목적은 자연현상과 귀신을 막기 위한 저주 노래 무도 법기등을 통해 공제방법으로 사용한다.
암화중 가장 많은것은 동물로 인류의 숭배대상은 삼계단을 거치는데 최원시적 상태는 자연경외와 공포를 느끼는데 무술은 동물을 매개로 인간과 신을 연결한다.
강렬한 종교심리는 각화시 동물형상을 가공하여 신성을 강조하는데 예술과 무술의 혼연일체의 현상을 나타낸다.
심령으로 신앙과 관념을 만들어 낸다.
12000년전 지구의 최후의 빙하기를 거치고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돌입한다.
이시기에 선민들은 도기를 만들고 도안을 그리는데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량의 동물도안을 그린다.
구석기시대에 비해 색상도안으로 변하여 목적은 종교함의를 포함하는데 용의 추형이 형성된다.
인류의 모든문명은 대하유역으로 평탄 비옥한 위하 양안이 중국문명의 발상지가 된다.
7천년전 채도문화를 가진 선민들이 모이는데 1953년봄 서안동교의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시골과 도편을 발굴하는데 건축유지와 완정한 채도를 발견한다.
이거주지에서발견된 도기는 기하형과 동물형상의 무늬가 나타나는데 1921년 하남의 면지현 앙소촌의 도기문식과 동일유형으로 반파유형유지라 한다.
반파유지 도기상 가장많이 출현하는 것은 물고기도형으로 어문은 사실 추상적으로 생동정채롭다.
수백건의 그물이 출토되는데 정미한 뼈를 이용한 그물과 낚시도구이다.
1955년 봄 반파거주지에서 도관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장구로서 어린이의 시체를 담는데 관의 표면에는 인면어문이 그려져 신비하고 의미심장하였다.
이관의 문양은 어류 토템숭배를 나타내고 옹관장의 종교적 특성을 짐작한다.
반파에서 100여공리의 백수령유지에서 마늘모양의 물병이 출토되는데 물고기의 모호한 도형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용무늬이다.
위하유역의 원용문은 현실중 생존하는 현실동물을 물고기 형태로 모사한다.
이는 동물숭배의 산물로 신과 인간사이의 소식과 신분의 전달이고 물고기의 초인적 능력을 반영하는데 수천년후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황하유역의 용은 용문을 뛰어넘는데 용으로 화한다는 전설이 생긴다.
전통문화중 물고기와 용은 호환되는데 1987년 복양시 장하변에서 고묘를 수중에서 발견하는데 무덤에서 용호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1.7미로 후세의 용형상과 비슷했다.
발견된 도기로 감정결과 6천년전의 유물로 판명되어 무사의 묘로 추정한다.
한학자는 악어로 보는데 악어에서 용이 연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한다.
이지역은 과학분석을 통해 아열대기후로 판명된다.
토양과 많이 발견된 조개껍질로 분석하여 결론을 내렸다.
악어와 공룡은 동시대에 생존했고 수명은 150년에 이른다.
장하 이서의 분하유역은 원룡문이 많은데 1908년 금석학자 나진옥은 소둔촌이 은허임을 고증하였고 갑골을 변별하여 1928-1936년 은허발굴이 이루어져 15차의 과학적 발굴을 한다.
좌전에서 수차언급하는 하허가 존재하는지를 찾기위해 1950년대 고고학자들이 고찰을 하는데 섬서 양분현 도사촌일대에서 유지를 발견하여 좌전의 기록은 하허의 위치를 산서성 남부 분하이동으로 보는데 지금의 산서양분지역이다.
1978년 수년간의 발굴이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도사유지는 4000-4600년전으로 추측하는데 1981년 완정된 대묘를 발굴하는데 반룡문의 도반을 발견한다.
도사유지의 5개묘에서 용반을 발굴하고 주사로 채회한 반룡도안을 확인한다.
도안중 용신은 뱀처럼 굽어지고 생활용품이 아닌 도기제작후 표면에 채회한 흔적을 발견하는데 제사진설용으로 판단한다.
일부학자는 고대의 社神이라 주장하고 악어와 뱀이 결합된 형상으로 본다.
이용은 잎에 나뭇잎을 물고있어 고대의 사는 나무를 심는 신으로 사수의 부호로 보는데 고대문헌에는 지역마다 나무성장의 차이를 토지신의 재량으로 본다.
사직은 국가의 상징으로 변하는데 고대국가 제사중 사와 직을 가장 중시하는데 사는 토지신이고 직은 곡신이다.
1958년 감숙 조하유역 마가요문화 유지에서 5500년전의 채도병을 발견하는데 채도로 신비한 생물형상으로 머리는 원형 억굴은 인간과 비슷하고 두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큰입은 열고 치아는 노출되는데 경부는 구부린문양으로 복부는 망상화문으로 마가요문화의 부가문유지중 비슷한 병이 다시 발견되어 도룡룡 형상으로 반복 출현하여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보이고 마가요이후는 선와문으로 변한다.
선와문의 표현은 황하유역의 호수 감소로 황하에 진출후 선와문이 발전한다.
원시인들은 관찰력이 세밀하고 물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는다.
마가요문화는 진귀한 채도 예술품을 다량 남기는데 채도상의 문식은 현란하다.
세밀한 선조와 선와상 화문이 채도문식의 주제로서 흐르는 물의 묘사와 찬미의 표현이다.
급하게 굽이치는 유수는 선민들의 가장중요한 원소가 되고 영감의 래원이다.
병에그려진 그림은 제사시 신령과 구통하는 용으로 판단하는데 황하 상유는 도룡용의 주요서식지로 물속에서 광선과 소리를 내고 야간에만 밖으로 나와 먹이를 찾아 신체색이 환경에 따라 변하므로 강한 힘과 삼년간 먹이없이도 살 수 있어 신비한 숭배대상이 된다.
태호유역에서는 원용문이 옥기상 출현하는데 1986년 절강 여요현 병요진에서 양저문화유지의 묘장군을 발견하는데 수많은 옥기를 발견하고 그중 옥월은 나무자루는 부패되고 옥은 완정한데 고대 옥월은 무기에서 제사용으로 군사 권력을 상징한다.
그도안이 기괴한데 하부는 야수의 얼굴이고 상부는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데 신인수면문이라 명하는데 같은 문식이 옥종상에도 나타난다.
이옥종은 체량이 6.5근으로 8면에 조각이 있는데 신인수면의 도안이 그려져 있다.
이는 무사용 통천례용으로 보는데 일년후 5공리의 요산유지에서 제단과 묘가 같이있는 유지를 발굴하는데 팔찌형 옥기를 발견하여 상면에 4개의 수면문이 있고 옥기전체는 용의 형상으로 용수촉이라 명한다.
자세히 관찰하니 수촉상 수면문과 옥종 옥월상 수면문은 일치하여 고양이류 동물로 추측하는데 호랑이 숭배로 보인다.
전국시기 무석 홍산대묘에서 발견된 전국 원시청자는 청동기의 조형을 모방하는데 부근의 요지쇄편에서 백여종의 호문을 발견했다.
무사는 호랑이를 통해 통천하여 천지지간을 왕복한다.
종교의식중 용의 공능과 상통하여 옥종상의 호문은 태호유역의 원룡문이다.
태호유역의 양저문화는 남북을 바라보는데 동북의 요하유역은 특유의 지방성문화인 홍산문화의 유물중 대량의 정미한 옥기가 출토되는데 1971년 내몽고 옹우특기의 삼성탑촌에서 식수시 옥종을 발견하는데 20년후 화하은행의 심볼로 사용하고있다.
옹우특기는 적봉시에 있는데 홍산구 동북각에 홍색의 석산이 있어 몽고어로 우란하다 이다.
신석기유지로 여기가 홍산문화의 중심지대이고 홍산여신을 발견하고 2012년 남신도 발견된다.
적봉부근은 시라무렌하 노합하의 중심지역이다.
1971년후 홍산문화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데 1979년 요년성의 문물 고찰시 객좌현 동산주의 홍산문화유지를 발견하는데 남은 원형 북은 방형의 석철건축유지로 돌의 가공기술과 석철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제사용 제단은 대단한 규모로 종교문화의 발달을 알수있다.
1984년 동산쥬 80공리의 우하량산정에서 유지를 발견하는데 토목식 반지혈식 주거유지로 이곳은 제사장소로 종교지역이다.
이곳은 여신묘로 추측되고 적석총의 무덤이 있어 취락지구유지의 발견은 없었다.
적석총은 홍산문화의 특징으로 우리나라 고대의 묘장형식이다.
북방민족들은 적석총이 대세이고 묘장은 가장보수적으로 민족특징을 보여준다.
석관을 사용하고 돌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산과 같은 느낌을 준다.
묘장중 사신의 흉부에 두 개의 정미한 옥기가 놓여있고 남성시체는 다리를 교차하여 매장되었는데 한자의 교자 교태라 하는데 천지의 교융합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장자가 무격 제사인일 가능성이 크고 흉부의 옥은 천지구통의 의미이다.
조형상 옥룡은 여러동물을 혼합한 형태로 돼지의 머리와 가장 유사하다.
8천년전의 흥륭와문화 7천년의 조보구문화의 유물은 도존상 멧돼지가 조각되어 있었다.
돼지 사슴 새를 숭배하는 토템의 문화였고 이후계승된 홍산문화는 이들 토템을 숭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하량발견의 옥룡은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는데 이전에 이러한 옥룡과 옥기을 발굴하여 보유한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민간에 이지역에서 사적발굴로 옥기를 소장한 사람이 많다.
3년후 60공리의 황곡둔에서 또 같은 옥기가 발견되는데 소병기교수가 감정한다.
20여년전 출토된 우하량 옥룡은 두부는 곰 잠충 인간의 배태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2003년 겨울 우하량 16개지점을 다시 발굴하여 또다시 용형옥기를 3점출토하여 민간의 수점과 공예수법이 일치하여 광범지역에 옥례기의 규범화로 부락의 문화와 관념이 규칙적이었다 할 수 있다.
이곳에 공통의 신앙을 가진 강대한 부락연맹의 존재가 확실하다. 하겠다.
중국문화는 태아기에 다원적 상태였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위하유역의 어문 장하유역의 악문 분하유역의 사문 조하유역의 예문 태호유역의 호문 요하유역의 저문등 다원적 문화가 상응하여 신비한 추측을 보여준다.
하남 언사교외의 이리두유지의 궁전구에서 엄밀한 중축선과 복잡한 도로체계를 발견해 중국최초의 왕성유지임을 확인하는데 최남단의 귀족묘장중 동령을 발굴하였다.
녹송석을 정리하다가 한 마리 동용을 발견한다.
동물의 추상화 과정이 이미 시작한 것을 알수 있었다.
적어도 3700년전 유물로 이시기는 황제가 중원을 통일한 시기로 용과 중국민족의 연원관계를 다시 확인한다.
1994년 부신퇴 조룡의 발견으로 기점은 다시 회귀하여 기원의 시기를 확정할수없게 된다.
요녕 부신 사해문화 원시부락의 용발견은 전홍산문화로서 8천년전이다.
용의 길이는 20여미터로 돌을 쌓아 만든것이다.
용을 숭상하고 용의 후손임을 자칭한 중국인들은 완전한 형태의 용이 홍산문화의 고대에 중국과 관계없는 소위 오랑캐지역에서 계속 출토되자 충격을 받는다.
산동성 가상현의 무량사는 작은 사당인데 동한말기 화상석이 각화되어 동서후 3면의 장벽상 40여개의 역사고사가 나열되어있다.
치우5병과 황제의 작전과 천상에는 용이 있고 한 대 사람들은 고대에 용이 황제를 도왔다고 믿는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봉선서중 제국술사 공손경이 황제가 정을 만든 고사를 말한다.
사기가 저작된 2천년후 1988년 하남 복양에서 사전 묘장을 발굴하는데 조개껍질로 세 개의 도안을 만들었는데 용과 유사한데 좌전에는 양공24년 노국 범선자는 자칭 자신의 조상은 하대 어룡씨라 하는데 하대에 용씨가족이 있었는가는 고증자료가 없어 회의적인데 1959년 하남언사부근 이리두에서 농민이 유물을 발견해 40년이상을 발굴하여 궁전 도로 록송석 작방 청동기 쌍륜차흔적등을 발굴하였는데 탄소측정결과 전1900년 좌우로 하대의 기년범위내이다.
이리두 유지에서 발굴된 쇄편중 용문을 발견하는데 뱀과 많이 닮아 예술화 되어 있었다.
청동기의 출현은 역사의 장에 못을 박는 것처럼 인류문명의 선진정도의 표식이다.
중국의 청동기 출현은 상대적으로 늦은데 찬란한 제조공예와 문화를 제고한다.
북송시기 금석학이 출현하는데 선화박고도록은 중요저작으로 북송 선화연간 황가에서 수장하는 상에서 당대까지 839점의 청동기정품을 기재하는데 한 대부터 상주시기의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한왕조는 청동기를 중시하여 국지중기라 한다.
선화박고도록 제1권은 청동문식의 단락으로 여씨춘추의 상대청동기의 묘술을 이어 규정 문작용호이라 하여 문자지정의 용문은 상대청동기상 출현하는데 상대에는 전대의 종교관념을 집대성하여 원시무술을 체계화하여 규범화한 시대로 숭배대상의 형식의 다양하여 예의의 번욕은 공전절후의 정도에 오르는데 전국에서 진한연대에 쓰여진 예기는 이렇게 서술하는데 상대의 종교문화의 흥성은 은인존신 솔민이사신 이라하여 선귀이후례로 예기의 상대에 대한 모호한 기억은 15만편이상의 갑골문재료는 종교생활을 예시한다.
상대인들은 귀신의 세계는 유형의 세계로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귀신은 자신들의 주위에서 미세한 변동으로 생활한다고 믿는다.
일체의 길흉화복을 조종한다고 믿는다.
유예할 사항이나 의문은 점복에 의지하는데 귀갑이나 소뼈의 균열로 점친다.
귀신에 경의를 표하기위해 열정적으로 절륜한 예물을 창조하는데 예기를 동물조형으로 장식은 동물주제의 문식으로 나르는 조류나 짐승을 청동기에서 대응현상을 발견한다.
더욱 신비한것은 다량의 추상으로 괴이하게 멀리 현실의 생물을 청동기에 빈번하게 주인공으로 부각시킨다.
상대 청동기의 도안은 신의 사자로 제사를 통해서 사자를 조상에게 보내 신과 구통하는 목적이다.
상대 미술도안은 신과 유관하여 예기상 괴이한 문상은 상인 심중의 숭배신령이다.
귀신에 최대의 경배와 경외중 상시기의 용문은 창조되는데 더 이상 현실동물이 아닌 추상도안이 된다.
끝없는 신통과 역량을 부여하는데 정주시 동남부의 좁은 거리에서 1955년 정주상성유지를 발굴한다.
유지면적은 25평방공리로 현재 정주시 면적의 10배로 시경 상송은 당시 상성의 장엄웅위를 노래하는데 商邑翼翼 四方之極이라한다.
매일 만여명의 노예가 축성하는데 3-4년의 시간으로 거대한 공정을 완성한다.
상조의 강성한 증거로 상인들의 청동주조공예는 매우 발달하여 은허에서는 주조작방의 유지를 발견한다.
출토된 도제연노는 동액 13근을 일회에 붓는데 대형인 후모무정은 상대 기술수준과 능력을 보여주는데 후모무정은 875근으로 1200근의 동액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술을 바탕으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데 석기시대와 비교하면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
동물이 통천신수의 관념으로 상대의 청동기상 동물형상은 세종류로 소 양 돼지 사슴 코키리등 생활의지동물과 제사중 늘 희생으로 사용하는 동물은 수렵활동후 사용하고 인간을 제사의 희생으로 신령에 분향한다.
호랑이 표범 악어 뱀등 맹금류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동물로 제사중 무사의 조수로 충당하고 물고기 개구리 도룡용 나비등 기이한 동물은 인간의 희망과 이상으로 인과 신사이의 사자로 신의 일부분 신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상인들은 동물의 일부분을 조합하여 허구적 신동물을 인공적으로 창조한다.
머리 몸통 다리 발등을 사용하고 진실동물의 형상을 탈피하여 추상화 기호화한다.
용경 교수는 1940년대 상주이기통고를 출판하는데 70여종의 청동기 화문을 현상과 유행기간을 분류하고 40년후 마승원교수는 중국청동기를 주편하는데 문식을 계통별로 정리한다.
용문식은 3대분류 방법으로 정리하는데 굴체용문 파행용문 반용문으로 분류한다.
굴체요문은 신체적 곡선변화를 보이는데 위하유역의 어문에서 래원하고 돌출 기하형 문식은 뱀의 몸에서 화문을 차용하고 포효하는 형상은 태호유역의 호문을 차용했다고 분류한다.
파행식은 장하유역의 악어문에서 반룡문의 둥근원은 분하유역의 뱀무늬에서 래원한다고 주장한다.
반룡문의 머리는 상대에 유행한 호면 도철문에서 왔다한다.
이러한 지혜와 경건한 창조는 복잡다변의 용문은 상청동문화중 강채를 발한다.
복잡한 용문을 만든이유는 제사내용과 직접적 관련으로 상인들의 생활중 귀신을 홀리기 위해 경건하게 만물지상의 제에게 최상의 예의를 표하는데 갑골문준 제오신인 오방지신으로 상인들의 다신숭배는 동서 남 북 중의 오방과 조상신으로 이루어진다.
문화의 포용으로 용의 형상도 광채를 발하는데 천제와 조상의 숭배외에 대외교류의 확대를 통해 상대용문 생산에 영향을 준다.
상대유지중 차마갱을 발견하는데 말과 차량은 상인의 중요공구로 교통을 촉진하여 경제교류를 촉진한다.
교류는 변화를 수반하는데 산서박물관에는 정미한 청동기가 있는데 1959년 산서 석루현에서 발굴하는데 괴수의 모습으로 주조하는데 작은 배처럼 만들어 형상의 악어문과 신비한 추상문식으로 상대의 용형 굉인데 곤혹스러운 형상으로 괴이한데 다양한 융합이 이루어졌고 2006년 섬서 한성에서 의외의 발굴을 하는데 명문상 예국국군의 부인의 3종기물상변에 10여건의 기물에 명문이 있고 다량의 옥기를 발견했는데 옥저룡은 홍산문화의 유물이어서 과연 교류의 결과인지 곤혹스럽게 했다.
이부분은 영원한 미제로 남는데 단 홍산문화가 하북지역에만 영향을 주었다는 관념의 수정을 가져온다.
상인들의 차륜은 다양한 교류로 수도동귀하는데 원용문의 융합 조합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청동에 뿔을 붙이는 것은 용형성의 관건으로 용의 뿔은 특수한 의의가 있는데 학자들의 관심사인데 왕충은 논형에서 용은 뿔이 없으면 승천하지 못한다. 하였고 당대 단성식의 유양잡조에서 척목은 용의 뿔이다. 뿔이 없으면 용은 다른 동물과 같다라 한다.
갑골문의 용자의 형상은 뿔을 강조하는데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문일다.는 용각은 각부족의 토템에서 연변했다. 하나 증거가 전혀없다.
하신은 악어의 머리각질의 돌출을 말한다라 하는데 상대의 용문은 쌍각이여서 설득력이 부족하고 진수상은 용뿔은 최초에 시간측정공구인 시계(표)다라 한다.
왕충이 말한 척목은 자척공구로서 용의 머리에 사용했다.
그러나 상대의 용각중 자와 비슷한 용각은 없다.
고고학적 발굴의 청동기는 몸체는 비슷하고 뿔은 각양각색으로 은허출토의 양고용문은 곡절각으로 익호상의 용문은 후권각으로 무복호에는 귀처럼 생긴 뿔이 있었고 첨형각 조형각등 다양한 뿔을 만들었다.
청동기상 새 수 인간등 무각동물의 머리에 뿔을 만든다.
뿔은 용만 붙이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인문의의가 있다.
상인들은 무각동물에도 뿔을 다는데 종교관념의 중요한 의미가 있어 자연계중 뿔은 유각동물중 웅성의 표지로서 강성유력의 상징으로 유각동물군중 수령은 강한 뿔을 가지고있다.
이현상을 중시하고 연상하여 뿔의 형상에 주의한다.
하북성의 흥륭현 문물보관소에는 12000년전의 녹각을 1983년에 폐품처리장에 판것을 구입하는데 신석기시대 녹각상 화문은 인공가공한 것으로 선염한 색상은 퇴색되지 않고 선민들은 녹각상 그림의 마력을 기대하여 수렵이 순조롭기를 기원한다.
문명의 연진에 따라 뿔은 고대선민들의 생활중 주요한 작용을 하는데 1972년 섬서 부풍현에서 출토된 서주시기의 사장반은 명문중 祈角熙光 義其禋祀라 기록하는데 희생으로 쓰는 동물은 두 개의 뿔이 가지런하고 광택이 나야하고 제사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시경에는 뿔을 제사에 쓴다는 노래가 있는데 주송 량사(좋은 보습)에는 큰 누런소를 잡고보니 뿔만 구부정하네라 노래하는데 사직신에 희생용으로 동물의 뿔을 주요한 의식에 사용하였다.
용의 연변
1793년 여름 건륭황제는 궁전에서 고옥을 감상하는데 양저괴수의 문식과 용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옥종의 용도를 마차장식으로 이해하고 만다.
건륭은 태화전은 12654조의 용으로 장식된것을 알지 못하여 원고시대에서 청대까지 용의 형상은 만장의 복잡한 연변을 거친것을 알수있다.
조대의 변천 관념의 연진 문명의 발전으로 용문의 형상과 함의는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원전11세기 중원통치 500여년의 상조는 황토고원에서 달려나온 주족에 의해 뒤집힌다.
주왕조는 이덕배천의 관념으로 무술종교는 예악문화의 의해 구축된다.
예제와 법도가 정권합법성에 의거하게 된다.
춘추시대에 살았던 공자는 주대사회를 추구하는데 감개스럽게 존례중덕의 주를 회고하면서 우울해 한다.
섬서성 한성시 동북의 양대촌 황하서안의 언덕에서 2004년 8월 밤 도굴범들의 폭탄으로 2800년전의 고묘를 파괴하여 문물국은 급히 발굴하는데 서주만기에서 동주시기의 묘장으로 수많은 문물을 발굴하는데 그중 금기 48건 청동기 70여건 옥기 700여건이었다.
고묘군중 출토수량이 최다인 26호대묘는 용문 옥황이 출토되는데 양단에 음각선조가 굴체용문으로 꼬리는 소실되었다.
신체는 휘어져 구부려지고 면부는 상대용문과 닮지 않았다.
공포와 사나움으로 옥황상 용문은 서주시기 용문을 대표하는데 주요특징은 동물의 사실적 모습으로 돌아온다.
추상형식의 과도에서 미적추구의 단계로 연변하였다.
원시적이고 피의 동물본성으로 회귀하여 1971년 섬서 경양 고가보1호묘 서주초기의 부요가 출토되는데 명백한 동물특징으로 경부는 휘어져 위로 올라가고 입은 평범하여 꼬리는 휘어져 동일시기의 봉문조형에서 용문과 봉문의 비슷한 곳이 많아져 용의 머리와 봉관과 유사한 용뿔로 주인들은 봉의 모습을 용뿔에 각화한다.
신왕조탄생마다 자신들에 유리한 길상동물이 탄생하는데 제왕의 천수를 강조하여 정통성 합법성을 연역한다.
주대에는 봉황에 성서로움을 가탁하는데 주대부터 수백년의 침적을 경과한후 큰 변화를 일으킨다.
주대의 용문은 봉문의 영향으로 예술화 도안화하는데 용문의 함의는 통천의 신수에서 길상의 상징으로 변한다.
주대용문 변화의 영향의 또다른 중요한 인소는 주류문화의 변천으로 예기 표기에는 주인은 존례를 항상화하여 귀신을 존경하되 멀리한다.
서주사회의 문화특징 예의숭상과 법도의 시대를 반영하는데 고묘출토의 기물중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2007년 여름 섬서곡옥에서 16년째 발굴작업중 삼천년전의 거형차륜은 시공의 창상 흔적을 보이고 1991년 서주시기 진후묘지가 발굴되고 특별히 63호묘 출토의 문물은 고고계를 진동하는데 204개의 옥으로된 옥패를 발굴한다.
이옥패는 주대의 엄격 옥패규정에 의해 옥황은 신분의 존비를 정하는데 정의 사용규정과 같다.
1990년 출토의 괵국국군 조패는 7개옥황인데 대소 45개의 황으로 온륜화귀의 옥황상 각이의 많은 용문이 세겨져 옥황상의 용문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방두단신 신체세장의 특징이 있다.
예악문화의 영향으로 주대사회의 심미풍상은 우아 평정의 방향으로 발전한다.
조패상 다.종조합의 신식용이 출현한다.
이용문은 생물의 직접모사를 초월하여 일종의 미학규율로 설계되어 예술도안이 된다.
청동세계중 용문의 연변추세는 보다 명백하게 체현되고 서주 중만기에는 수백년의 수면용문의 유행이 쇠퇴한다.
용은 완전히 동물의 수성을 잃고 유행도안중 용의 머리 다리 꼬리등을 모두 생략하고 장식성 도안으로 바뀐다.
서주만기의 청동기는 양기수의 수목교련문중 용의 뿔과 아래턱부분이 형태상 이미 구별이 불가능하여 진다.
서주시기의 용은 종교적 응중엄숙을 탈피하여 회선다자의 곡선미를 추구하여 이후 민족성격에 깊이 침투하여 심미정서를 함축한다.
전770년 주평왕의 동천으로 각제후국은 분분히 굴기하여 주천자의 실력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다.
통치범위는 방원 600리에 불과하여 동탕중 철제공구의 사용으로 사회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격탕광양의 시대정신은 비양의 자태를 보여준다.
동주의 용은 파행동물 형태가 아닌 지상에서 천천히 포복하는 신체는 더이상 보이지 않고 굽어지기 시작하여 날아올라 질주한다.
寧靜致遠을 숭상하는 문화전통으로 용비봉무의 율동감을 선택하는데 1982년 1월 호북성 형주시 마안산에서 고묘를 발굴하는데 수장품중 다량의 칠기 죽기 채의목용을 발견하여 격동한다.
목용은 얼굴색이 선염 청초하고 하의는 비단옷으로 보존이 양호하였고 색상이 화려 하였고 관에는 화려한 비단이 가득하여 놀란다.
장방형 회색금포 금피(이불)는 세월로 떡처럼 붙었는데 수견피를 분리에 성공하여 담황색의 금용이 비상하는 무늬로 용이 춤추는 채문봉조를 확인하는데 기묘한 것은 봉의 머리에 용꼬리 조형이 그려있었다.
용과 봉의 조형은 교직되어 용봉합벽의 意像으로 걸출한 예술을 창조한다.
동주시 용과 봉의 합벽의 이유는 용과새는 고대 사상중 중요내용으로 천문학상의 기본내함으로 문화적으로 용과 새는 묘주인의 영혼을 승천시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음양설의 등장을 반영한 가능성이 크다.
전국시대이후 영혼승천의 사상의 영향으로 용은 통천의 령수로 사자의 영혼을 천국에 도달시킨다고 믿었다.
봉은 나르는 신조로 봉의 인도로 용이 천국으로 가는 도로를 찾을수 있다고 믿는다.
초국의 비단이불에 용봉합벽의 조형도안은 묘주인의 영혼이 승천하는 길상축복을 의미한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새가 물고기로 변하는 도안이 출현하는데 어문은 용문의 원형중 하나로 상대옥기중 용조결합의 조형이 나타나 상대 옥응(매)은 이미 용의 형태로 훗날 용봉조형의 함의는 변화가 발생하는데 용은 양 봉은 음으로 용봉정상은 아름다운 혼인을 상징하게 된다.
원고시대 심미추상의 철학관념은 세속화로 연변되는데 1972년 1월16일 호남장사부근의 한 대고묘의 발굴이 이루어져 마왕퇴 한묘인데 관곽은 4층으로 정리후 정미절륜의 백화가 내층 채관상 출현하는데 이천년의 백화가 새것처럼 보관이 완벽하여 모두를 놀라게 한다.
백화중간에 거대한 옥벽이 있어서 청홍의 두마리용이 옥벽중간을 통과한다.
일련의 죽간을 발견하는데 주인의 내력이 적혀 있고 수장품의 청단이 적혀 있었다.
이백화는 장례시 명정으로 기발에 묶어 사용하였다.
이명정에는 금조 해 달 부상등이 다양하게 그려지고 용의 형상이 비약적이고 화려찬란한데 백화사상 걸작품으로 평가한다.
이백화는 천국의 경물을 표현하여 비승천국의 노상에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백화는 생동적인 한 대의 시공모식을 보여주는데 천상 인간 지하이다.
용은 삼계를 연결하는 사자로서 쌍용과 옥벽을 합쳐 한폭의 승천하는 용주를 만들어 묘주인의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한다.
용은 종횡천지로 의상화하여 용은 종교의식중 통천신수의 신분으로 발전한다.
용과호랑이의 격투장면은 음양교합의 길상함의를 내포한다.
서한시기 문경지치를 통하여 사회가 안정되고 물질생활이 제고되어 생존의 열정이 높아진다.
생사문제가 문화상 돌출하는데 한 대사람들은 세속생활에 미련을 두고 영원히 연속되기를 희망하여 돌출하는 용은 한 대인들의 정신층면상 몽환의 형식으로 생명종결에 대항하는 일종의 방식이다.
구통천지와 길상외에 한 대의 용은 또다른 공능이 있는데 산서박물관의 창고에 한 대 4신와당은 원형조각상 청용 백호 주작 현무의 조상은 한 장안성유지 출토의 와당중 가장크고 보존이 완정하여 와당상 또다.른 형태의 용문은 용의 몸체와 형상은 웅건하고 힘이 있어 달리는 용의 형상으로 한 대인에게는 또다른 작용을 한다.
한 대 4신은 방향 사계절을 의미하는데 용은 동방을 대표하고 봄을 상징한다.
사신와당은 궁전 일등귀족의 저택의 방위와 다른공능은 기복과 벽사의 기능이 있다.
하남 남양시 포산원점 출토의 한화상전상 더욱 추상화되고 신비한 용문도안이 출현한다.
도안은 묘동측의 장벽상 천문성수와 용의 비상이 그려져 천상의 생활을 묘사한다.
천문학상의 진귀자료로서 동궁용수의 창룡도안은 한 대지식인은 능란한 경험세계를 완정한 지식체계로 전환한다.
이시대는 지식인에 용기와 의지를 주어 지식의 격증으로 제도와 규범을 갖추는데 용의 형상과 사용은 진한시기를 거쳐 성숙기에 접어든다.
동한말년 군웅병기로 중국역사는 다시 분열시대로 진입하는데 삼국 양진남북조가 3-6세기에 군벌할거시대로 이행한다.
전쟁 기황 온역 대규모의 인구이동으로 삼백년의 비창의 시기를 용의 형상은 변화 발전한다.
1963년 산서대동 석가채촌 북위묘장중 육조시기 정미한 석주가 출토되는데 석초상 용문은 기세가 웅혼하여 석초는 북조묘실에서 나왔는데 남조용문의 예술특색이어서 곤혹에 빠지는데 일반적으로 북조묘실 출토의 용문은 머리는 넓고 신체는 풍유한데 옹용지미를 느끼게 하는데 현존 남경박물관의 우인희룡도는 남조용문의 대표작으로 남조의 용문은 현학사조의 영향을 받아 골격청기 통체경수로 용의 머리는 길고 두눈은 노려보는 형상이다.
석초상의 쌍용은 조형상 북조의 용문에 더욱 근접한데 충만한 힘과 동적자태가 느껴진다.
남조의 용문과 상호호응하여 남북융합의 예술풍격은 완미한데 이어 출토된 묘지명은 북위 사마금용의 묘로서 북위 낭야왕인데 부친 사마초지는 동진을 배반하고 북조로 도주하여 북조의 공주와 결혼한다.
그는 남북문화의 결합체로 그의묘장에 남조의 용의 형상을 수장하게 된다.
사마금용 석초상 먼저 식물과 연관되고 이것은 하화인데 불교의 경전부호로 청정무애의 경계를 상징하여 남북조시 북조는 불교예술의 발전이 성행하여 불교예술의 영향은 전사회에 삼투되어 각종 생활에 투영된다.
문성제시 운강석굴을 개착하는데 북위중기 대동서교의 무주산록에 최고의 예술장인이 모여 60여년가 산록에 연이어 주요동굴 45개를 개착하고 동굴안의 대소조상 51000여존을 조영하여 후인들은 운강석굴이라 한다.
담요5굴은 그중 가장 주목을 받는데 담요5굴은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경목제 문성제의 5인의 황제를 모델로하여 5존의 높이 10미터의 대불을 조성한다.
대규모의 불상조성운동은 북위 효문제시기 천도 낙양이후 494년부터 용문석굴을 개시로 만장의 개착과정은 북송에 이르는데 용문석굴의 연화동은 북위만기에 조성하는데 각동에 한봉오리의 정미한 석연화로 인해 득명한다.
연화동 우벽의 불감상 용문과 하화가 긴밀히 결합하여 용의 선체가 권곡유동하는 자태로 극도의 미감을 나타낸다.
양한시대의 용과 비교하면 육조용문은 예술수준상 명백한 진보로 두부는 더욱 길어지고 신체는 커지고 아름다워진다.
각민족문화의 융합 발전과 불교의 전래로 신예술시각의 도입이 이루어져 용문은 육조시기 극대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수당시기 중국고대의 역사는 최현려한 편장을 열어 270년의 내전 끝에 대당제국은 웅위한 발전으로 역사상 최찬란문화의 시대로 예찬된다.
1981년 8월24일 섬서부풍의 법문사의 당대불탑이 풍우중 손괴되어 동북부분이 완전히 무너져 불탑정수과정중 법문사 지궁을 여는데 불조사리와 수천의 황실진보를 발굴하는데 2499건의 보물중 당대 고도발달의 물질문명을 증명하는 황실의 금은기 영롱한 주보옥석을 유색이 옥처럼 맑은 비색자기 현려다채한 당대직물 외래의 유리기물등 당황실의 생활화권이 펼쳐진다.
법문사출토의 은질운룡반상 영조된 금룡이 양변에 새겨져 정미한 선조의 미를 보여준다.
당대는 용문의 번성기로 황실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각종생활기명중 용문은 길상도안으로 광범하게 사용하여 역대에 처음이었다.
섬서박물관 수장의 당대 청동반룡경은 거울배면의 운단비무의 상용은 용의 신체상 세밀한 린문(비늘무늬)이 조밀하여 조형이 힘으로 충만하여 부려당황하다.
강소 고유시 출토의 당대 동경은 섬서와 강소는 거리가 먼데 양지출토의 용문은 유사하여 사회발전에 따라 수공업 수요의 증가와 기술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진인각교수는 송대에 문화가 최고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는데 사회문화의 진보로 이성주의사상이 태동하여 사회사상의 주류가 된다.
송대의 용문의 형태는 총결판으로 완정된 화룡이론을 정립하여 곽약허의 도화견문록에 의하면 3정9상이라 하는데 3정은 사람으로 말하면 상중하초를 이르고 9상은 각부위를 지칭한다.
송대의 미술이론은 성숙하여 이시기의 용문은 상득익창한다.
사천 노현의 고고발굴은 송대용문의 매력을 더해주는데 2002년 초 도굴의 성행으로 백여좌의 남송시기의 석실묘지를 발굴하여 164폭의 완정된 석각은 매우 정미하여 용을 주제로 한다.
당대 용문에 비해 용꼬리의 처리가 더욱 영활하다.
남송대에는 남방의 수전이 대량개발되어 쌀의 산량이 대폭 증가되어 인구가 격증한다.
송대 전국인구는 1억5천만에 달하는데 만호이상 성시는 50개가 넘어서고 수도인 변경은 백만은 넘어선다.
청명상하도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데 자기업은 공전의 발전을 하는데 관 가 여 균 정요등 5대 관요를 개설하여 상해박물관의 인화운용문반은 정요의 정품으로 주체의 용문은 운문과 결합하여 선조공정수려하여 정밀유아한 감각을 느낀다.
정요는 당대 백자생산으로 각화나 인화없이 생산되다. 송대에 돌연 성숙단계로 접어든다.
이유는 하북곡양지구는 오래전부터 석장이 많아 각화기술이 발전하고 혁사를 궁정에 공품으로 헌상한다.
정요의 문양은 혁사의 기술이 기원으로 하북석장의 남하로 발전을 이룩한다.
원대에는 도자기술의 완숙기로 경덕진이 문명을 날린다.
백지람화의 청자소제에 성공하는데 70여년사이에 기타품종은 도태된다.
청자가 시장의 주류가 되고 원대용문은 대부분 청화자에서 볼수있는데 원대에는 용문을 아주 중시하여 용문 운문 화초문이 결합한다.
진강박물관 수장의 용문자병상 용문은 독특한데 1929년 영국인 허드슨은 청화운문상이병을 가지는데 지정11년의 관식으로 원대 각화는 복잡하고 정미하여 국화 초엽 연화 비풍 모란등 다층도안의 사용으로 터키의 토프카 박물관의 청화자를 감정하여 문양을 분석한다.
용의 두부는 길고 두눈은 조장이 불길같고 안청은 작으나 신같고 경부는 세장만곡하여 신체는 사형으로 수염 모발은 휘사표양하여 토프카 박물관의 백여점 원청화는 전문가들의 연구의 초점이된다.
2001년7월 토프카비박물관에 7명의 중국도자전문가들이 3일간 직접 고찰하도록 허락받아 1271-1368년사이 97년의 통치기간에 마배민족이 짭은 기간에 용문을 예술의 극치로 진보시킨 걸작들을 검토하는데 당시 주문생산품이다.
원대에 비해 명의 용은 장엄과 위엄의 감각으로 용의 신체는 보다. 거칠어지고 표사 비양으로 길상의미를 강화한다.
명대에 용문은 왕실건축의 불가결한 장식으로 산서 태원의 구룡벽은 주원장의 13자인 주계왕부의 영벽으로 홍무 25년 건축인데 1392년-1644년사이의 병화로 왕부는 훼손되나 구룡벽은 별도건축이어서 화를 면한다.
구룡벽은 길이 15.5미터 높이는 8미터로 중국3대 구룡벽중 하나로 건축연대최조 규모최대로 기세가 가장 웅위하다.
구룡벽의 최중앙 정면의 용은 명대이전에는 정면의 용문은 없었으나 명대 장인은 정면의 용문을 창조한다.
정면용문은 군권을 신화하고 권력의 공구로 화한다.
황가에서 용문을 광범사용하고 용문을 농단하는데 주원장은 명확히 규정화하여 관리의 의복 장막의 현 화 자의 3색은 이용이 불가능하고 직수용봉문은 위반자는 처벌한다.
명영종 주기진은 직수와 유사한 용문의 망문 비어문 두우문의 사용시 참수하도록 한다.
용문을 통치자의 농단후 비슷한 동물은 민간에 남아 백성들의 상서로운 축복을 위해 비용문을 용의 아들로 간주하여 용생9자의 설법이 점차 유행한다.
이동양은 홍치연간 대학사로 회록당집에서 기록하는데 수우는 음악을 애호해 거문고에 애치는 살인을 좋아해 무기에 조풍은 전태각상에 포로는 반곡의 용과 유사해 종각에 순예는 사자와 비슷하고 연기를 좋아해서 불상과 향로에 패하는 비시로 거북비슷해 힘의 상징으로 비석에 폐한은 호랑이와 비슷해 감옥대문에 부시는 용형과 비슷하고 호문으로 석비의 양방에 치문은 용형해수로 전적의 양머리에 사용하여 용의 아들들은 온고 부유 고귀의 상징이 된다.
사회의 각방면에 활약하여 용의 공능을 극대화하여 신비 위엄을 창조한다.
1644년9월 자금성의 주인이 바뀌는데 용의 명운은 변화가 없이 의연히 궁전에서 생활한다.
계속 통치자의 필요한 존재가 되어 일개월후 복림이라는 7세아이가 용과 처음접촉한다.
무영전에서 즉위하는데 순치제가 되고 기본적으로 명의 용을 계승하여 형식과 특점을 유지한다.
용모와 신태는 보다 응중 창로하여 상대의 신비는 보이지 않고 전국의 장양 진한의 질박 송대의 준수를 잃고 원대의 쇠탈과 웅건을 말하지 않는다.
통치자의 독점과 장식으로 전락하여 과거의 신비 경건은 사라진다.
용행생우
물은 변화다단하고 위력은 무궁한데 수도꼭지를 용두 수용두라하는데 청대의 사료필기 냉로잡식중 순치초 상해현 당씨는 왜인이 준 수룡두로 화재를 막았다고 기록하는데 일본의 소방기구를 말한다.
중국건축중 용두가 광범히 출현하는데 고궁의 배수관도의 출구는 용두장식을 하는데 태화 중화 보화전 삼전의 대기상 용두는 1142개로 비가오면 장관을 이룬다.
장식과 공능의 결합경관을 수시로 볼수있는데 용과 수는 건축상 결합하여 밀접관계를 암시한다.
상고시대 각민족신화는 수신이 있는데 공동의 명칭이 있는데 기괴하다.
동서양의 물관련의 모든 신화에는 영어 알파뱃 n이 모두 들어간다.
인도 범어는 나가이고 희랍의 수신과 마야수신도 동일하다.
중국의 수신은 儺(나)이고 지금도 남아있다.
용의 고대발음은 농인데 농과 나는 수신이다.
용은 언제 물과 관련을 갖게 되었을까
문화현상으로 추적해보면 산동 기수현 도서관에 한화상석을 보유하는데 쌍두용이 호형으로 천정에 그려있어 양단용두는 입에서 물을 뿜어낸다.
한 대 중국인의 관념에는 용은 물을 뿜는 신기한 동물로 인식한다.
중국의 용과 물의 전설은 멀리 한에서 시작한다.
1934년 중국에 심취한 미국학자가 탁편 하나를 사는데 미국의 저명 한학자인 중국명 비정청의 부인으로 이탁편은 산동 가상현 무량사의 한화상석에서 온것이다.
무량사는 동한말년에 세워져 1800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사당내에는 많은 화상석이 보존되어 장권식의 인물화상은 중국기원을 서술하는데 모호불청하다.
4천년전 황제 치우의 교전장면이 있는데 사람과 동물의 전쟁으로 황제는 치우를 수몰하여 이기려 획책하는데 사기에는 황제의 신변에 용감한 용이 있다한다.
무량사 벽화중 용의 모습은 없는데 이신비한 응용은 하남 남양의 한화상석 벽화중 전설중의 응용이 그려져 있는데 응용은 가장 오래된 용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의 묘술에는 응용은 축수를 하여 남방에 거주하는데 남방의 기후는 습윤다우로 인한 것이다.
용은 황제의 공신이자 원고제왕을 보좌하였다.
대우의 시대에 도천홍수에 직면해 대우는 치수시 용을 앞세워 길을 여는데 신용의 꼬리로 하도를 열었다 한다.
홍수는 최종적으로 바다로 간다.
응용은 중국의 제왕을 보좌하는데 1923년 2월25일 노력주보의 증간에 즈음하여 독서잡지상 북경대 고힐강교수가 친우인 전현동에게 서신형식으로 학술서간을 발표하는데 고교수는 대담하게 우임금는 9정상 주조된 동물로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의 학자들은 극렬반대하는데 이토론내용이 고사변이라는 학술서가 된다.
이래서 대우는 인과 신중 어느쪽인가의 문제가 논쟁이 된다.
2002년봄 홍콩의 골동상에서 청동기가 발견하는데 밑바닥에 100여자가 전각되어있어 이학근교수가 감정하는데 천명우부토 수산준천인데 부토는 9주로 획분하는데 준천은 치수이다.
이청동기는 수공수라 명하고 2900년전의 기물로 서주중만기대이다.
서주시기 대우의 공적이 광범하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좌전 소공 29년조에 순이 기록되어있어 동부가 동물을 순치했다한다.
1987년 하남복양 서수파유지의 45호묘중 조개껍질로 용을 형상화한 유적을 발굴한다.
6400년전에 만들어져 훗날 용의 형상과 놀랄정도로 비슷하여 묘주인의 서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조개껍질로 만들어 졌다.
홍산문화의 동산쥬유지의 5천년전의 방형석철 기좌에서 남북축선이 대칭분포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부근에서 담록색 옥석이 발견되는데 호형옥석으로 황이라 한다.
황은 가장오래된 예기와 패식으로 이옥황의 패식은 용머리가 확실하다.
갑골문의 무지개를 뜻하는 虹(홍)자는 옥황과 너무나 유사한데 용과 무지개의 관계를 암시하는데 고인들의 눈에는 무지개는 기괴한 자연현상으로 오채가 비온후에 나타나 용의 화신으로 여겼다.
산동 무량사의 다른 화상석에는 채호반의 쌍두용이 그려져있고 우수의 관념을 표현한다.
물의 여러 가지 역량은 고인들에게는 공포와 위협으로 무한숭배를 하게된다.
용에 대한 상상과 경외로 물숭배의 두려움으로 전이된다.
고대농업문명은 인간과 물사이의 수요로 원만한 관계를 형성한다.
한재시는 다양한 기우형식으로 용은 중요임무를 담당한다.
상대 갑골복사중 황경 또 비가 오는가라는 복사가 있다.
용은 밭을 만들고 비를 내린다.
황은 갑골에서 장애인을 의미하는데 상형으로 배가 부어오른 사람을 말한다.
장애인이 누워서 올려다 보는데 더구나 황은 장애인을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다.
이학설은 구석규교수가 해석했는데 선진시기에 황은 천생기형을 말하는데 코가 거꾸로 달려 기우제시 물을 붓고 화형 폭사시킨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죽음을 기다린다.
가장 극단적 기우제는 사람을 태워 비를 희구하는 의식이다.
심한 경우 수령을 불에 태워 스스로 죽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상의 탕왕은 하왕조를 멸망시킨후 7년대한을 겪어 최후에 자분기우를 결정한다.
막기우제를 지내고 장작위에 섰을때 돌연 큰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
논어와 묵자 상서에는 탕의 기도문의 편단이 보인다.
산해경에는 한재시 사람들은 밭가운데서 용의 형상을 쌓아올려 비를 내리게 하였다.
진한시기 기우의 핵심내용은 토용감응술로 연변된다.
토용을 축조하여 용을 감동시키면 비를 내린다.
이미 용의 공능은 전달의 사자가 아닌 비를 주는 능력을 보유한다.
산동 기수의 한 대화상석상 기우의 장면이 나오는데 용은 하면의 정점에 나타나 용과 사람은 보다 근접해진다.
용숭배의 논리가 발전하여 강우능력으로 신이한 동물이 되어 당대에 용은 인격화 한다.
인성특징의 용왕이되어 류의전서는 당전기중 경전적 작품으로 용녀와 서생의 고사가 생긴다.
이시기에 용궁중 인격화하여 희노애락의 정감을 느끼는 존재로 변한다.
서한시 불교가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래되고 동한시기 불교전적이 한역화 되고 불교고사중 용과 아주 비슷한 동물이 있는데 범어로 나까라 한다.
신강 커서얼 석굴 벽화 벽면상 나까가 있는데 금시조의 입에 남아의 망사로서 인도신화중 나까는 지옥수역에서 거주한다.
반인 반사로서 지옥과 바다의 흑암을 비춘다.
불교전래후 인도의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사신숭배를 포함하게 되고 나까는 호불의 천용8부중 하나로 한역 불경중 현장의 대당서역기중에 이러한 사왕이 용왕이 된다.
이러한 용왕이 인형이 된다.
불교 나까왕의 영향으로 중국용은 사람의 형상이 출현한다.
송화 대리국 범상권중 8대용왕이 최초로 지금의 용왕형상이 된다.
대리국은 백족위주의 정권으로 운남일대의 정권인데 인도불교가 당대 초년에 전래되는데 수백년간 흥성하여 대리 숭성사탑등을 남기는데 남조도전 대리국범상전등을 남긴다.
이는 진귀한 고대회화로 대리의 용왕은 사람의 외형특징을 갖는데 인형의 신이 된다.
마괴소설 서유기중의 용왕은 인간과 더욱 많은 공통점을 갖는데 4명의 용왕은 가족으로 상호지간에 형제관계가 된다.
더구나 각자의 개성과 품덕을 갖는다.
[출처] 중국의 용문화 중국의 상징|작성자 박기수
첫댓글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