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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묵상글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 영적 사춘기, 관계의 재편.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5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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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3 04:34
- 영적 사춘기, 관계의 재편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와 형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이지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당신 어머니가 아니라고 내치시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실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럴 리 없고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뜻은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신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초대의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즉시 그리고 어찌 그리 단호하게 하실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준비된 말씀일까?
생각되면서 주님께선 실로 마리아를 내치신 건 아닐까? 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이 아니고 12살 때부터 이미 준비된 말씀입니다.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 성전 방문 때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 남으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께 왜 부모와 떨어져 속을 썩이느냐는 나무람을 들으셨지요.
이때 주님께서는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를 나무라십니다.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냐고 말입니다.
이때 이미 우리 사춘기처럼 주님도 갈라서기를 하신 걸까요?
제 생각에 사춘기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영적인 사춘기입니다.
혈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 가신 것이고,
마리아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아버지임을 선언하신 것이니
주님께서 친어머니 마리아를 내치고 끊으신 것은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매정하게 보이지만 육신의 어머니이심은 끊으시고
어머니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할 하느님 딸일 뿐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지요.
‘관계의 재편’이라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사춘기를 거쳐
관계를 인간적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 재편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 곁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머물고,
자녀를 내 자식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이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하느님의 딸이요,
주님의 어머니들이 되는 관계 재편을 우리도 오늘부터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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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참가족 명품 공동체
“하느님, 공동체, 미사와 강론, 서비스업, 렉시오디비나”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시편122,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제가 800km 2000리 산타아고 순례여정중 가장 많이 기도로 바쳤던 성구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참가족 명품 공동체에 속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2000년 전통의 가톨릭교회입니다. 명품종교 가톨릭에 명품성인들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참으로 삶의 좌표, 희망의 징표가 되는 명품성인들을 보고 배울 때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참 다양한 성인들입니다. 모양, 크기, 색깔, 향기가 다 다른 꽃들처럼 성인들도 교회내에서 참 다양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인들을 기념하고 기릴뿐 아니라 각자 성인들을 보고 배우며 성인으로 불림받았음을 깨달아 성인답게 성화의 여정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은 피에트렐치나의 오상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소속되어 한결같이 성사생활은 물론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겼던 수도사제였습니다. 특히 성인은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지니고 주님의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중인 1990년에 하느님의 종이 되었고, 1997년에 가경자가 되었으며, 그후 기적심사에서 그 기적이 인정되어 1999년 5월2일 시복되었고, 마침내 3년후 2002년 6월16일 성인의 반열에 오릅니다. 성인의 어록일부만 소개합니다.
“병중에 있는 사람은 미사를 봉헌하는 중인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밑에 있게 하고 천국의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픔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성인의 삶이 고통받는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으로 다양한 성인들을 모시고 있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참 복된 우리 신자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참가족 명품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을까요? 믿는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일 것이며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답을 드립니다. 다음 복음의 짧은 대목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그대로 예수님의 한가족이 되어 이 거룩한 성전안에서 당신을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빌론 유배후 다리우스 임금의 명령으로 귀환공동체를 위한 성전 준공과 봉헌이 이뤄짐을 봅니다. 공동체가 한가족을 이루기 위한 가시적 공간의 하느님의 집인 성전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런 배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명품공동체를 탐구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찾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신자들입니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참으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하느님 자리에 놓지 못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간품위의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찾아 만나야 하는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래서 매일 미사와 기도의 공동전례입니다.
둘째,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한가족 명품 공동체라 했습니다. 함께 모였다 해서 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히 바라볼 중심의 방향이 같아야 다양성의 자유롭고 행복한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예수님 중심이 같아서 사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장면이 그대로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는 제자들입니다. 날마다 공동미사전례은총이 예수님의 참가족 명품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미사와 강론’이 중심에 자리한 공동체입니다.
지난 가톨릭신문 13면의 기사내용을 공감하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부흥하는 개신교회 비결은 역시 ‘예배와 설교’>라는 제하에, 부흥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의 비교가 우리 가톨릭교회에도 참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예배와 설교>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미사와 강론>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부흥하는 교회 목회자의 45%가 교회 성장의 핵심동력을 ‘예배와 설교’를 꼽았고, 이어 ‘신자들간의 친밀한 교제와 공동체 의식(39%)’, 소그룹 활성화(29%)를 꼽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구성도 주일학교 학생19%, 청년18%, 장년38%, 시니어25%로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고, 쇠퇴하는 교회는 이 반대로 역피라미드형에 가까웠다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노화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 보여줍니다. 우선적으로 본질적 중요사항이 ‘미사와 강론’임을 절감합니다.
넷째, 서비스업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학교, 병원, 음식점처럼 명실공히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서비스업의 세 필수요소는 제가 자주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사람이 좋아야 합니다. 친절한 환대의 배려와 존중감이 뛰어난 온화한 사람이면 좋습니다. 둘째는 실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 분야에 유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쓸모 없습니다. 그러니 부단히 공부하고 실력을 연마하여 유능한 실력을 지녀야 합니다. 셋째, 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안팎의 환경이니 사람환경이 우선이고 다음은 건물입니다. 안팎으로 잘 정돈정리되고 조화와 균형이 이뤄진 아름다운 환경이어야 합니다. 특히 전례공간인 하느님의 집인 성전의 중요성은 제일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서비스업의 세 관점에서 자주 요셉수도공동체를 바라보곤 합니다.
다섯째, 렉시오 디비나가 생활화한 공동체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입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의 말씀 공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와 말씀의 사랑과 공부입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수행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을 사랑하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는 그대로 관상의 생활화가 됩니다. <말씀의 읽기와 경청, 묵상, 기도, 관상, 말씀의 실천>의 구조에 따라 렉시오 디비나를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정화와 성화,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뒤따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위한 다섯가지 요소를 나눠봤습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지상에서의 미완의 순례여정중인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위로와 치유의 구원에,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 형성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루카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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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시며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시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첫째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되,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또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사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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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롬비아 선교센터에서 며칠 묵으면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친화력이 좋았습니다. 센터에 온 지 18개월 되었는데 손님이 18번째 왔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손님이 오면 방을 청소해야 하고, 손님이 가면 방을 정리해야 합니다. 본인은 이미 몇 번씩 갔던 곳을 가야 합니다. 손님을 위해 식사를 챙겨야 합니다. 공항에 가서 데리고 와야 하고, 공항까지 데려다주어야 합니다. 손님이 있는 동안은 본인의 개인 생활이 거의 없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5팀이 더 온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았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사무처장 주교님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내년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건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현지인 가족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가족은 저희를 집에 초대해 주었고, 내년 사제 모임에 점심을 준비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 가족은 시장 성당에서 미사 드리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동안에도 시장 성당 미사를 함께 봉헌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와 서울 대교구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한 지역을 돕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서울 대교구에서 도움을 주는 프로젝트입니다. 벌써 3번을 하였고, 매년 5번 정도는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운영하는 선교센터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묶인 이를 풀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포하셨던 말씀이 신부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세례받지 않은 분들이 선교센터를 찾아왔습니다. 선교센터는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아직 세례받지 않았지만 이미 세례명으로 부르면서 지냈습니다. 미카엘 미카엘라 부부와 안나 자매님은 12월에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내년에 세례받기로 했는데 미카엘 형제님이 대부를 서기로 했습니다. 옷감 장수 리디아가 바오로 사도를 도왔듯이 많은 분이 신부님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8년 넘게 선교사로 있었던 신부님은 콜롬비아 선교센터에 왔을 때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오면서 선교센터는 활력을 얻었고, 말 그대로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었고, 현지인들의 고충과 아픔을 들어주었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기꺼이 함께하였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2000년 전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미 10년 넘게 선교사로 있었기에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주교님께서 허락하시면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지금은 자동차가 없어도 큰 불편이 없지만, 선교센터가 성장하면서 자동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부님이 있으니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2026년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답사를 다녀오면서 거룩한 변모 당시 하늘에서 들려왔던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갔지만, 영적으로 많은 도움 받았던 ‘답사’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부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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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2일 월요일- 서른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비폭력의 삶에 투신하기
비폭력이 시민 인권 운동의 핵심 기풍이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연방 하원의원 존 루이스(John Lewis: 1940-2020)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비폭력에 대한 그의 투신의 토대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비폭력의 철학과 의식적 훈련에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비폭력을 단순히 기교나 전략으로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 즉 살아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는 이들로서 모든 인간 존재 안에 신성의 불꽃이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 인격은 신성한 무엇이고 특별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다른 한 인격체로서나 한 국가로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지고 창조된 그 신성의 불꽃, 그 인간성의 불꽃을 파괴할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셀마의 짐 클락 보안관(Sheriff Jim Clark: 1965년 “피의 일요일” 당시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함)나 버밍햄의 불 코너(Bull Corner: 1963년 시위대에게 경찰견과 소방호스로 공격 지시) 앨러바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 “분리지만 평등”을 주장하며 인종차별 정책을 옹호함)를 체제의 희생자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억압자이자 동시에 불의한 사회 구조의 희생자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싸우고자 했던 것은 개인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악한 시스템이었습니다. [1]
신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 1935-2012)는 당시 미국 시민권 운동의 중심지였던 셀마(Selma)에서 벌어진 극도로 긴장된 순간을 회상합니다. 그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군중의 양심에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비폭력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킹은 자기를 따르던 이들에게 비폭력에 대한 이해를 깊이 스며들게 하였기에 이 비폭력이 당시 시민권 운동 전체의 핵심적 기풍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에베니저 침례교회 앞에 서 있던 많은 흑인 군중과 백인 활동가들이 몽고메리에서 온 흑인 장례식장 대표가 갑작스럽게 도착하자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말인 즉슨, 그날 오후, 몽고메리 주청사 근처에서 흑인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말을 탄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도망갈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경찰은 학생들에게 “흩어지든지 결과를 감수하라”는 냉소적인 명령을 내렸으며, 기마 경찰들이 시위대 속으로 돌진하며 무차별적으로 폭행했고, 부상자들에게는 2시간 동안 구급차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던 군중은 극심한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행진하자!"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뒤쪽 맞은편 거리에는 알라바마 주경찰들과 짐 클락(Jim Clark) 보안관의 지역 경찰 병력이 줄지어 서서 시위대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흑인 목사가 마이크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노래를 부를 시간입니다!" 그는 이 가사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그러자 이 노래를 알고 있던 이들이 노래로 응답했습니다. "물론이죠, 주님!"... 이어서 그는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 협의회(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의 지도자들을 하나씩 언급하며 노래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군중은 이름 하나하나마다 "물론이죠, 물론이죠, 주님!" 하고 응답했습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정을 하나로 모으고, 신앙적 확신을 강화하며, 비폭력의 길을 선택하는 영적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상치 않게 "보안관 짐 클락을 사랑합니까?!" 하고 노래 불렀습니다 "물...론이죠, 주님." 하는 답이 놀라 머뭇거리던 군중에게서 나왔습니다. "짐 클락을 사랑합니까?" "물론이죠, 주님!" 이번에는 그들이 더 크게 노래했습니다. "짐 클락을 사랑합니까?" 이제는 아모스서 1장과 2장에서처럼 분명하게 분노로 들끓던 군중이 사랑과 비폭력의 길을 받아들이는 결정적 순간이 온 것입니다. "물론이죠, 물론이죠, 주님!"
그런 다음 제임스 베벨 목사(Rev. James Bevel)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저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선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짐 클락을 패배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나요, 짐? -우리는 당신이 마음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을 미워함으로써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변화할 때까지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고통에 대해 마음 깊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커져가는 무력감을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않고 영적 실천으로 승화하기 위해 평화 조성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술탄을 직접 만나러 갔던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작된 프란치스칸 방식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종교간 화해와 협력의 길이 발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Robert H.
References
[1] John Dear, “Nonviolence Is Christian Love in Action: A Conversation with John Lewis,” ONEING 10, no. 2, Nonviolence (2022): 42.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2] Walter Wink, 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 (Fortress Press, 2003), 64, 65–6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oa Heftiba,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갈등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관점이나 배경은 다르지만, 힘이 아니라 용기로 공통된 가치—예를 들어 사랑, 평화,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경청하고 바뀔 수 있도록 자신들을 내맡기고자 하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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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의 사랑은 치유와 용서, 회복과 화해에 중심을 두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374-444)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설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가 애써 설명하고자 했던 핵심은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을 끌어내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당신 가족의 지위까지 끌어올리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어머니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을 경멸했다고 상상하거나, 형제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무시했다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너희 아버니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마땅히 해야 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은 형제들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가장 큰 존경과 가장 온전한 애정을 보여야 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온전하고 합당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영적 가족으로 끌어올리시면서, 동시에 육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여전히 유지하신다는 점이 강조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 저자는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는 말씀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루카 복음 저자는 이 말씀이 가족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피를 나눈 관계에 대해서도 단순히 그 육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영적인 사랑과 존경의 마음음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가족은 신성한 공동체이지만, 상처받기 쉬운 공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족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쓰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상처, 오해, 침묵, 단절은 쉽게 간과되기가 일쑤입니다. 가족의 관계는 우리가 너무 가깝게 여기기에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하는 부분일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방어보다 치유를 먼저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보호뿐 아니라 치유와 용서, 회복과 화해에 중심을 두는 사랑입니다. 달리 말해, 아픔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랑도 있어야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싸매주고 치유하는 사랑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도전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관계 안에는 이런 아픔이 없어야 하지만, 또 아픔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족이라는 관계성은 사랑과 상처가 공존하는 현실임을 우리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 관계는 때로 매우 파괴적일 수 있으며, 가족 구성원에게 받는 상처는 낯선 사람에게 받는 상처보다 더 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말 한마디, 침묵, 무시, 통제가 깊은 상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사제 성소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제를 많이 만들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 안에서부터 우리가 받는 보편 사제직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도록 서로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제의 역할은 이 세상과 저 세상, 내재와 초월,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정은 이 세상에서부터 세상적 가치가 전부가 아니라 더 큰 세상, 즉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있음을 배우는 곳이어야 하고, 또 그 배움의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보편 사제로서 역할을 하는 부모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무조건 이상화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관계를 더 깊은 가족으로 보시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이 참되게 유지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관계성 안에 모든 관계성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기도의 궁극적인 지향은 바로 이 관계성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맺어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지향을 두고 정성을 들여 사랑과 관계성의 하느님께 기도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육신의 혈연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조금 더 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만 보지 말고, 어머니와 자녀, 형제자매간, 이웃 등 다양한 인간 관계성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인식이 우리 내면에 깊이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어떤 가족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모든 인간 관계를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로 받아들이며 참된 관계성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현해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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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새 가족은 말씀을 듣고 행한다
이 교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임을 가르칩니다. 누가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해 공손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니, 당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하찮게 여기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분은 모세 율법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히느님께서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될 것이다"(신명 5,16) 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형제들뿐 아니라 원수들까지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당신 말씀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하신 방법을 설명해 드리지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최고로 공경하고 완전하게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받아들이는 자세만큼 더 온전한 사랑을 내리시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 아닙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온전한 복종으로 당신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기꺼이 당신의 멍에를질 열망을 품도록 하실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3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어머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요한이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을 실제 모습 그대로 봐올”(l요한 3,2) 때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고, 그분과 똑같은 존재가 될 것이고, 그분과 똑같은 방법으로 알고 이해하며, 온통 그분과 똑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느넘 자녀의 본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이라 해도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 수 없으며, 내가 지혜의 본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이라 해도 나를 지혜롭게 하실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아직은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l요한 3,2). 우리는 요한이 몸소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고 말한 것만을 알 따름입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무언가가 이 모든 것을 감추고 있으며, 이 지식을 숨기고 있습니다.(47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X.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거슬리는 것들에 대하여
제1 준비 묵상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하십시오:
“내 자녀야, 너를 그렇게도 사랑한 내 거룩한 성심을 더 이상 상하게 하지 마라.”
제2 준비 묵상
내 안에서 예수 성심을 거슬리는 모든 것을 버릴 은총을 청하십시오.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특히 거슬리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세속적인 정신
2.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 미지근함
3.죄
성찰
당신이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지라도,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기도조차 하지 않으셨던 바로 그 세상, 그분께서 말씀하셨듯이 온통 악에 빠진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은 완전히 반대됩니다.
세상의 정신은 탐욕의 정신입니다.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또한 야망의 정신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교만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이며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고, 겸손한 이들을 멸시하고 얕잡아 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세상 재물에서 벗어난 정신입니다.
세상 것을 마치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사용하며, 그것들이 더 고귀하고 높은 목적을 위한 피조물임을 기억합니다.
그것들은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유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겸손과 자기희생, 자기 망각의 정신입니다.
은밀히 일하고 기도하며 고통을 견디고, 세상에서 감춰지고 무시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적용
이 두 가지 정신 중에서 내 안에 더 강하게 자리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안에 살고 있든, 수도생활의 보호된 피난처 안에 살고 있든, 나의 상태에 따라 어느 정도든 세속적인 정신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 내 의무입니다.
기도와 결심
주님, 저는 어디든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심의 정신을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빛과 은총을 주소서.
그 정신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사랑한 후에는 더욱 닮아가게 하소서.
오 주님, 제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같게 만들어 주소서.(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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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아이가 오랫동안 키웠던 애완견이 병으로 죽었다며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애완견을 키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슬픔이 너무 컸고, 이런 슬픔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뒤, 이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애완견을 다시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그때, 또 이 슬픔이 반복되는 것이 싫다며?”라고 묻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만, 그전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이별의 슬픔보다 행복을 주는 기쁨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과 달리 최고의 행복을 주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마음이 어쩌면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이 세상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큰 사랑을 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당신 사랑으로 주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는 가족 관계가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가족의 방문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관계보다 더 중요한 가족의 정의를 제시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혈연 중심 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 안에서 맺어지는 영적 가족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기보다, 단순한 혈연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이 과연 이 안에 있을까요?
내 신앙 공동체를 ‘영적 가족’으로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단순한 혈연관계 등을 중시하면서, 가지고 있던 신앙까지도 남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자기 삶 안에서 “예,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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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몸에 지닌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 /
오상(五傷)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8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묵상을 즐겨했다.
1903년 16세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해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 종신 서원을 하고, 1910년 8월 10일 23세 때 고향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간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에 징집되어 1918년 해제받기까지 수차 병가를 받았고,
결국 기관지염으로 군 복무 불능 판정을 받아 산조반니 로톤도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다시금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의 흔적을 알았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았으나 몇 달 만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는 고통을 50년이나 겪었다.
이 오상 소문은 널리 퍼져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인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에 그는 수도원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 당했다.
그 후 미사는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이런 제재는 되풀이되었다.
1931년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성인은 이를 하느님의 뜻이라며 순명했다.
격리 기간 동안 성인은 미사와 기도로 지내다가 1934년에 가서야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 후 1960년에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
1963년에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인은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 23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비오 신부는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면서,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고, 신앙 안에서 모든 행실을 행하였다.
이 신앙은 그가 알 수 없는 하느님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했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1999년에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의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오상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성인은 사목적 열정으로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을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와 병자를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 백성을 섬겼다.
그리고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닌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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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혈육을 넘어 참 신앙의 어머님이신 마리아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왜 살며 지금의 삶은 어떤가?
가끔은 이런 질문을 떫게 여기면서 그 답변을 피하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 답은 있어야만 삶이 분명해질 게다.
그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이 걸린단다.
배우자와 자녀, 부모 형제 때문에 산다나.
그렇다.
가족이라는 인연만큼 소중한 건 이 공동체란 세상에는 없다.
그들과 기쁨으로 사는 게 삶의 어느 면에서는 정말 중요할 게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 개입을 청해야만 하리라.
그 기쁨은 주님 은총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기에.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많은 군중 때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 중 누가 예수님께 나아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런 사람들이다.”’
얼핏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많은 이가 두고두고 의아하게 생각할 게다.
그러나 이의 초점은 그분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것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과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가족 공동체를 만드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의 법칙을 따르는 이들만이 당신 가족이 된다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를 의미할 게다.
사실 예수님은 어린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 축제가 끝나고 나자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사흘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으신 부모님께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라며
부모님께 쾌나 섭섭하게 해 드린 적이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 뜻에 따르려면 혈육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소시 적부터 의당 예고하신 거다.
지금 예수님은 그때 그 모습이나 별반 다름 아니시다.
아들이 보고 싶어 왔으나 그분께서는 만나려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라고 냉정히 말씀하신다.
이런 예수님께 성모님은 그 옛날 섭섭했던 그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셨는지도 모를게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셨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게 크고 보편적 사랑,
더 많은 이를 형제자매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일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하나가 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도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겨 드리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라 단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 관계를 바라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먼저 떠나는 불효자가 아닌,
성모님을 혈육을 넘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로 만드셨다.
혈육에만 매달려서 그 큰 하느님 뜻을 모르시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매인 게 아닌
하느님과의 뜻을 이루려는 관계임을 분명히 보이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해타산에만 젖는 안타까운 가족 관계를,
주님 말씀으로 다져진 찐한 혈육의 참된 가족으로 거듭 나야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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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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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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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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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처럼
당신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당신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과 그 사람은 형제 관계가 됩니다.
즉 예수님과 닮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표현에서 우리는
형제 관계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같은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즉 형제 관계에 머물기 위해서
다른 형제에게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앞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할 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 수도 공동체는
같은 신앙, 같은 이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들 공동체에 살면서
우리의 초점은 하느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형제성은
우리가 얼마나 친한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각 구성원이 하느님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성향이 맞지 않아도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공동체 안에 머물 수 있고
그렇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형제로 살아가기에 친교도 중요하지만
기도와 미사는 서로 형제로 살아가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오늘도 우리 서로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힘이 되어 주고
그 길에서 형제자매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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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미사 때마다 ‘하느님’, ‘주님’ 다음으로 자주 사용하는 호칭이 ‘형제, 자매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그 호칭을 사용하면서 정작 나와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 나라’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과의 관계를 정말 ‘혈육’과도 같은 끈끈한 관계로 여기고 있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나의 ‘가족’만큼 깊은 친교를 맺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하느님 앞에 한 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저만 그럴까요? 제가 드린 말씀을 듣고 속으로 뜨끔하진 않으셨는지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하느님을 중심으로 맺어진 우리의 영적 관계를 꼼꼼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이 성당 안에서 나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서먹한 관계에 있는 이들을 부르는 애매한 호칭으로 전락해 버렸다면 어서 빨리 우리의 친교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 그리고 당신과 우리 사이를 ‘영적인 가족’이라는 새로운 끈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그건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지요. 하느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부족하고 약하며 허물과 잘못으로 가득한 우리는 ‘감히’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싶다는 꿈 조차 꿀 수 없는, 또한 꾸어서도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가족이란 ‘혈연’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하나로 묶여지는 특별한 관계성인데, 전능하신 하느님과 비천한 우리는 그 어떤 면에서도 공통분모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마련해주신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음으로 듣고 머무르며, 품고 실행하는 말씀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를 묶어 한 가족을 이루게 해 줍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보다 단단하고 친밀하게 묶으려면 말씀이라는 끈을 사랑이라는 튼튼한 매듭으로 묶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실천’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시키는 일을 손과 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을 ‘신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 신앙과 생활이 언제나 한 몸처럼 이어져야 신앙생활입니다. 머리로 아는 구원의 진리를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가 이루어져야 신앙생활입니다. 주일미사에 빠짐 없이 참례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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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5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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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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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신동민 프란치스코(청라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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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과 영광의 상처!>
오늘 우리는 피에트릴치나의 성 비오 사제를 기억합니다. 통상 성인들의 이름 앞에 어디 출신인지를 붙이곤 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시에나의 카타리나 등등. 앞쪽에 있는 것은 도시 이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오 신부님은 1887년 피에트릴치나에서 탄생하셨는데, 이탈리아 말로 피에트릴치나(Pietrelcina)는 피에트라(Pietra)의 애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에트릴치나라는 말은 작은 돌이라는 뜻입니다.
비옥한 농토는 거의 없고 척박하고 쓸모없는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했던 마을이 피에트릴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요 관광지가 되어, 자갈밭이었던 과거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교회 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비오 신부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큰 영적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러운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었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간혹 부끄러움에 죄를 숨기거나 축소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던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입술만 나불거리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느님을 얕본단 말입니까?”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그릇된 생활을 고치려는 의지가 아주 약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더러운 놈!”
며칠 후, 그토록 모질게 쫓겨난 그 사람이 울면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그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활짝 팔을 벌리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격려했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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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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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이 감옥 탈출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혹시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자녀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간섭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최근,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 아들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어머니에게 소리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이제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제 인생을 돌려주세요!” 아들을 사랑한 나머지, 그의 모든 걸음을 통제했던 어머니의 애정은 결국 아들에게 숨 막히는 감옥이 되었고, 아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애정이 자녀를 망치듯, 방향을 잃은 애정은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 (루카 8,21) 이 말씀은 혈연의 애정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의 더 큰 사랑과 질서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은 애정이 어떻게 우리를 파멸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구약의 영웅 삼손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엄청난 힘을 받은 나지르인이었지만, 데릴라라는 여인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에 사로잡힙니다. 데릴라의 집요한 유혹에 넘어간 그는 결국 힘의 비밀인 머리카락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 순간, 삼손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노예로 전락한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강했지만, ‘데릴라에 대한 애정’이라는 끈에 묶여 영적으로는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선택한 이들은 세상의 애정을 끊어내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했지만, 하느님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라는 에즈라 예언자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하느님과의 계약이라는 더 큰 사랑을 지켜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지만, 프란치스코는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돌려주며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의 애정이라는 끈을 끊어내고 하느님이라는 더 큰 사랑을 선택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고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작은 애정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하느님이라는 영원하고 더 큰 사랑을 온전히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지만, 그 애정이 우리를 휘둘러 주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리게 한다면, 우리는 삼손과 같은 비극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외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 선종한 한 노 사제가 임종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작은 애정을 포기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더 큰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그 사랑 안에서 가장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이 노 사제처럼, 세상의 작은 애정에 묶여 머무는 대신 더 큰 사랑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용기를 냅시다.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가장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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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롬비아 선교센터에서 며칠 묵으면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친화력이 좋았습니다. 센터에 온 지 18개월 되었는데 손님이 18번째 왔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손님이 오면 방을 청소해야 하고, 손님이 가면 방을 정리해야 합니다. 본인은 이미 몇 번씩 갔던 곳을 가야 합니다. 손님을 위해 식사를 챙겨야 합니다. 공항에 가서 데리고 와야 하고, 공항까지 데려다주어야 합니다. 손님이 있는 동안은 본인의 개인 생활이 거의 없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5팀이 더 온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사무처장 주교님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내년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건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현지인 가족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가족은 저희를 집에 초대해 주었고, 내년 사제 모임에 점심을 준비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 가족은 시장 성당에서 미사 드리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동안에도 시장 성당 미사를 함께 봉헌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와 서울대교구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한 지역을 돕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서울대교구에서 도움을 주는 프로젝트입니다. 벌써 3번을 하였고, 매년 5번 정도는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운영하는 선교센터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묶인 이를 풀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포하셨던 말씀이 신부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세례받지 않은 분들이 선교센터를 찾아왔습니다. 선교센터는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아직 세례받지 않았지만 이미 세례명으로 부르면서 지냈습니다. 미카엘 미카엘라 부부와 안나 자매님은 12월에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내년에 세례받기로 했는데 미카엘 형제님이 대부를 서기로 했습니다. 옷감 장수 리디아가 바오로 사도를 도왔듯이 많은 분이 신부님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8년 넘게 선교사로 있었던 신부님은 콜롬비아 선교센터에 왔을 때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오면서 선교센터는 활력을 얻었고, 말 그대로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었고, 현지인들의 고충과 아픔을 들어주었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기꺼이 함께하였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2000년 전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미 10년 넘게 선교사로 있었기에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주교님께서 허락하시면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지금은 자동차가 없어도 큰 불편이 없지만, 선교센터가 성장하면서 자동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부님이 있으니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2026년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답사를 다녀오면서 거룩한 변모 당시 하늘에서 들려왔던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갔지만, 영적으로 많은 도움 받았던 ‘답사’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부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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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가족과 친척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드렸지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과 친척들을 매몰차게 대하시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말하는 마르코 복음서를(3,21 참조) 보면 이 부정적인 인상은 더 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 의도하신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가족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그분 어머니와 친척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께 더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느님께서 너무나 소중하시기에,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아들과 딸, 곧 가족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직무를 수행하시고자 가족을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에 둔다면 누구나 그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제자들로 제시합니다.(사도 1,14 참조)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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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9-2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가족보다 더 깊은 친밀성을 지닌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신다. 곧 “내 어머니요,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21절)라는 선언이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 유대보다 우선하는 영적 친교를 드러내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밝혀준다. 신앙은 듣는 데서 시작되지만, 실천을 통해 비로소 열매 맺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 들어 올리시는 말씀이다.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단순히 귀로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응답하신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낳으셨기에 행복하시지만, 무엇보다 말씀을 믿고 실천했기에 더욱 행복하시다.”(De sancta virginitate, 3)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세상 안에 낳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리서도 이 진리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깊은 친교 안에 들어가며, 이 친교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형성한다.”(2233항 참조) 교회는 혈연과 인종, 국적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이다. 신앙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고 있는가?” 신앙은 단순한 감정이나 전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의 실천이다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일상의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드러낼 때,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만연한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삶은 세상 속에 ‘하느님의 가족 문화’를 세우는 일이다. 이웃에게 관심을 두고, 용서와 자비를 실천하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주님의 가족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족으로 초대한다. 그분과의 친교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 말씀을 듣고 실행하며, 그리스도를 세상 안에 낳아주는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하겠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루카 8,21) 우리의 삶이 이 말씀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복음이 되기를 청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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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루가 8,19-21 (예수님의 참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계시게 함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와
함께 계신
하느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보듬으시는
하느님을
보듬음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에게
스미시는
하느님께
스밈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믿으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바람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따름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섬기시는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나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살림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가족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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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또는 구원을 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을, “나의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만 들어간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입니다.(마태 12,46) 사람들에게 가로막혀서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은 예수님의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설교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을 때, 그 사제의 가족이 찾아왔다면, 그러면 미사를 중단하고 가족을 만나야 하나? 어떤 사제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만일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사도들의 가족들이 찾아왔다면, 그러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중단하고 가족들을 만났을까? 사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미사 참례 중에 식구들이 찾아와서 불러낸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끔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 미사 참례를 중단하고 성당 밖으로 나가서 식구들을 만나는 사람도 있고,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사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고, 생명의 빵을 받아먹는 시간입니다. 식구가 아니라 더 중요한 사람이 찾아왔더라도, 미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미사 참례 중간에 나가는 것은 정말로 ‘예의 없는’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부부의 인연’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9,6)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와 형제자매도 전부 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인연’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유든지 간에 가족을 버리면 안 됩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고, 가족도 버렸다."(마태 4,22)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맞지만, 그들이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다 버린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선교활동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습니다.(1코린 9,5) 신앙인은 예수님의 성가정을 본받아서 자신의 가정도 성가정이 되기를 희망하고,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고, 가족이 함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핑계를 대면서 가족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을, “가족이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그리고 그 말씀을 가족이 함께 실행하여라.”라는 가르침으로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실행’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은 바로 옆에 있는 가족에게 먼저 해야 합니다. 만일에 가족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영적인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한데, 그것만 강조하다가 ‘육적인 가족’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에페 5,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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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친인척 관계를 뛰어넘는 영적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통래서 연결된 이들은 서로 형제들입니다. 관계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 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보면 출가함으로써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억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 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 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 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 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 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 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혈연관계에 집착하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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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과 형제 자매되는 법>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이셨던 것 같습니다. 출생부터도 부모의 뜻은 전혀 개입이 안 되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며칠씩 찾아 헤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장가를 가서 부모를 모신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모보다 먼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효자였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쫓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이렇게 냉랭하고 섭섭하게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불효자이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가정이라는 차원에서는 가장 효자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부모 곁을 떠났고, 생업까지도 뒤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아오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떠나온 집과 가족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예수님께서 효자였는지, 불효자였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제인 제가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식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효자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옆에서 잘 모시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원의를 채워드리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불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면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높고 또 많은 부분을 제일 먼저 저와 상의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의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사목자로 있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맨날 집에만 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효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예수님은 효자 그 이상인 분이시지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며 요셉 성인 역시 천사의 알림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순응하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정의 가족들은 효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식에 대한 존경심을 당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서 이 모든 인간적인 인연을 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은 섭섭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8,21)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만이 아니라 사목자인 제 안에서도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몇 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제보다도 신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목자로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목위원들이나 구역장, 반장 또는 단체장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과는 저의 육적인 형제 자매보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성당 초등부 교사들은 모두 어머니 교사들입니다. 행사 후 수고했다고 1박 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15~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남편 없이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는 것이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이 있기에 남편이 보내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한 형제 자매임을 체험할 수 있었던 단합대회였지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 본당 사제의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해 나갈 때 새로운 형제자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봉사 직분에 더욱 성실히 임하고 항상 겸손된 자세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형제 자매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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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유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과 형제 되기>
우리는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고는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합리화의 구실은 다 있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부모자식이건 부부사이건 소용이 없고, 법을 위반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 처리합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혈연, 지연에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는, 공동체란 울타리가 있어서 좋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감정에 치우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감정이나 파벌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교포사목을 하면서 이 두 사회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나를 기초로 한 이성의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공동체 사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것이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개인 이기주의냐 집단 이기주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혈육인 어머니와 형제를 무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랑에 바탕을 둔 공정으로 보완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6,63에서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육이 없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앞날에 대해 암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형제로 들어 높이십니다.
인간의 지위가 종에서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 상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됨으로써 신적인 위치로까지 들어 높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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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의 참 가족>
오늘 복음은 바로 말씀을 정성껏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혈연관계로 맺은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만으로는 안되고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에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는 열성과 원의"가 있어야 한다.
루카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사용한 동사는 "찾다."와"보다."라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갈망과 원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원의가 있는가? 모든 영성은 이 원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원의는 점 점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예수님의 가족으로 될 때까지 성숙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은 흡족하리니."(마태 5,6)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배고픔과 목마름만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예수님을 찾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복음 묵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이는 복음 묵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만이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분들과의 형제 자매들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어머니요 형제들로 바뀌어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위치는 밖에 서 있었다.
밖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늘 밖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깊이 더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밖에 서 있는 자세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낳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낳으신 분이 아니시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천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때 형제가 될 수 있다.
즉 같은 일을 하는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낳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가 되어 모두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행은 항상 들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서 이루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아서"(18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한 마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8절)는 말씀으로 시작한 8장의 결론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시다. 루카가 제시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약해보면
첫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첫 번째 자세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걸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선언하고 그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받아들인 말씀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노력하고 돌봄으로서 말씀이 점차적으로 꽃이 피도록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세 번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20) 아이를 잉태한 엄마는 태아의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항상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작업" 즉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네 번째.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빛을 받는다. 즉 좋은 땅이다. 즉 마리아의 삶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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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아이가 오랫동안 키웠던 애완견이 병으로 죽었다며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애완견을 키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슬픔이 너무 컸고, 이런 슬픔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뒤, 이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애완견을 다시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그때, 또 이 슬픔이 반복되는 것이 싫다며?”라고 묻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만, 그전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이별의 슬픔보다 행복을 주는 기쁨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과 달리 최고의 행복을 주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마음이 어쩌면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이 세상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큰 사랑을 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당신 사랑으로 주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는 가족 관계가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가족의 방문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관계보다 더 중요한 가족의 정의를 제시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혈연 중심 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 안에서 맺어지는 영적 가족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기보다, 단순한 혈연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이 과연 이 안에 있을까요?
내 신앙 공동체를 ‘영적 가족’으로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단순한 혈연관계 등을 중시하면서, 가지고 있던 신앙까지도 남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자기 삶 안에서 “예,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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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적 사춘기, 관계의 재편>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와 형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이지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당신 어머니가 아니라고 내치시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실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럴 리 없고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뜻은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신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초대의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즉시 그리고 어찌 그리 단호하게 하실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준비된 말씀일까? 생각되면서 주님께선 실로 마리아를 내치신 건 아닐까? 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이 아니고 12살 때부터 이미 준비된 말씀입니다.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 성전 방문 때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 남으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께 왜 부모와 떨어져 속을 썩이느냐는 나무람을 들으셨지요.
이때 주님께서는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를 나무라십니다.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냐고 말입니다.
이때 이미 우리 사춘기처럼 주님도 갈라서기를 하신 걸까요? 제 생각에 사춘기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영적인 사춘기입니다.
혈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 가신 것이고, 마리아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아버지임을 선언하신 것이니 주님께서 친어머니 마리아를 내치고 끊으신 것은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매정하게 보이지만 육신의 어머니이심은 끊으시고 어머니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할 하느님 딸일 뿐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지요. ‘관계의 재편’이라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사춘기를 거쳐 관계를 인간적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 재편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 곁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머물고,
자녀를 내 자식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이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하느님의 딸이요, 주님의 어머니들이 되는 관계 재편을 우리도 오늘부터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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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참 가족이셨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
오늘 복음(루카8,19-21)은 '예수님의 참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21세기 위대한 성인으로 불리는, 우리에게 '오상의 비오 신부님'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1887년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1902년 15세 때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들어가셨고, 1910년 23살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1918년부터 1968년 선종하실 때까지 무려 50년 동안 두 손과 발,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지니셨습니다. 곧 고통 속에서 사셨습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하심으로써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무려 50년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사신 분입니다. 오상이라는 거룩한 고통도 있었지만, 한 때 사제의 본질적 직무인 미사와 고해성사가 금지되는 영적인 아픔도 겪으셨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기도의 중요성'을 현대 교회에 부각시킨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루에 평균 10시간 이상 고해성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50년 동안 고통을 겪으신 오상의 비오 신부님, 그리고 모든 고통을 인내(기도)로써 이겨내신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묵상해 봅시다!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더욱 희생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 밑에 있게 하고, 천국 문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그대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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