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참포도나무요(8)
무릇 내게 붙어 있어야
요 15:4-11 / 김광일 목사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 어머니가 기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작별하는 순간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고 항구에서 배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 테일러의 마음속에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깨달았습니다.
그 후 테일러의 맏딸 그래이시가 8살 때 갑자기 죽었습니다. 상해로 가는 배 안에서 5살난 아들을 잃었습니다. 또 막내아들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고 아내마저 33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테일러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통곡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실 때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맏딸 그래이시가 죽었을 때 “다른 아이가 아니라 구원받은 그레이시를 데려가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섯 살 난 아들이 죽었을 때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죽은 아이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품 안에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와 함께 12년 동안 행복하게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존전으로 데려 가심에 감사하며 주를 위해 더욱 헌신할 것을 서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게 한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테일러의 마음에 빛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진짜 믿지 못한 사실과 예수께서 포도나무시고 자신은 가지임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가지인 자신은 오직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와 하나인 사실만 믿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에게 붙어있는 몸이라는 것을 믿는 순간 은혜의 문이 열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말입니다. “그 분께서 나를 어느 곳에 두시든, 어떤 일을 겪게 하시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도 은혜를 주시며 가장 어려운 상태에서도 은혜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인에게 값싼 물건을 사러 보내건, 가장 비싼 물건을 사러 보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그에게 필요한 돈을 지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께 붙어 있다면 당혹스러운 경우에 처한다 해도 마땅히 인도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하신다 해도 마땅히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고통과 시련 가운데 처하게 하신다 해도 마땅히 힘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테일러는 긴급한 경우를 당했을 때가 많았으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 붙어 있는 믿음이 확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와 ‘너희’의 분명한 존재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붙어 있으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 안에 들어오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영적 교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사랑과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무릇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릇 주께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열매를 맺으리라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가 런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만 명 이상 모였고, 집회 마지막날 저녁에 스타디움에 10만명이 참석했습니다. 어느 목사 부인도 집회에 참석해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한 남자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힐긋 쳐다보니 도무지 믿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앉는데 약간 술 냄새가 났습니다. 두 남자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금방 친해져 설교 시간 내내 잡담을 합니다. “저 목사 얘긴 전부 거짓말이야” “그럼 그럼, 헌금 뜯어내려고 저래” 목사 부인은 대단히 언짢았습니다. 믿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비방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가 두 시간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설교시간 내내 불평하고 쑥덕거리던 두 사람의 말이 없어졌습니다. 잠들었나 하고 쳐다봤더니 두 눈을 뜨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설교를 마치면서 “누구든지 이제부터 예수 믿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목사 부인 옆에 앉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옆 사람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저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당신은 마음에 없소?” 부인 바로 옆에 앉은 다른 남자가 우물 주물 하더니 “나도 나가지요” 하면서 일어나 양복 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 목사 부인에게 주면서 “부인, 이 지갑을 받으시죠” “웬 지갑이죠?” “부인 돈지갑을 방금 훔쳤는데 저 강단 앞으로 나가면서 지갑을 부인에게 돌려드립니다” 하더랍니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께 붙어 있으면 반드시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의 ‘거하다’는 신비로운 연합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도나무 수액이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줄기로 순환되듯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꽃을 피우는 화초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과수의 가지입니다. 과수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수를 관상용으로 심는 농부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야말로 제자 즉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이기 때문입니다. 배지를 보면 신분을 확인할 수 있듯이 열매를 보고서 참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매는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니라 주께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깨끗케 하심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예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오로지 예수께 붙어 있을 때 은혜와 능력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응답을 이루리라
1979년 11월 4일, 이란에 있던 미국 대사관의 외교관, 미국 민간인 63명이 1981년 1월 20일까지 444일간 억류된 인질 사태가 있었습니다. 당시 미 행정부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파견했지만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레이건 대통령이 이란과 협상해서 해방을 시켰는데 당시 억류되었던 캐서린 쿠브(Kathryn Koob)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처음 5개월 동안은 지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안정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도와주실 것이다.’ 5개월 후 스위흐트와 있게 되었는데, 함께 기도하며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감옥 생활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라 일생을 바꾸어 놓는 천국이 되었습니다.” 같은 감옥이지만 처음 5개월 동안은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깊이에 들어가니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같은 곳이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오로지 주께 붙어 있어야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고 사태를 역전시킵니다. 내 뜻대로 응답되지 않아도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현재의 상황을 잘 대처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역사합니다. 많이 기도하면 많이 역사하시고 적게 기도하면 적게 역사하십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축복이 주어지고 우연은 필연이 됩니다. 기도는 최대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거하면서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농부의 관심은 좋은 나무와 좋은 곡식에 있습니다. 농작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유심히 관찰합니다. 병충해가 우려되면 농약을 뿌립니다. 잡초가 돋아나면 김을 매거나 제초제를 뿌려 잡초를 제거합니다. 더 많은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께 붙어 있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을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주 안에 거하며 주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기도는 소원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붙어 있음을 원하십니다. 부디 주께 붙어 있음으로 간구하는대로 응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쁨이 더하리라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네로(Nero Clavdivs Caesar)황제가 살았던 왕궁은 복도의 길이만 1.6km나 되는 호화찬란한 곳이었습니다. 벽마다 상아와 자개로 장식되었고, 천정에 샤워장치가 있어 찾아오는 손님에게 향수가 이슬처럼 뿌려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네로가 쓰고 있는 왕관은 30만 달러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말도 은으로 장식된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가 한번 출타할 때면 천 명의 군사와 마차가 뒤를 따랐고, 낚시를 할 때면 금으로 만든 낚시 바늘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값 비싸고 좋은 옷이 하도 많아 한 번 입었던 옷은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부귀영화의 극치를 누리며 살았던 네로는 과연 행복했습니까? 허무와 공포에 시달리다 자살로 인생을 쓸쓸히 마쳤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여기의 ‘내 기쁨’이란 원문을 직역하면 ‘나의 것인 그 기쁨’이란 뜻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맛본 사람만이 아는 지극한 기쁨입니다.
주께 붙어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기쁨이 주어진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시되 충만한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주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주께서 내 안에 계시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더해집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의 기쁨이 채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심을 알기에 그로부터 오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그 어떠한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19세기초 복음 전도자이자 목사였던 윌버 채프만(J. Wilbur Chapman)의 말입니다. “배가 가라앉는 이유는 배가 물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이 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것이 위험한 일이다. 초대교회는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다.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주변의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또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갖추고 있는 양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열매 맺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이요 주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 붙어 있어야 함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무릇 주께 붙어 있음으로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쁨이 더해지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집에 사십니까
요 15:4-8 / 김경진 목사
<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지쳐 있습니다. >
오늘 이 예배당에는 여덟 분 정도의 목사님과 순서 담당자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텅 비어 보이는 예배당입니다. 가정에서 모여 앉아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계실 여러분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모두 건강하시지요?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3월 1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예배당 문을 닫았을 때, 저는 정말 격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예배당 문을 닫는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쫓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죄악 된 모습,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에 더는 참으실 수 없어 나가라고 호통치시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예배당을 비웠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슬퍼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예배당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들도 많겠지만, 오늘 우리의 마음에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이 무엇일까요? ‘분노’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무언가에 화나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무언가를 향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또 정부로부터 핍박받고 있다고 분노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다고 힘들어하고 절망하면서 분노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감염병의 상황에서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비난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가정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처음에 우리가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때는, 그리고 코로나19가 시작될 때는 많은 사람이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정에서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면서 가정이 회복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른 소식들도 들려옵니다. 자녀와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부부 사이에 이혼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참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 20대 청년 4,4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코로나19의 상황에서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약 70%가 ‘코로나 블루’를 겪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왜 이렇게 분노가 일어나고, 왜 이토록 우울함이 생기며, 왜 이렇게 절망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누군가 무엇을 잘못한 까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많이 지쳤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광야 길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 양식이 없어 난동을 부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난동을 부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많이 지쳤습니다. 정부도 지쳤고, 공무원도 지쳤으며, 방역 당국도, 교회도, 일반인도, 청년도, 우리 모두가 지쳤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쳤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혐오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은 사회입니다. 혐오 표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니, 2015년에 나타난 온라인상 혐오 표현이 407만여 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년 후인 2018년에는 온라인상 혐오 표현이 약 1,176만 건으로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아마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이런 혐오 표현은 더욱 늘어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신천지를 향해 혐오 표현이 쏟아지는 것 같더니, 이후에는 국가와 정부를 향해, 그리고 지금은 또다시 교회를 향해 혐오 표현이 쏟아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름대로 여러 교회가 사회에 봉사하며 방역 지침에 협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는 현실에 당혹감을 금치 못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지친 많은 사람이 교회를 향해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 여러분의 마음도 참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
한 신도가 목사님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사람 중 하나가 저인 듯합니다. 제가 이 과정을 다투지 않고 이겨 나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믿지 않는 친정 식구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화살이 다 저에게 날아오고 있네요. 이단이 뭔지 모르는 아버지는 신문에 난 사랑제일교회 광고를 보고, 이제 교회는 나가지 말라는 억지까지 부리고 계십니다. 언니, 동생들은 ‘기독교, 예배 포기 못 한다’라는 교계의 반응 뉴스 사진을 저에게 날리며, 과연 하나님이 계신 것이냐고, 이기주의 아니냐며 난리입니다. 제가 무슨 기독교 대표도 아니고, 한국 기독교 대표도 아닌데…. 조금 다투다 기도하고는 미안하다고, 그리고 부끄럽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경험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달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더니 멈칫하고는 뒤로 물러선 후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들려져 있는 성경책이 보였습니다. ‘아, 교회에 다녀온다는 게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위협이 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으로 놀랐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향한 비난과 혐오의 시선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때론 참 황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도리어 세상을 향한 반감이 생기기도 하고, 정부를 향한 반감이 생기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서로의 잘못을 비난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오늘의 상황을 교회의 위기로 진단합니다. 교회가 정부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전도도 잘되지 않을 것 같다고,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이제는 예배당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온라인예배에 익숙해진 성도들이 예배당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을 것 같다고, 기독교의 쇠퇴가 점쳐진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쇄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탈출하여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는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겠습니까?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박해하지 말라고 투쟁하면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의 참 모습을 알리기 위해 강연이나 포럼을 개최하면 되겠습니까?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면 가능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지 않도록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을 골라서 하면 되겠습니까? 성도들이 흩어지기 전에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해야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해결될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이자 기도 제목입니다.
< 오직 ‘사랑’만이 기독교의 기독교 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해결의 길을 찾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중 8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오늘의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오늘의 상황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형국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벌어지는 많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만한 일들만 하고 있을까?’ 하는 한탄이 터질 지경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입니까? 왜 우리가 믿음이 좋은지를 증명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교회의 존재 이유조차 세상에 바르게 증거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하십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열매입니까? 한마디로 이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열매이자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열매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이겠습니까? 9절 이후의 말씀에서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9~12)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는 열매가 무엇이며, 우리로 하여금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인내하는 ‘사랑’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우리의 제자 됨을 증명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위기 속에서 자칫 사랑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 자칫 투쟁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분쟁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위기 가운데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사랑’만이 기독교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지켜야 하고, 어려울수록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칼이나 권력이나 어떤 재물이나 다른 무엇으로도 기독교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교회를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제자 됨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기독교 됨을, 교회 됨을, 제자 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저 감정으로 솟아나는 ‘사랑’이 아닌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이 땅에 보이신 깊은 ‘사랑’, 희생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열매로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4)
우리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드시며, 둘이 서로 꼭 붙어 있어야 가지가 나무로부터 오는 영양분과 수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열리는 열매일 뿐입니다.
다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 붙어 있습니까? 주님께 영양분을 얻어 자라나고 있습니까?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까? 교회에 붙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 생활에 붙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붙어 있고, 교회 생활에 붙어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주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나왔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교회 자체에 붙어 있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주님 안에 있는가? 주님께 붙어 있는 존재인가? 나는 지금까지 무엇에 붙어 있었으며, 무엇에 붙어서 살고 있었는가? 무엇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었는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만약 교회에만 붙어 있는 삶이었다면, 오늘과 같은 분리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었다면, 교회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 현실, 이 분리가 결코 두려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내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말 안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라고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말씀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양분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열매를 선물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열매를 얻도록 해 줄 것입니다. 이 열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우리의 제자 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 열매를 세상 사람들이 먹게 되면 그들도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랑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되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부동산 문제로 정부가 많은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도리어 이 조치 때문에 부동산 시세가 올랐다는 보도도 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에 사십니까? 얼마짜리 집에 사시나요? 어떤 동네에 사십니까? 이것이 과연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 집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까? 좋은 집에 사는 것만이 행복의 기준은 아닙니다. 큰 집에 살면서도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 말입니다. 그런 집은 어디에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조금 작은 집에 살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한 집이 되고, 기쁨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많은 분이 교회가 박해당하고 있다며 교회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교회가 쇄락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면 됩니다.
<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랑의 구현에 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패싸움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일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 교회가 형성되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기독교는 세상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인이라는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라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탄생했고 성장했습니다. 교회는 정복을 통해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한 게 아닙니다. 로마라는 엄청난 나라, 이방 신이 가득한 그 나라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포했으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며,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기독교를 만들었으며, 온 땅에 기독교를 퍼지게 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세상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이 예배, 정말 경건하게 드리고 싶어 하는 이 예배, 한 번도 빠짐없이 드리고 싶어 하는 이 예배를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잠시 양보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위기에 처했다고 많은 분이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교회를 알아줬습니까? 믿는 사람들을 존중해 주었습니까? 믿음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초대 교회가 어떠했습니까? 열두 명, 오십 명, 오백 명, 그저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믿음을 증거 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초대 교회를 형성해 가지 않았습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집에 사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가요? 그러나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계십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안에 거하고 계십니까?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으로부터 열매를 얻는 순환의 과정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반응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또다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2~14)
사랑입니다. 여전히 사랑입니다. 투쟁이 아닙니다. 분노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그것을 당부하십니다.
복 종
요 15:4 / 안양준 목사
오래 전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청년부와 ‘믿음의 삶’에 대해서 토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나도 성경대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소원보다도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하기도 하고, 말 한 마디에 귀신을 물리치기도 하고, 온갖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그렇게까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습니다.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무리 믿음 좋다는 사람도 바닷물 앞에서 “파도야! 잔잔해져라”고 명령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만약 예수님을 흉내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한 마디에 “바닷물이 잔잔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고 해도 옮길 것이라 했는데 실제에 있어는 너무 우리의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성경대로 살고 싶다는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하고 물으니까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살고 싶습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삶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위기에 빠질 때마다 건져 주시고, 적과 싸울 때마다 늘 승리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고, 평안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천사에게 들리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축복의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다 이 방법대로 살았습니다. 다른 성경의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사람이기에 겪게 되는 여러가지 역경과 환란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모든 나무 중에서도 포도나무는 그래도 귀한 나무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포도나무를 귀한 나무로 만듭니까? 포도나무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성한 잎입니까? 아니면 향기로운 꽃입니까? 모든 나무마다 제각기 장점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가지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나무는 뿌리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나무는 꽃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나무는 잎사귀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뭐니뭐니해도 그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장 영광스러울 때는 포도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렸을 때입니다. 크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열매가 한없이 열릴 때, 그래서 나무 전체가 포도송이에 의해서 가려질 때 그때 포도나무는 가장 사랑을 받고 보는 사람마다 감탄사를 내게 합니다.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외국의 포도원들은 차를 타고 지나가도 끝이 안보일 정도로 큰 곳이 많다고 합니다. 얼마 전 포도원을 배경으로 한 ‘구름 속의 산책’이란 비디오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포도를 거두면, 그 포도를 커다란 차에 실고, 여인들이 맨발로 올라가 그 위에서 춤을 춥니다. 그 때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포도 농사가 잘되었다고, 나무에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만큼은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면 자기만 좋은게 아닙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야! 저 사람 예수 믿더니 정말로 변했네. 성질도 변하고 부지런 해 지고”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보고 부러워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살고, 건강하고, 돈 잘 번다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믿음대로 살 때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옆집 사람은 교회에 다니더니 식구들 한테도 잘하고, 주일이면 온 식구가 다 함께 교회에 가는 데, 우리 남편은 매일 술만 먹고 툭하면 화내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열매는 돈 잘버는 게 아니고, 사람 자체가 곧 열매인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열매가 맺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나무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의 모든 힘을 줄기를 통해서 공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할 일은 그저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지가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가지를 잘라 버립니다.
교회생활 하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만 열심이고 교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 일이 첫째고 교회일이 둘째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생기면 모처럼 시간이 생겼다고 놀러가고 친구 만나러 가지 교회는 또 그 다음입니다.
교회가 볼 일 다 보고 난 후에 오는 곳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고, 축복의 삶을 살고 싶기는 하지만 자신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네 안에 거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시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는 살지 않는 사람이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마치 심장에서 피가 온 몸을 향해 퍼지듯이, 성령의 역사가 우리 삶 전체를 향해서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우리 삶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갈 5:22)
죄라고 하는 것도 별 게 아닙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처음부터 다 하나님에 붙어있게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니 죽음이 오게되고, 하나님을 떠나니 건강이 있을리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자연히 평안도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성도들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이미 성령이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그러한 삶이 경험되지를 않는다. 왜 그럽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성도라도 그 아름다운 삶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 해도 자기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복종합니까?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재물을 바치고, 시간 을 바치고, 선행을 하라고 할까봐 교회에 나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교회에 와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다”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우리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에 놓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것, 내 못된 성질과 습관, 다 죽었다고 여기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라고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마음은 온통 세상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 앉아서도 남에 대한 미움, 억울한 생각, 근심 걱정, 사업 걱정으로 마음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여기 앉아서는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모든 걱정거리, 미움과 나쁜 생각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 하나님 앞에 거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곧 열매맺는 길이요 기쁨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자비한 마음, 착한 마음,기쁨, 인내, 사랑하는 마음, 절제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음행이요 호색입니다. 요즈음 얼마나 성도덕이 문란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 6:1-2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길의 첫째가 교회에 나오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복음을 듣고 그 내용이 나를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대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 속에 성령의 열매가 내 속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잘되는 집과 안되는 집이 있었습니다. 잘되는 집은 별 재산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데 잘됩니다. 늘 화목해서 모두가 웃는 얼굴 환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잘 풀립니다. 그런데 다른 쪽 집은 재산도 꽤 물려받고, 자식도 많은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습니다. 늘 화목하지 못하고 화난 얼굴입니다. 가족은 늘 아프고 사업에 안되고 가난해져 갑니다.
안되는 쪽 가장이 잘되는 쪽 가장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을 부릅니다. “다 나오너라.” 그러자 즉시 모두가 다 뛰어 나옵니다. 가장은 명령했습니다. “들어가서 냉장고를 들고 나와라.” 그러자 온 가족이 여자들까지 가세해서 낑낑거리며 냉장고를 들고 나왔다. 그러자 가장은 말했습니다. “자 이제 그 냉장고를 지붕으로 던져라.” 모두들 지붕을 향해서 자세를 취합니다.
냉장고가 지붕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물론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에게 복종함으로 단합된 힘과 화합을 보여주었다. 안되는 쪽 가장이 집에 돌아갔다. 똑같이 해보았습니다. “다 나오너라.” 아무리 외쳐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찾아다니며 불렀더니 마지 못해서 찡그리며 나옵니다. “냉장고를 들고 나와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복종이 안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자기들에게 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회를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하고 복음의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가 풍성한 영광의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을 때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성도가 아름다운 행실을 많이 보일 때 모든 이의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모두 밝고 웃는 얼굴입니다. 물론 아픔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늘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19세기말 유명한 부흥사 토레이 목사의 간증을 보면 어느날 딸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슬픔에 눌려서 창문을 열고 딸의 이름을 부르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위로가 생기더니 기쁨이 찾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겨내고 또다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갔다고 합니다.
이 신비한 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하고 신비한 힘, 그리고 그 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아름다운 삶, 그것이 바로 성도에게만 있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일어나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이런 삶을 누가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건강하게 살고 부요하게 사는 것은 다음의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하나님이 다른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게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
요 15:4-7 / 피종진 목사
본문에 나오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성도가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원줄기에서 양분과 수액을 공급받듯이 성도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이라는 양분과 수액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영적 사귐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거하시면 됩니다. 예수님 밖의 세계는 구원과 영생이 없는 곳이고, 자비와 은총도 없는 곳이며, 주님의 사랑과 보호도 없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순간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순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환난과 핍박이 그들에게 극심할 때마다 그들이 항상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가진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소유한 모든 것은 다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고전 3:12,13).
로마서 8:10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자이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바로 예수 안에서 그 영이 살게 되고,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그 가지가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지에 열매 맺을 아무런 조건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수많은 포도의 열매를 맺게 되듯이 우리가 좀 부족하고 어리석어도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 붙어 있다는 조건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서에 보면 우리가 맺혀야 할 열매의 종류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의인의 열매입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잠 11:30) ②행위의 열매입니다.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잠 1:31) ③입술의 열매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④손의 열매입니다.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1) 열매 중에도 가장 귀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셋째, 버리운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잘려진 가지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버리운 가지는 불에 던져 사른다고 했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버리운 바가 되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긍휼과 자비도 없습니다. 예수 떠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고, 예수 안에서 있으면 모든 것이 새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심은 곧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버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예수 안에 거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소경들은 눈을 뜨게 해달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또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는 그의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했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면서 병 낫기를 소원했습니다. 이 모든 소원들은 예수 안에 있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7,8에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33:3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째,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주님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깔려 있어도 빛이 비치면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흑암같이 덮여있어도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조명될 때 어둠이 물러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주님의 세계는 항상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옥중에서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기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의 삶속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세상에서는 울다가도 교회에 와서는 웃어야 됩니다. 항상 우리는 이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슬퍼하지 말고 주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455장에 보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참 기쁨이 있기를 원하신다면 항상 예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버리운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주 안에 거하라”고 하신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안에 사는 사람
문기태 목사
예수 믿는 사람은 주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는 것은 예수님밖에서 살다가 예수님안으로 옮겨 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영접하여 우리안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예수님이 여러분안에 계시고 여러분이 예수님안에 거한다면 사단이나 세상의 공격에도 절대 안전합니다. 주님이 다 막아 주시고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의 노력 유무와 상관없이 여러분 인생의 종착역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안에 살면서 계속 죄된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와 못견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아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 들어가서도, 바로앞에 이끌려가서도 형통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맞서 싸웠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승리했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주안에 산다는 것은 형통과 승리와 능력이 보장된 축복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간 사실에만 감사하고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밖에서 살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그리스도안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살며 주안에서의 생활의 풍성한 축복을 깨닫고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특히 '주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주 안에서의 삶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주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안으로 옮겨 왔으면 주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주 안에서 든든히 서라(1)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으로 옮겨 오게 되면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기도 하고 시험이 찾아 오기도 합니다. 사단이 가져다 주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이런 바람을 맞을 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뿌리를 깊이 박고 굳건하게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사단은 쫓겨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통하는 삶이 찾아 옵니다.
그런데 교회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쉽게 흔들립니다. 의심의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의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교인에게 시험을 받아 상처를 입고 흔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믿음이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 수준에 머무르면 이런 바람에 쉽게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분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
하나님은 우리가 요동치 않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하지 않고 구한대로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환란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공격에도 불신앙에도 같이 휩쓸리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요동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었습니다. 위대한 치료자 예수님이 그의 동네에 가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분명히 자기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를 보지 못하시고 그냥 지나가 버리실까봐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못마땅해서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서 예수님의 관심을 끌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소경의 외침을 마침내 들으시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즉시 예수님 앞에 나갔고, 그 자리에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보살피십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열심을 꺾으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그 누구도 그의 열심을 꺾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 흔들려고 할 때 바디매오처럼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여러분 예수님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십시오. 그래서 믿음에 굳게 서서 확신을 가지고 삽시다. 사단이 어떤 강한 역풍을 날려도 날라가지 않고 든든히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
빌립보 교회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마음이 갈라져 교회안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개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유다서18-19절을 보면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만을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편을 가르는 사람을 가리켜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사단은 교회를 공격하며 이간질을 많이 사용합니다. 서로의 허물에 시선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비난하게 합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연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의 대적이 사단이라는 사실을 잊게 하려고 이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지체를 적으로 착각하게 하여 모든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테니스 복식게임을 하다보면 아주 게임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둘 중 한사람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면 잘 하던 사람도 부담이 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집니다. '파트너가 실수하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혼자 두 사람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겨 무리한 게임운영을 하게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게임을 아주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소 파트너가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파트너를 신뢰하고 실수를 많이 할 때라도 격려하며 자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어려운 게임이 풀리는 수가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운동경기처럼 혼자만 잘해서 잘되지 않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는 한 팀으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지체가 신뢰가 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가 눈에 잘 띄이고 무언가 일을 분담하여 함께 했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자서 다 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기고는 지나치게 간섭을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불쾌해지고 연합에도 금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진정한 연합을 위하여 믿음이 가지 않을 때도 지체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수했을 때에 비난하기보다는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역할분담을 하여 위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체의 패배는 곧 나의 패배요, 지체의 승리할 때 나도 함께 승리한다는 원리를 기억하고 지체가 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울 줄 아는 사람만이 승리의 감격을 누릴수 있을 것입니다.
시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러분 교회안에서 다른 이들과 마음을 연합하는데 힘쓰십시오. 출신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목장이 다르고 다른 점이 많아도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지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마음을 합하시기 바랍니다. 뜻을 합하시기 바랍니다. 사역을 함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3.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
사람마다 기쁨을 추구합니다. 각각 마음에 만족을 주는 기쁨을 찾아 다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적인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의 제한을 받습니다. 실패하였는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병들었는데 기뻐하는 것은 생각할 수 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실패 했을 때도 성공했을 때와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와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도 부요할 때와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쁨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안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나라경제가 어려워지고 직장 분위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에도 그 여파가 미치고 사회전반에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 왔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언어가 거칠어지고 사소한 일에도 싸울듯이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주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살기는 어려워졌지만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주님께서 주신 풍성한 기쁨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으므로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 구하여 받으므로 오히려 기쁨이 더 충만합니다. 시련을 만나 잠시 근심하나 오히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므로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고 더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며 살기 때문에 항상 억제할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살아갑니다.
부서진 질그릇같은 인생의 소유자인 화니 크로스비.이 여성은 맹인이었습니다.그녀는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됐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그녀는 스스로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믿고"감사"와 "기쁨"에 가득찬 삶을 살았습니다.화니 크로스비는 평생 9천 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기쁨을 시로 옮긴 것입니다.전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446장 "오 놀라운 구세주"가 바로 그녀의 찬송시입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 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메 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이 찬송에서 장애인의 슬픔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에 그녀 안에 있던 기쁨이 전염되어 절로 기쁨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슴하십니다.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가 잡혀 매를 죽도록 맞고 묶인채로 어두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안에 밀려오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반중에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감옥속의 다른 죄수들이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찬송소리는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감옥의 모든 문들이 열렸습니다. 죄수를 묶은 수갑이 다 풀렸습니다. 간수가 놀라 달려왔습니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가 다 탈옥한 줄 알고 자결하려는 그를 붙잡고 바울은 전도했습니다. 온 가족이 그 밤에 구원받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굉장한 일이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 바울이 바로 그 도시에서 체험한 사건입니다.
모두가 근심하며 찌푸린 얼굴로 사는 시대지만 우리들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면 그런 기적이 여기에서도 오늘날 수없이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항상 시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 주 안에 있음을 확신하고 주안에 굳건히 서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서로 마음을 합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하십시오
요 15:5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에서 얼쩡대는 차량 뒷유리창에 붙은 "당신도 초보였다"는 글귀처럼 우리 모두 한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누구의 표현처럼 교인들의 “위선행위를 탐지하는 안테나”를 세우고 다녔습니다.
특히 원치 않는 교회 출석을 시작하게 된 경우는 더욱 안테나를 높이 세웠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위선을 발견하기만 하면 교회 출석을 거부할 수 있는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음 놓고 기독교를 반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의 위선과 기회주의, 기만의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눈초리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지금 살피는 분은 없습니까? 하여간 털끝만한 위선의 냄새라도 감지하면 신속히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교회당에 발을 디딘 분은 없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공정한 눈으로 교인들을 둘러보게 되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분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면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속으로 우리를 향해서 말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신앙인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관성을 보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함께 하려고 나서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좋은 소식을 나누기 전에 먼저 자신이 좋은 소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천국 잔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천국잔치의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기쁨, 기도, 감사의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주님의 말씀도 동일한 사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 .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 . .”(요 15:5)
그러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해야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면, 만나자 마자 여러분이 믿는 믿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히 여러분을 알고 있는 이웃이나 친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 역할을 다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짠 맛을 확인해야 합니다. 밝기를 확인해야 합니다.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그 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주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삶을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을 가지는 것을 별로 급한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조차 우리처럼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답하기 전에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십시오.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받는 인상은 어떻습니까?" 하고 한번 물어보면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답할까요?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부정적인 대답을 할지 모겠습니다.
“글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위에 몇 명 있지요, 글쎄요, 좀 형식적이고 대체로 마음이 좁아 보입니다. 아시죠? 어떤 교인들은 정말 융통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같아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아요,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더 심각한 대답도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아마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분들 같은데요, 하지만 그들을 만나보면 답답해요, 게다가 함께 가까이 하면 비난받는 느낌까지 받아요,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구요”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들은 너무 단순해요,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요, 케케묵은 대답을 성경에서 찾아낸다구요, 어떤 때는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 아닌가 보이기도 하고 아주 위선자들 같이 보이기도 해요, 하여간 성가신 존재들이죠”
이런 반응은 여러분이 직접 알아봐도 크게 차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흥미롭기도 하지만, 실망스러운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 크리스챤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요? 도덕적으로 본 받을만한 성실한 사람들이지요, 다른 사람들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친절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진실을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지요,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 같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우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받는 인상가지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평가보다는 훨씬 더 나은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지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과 빛이 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 분을 믿고 따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사람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도울 수도 있고,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말것 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를 지켜보는 이웃들에게 영생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고 그 길을 막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벼랑끝으로 내어 몰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간디는 한때 남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영적으로 심각한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백인 교회는 피부색이 검은 인도인들에 대해서, 그 지역에서 하급생활을 하고 있던 인도인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뒤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기독교인 자신들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진리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물어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이 부정직함이나 진실치 못함일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싫어요”.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정말 싫습니다. 마음속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할 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물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매력 있는 특성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십시오. 정직함, 순수함, 진실함이 앞자리에 나올 것입니다.
“아시잖아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설사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진실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높이 평가해요” “자신의 실수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을 우리는 만나 보았으면 합니다.
누구나 진실한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지금부터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은 비록 힘든 길이지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첫 째 단계는 1 진실한 자아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냐 하는 그림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입니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독단적인 교리로 뭉쳐진 집단이라고 생각 하곤 합니다. 아무런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 집단으로 오해합니다. 사람들을 같은 틀에 집어넣고 압력을 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풀빵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여깁니다.
교회는 정반대입니다. 그런 면에서 군화를 발에 맞추는 군대와는 아주 다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결코 모든 사람을 한 틀에 찍어내는 공장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을 따르기 위해서 여러분의 정체성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원래 설계하셨던 그대로 여러분들을 쓰시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재능을 주셨는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분별하도록 노력하고 그 부르심을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진실한 자아상을 가지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원래 우리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지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여러분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됨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그런 조크를 했지요, “못 생겨서 미안합니다”라고.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여러분의 모습에 대해 더 이상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개성을 부정하려 들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성격이 화끈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제발 조용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타고난 열정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만화경 속에는 모든 재능과 기질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별나게 정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급한 일을 시켜놓아도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서서라도 이야기를 해야만 됩니다. 절대 달려가는 법이 없습니다. 온갖 이야기 다 해야 사람 사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는 타고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얌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주문은 너무 혹독한 것입니다. 혹은 고독 속에서 발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 무리 가운데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여러분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꼭 여러분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여러분 됨을 보고 여러분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그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래 전에 대전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집회가 후반으로 접어들 때쯤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평소에 당신의 주일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은혜를 받는다고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신의 주일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니까 이번 집회에는 평소 당신의 사정권밖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니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평소에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특별 집회에서 은사를 받는다고 담임목사님이 인사하니까 나도 쓰일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도 다른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흉내 내어서 제대로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랍고 훌륭하게”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독특함을 드러낼 때 여러분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타고난 기질에 대해서도 절대 여러분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제 가까이 있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둘째아들 녀석이 꼭 제 엄마를 닮아가지고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길레 제가 물었어요. 당신 지금 누구 작품에 대해서 평가 절하하느냐고. 우린 다 하나님의 작품이잖아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무궁한 지혜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빚어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독특함을 드러낼 때에 여러분은 영향력 있는 삶을 살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쳐날 것입니다.
진실한 삶,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2 여러분의 감정에 충실하십시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자석과 같은 강력한 힘은 감정적으로 진실한 삶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신자들은 이 점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억압하려고 듭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결코 화를 내거나 슬픔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상처를 받거나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적거나 천박한 성품의 증거라고 잘못 가르치기도 합니다. 애써 고통 중에도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이 영적 성숙의 척도라고 여깁니다. 어떤 상황 속에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권합니다.
그럴 때 두 가지 잘못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는 “정서의 혼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밀려오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속수무책인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 상태를 벗어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상담을 받아야 됩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면 금방 혐오를 느끼고 물러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죽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도 않고 상투적인 말로 “어쨌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슬퍼해야 마땅해, 뭔가 크게 잘못됐어, 나는 저런 신앙을 가지고 싶진 않아, 신앙이고 뭐고 이런 때는 슬퍼해야 마땅해”라고 생각하면서 물러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십시오.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소리를 내어 우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진솔한 감정 표현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최근 코이카 단원으로 해외에서 봉사하다가 낙뢰로 인해 죽음을 당한 사건 당하면, 그것도 당사자의 가족이라면 슬퍼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어떤 비극 앞에서도 슬픈 표정도 없이 범사에 감사한다고만 되뇌이면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종교를 멀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충실하십시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과 미소 띤 표정, 석고상이 되어버린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여러분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두려움, 슬픔, 분노, 질투, 상실감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때 오히려 마음을 열고 다가섭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숨기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솔한 감정표현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없이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신앙가운데서 승화시켜 가십시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자신도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유교적인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엇이 예수의 가르침인지 구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죽어야 교회가 바로 될 것 같습니다.
공자는 군자의 도를 가르치면서 군자는 얼굴에 희로애락을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건 소인배의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표정을 지어야 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우시기도 하셨고 불의한 현실 앞에서 상과 의자를 뒤집어 엎기도 하셨던 분인 것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묻습니다. 진실한 삶,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3 실수에 대해서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실수를 감추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어떤 사장이 회사에 20여명의 크리스천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매와 같은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양심적이고 상냥하고, 일에 몰두하는 크리스천 일꾼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끌렸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인 일이 있었어요. 갓 개종한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일이 끝난 후에 만나 줄 수 있는지 물어왔어요. 만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대답을 해놓고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그 젊고 신앙에 열심인 사람이 나를 개종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 되었어요
그가 머리를 숙이고 사무실에 들어와 이런 말을 할 때 놀랐어요, ‘사장님, 몇 분이면 됩니다. 용서를 구하려 왔어요. 저는 여러 해 동안 사장님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몇몇 회사의 생산품을 가져다 쓰는 등 다른 사원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급해 주는 물품 가운데서 남는 것이 있으면 적당히 제가 사용했었습니다. 회사에서 제 마음대로 제 개인적인 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전에 저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이제 순종하게 되었고 제가 행한 잘못을 사장님과 회사 앞에서 바로잡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 행동의 대가로 저를 해고시키셔도 됩니다. 그대로 순복하겠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아니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만큼 감봉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사장님 앞에서 그저 일을 바로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이러한 진실함입니다. 이런 고백을 들은 사장은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 밤에 건설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로마의 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한 것도 이러한 진실성 때문입니다. 다만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솔직하고도 겸허한 고백이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그저 꾸밈없는 진실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어떤 잘못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불리하면 도망치고 잡히면 모른다고 하며 오리발을 내밀면서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세상 속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입니다.
엄청난 과실을 범하고도 무조건 발뺌하는 세상에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감화만이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을 고백함으로서 누리는 해방감을 맛보시면 강같은 평강과 샘솟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될지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손해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강력한 도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진솔한 사과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아직도 사람 살만한 곳으로 남아 있도록 지탱하는 힘은 바로 이런데서 나옵니다. 그 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고백해야 할 무엇인가가 없습니까?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고 계속 덮어 버리려고 하는 뭔가가 여러분의 삶에는 없습니까?
어쩌면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말씀 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실해지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지금 듣고 있을 도 있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완벽해지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수를 고백하고 그것을 바로 잡는 용기가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겸손과 참회, 심지어는 책임 있는 배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진지하게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누군가 역할 모델이 되어야만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하려 들지 않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셨던 것처럼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처형과정을 지켜본 백부장은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고백을 하게 했습니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시면서 수없이 쓰러진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군중들의 조롱거리가 되신 모든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동시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미래를 부탁하실 때, 뉘우치는 강도에게 아량을 베푸실 때 그 목소리를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주님,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실 때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군대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백부장으로서 그 모든 희생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철저한 헌신, 거기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하는 일에 자원하는 모습이 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로마의 백부장들의 헌신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거리가 될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는 주님에게 감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태신자들은 나약한 신앙인들에게 별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서 살고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두려워 말고 진실해지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해 버리는 성도들을 통해서는 강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해 버리고 꽁무니를 감추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진실하게 결단하는,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생명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각오로 나오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실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학교에서 직업전선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신실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실하십시오.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께서 본래 만들어 주신 대로 살아갑시다. 감정적으로 진실하십시오. 미소 띤 석고상이 아니라 일희일비하는 진솔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혹 살다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보십시오.
담대하게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서 싸워갑시다. 백부장처럼 용기 있는 고백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갑시다. 체면치레에 얽매이지 말고 믿음을 나타내고 믿음대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신앙인의 힘이고 매력이며 신실한 크리스천의 삶이 가지는 잠재력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아멘
내 안에 거하라
요 15:5-8 / 이영훈 목사
<등단 후 멘트>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한없이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가 복된 자인 것입니다. 좌우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가 찬양으로 감사로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늘의 큰 상급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늘 우리의 믿음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성가 275장)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영원히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기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앞으로 살아갈 우리 남은 여생도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늘 잊지 않게 하시고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시고 우리 삶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오늘 요한복음 15장 5절로 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내 안에 거하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절망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고 보람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베풀며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늘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면 참 좋겠는데, 때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상처받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계속 믿음이 자라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해지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데 예배드릴 때는 참 정성껏 예배드리고 주님을 섬길 때는 그런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서 그렇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분노하고 다투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기도 부끄럽고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귀한 헌신으로 중국 전역에 복음이 증거 되었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정부에서 인정한 교인과 또 가정교회 지하교회를 다 합쳐서 1억 명이 넘는 크리스천이 중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 가운데 큰 어려움과 절망에 처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 마음에 ‘이제 더 이상 나는 못하겠다. 이제 나는 지쳤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러한 좌절감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모든 선교비가 끊어지고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그러한 절망에 처했던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어요.
그때 이 허드슨 테일러를 변화시켜서 위대한 주의 종으로 그 남은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준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그가 그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깨달은 것은 내가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주님이 다 하시는데 내가 하려고 계획하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다보니까 늘 부딪히고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상처받고 절망하게 되었다는 그런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가 그날 이후로 성령으로 충만함 받아서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니까 주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함께 하여 주셔서 가는 곳마다 복음이 증거 되고 교회가 서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내는 그러한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주 안에 거하는 삶
첫째로 주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기 원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핵심은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하고 가지하고 분리해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우리가 붙어있기만 하면 우린 많은 열매를 맺고 이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나무로 말하면 포도나무처럼 볼품없는 나무가 없어요. 제가 어릴 때 상도동에서 살았는데 집 마당이 넓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할아버님이 마당에다가 포도나무를 심으셨어요. 포도나무가 겨울에 비틀어지고 아무 볼품없는 나무인데 봄이 돼서 잎이 자라고 여름이 돼서 열매가 맺히면 아, 그 포도나무 열매로 인하여서 나무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우리나라 포도열매가 단지 몰라요. 우리 한국 포도는 세계적으로 알아줍니다. 우리 한국에 수입되어 온 포도의 대부분은 칠레에서 온 것인데 칠레 포도가 한국 포도를 당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맛있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 비결은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붙어있기만 하면 예수님과 하나 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우리 삶 가운데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한 가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가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었는데 우리가 우리 감정에 따라서 생각에 따라서 스스로 떨어졌다 붙어다 떨어졌다 붙었다 그래서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것이 붙어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가서 막 소리 지르고 싸우고 달려들면 떨어졌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자석처럼 붙었다 뗐다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부터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 속에 그러한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모습은 옛사람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죄에 속해 있던 그 옛사람이 자꾸 나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가서 아무것도 아닌데 다투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상처를 받게 하고 그러한 일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딱 붙어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붙어서 주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기 위해서는 우린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무장해야 돼요. 여러분 붙어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은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 갈 때까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그 사실을 꽉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주여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꽉 붙잡고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시험이 다가오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 붙어서 믿음으로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으려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가서 주의 말씀에 늘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말씀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교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 다음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렐루야.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거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시는데 무엇이든지 주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내가 다 이루어 줄 것이라. 할렐루야. 늘 말씀 묵상하고 말씀 안에 거하고 또 말씀을 지켜 행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3장 24절에,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말씀 안에 거하면 성령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주님과 내가 하나 되게 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많은 역사를 이루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함으로 주님 안에서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장 6절에서 7절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깊이 주님께 내려서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믿음의 역사를 이뤄나갈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2. 열매 맺는 삶
첫째로는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우리는 나가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언제 영광을 받으시느냐? 많은 열매를 맺을 때. 언제 우리가 제자로 인정받게 되느냐? 많은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고 제자로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는데 이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달라져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격적으로도 성숙되어져야 하고 우리 삶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시고 또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심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고 항상 우리에게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주여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시고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나와서 교적에 이름을 올린 교인이 있고 그 다음 교회에 출석해서 예수를 믿는 신자가 있고 그 다음 나아가서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린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교인이고 물론 신자이지만 거기에 마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제자가 되기 위해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오늘 요한복음 15장 2절에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할렐루야. 신앙생활을 할 때,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합니다. 나뭇가지가 벌레가 먹었다든지 또 가지가 수액이 부족해서 말라비틀어지면 열매도 못 맺을 뿐 아니라 열매 맺는 가지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가지들이 있는 것을 잘라 내버려야 합니다. 끊임없이 미워하는 미움의 가지, 분노의 가지, 원망과 불평의 가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의 가지, 아무 것도 아닌데 격한 감정으로 화를 잘 내는 그리하여서 사람과의 관계가 다 잘못되는 그러한 잘못된 가지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여러분 잘라내야 해요. 그것을 안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제가 잘 아는 분 가운데 화를 너무 잘 내는 분이 있어요. 보통 그런 분들의 특징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근데 화를 내서 상처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구요. 막 소리 지르고 그래서 다신 이분 얼굴 못 보겠다, 생각하는데 다음 주엔 또 싱글싱글 하면서 오세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는요 화내면 돌아서서 잊어버립니다.” 말씀은 참 좋은데 화를 안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 안에서도 그 분만 들어오면 벌벌벌벌 떨어요. 아무 것도 안했는데 격노해서 화를 내니까 집 안의 분위기가 얼마나 참 그 화를 한번 냄으로 말미암아 싸늘하게 얼어붙는지 모릅니다.
이런 가지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압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면이 가장 연약한 부분이고 문제가 있는 부분인 것을 압니다. 그러한 잘못된 부분을 정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게 잘못된 모습이 무엇인지 늘 그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일꾼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디모데후서 2장 20절로 21절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할렐루야. “주여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처럼 겉모습만 거룩 거룩하고 이 마음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얼룩져있던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마태복음 3장 8절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여 내 잘못된 모습을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한번 주님 앞에 바로 믿음의 자세를 갖추고 돌이켜 참된 회개의 삶을 살기만 하면 우리 일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복 주시는 일생으로 바뀔 것입니다.
스티븐 룽구(Stephen Lungu)라고 하는 선교사님 계십니다. 본인은 자신을 예수님을 업고 가는 아프리카의 당나귀라고 말합니다. 이분은 부모님께 버림받은 다음 증오와 분노로 갱단에 들어가고 테러리스트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짐바브웨가 독립국을 이루기 전에 영국 식민지로 있었을 때에 50대 아버지와 10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티븐 룽구는 일곱 살 때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집 없이 다리 밑에 살며 가출한 또래들과 검은 그림자라는 갱단을 만들고 마약과 살인, 폭행, 강도짓을 하며 1950년대 말에 백인들의 통치에서 벗어나 흑인들의 땅으로 바꾸자는 구호를 외치며 청년 동맹에 참여해서 공공시설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살인을 저질렀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교회를 폭파시키려고 예배드리는 장소에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말씀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꼬꾸라져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장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러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처지를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아시고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알아 그때로부터 그가 눈물로 회개하며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선교사가 되고 나서 아프리카 선교사에 소속 되서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호주 등 전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을 스스로 예수님을 업고 돌아다니는 아프리카의 당나귀라고 합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버려져 온갖 증오와 분노, 폭력으로 뒤 덮은 저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저를 버린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셨으며, 저를 통해 수많은 가정이 회복되고 견고해지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저에게 증오와 공포와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기쁨과 사랑과 행복을 주었습니다. 세상은 저를 ‘버림받은 자’라고 손가락질 하여 저로 하여금 부모님을 증오하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부모님까지도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평생 복음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는 인생으로 하나님께 붙들려 행복한 전도자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입술이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우리 입술에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아름다운 말만 쏟아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의 입술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입술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을 저주하고 비판하고 참소하고 파괴적이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게 주시옵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통하여 남을 살리고 변화시키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그러한 말을 맺어 입술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입술이 기도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기도할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오니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것이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 뜻 가운데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으면 주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가서 우리는 감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맺고 기도의 열매를 맺고 감사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존경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3. 사랑 안에 거하는 삶
끝으로 우리는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열매가 항상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으려면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이제부터 하늘나라 갈 때까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 놀랍고 위대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주님께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사오니 이제부터 우리도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죄짓고 불의하고 추한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사오니 주여 우리도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고요,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고요, 사랑하면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줄 수가 있어요. 부부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실수도 용서하고 서로의 약점도 다 이해하고 서로의 부족함도 서로가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치료받는 그러한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그 근본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로 11절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은 말씀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할렐루야! 우리가 우리 믿는 형제들을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위선자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로 21절에 우리에게 엄히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여기서 형제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크리스천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크리스천을) 사랑할지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사랑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사랑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료하고 사랑은 우리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김요석 목사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Das Dorf Der Vergessenen」이라는 책을 쓰셨는데요, 지금 한센병 그 정착촌에서 교회를 사역하고 계신 아주 귀한 목사님이세요. 독일의 유명한 튀빙겐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셔서 신학 교수로 강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많으신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자유주의 신학자이고 신신학자가 아니오! 당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소?” 아주 그 목사님 말씀에 충격을 받았어요. 당황해서 이 교수님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학문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소. 그러니 당신 목회를 해야 됩니다. 목회.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가 힘드니 목회하시오.” 그리고 소개를 해준 곳이 이 한센병 환자촌이에요.
그래서 그곳에 가서 첫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딱 올라섰는데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 한센병환자 예전에는 나병환자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그전에는 또 문둥병자라는 표현을 또 했는데 한센병은 이 모든 끝에 신경이 다 죽어서 손가락이 다 잘려져 나가도 아픈 걸 모르는 거예요. 세수하다 보니까 코가 없어져버리고 머리털이 다 빠지고 귀도 다 없어져버리고 그러니 지금은 치료하는 약이 나와서 더 이상 한센병이 퍼지지 않지만은 우리나라가 옛날에 얼마나 한센병 환자가 많았습니까? 한센이라는 분이 치료하는 약을 발견해서 이름이 한센병으로 바뀌었는데 딱 설교하려고 내려다보니까 아 코도 없고, 눈도 퍽 들어가 있고, 귀도 없고 한분이, 손가락도 없고 주먹만 쥐고 앉아있으니 그냥 놀래갖고 설교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무슨 설교를 했는지 정신이 없었어요. ‘아이고. 내가 목회를 어떻게 하나. 설교 끝나고 예배 마친 다음에 이제 빨리 여기서 도망가야 되겠다.’했는데 나오는 입구에 웬 할머니가 서 있다가 손을 꽉 붙잡는데요,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손이에요. 고름이 막 낀 손을 붙잡고 손을 안 놓아 주는 거예요. 자꾸 부비는 거예요. 아 노란 고름이 있는 그 손을 자꾸 부비는데 본인이 손을 빼고 싶은데 그 한센병 환자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18살 때 이 병이 들어서 지금 제 나이 78세입니다. 만 60년 동안 한 번도 성한 사람 손을 잡아본 적이 없는데 목사님 손을 잡으니까 너무 좋아서 제가 이럽니다.” 그 말씀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아, 지금 어쩌면 내가 잡고 있는 이 손이 우리 예수님 손이 아니겠는가?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고초 받으신 손, 어쩌면 손가락도 부러지고 상처 난, 고름도 생긴, 그러한 비참한 손이었을 것이다. 내가 예수님 손을 잡는데 왜 이렇게 겁을 내는가?” 그 자리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 후로 자기 삶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한 목회 사역을 잘 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교수직분 다 내려놓고 한센병 환자를 섬기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 기쁨 속에 살아가고 귀한 사역 잘 감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삶이 그와 같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이제부터는 우리 주변에 상처입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사랑을 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많은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그와 같은 주님의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