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충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보수"라 표방하고 있다. 영어로 conservative.
한번 그들이 보수적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자 그럼 "보수주의"가 어떤 것이며, "진보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사전적 의미로 한 번 알아보자.
먼저 보수주의를 보자.
보수주의[Conservatism]
진보주의(進步主義)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종교, 문화, 민족적 가치관 등 현 체제 또는 가치관을 유지하거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념 및 태도를 말한다. 이는 특정 시점부터 현재까지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현재 체제가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서 현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면 보수주의, 이를 개혁하려고 하면 진보주의가 되는, 그 사상적 내용 자체는 고정되지 않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보수주의는 역사적 보수주의와 심리적 보수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컫는 보수주의는 역사적 보수주의, 즉 사상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미를 지닌 정치사상의 한 조류를 말한다. 보수주의는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정치철학자였던 E. 버크에 의해 프랑스혁명 이듬해인 1790년 내놓은 저서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사상적 조류로써 이론적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면서 당시 급격하고 과격했던 프랑스혁명 이후 급진적이며 급격한 사회변혁보다는 검증된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사회를 개선해 나가자는 영국의 점진주의(개량주의)를 지지했다.(보수주의의 탄생)
그리고 '보수주의'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정복고주의자였던 F. R. 샤토브리앙 자작이 1818년 왕당주의운동 기관지 <보수주의자(Le Conservateur)>라는 간행물을 발간하면서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왕가가 몰락하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확산을 막고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옹호하던 왕당파의 정치적 입장 또는 이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근대 보수주의로서의 이념은 영국, 독일 등의 유럽국가들은 물론 미국에까지 확산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와 대립한 귀족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근대 보수주의와는 달리, 19세기 후반부터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둔 노동자계급의 진보주의에 대해 시민계급의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현대적 보수주의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역사적 보수주의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속에서 발전을 꾀하는 것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편, 심리적 보수주의는 이제까지 생활해 오던 습관처럼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새로운 사회환경 변화에 대한 경계심이나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심리적ㆍ감정적 태도 또는 성향(性向)을 말한다. 인간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適應)하거나 조정(調整)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폐쇄 또는 개방적 교육에 따른 특정 환경이나 연령에 따라 보수적 성향의 강도에는 차이를 보인다. 특히 노인이 청년보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거나 새로운 변화에 대한 도전이나 시도를 꺼리고, 이제까지 안정적이라고 인정된 것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주의
보수주의(保守主義)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현재의 정치ㆍ사회체제ㆍ문화ㆍ제도들의 모순을 급진적이고 혁신적 개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 또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며, 시대적ㆍ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성을 띠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8세기 유럽의 절대왕정에 반발하여 J. J. 루소 등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진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반발하여 사회주의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보수주의가 된다.
글을 읽어보면 진보주의는 자본주의를 배척하는 사회주의 성향이 다분한 부류를 말하며, 보수주의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현재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목표로 한다고 나와있다.
자 그렇다면 이때까지 민주주의를 유린, 부정, 파괴했던 한국사 유명 인물 혹은 단체에 대해 알아보자.
1. 이승만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세워 국가를 통치했지만 결국,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또한,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2.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중에 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하여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때 유신헌법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는 김일성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통제수단을 공식화하는「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됨)
하지만 이후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3. 전두환
79년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재임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민주화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수용하였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4. 주사파 (現 뉴라이트)
김일성의 소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웠으므로 주사파라고 하며, 한편으로는 북한의 남한혁명노선이라고 하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여 특히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NL파라고도 불렸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후 전체주의적 사회통제(현재 북한이 가진 체제)가 극심해지고, 10·26 사태 이후 12·12 군사 반란으로 등장한 전두환 군부(軍府)가 1980년 소위 '민주화의 봄'이 좌절시키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자유우방 미국'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흔들리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정치운동세력이 생겨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체사상도 유입되었다.
(지도자들의 극심한 전체주의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생김)
1985년에 발표된 김영환의 강철서신은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세력에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군사독재체제를 용인하는 미국에 대한 반미(反美)의식과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적 토양을 바탕으로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이념으로 하고 있던 학생운동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 태도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주체사상파는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실상이 전해지고 1996년에 한총련의 주도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조국통일범민족대회'를 김영삼 정부가 강경하게 진압한 후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판결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구속·수감됨으로써 급속히 그 세력이 약해졌고, 1997년 말의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학생들의 정치운동 참여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 학생운동가 중 일부 주사파와 좌파 중 전향자들에 의해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2004년 11월 자유주의연대를 출범으로 뉴라이트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는 신지호 대표와 홍진표 사무총장, 최홍재 전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 등이 이끌어 가고 있다. 또한 2005년 11월에는 김진홍 대표가 이끄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창설되어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서는 일방적인 보수운동을 표방했다.
상위에 올라간 세 사람은 국민의 민주주의 요구에 반항하였고 장기집권의 목적으로 권력을 이용하였으며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이 했던 것 처럼 민주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로써 국가를 1인 독재 체제로 운영하려 하였다. 즉,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수주의가 아닌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과 체제인 전체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인데, 당초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하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전체주의는 현재 공산주의를 지칭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칭하였고 그러한 전체주의에 빠진 독재 지도자들의 행동 국가 운영방식이 현재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과 상통한다는 것이다.
즉,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바로 본인들이 공격하던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과 국가 운영방식에서매우 가까운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라는 것.
북한과 매우 닮은 그리고 전체주의를 꿈꾸웠던 저 세 사람을 일베충들은 단순히 북한과 극적인 대치를 했다는 이유로 "보수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역시도 전체주의를 꿈꾸웠던 이승만과 박정희와 극적인 대치를 이루었으니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보수주의자"로 볼 수 있을까?
답은 뻔하다.
XX야, 일베하니?
진짜 빨갱이가 누군지 알겠니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비하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전체주의로
국가를 운영하려던 자를 옹호하고
민주화라는 단어를 부정적 의미로 이용하고 있는
역사 의식 뒤틀린 일베충 너희들이 바로
이 시대의 real 빨갱이다.
written by ilbekiller
출처: ilbekiller 블로그
(허락받고 퍼왔어 많은데로 스크랩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