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⑱-1
민비(閔妃)의 自負心
일본에게 전국(戰局)은 예상 이상으로 진척되었으나, “갑오개혁”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내정개혁은 일거에 실적이 올라가지 않았다. 내정개혁 법안을 형식적인 다수결로 결정해 나가는 것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사무이며, 17명의 인원 중 다수가 “일본당(日本당(黨)”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었다. 인원수도 적고, 세력도 약한 “일본당”의 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유길준(兪吉濬), 안경수(安駉壽)등을, 陸奧(무쓰)는 「일본당, 오히려 조진당(躁進黨/역자 주: 벼슬이나 지위를 올리려고 성급하게 구는 당)의 반지반해(半知半解/역자 주:지식이 어중간하여 쓸모가 없음)한 개화자(開花者)」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한다.
군국기무처는 이해, 1894년12월9일 폐지되지만, 그때까지 불과 4개월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결정한 중요법안은 208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정개혁은 먼저 관제개혁에서 시작되었으며, 궁내부(宮內府), 의정부(議政府)이하 8아문(衙門)이 설치되었다. 500년의 전통을 가진 “육조(六曹)”의 행정기구를, 근대국가의 내각제도로 개선한 것이다.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는 김홍집과 동석한 영부사(領府事) 김병시(金炳始)는, 왕과 함께 눈물을 머금었다고 전해진다. 국왕에게, 머리위에 묶어놓고 있는 장발을 깎고 양복을 입을 것을 제안했으나, 이것은 왕과 측근들에게 거부되었고, 이때는 타협안으로 수습되었다.
군국기무처는 7월31일, 개국기원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고, 고종31년을 개국503년으로 했다. 8월10일 조세금납제를 결의하고, 은행 설립을 결정한다. 익11일, 23항목의 사회개혁안과 6항목의 재정경제 개혁안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은 본위제를 실시하였으며, 도량형이 통일되었다.
실로 쏜살같은 법안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그대로 조선정부나 대중에게 받아들여져 실시된 것은 아니다. 조령모개(朝令暮改)나 공문화(空文化)되는 일이 속출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김홍집내각의 협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청전쟁은 막 시작되었는데, 조선의 남부는 일본군, 북부는 청국군의 세력 하에 있었고, 김홍집조차 청국의 승리를 예측하고, 비밀리에 청국에 서장을 보내, 「지금 본의 아니게 일본 측에 협력하고 있으나, 이는 무력으로 지배당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행위」라고, 후일 조선정부의 입장을 석명할 준비공작을 하는 상태였다.
대원군은 법안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고 쉽게 도장을 찍지 않았다. 이것을 안 민비는, 군국기무처 의원인 일본당 사람들을 회유하여, 대원군을 무시하고 왕에게 직접 법안을 제출하도록 시사한다. 그녀는 기회를 잡아 한발 한발 왕권회복을 꾀하고 있었다.
다시 일본 측에는, 일청전쟁 승패의 예측이 서지 않는 이때에, 각의에서 대 조선정책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大鳥 圭介(오토리 게이스케)공사는 조선정부에 대하여, 말처럼 강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정개혁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그것은 아니다. 또 법안 가운데는 조선의 전통이나 습관을 무시하는 무리한 것도 있었으나 그 전부가 악법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학정의 박멸을 목적으로, 관리의 부정행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봉건관료기구에 매스를 대는 것,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죄인의 처벌은 본인만으로 하고, 가족의 연좌를 인정하지 말 것, 조혼을 금지하고 남자 20세, 여자 16세 이상으로 할 것. 미망인의 재혼은 귀천을 불문하고 자유라는 것. 공사 노비의 계약은 파기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는 것---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갑신정변, 동학교도의 개혁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 민중 속에서 나온 요구였다. 그것을 다시 나타내 보이면, 조선민중은 기쁘게 받아들일 것으로 일본 측은 생각했으나, 민중은 일본의 강제에 의해 시행하는 개혁에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선조 대대로 지켜온 장발을 자르라는 것과, 양복을 입으라는 등, 어째서 타국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고 반발한 그들은, 다른 법안의 내용을 검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일본은 내정개혁을 일반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준비기간도 두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당돌한 일이 민중을 당혹하게 했고, 감정을 한층 더 경화시켰다.
더욱이 “上”으로부터의 급격한 개혁이, 농업이나 상공업 생산면의 보호나 개혁 없이 실시에 옮겨졌으므로 각 곳에 “부작용”을 일으켜 민중을 어렵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또 수구파 대지주 관료의 봉건적 반동도 있어서, 이것도 또한 내정개혁 실패의 한 원인이 되었다.
陸奧 宗光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일본정부는 일청교전의 원인을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 2가지 점에 있다고, 세계에 표명했다. 그리고 청국이 거부한 내정개혁을, 일본 한 나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다. 陸奧는, 「나는 전부터 조선내정의 개혁을, 정치적 필요 이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생각 했다」고 쓰고, 「조선의 내정개혁은 첫째로 우리나라의 이익을 주안으로 하는 정도에 그치고, 이 때문에 굳이 우리 이익을 희생할 필요 같은 것으로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과 같은 국격이, 과연 만족스러운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지 의문시 했다.」고 처음부터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외국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어쨌든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일본군의 평양점령, 황해해전의 승리에 놀란 조선정부는 그때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일본 측에 협력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 국내에서 조선의 내정개혁 실패에 대하여 강한 불만의 소리가 나왔으며, 大島(오시마)공사에게 비난이 집중된다. 머지않아 그것은 大島공사의 소환과, 그의 후임으로 井上 馨(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으로 연결되어 간다.
평양, 황해에서의 일본군의 승리는 조선정부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열강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일본이 극동의 강국이 되는 것은 어느 나라로 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으나, 특히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간섭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0월초, 陸奧는 伊藤 博文 앞으로, 「다시 외국으로부터의 참견의 단서가 열린 이상, 우리 군대의 행동도 가장 신속히 하여, 외국의 간섭이 지나치게 성가시게 되기 전에, 어떤 지방이라도 점령해 두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써서 보냈다.
일본정부는 9월, 조선으로 위문사절로서 추밀원 고문관 西園寺 公望(사이온지 긴모치)를 파견했다. 이것은 大島공사가 발의한 것으로, 그는, 「일본군의 서울 입성 이래, 많은 주민이 성밖으로 피해 달아났으며, 일반인의 생활은 극도로 곤란 해 지고 있다. 이때, 일본이 왕가를 위문하고, 빈민을 구휼하기 위한 특사를 파견하는 것은, 양국의 친선에 유익할 것으로 믿는다」는 의견을 정부에 전하고 있었다.
西園寺(사이온지) 등 특사 일행은 국왕에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올린 후, 다시 왕비와의 회견을 요청했다. 외부(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우리나라에는 왕비가 외국 사절과 만나는 습관이 없어서」 하고 굳게 거절했으나 西園寺 일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디어 민비는 어렴(御簾)을 반쯤 걷어 올리게 한 다음, 궁녀 2사람이 앞을 가리고, “폐견(梐見/역자 주:폐하의 접견)의 예”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본 측의 이 강인한 처사는, 궁정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강한 불쾌감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 특사일행은, 어째서 조선의 습관을 무시하고 상대국 사람들의 감정을 해치면서까지, 왕비와의 회견을 강요 하였는가. 무엇인가의 필요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 고 단순히 그들의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민비가 조선왕실 제1의 권력자로, 일본 위정자들 사이에 자주 화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잠간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陸奧 宗光도 『건건록』에, 민비만이 대원군의 복수의 창끝을 피한 당시의 일을, 「(민비는)본래부터 종래와 같이 암탉이 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덧없이 구중궁궐에 박혀 몸을 숨기고 」 또 「민족(閔族)이 패퇴하여, 왕비 날개를 거둔 후에....」라고, 그녀가 부왕(夫王)을 대신해서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된 상태를 적어놓고 있다. 조선 문제가 일본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이 무렵, 민비가 “문제의 왕비”로 화제가 되어 있었던 것은 陸奧의 기술에서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민비암살사건>의 배후관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