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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우크라이나 비극 운운한다. 국내 언론매체가 러시아의 민간인 살상을 이구동성으로 성토하고 있다.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언론매체가 과연 민간인 살상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는 해방 이전 5년 동안 그리고 6.25전쟁 3년 동안 미군이 한반도에서 자행한 민간인 살상에 관해 이들 언론매체가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6.25전쟁과 비교하면 양반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과연 몇 명인가? 6.25전쟁 3년의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미 공군대장 리메이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6.25전쟁으로 60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미군이 40만 명 미만이란 점에서 보면 6.25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일부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 같은 비극이 벌어진 주요 이유가 미국의 세계전략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계 구축을 위해 가능한 한 장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미일동맹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도 한반도 전쟁 때문이었다고 한다. 참혹하게 진행된 한반도 전쟁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미일동맹 체결에 동의했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이 저술한 책을 보면 미국이 한국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가 잘 나와 있다.
1946년 10월 미군은 한국인들을 기관단총으로 난사하여 사살했다.
마산에서 경찰과 40명의 미군이 6,000명에 달하는 굶주린 군중을 겨냥하여 발포하면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어느 미군 하사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내가 속해 있던 대대는 마산 전역을 초계했습니다. 도로 곳곳에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우리는 총구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기관단총을 발사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은 참혹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원산, 청진, 성진과 같은 북한의 항구를 760일 동안 하루 24시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고 한다.
당시 유엔군은 적진을 겨냥하여 초토화정책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1월 15일 런던타임스 특파원은 “원주 지역의 유엔군 부대, 초토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유엔군 부대가 22개 마을을 전소시켰으며, 3백 채의 초가집을 불태웠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폭격으로 1951년 1월에는 한반도에 폭격해야 할 표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도쿄 시간으로 1951년 1월 31일 오후 5시 발행된 5공군 작전요약에 따르면 “452폭격비행단 소속 B-26경폭격기 요원들은 흥남 지역에 폭격해야 할 표적이 거의 없다고 보고했다.” 켄사스 주 출신의 클라크 왓선(Clark V. Watson) 상사에 따르면 “공중 폭격이 필요한 표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동일한 공동성명에서 유엔사는 흥남 지역을 공격한 경폭격기 항법사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고 밝혔다. “경폭격기가 투하한 네이팜탄 가운데 하나가 가스 또는 유류 저장소에 명중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 네이팜탄으로 인해 오렌지색 화염과 검은 연기가 형성되었다.”
폭격 당시 유엔군이 비전투원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음은 일부 공산군들을 마을에서 내쫓기 위해 네이팜탄으로 마을 사람들을 질식시켰다는 사실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지의 전선 특파원 조지 바르넷(George Barrett)은 2월 초순의 급보에서 이 같은 마을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참상을 묘사했다. 그는 안양(安養) 북쪽 마을을 점령한 기갑부대와 함께 행동했다. 그는 “근대시대 전쟁의 총체성을 보여주는 섬뜩한 현상”을 발견했다.
…3일 또는 4일 전 네이팜탄이 이 마을에 명중했다. 마을의 어느 누구도 이들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시체를 묻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특파원은 어느 늙은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유일한 생존자로 보였다. 그녀는 가족 4명의 시체가 누워있던 검게 탄 들판을 천으로 덮고 있었다. 마을과 들판의 시신 모두가 사망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네이팜탄이 작열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자전거에 올라타고자 했던 어느 성인 남자, 고아원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50여 명의 소년과 소녀를 포함하여 이 조그만 마을에서 네이팜탄에 불타죽은 사람이 2백 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한편 2월 중순 맥아더는 38선 이북 90마일 떨어진 원산에 한국해병이 유엔 해상 전력의 보호 아래 교두보를 설치하게 했다. 미 해군제독 알렌 스미스(Allen E. Smith)는 유엔군 해상 기동부대가 당시 원산을 41일 동안 “주야간 구분 없이 폭격했다.…이는 역사상 특정 도시를 공중 또는 해상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폭격한 경우였다.…당시의 폭격에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전함들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폭격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폭격을 받고 있던 35,000명 원산 시민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산 어디에서도 하루 24시간 시체와 함께 생활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스미스는 해군의 함포 사격으로 이곳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유엔군이 원산 주변의 성진과 청진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폭격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바로 직전까지 거의 760일 동안 원산, 청진, 성진과 같은 도서를 하루 24시간 지속적으로 포격했다.
오늘날 한국인 가운데에는 과거사는 과거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보인다. 특히 한미관계 측면에서 있었던 불행한 과거는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듯 보인다.
제주도 4.3사건을 가장 먼저 거론한 기관은 공교롭게도 하버드대학이었다고 말한다. 6.25전쟁의 비극을 거론하는 집단은 한국이 아니고 미국으로 보인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미 육군대장 웨드마이어 보고서에 입각하여 미국이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다고 온갖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웨드마이아 보고서가 일본에서 수십 판 인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처참하게 진행된 6.25전쟁을 포함한 해방 이후의 역사를 외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보인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재차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의 와중에서 6.25전쟁 당시의 참혹한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6.25전쟁의 비극은 과거사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비극 운운하기 이전에 6.25전쟁 등 해방 이후의 한반도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국방개혁연구소장 권영근
러시아의 민간인 살상 반인륜적 범죄라고? 6.25전쟁의 비극을 모르고 하는 소리!!!|작성자 권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