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현이령
밤이 한참 제자리일 때
소녀는 강변을 달립니다
지하 방에서 따라온 어둠이 발밑에서 끈적끈적
뜨거운 여름은 서로를 밀어내고
얘야, 너를 가졌을 때 눈부시게 넓은 꽃 언덕을 보았어
이제는 교복 넥타이로 단정히 너의 목을 묶으렴
달리는 소녀 뒤로 꽃들이 떨어집니다
목이 잘린 꽃들이 발자국을 찍는 밤
소녀는 자주 시간 속을 뛰어다닙니다
성장통은 꿈속에서도 멈추질 않아
몸을 나온 다리는 삐걱삐걱
지금 당신에게 달려갈게요
삐걱거리는 사람들은 비뚤어진 건물을 세우고
뒤뚱거리는 자전거가 기우뚱한 소녀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갑니다
출렁이는 것들에 멀미가 날 때
소녀는 자꾸 달립니다
이곳은 한때 바다였는지 뛸수록 짠 내가 납니다
물을 가까이하지 말라던 당신이 물속으로 생의 시간을 옮기는 동안
소녀는 다리가 자라났고
강의 시간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의 깊이를 넓혀가는 강
강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늙어가는 새벽을 보기로 했습니다
흔들리는 당신의 미간에 노란 조각배가 떠 있습니다
아껴서 훔쳐보겠습니다
미래에서 기다릴게요**
*
호소다 마모루 작, 타임리프(과거 또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 또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 애니메이션 속 대사
꿈속에서 보라
사진을 찍으러 왔어요
꽃불처럼 타오르는 내 눈동자를 잘 찍어줘요
아, 한쪽 귓불을 보정해주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아니, 촌스럽게
양어깨를 맞추라거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관대하게 앉아 있잖아요
어제는 앞집을 노크했어요
우리 집 고양이 좀 봐 주실래요?
보라색 울음을 울어요
나는 모나리자처럼 웃으며 말했어요
무척 예의 바른 주인이죠
쿵 하고 닫히는 앞집 문소리에
오후가 화들짝 깨어났어요
나는 고양이 털을 모아 그림을 그렸어요
한낮의 어둠은 몹시 흥분되거든요
커튼 뒤에 숨은 벽시계가
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어서 떠나야 해요
소심한 소시지를 시식하러 가야 해요
훌륭한 식사가 될 거예요
포장된 미래가
장바구니에 무심하게 담기고
나는 아늑한 불안을 꿈꾸죠
이것 봐요 여기를 좀 보라고요
아, 참
나는 여기 사진을 찍으러 왔어요
살며시 웃고 있는 나를 봐요
사진은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는 오늘도 발랄한 보라를 꿈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