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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에서 출발 불국사----석굴암----통일전----박물관----반월성----계림----첨성대----김유신장군묘
불국사
구분 사찰 - 사적 및 명승 제 1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위치 경주시 진현동 15-1
교통 경주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 쪽으로 가다보면 불국사역 앞 구정동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902번 지방도를 따라 2.5Km 가면 불국사 앞 관광단지 주차장에 이른다.
경주시내에서 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문단지를 지나 감포방면으로 가다가 덕동호 못미쳐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민속공예촌을 지나 5분정도 가면 역시 불국사 앞 관광단지 주차장에 닿는다. 불국사 가는 길은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무척 쉽다.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시내버스가 자주다니는데 경주역 앞이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불국사가는 버스를 쉽게 탈수 있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3,000 2,500 1,500
단체 3,000 2,300 1,300
주차료 [대형요금] : 4,000원, [소형요금] : 2,000원
불국사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은 넓은 조양평야를 건너 남산이 마주 보이는 곳이다.
신라 법흥왕 22년(535)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후대에 여러번 중수를 하였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시에 전부 소실되고 다만 석조물과 동불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후 효종 10년(1659)에 일부 중건하였고 1924-1936년 사이에도 여러번 걸쳐서 중수하였다.
1970-1973년 사이에 유지만 남아 있는 곳에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회랑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자로문, 범영루, 경루, 다보탑, 석가탑, 석등, 봉로대, 대웅전, 무설전, 안양문, 관음전, 비로전, 간주, 석조, 석부도, 석등 등이 남아 있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불국사는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고 하는 등 불국사 창건에 관해 삼국유사와 다른 기록을 보이지만, 이는 믿을 만한 연대가 못된다.
다만 총 2천여 칸에 이르는 6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어려 차례 중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석축만 남게 되었다.
창건 후 650여 년간 뭇 사람들에게 참된 부처님,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로 기억되던 불국사는 그 뒤로 여러차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으로 국력이 기운 뒤였고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던 까닭에 신라의 정신을 되살릴 길이 없었을 터였다. 그 뒤 자하문,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 등만 간신히 남아 있다가 1969년 발굴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되었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 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지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낱낱의 영역은 영역에 이르기 위한 계단, 영역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석굴암
구분 사찰 - 국보 제 24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위치 경주시 진현동 891
교통 불국사 앞을 지나 토함산 아흔아홉굽이 고갯길을 8Km 정도 오르면 토함산 정상 석굴암 입구에 이른다. 석굴암으로 오르는 석굴로는 유료도로이며 불국사 앞에서 석굴암 입구까지는 석굴암 관광버스가 아침 10시부터 매시간마다 다닌다. 불국사까지 가는 교통편은 시외버스터미널이나 경주역 앞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3,000 2,500 1,500
단체 3,000 2,300 1,300
주차료 [대형요금] : 4,000원, [소형요금] : 2,000원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토함산의 동쪽 봉우리 아래에 동남향하여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의 석재를 짜맞추어 인공 석굴을 만든 것으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석굴은 전방후원의 형식이고 원형주실과 방형전실, 간도로 구성되어 있다.
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로 덮었으며 전실에는 원래의 지붕이 없어져 1963년 목조건물을 새로 덮었다.
굴 중앙에는 높이 3.48m의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상, 인왕 및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본존불 주위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를 배열하고 본존불 뒤에는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천장 주위 10개의 감실안에는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따라서 석굴에는 모두 40분의 불, 보살, 천, 나한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심오한 믿음과 우아한 솜씨가 잘 조화를 이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잇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돼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굴암에 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과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텨온 석굴암은 그 자체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후 석굴암은 해방 뒤 계속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차 시멘트 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석굴암 내부에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항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였다.
현재 일반 관람객은 목조 전실로 들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박물관
구분 박물관
시대 근대이후
위치 경주시 안왕동 76
교통 경주시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쪽으로 2킬로미터 가면 길 오른쪽에 있다. 넓은 주차장도 있고 불국사방면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다. 경주역에서 박물관과 능원까지는 걸어서 10-15분 정도 걸린다. 역 건너편에서 박물관 가는 100, 101, 11번 버스를 탈 수 있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400 200
단체 400 200
개장시간 [3-4월]09:00-19:00, [5-8월]09:00-20:00, [9-10월]09:00-19:00, [11-2월]09:00-18:00
선사시대 유물에서 불교문화 유물에 이르기까지 2,5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8만여 점의 유물을 보유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문화 전반을 압축해 놓은 곳이다.
1910년 신라고분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서 '신라회' 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3년 후인 1913년에 '고적보존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1915년 현재 경주경찰서 화랑관 뒷건물에 그 동안 수집한 유물을 전시하는 진열관을 마련했다. 그 후 진열품의 수가 늘어나자 현재의 동부동 동헌자리로 옮기고 규모도 확장했다.
해방 뒤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자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이 되었다. 이후 별다른 발전이 없다가, 1975년 현재의 위치인 반월성 동쪽 인왕동으로 이전, 개관하게 되었다.
경주박물관의 본관, 제1전시실, 제2별관, 즉 세 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박물관 보유 유물의 수는 8만여 점, 이 가운데 2500여점의 유물만 상설 전시하고 있다.
본관에는 선사 원삼국실, 이양선(이양선) 기증 유물 전시실, 불교미술실이 있다. 선사 원삼국실에는 경주와 주변지역에서 수집한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이양선 기증 유물 전시실에는 이양선 박사가 기증한 문화재를, 그리고 불교 미술실은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조각과 금속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내부 및 전시 유물은 다음과 같다.
본관에 있는 선사 원삼국실 입구에는 울주 반구대의 너비 8 m, 높이 2m의 암벽에 새겨진 암각화의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고래, 호랑이, 개, 사슴, 돼지같은 짐승과 생식기가 그려진 남자, 배, 사냥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시유물로는 경북 지방에서 출토된 토기와 석기(신석기 문화), 구정동에서 출토된 무기와 의식용 도구, 경주 입실리에서 출토된 무기와 장신구, 대구 평리동의 유물(초기 철기 문화), 조양동 38호 무덤에서 발굴된 유적(원삼국시대 문화)들이 대표적이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에 걸친 황룡사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에는 갖가지 와전류와 토기, 금속제품, 납석제품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황룡사 복원 모형을 전시하여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재현하였다. 백색의 화강암을 재료로 삼은 석불과 십이지상 등은 신라 조형미술의 우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이 밖에 임신서기석·남산신성비 등의 갖가지 비석들은 신라 역사를 밝혀주는 대표적인 금석문이다.
이양선 기증 유물 전시실에는 의사였던 이양선 씨가 30년간 개인적으로 모아온 수집품 666점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기마형 인물토기, 오리형 토기가 있다.
제1별관은 고분관으로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금관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교동고분·계림로고분군·월성로고분군· 안계리고분군 등 경주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용강동고분·황성동고분 등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2별관은 안압지관으로 안압지에서 나온 3만여 점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신라시대 궁궐에서 쓰던 생활용품들로 당시의 궁중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것들이다.
박물관 정문의 오른쪽 뜰에는 성덕대왕신종이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도 고선사터 석탑을 비롯하여 장항리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입상 을 비롯한 많은 불상과 석탑, 석조, 석등, 비석 받침 그리고 각종 석조유물들이 뜰에 늘어서 있어 또하나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개장시간은 3월에서 10월까지는 9시-18시(입장은 17시 까지)이고, 11에서 2월까지는 9시-17시(입장은 16시 까지)이다. 정기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이다.
반월성
구분 성/문 - 사적 제 16 호
시대 삼국시대 - 파사왕
위치 경주시 인왕동 387-1외 120
교통 경주시내에서 불국사 방면(울산방면) 버스를 타고 국립경주박물관앞에서 하차한 후 시내쪽으로 방향으로 되돌아 5m 정도 걸어나오면 왼쪽 방향에 능선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반월성이다. 경주시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불국사 방면(울산방면)으로 2km 가량 가면 오른쪽 방향에 보인다.
반월성은 경주의 심장부 남천가에 있다.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신라왕가의 석씨 시조 탈해왕이 임금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살던 곳이었는데, 임금이 된 후에도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5대 임금인 파사왕 22년(A.D.101년)에 이 성을 궁성으로 크게 축성 한 후 금성 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렇게 궁성으로 이용되던 반월성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까지 약 900년간 신라를 다스리던 곳이었다. 이 성의 이름은 생긴 모양이 초생달 같다고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고 하며, 임금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에서 재성이라 불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반월성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화려하고 장엄하던 대궐들은 간 곳 없고 빈 터만 남아 있으나, 옛 기록을 더듬어 보면 성문으로서는 남문, 북문, 귀정문, 임해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등이 있었고, 49대 헌강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서울 장안을 굽어 보며, 태평성세를 부르던 월상루와 망은루, 고루등의 누각들, 그리고 임금님께서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조원전, 숭례전을 위시하여 많은 전각들이 처마를 맞대어 있었다 한다.
반월성은 그 이름처럼 마치 반월처럼 생긴 명당이다.동북쪽의 우백호,남천쪽이 좌청룡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북쪽은 나지막한 구릉이 이어져 그 위로 돌들을 쌓은 석축의 성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 비하여 좌청룡의 남천쪽은 구릉 대신에 강물이 감돌아 나가고 있으므로 청룡의 기운을 얻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명당의 기운을 얻어서 신라 왕조가 탄생되고부터 멸망할 때까지 천년 동안을 줄곳 이 곳에서 영쇠를 이어나갔으니 누군들 명지 명당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계림
구분 사적지/유적지 - 사적 제 19 호
시대 삼국시대
위치 경주시 교동 1
교통 반월성터 안에서 북쪽 첨성대나 대릉원 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바로 왼쪽에 계림이 있다. 반월성을 통하지 않고 가려면, 국립경주박물관 앞 서거리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시내 쪽으로 400여미터 가면 왼쪽 인왕동파출소 옆으로 첨성대 가는 작은 포장도로가 나온다.
첨성대를 지나서 다시 반월성 길로 가면 성 바로 못미처 오른쪽에 계림이 나온다. 그러나 첨성대 앞길은 차량통행금지지역이다. 역시 걸어가야 한다.
차로 가려면 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시내로 난 7번 국도를 따라 800여미터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400여미터 가면 대릉원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에서 남쪽 반월성으로 조금 걸어가도 길 오른쪽에 계림이 나온다. 주차장은 박물관이나 안압지 그리고 대릉원 주차장을 사용해야 한다. 시내에는 숙식할 곳이 많이 있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300 150 100
단체 200 100 100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는 곳이다. 탈해왕 9년(65) 3월 어느날 밤 왕은 월성 서쪽 시림이라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아 호공을 시켜 숲으로 가보니 금색 찬란한 궤짝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왕은 궤짝을 가져다 열어보게 하였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범상하지 않았다. 왕은 기꺼이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으며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성을 김이라 하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왕위를 사양하여 김알지의 육대손에 와서야 김씨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이가 바로 13대 미추왕이다. 이후로 이곳을 계림이라 하였으며, 김씨가 왕이 되어 나라가 번영할 때는 나라 이름을 아예 계림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박,석,김 씨 시조의 탄생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바다를 건너오거나 알에서 깨어나는 난생설화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들은 외부에서 신라 지역으로 들어오는데, 이는 철기 문명을 가진 북쪽 사람들이 토착민을 밀어내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것을 묘사한 듯 무척 흥미롭다. 때문에 신라 사람들이 기원전 1세기경 북에서 내려온 삼람들이라고 하는 근거가 된다. 반월성에서 첨성대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계림은 숲 가운데로 시내가 흐르고 그 주위는 습지인데, 특히 느티나무와 왕버들나무 숲이 울창하다. 이곳의 나무는 함부로 벨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수명을 다한 나무를 빼고는 옛 숲 그대로이다. 숲 가운데에 순조 3년(1803)에 세운 계림에 관한 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이 있다.
첨성대
구분 국보 제 31 호
시대 삼국시대 - 선덕여왕
위치 경주시 인왕동 839-1
교통 경주시청에서 남쪽,대릉원앞에 주차를 시키고,남동쪽으로 약 15분 가량 가면 첨성대가 있다.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가면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300 150 100
단체 200 100 100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눈 우물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 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매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井자 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08m, 밑지름이 4.93m, 윗지름이 2.85m이며, 제 27대 선덕여왕 재위중(632-647)에 축조되었다.
김유신장군묘
구분 능/묘 - 사적 제 21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
위치 경주시 충효동 산 7-1
교통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고속터미널옆 서천교를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송화산 쪽으로 1.1km 정도 간다.고속터미널에서 불과 2k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데다 형산강을 끼고 경주시를 바라보며 가는 길맛도 좋아 걸어가기를 권한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근처에 기념품가게가 한두곳 있으나 숙식할 곳은 없다.
입장료 어른 학생, 군인 어린이
개인 500 250 200
단체 400 200 150
주차료 [대형요금] : 2000원, [소형요금] : 1000원
김유신은 A 959 진평왕 (26대왕)때 태어났다.
묘자리는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울창한 소나무 숲속이며,어느 왕릉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름 길이만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인데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사이 바닥에 돌을깔았다.
호석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 십이지신상이다.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동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머리 모습이 이색적이다. 무장을 하지 않아 그런지 매우 온화해 보인다.
「삼국유사」에 "김유신 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 모지사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고 하고, 또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그 의 부음을 듣고 백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보내고, 군악고취 100인을 보내 금산원에 예장하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워 기공을 기명하고, 민호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문무왕이 호화로운 능을 마련해주지 않았나 싶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첫댓글 힘들었겠다....제 와이프가 그러는데 혹시 경주에서 택시기사 하시는 분이신지요??? 암튼 엄청 팔 아프셨겠슈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