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께 바친 것은 백배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고,
영원한 생명까지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우리가 안고 사는 교만 가운데 ‘영적 교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교만이란, 자신은 남들보다 영적으로 낫다고 여기며,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특별히 봉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교회 일에 열심인 봉사자들이 이런 교만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투에는 이런 영적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칭찬도 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어떤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금을 등에 태우고 가는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 나귀는 늘 임금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여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이 온몸을 치장해 주고,
임금이 타는 나귀라고 해서 늘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이 그 나귀를 타고 행렬 할 때, 사람들이 환호를 하자,
나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환호하는 줄 알고 앞발을 들어 답례를 보냈습니다.
결국 임금은 나귀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적 교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우리가 잘 아는 예화입니다.
교회에 봉사한다는 것은 ‘부름 받은 종’으로서
하루하루 주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라고 늘 마음속으로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이상 생각하는 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안토니오 씨는 공소 회장입니다.
면 소재지에서 사진관을 운영합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주일이면 공소 예절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미사를 봉헌하러 오시는 신부님을
안내하고 식사도 함께합니다.
가끔은 그가 식대까지도 냅니다.
40대인 그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공소에서 ‘젊은이’ 축에 듭니다.
좁은 시골에서 평판도 좋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부인과 싸웠다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냉전 중에 있는 아내를 다독거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의 원인은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동생이 사업에 실패해 돈이 급히 필요하다며
과수원을 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복덕방을 통해서 팔려고 했더니
너무 싼값을 요구해 억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이러한 하소연에 안토니오 씨는
사진관을 담보로 돈을 빌려 과수원을 샀습니다.
부인 몰래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부부 싸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5년 뒤 나는 그 본당을 떠나 다른 본당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안토니오 씨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과수원 인근에 공단이 생긴다고 과수원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어
보상금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 과수원을 샀던 금액보다 훨씬 많아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축복 앞에서 경외심을 지니면 겸손을 잃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계속해서 하늘이 지켜 줄 것입니다.
안토니오 회장님은 오늘의 복음 말씀을 체험한 분입니다.
‘복음 정신으로 살면 박해도 있지만 그만큼의 보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