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유진오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해
더 한층 쓸쓸해지는 가을밤인가 보다
내사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
그러나 마음속 숨은 불길이
사뭇 치밀려오면
하늘도 따오 불꽃에 싸인다
아마 이 불길이 너를 태우리라
이 불길로 해
나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밤은 숨 막힐 듯 기인가 보다
불길이 스러진 뒤엔
재만 남을 뿐이라고
유식한 사람들은 말라더라만
더러운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불길!
이것은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불길을 사랑한다.
낡은 도덕(道德)이나
점잖은 이성(理性)은 가르친다
그것은 너무나 두렵고
위험(危險)하지 않느냐고
어리석은 사람아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네 거짓과 비겁을
허물치 말까 보냐
네가 생각지도 못한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것이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간다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 있어
괴로운 밤
나의 사랑 나의 자랑아
나는 불길에 싸여버린다.
(시집 『창』, 1948)
[어휘풀이]
-구융 : 구유의 사투리, 구유는 마소의 먹이를 담는 큰 그릇
[작품해설]
“시인이 되기는 바쁘지 않다. 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고 유진오는 자신의 시집 『창』의 발문(跋文)에서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과 투쟁 경력으로 인하여 흔히 그의 시는 정치성이 강하고 혁명적 사상성이 투철하다고 판단하기 쉬운데, 이러한 판단에 맞는 시는 주로 초기에 「장마」, 「횃불」, 「3·8 이남」,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의 창작으로 인하여 1년의 감옥 생활을 겪는데, r 이후에는 선전 선동적인 시들보다는 그러한 투쟁 의식이 한층 내면화된 한 차원 높은 시들을 창작해 내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언급에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그는 투철한 민주주의작 되지 못한 서정적 시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불길」은 바로 그러한 그의 내면화된 투쟁 의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먼저 시적 화자는 어느 겨울 밤,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더 한층 쓸쓸해’짐을 느낀다. 그는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여서 가슴 속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마음속 숨은 불길’에 휩싸일 뿐이다. 그 때 마음속의 불길은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그리운 이까지 태울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타오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쓸쓸하고 / 안타까운 밤은 숨 막힐 듯’ 길기만 할 뿐이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하여 ‘불길이 그러진 뒤엔 / 재만 남을 뿐이라고 / 유식한 사람들은 말하’지만, 불길은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과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 모조리 집어 삼키는’ 것으로서, 단순한 개인적인 연정의 의미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표상으로 승화된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신명나는 그리고 정의 의미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표상으로 승화된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 불길을 사랑‘하지만 그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동시에 ’두렵고 위험‘하기까지 한 선택임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 불길을 회피하는 것은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거짓과 비겁‘의 행위여서, 그는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가는‘ 투쟁의 의지를 새삼 불태운다. 그러나 그것은 외롭고 고독한 선택이고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어서 괴롭기도 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그의 ’사랑‘과 ’자랑‘인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투쟁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느끼는 고독감과 괴로움을 솔직히 드러내 준다. 그러면서도 감상(感傷)과 흥분을 억제하면서 내면화된 의지를 가다듬는 성숙한 시인의 진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가소개]
유진오(兪鎭五)
1922년 전라북도 완주 출생
1940년 초반에 일본 문화학원을 다님
1941년 중동학교 졸업
1946년 김상훈 등과 함께 『전위시인집』 발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활동
1947년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 들어감
1949년 군법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감형, 그 이후 행적은 불분명함
시집 : 『전위시인집』(1946), 『창』(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