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도리어 혼란만 초래한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려고 했더니
어찌 개구리가 나와 진흙에서 뒹구는가…”
마음공부 하려면 우선 대전환이 필요하다
감성에만 만족하면 공부 다 된 듯 착각
불교 책 여러 권 읽고 보호막으로 삼기도
감성적 위로, 지식에의 접근 모두 버려야
고함에 물줄기 거꾸로 흐르듯 새 길 보여
사람들이 흔히 수미산이라고 하는 카일라스. 계단도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강설
지금도 끝없이 수많은 주장이 엇갈리고 있듯이 불교의 수행론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크게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업(業)을 맑히며 한 단계씩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개개인의 수행과정을 보면 이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래서 많은 경론에서는 수행하며 오르는 단계를 무수히 설정해 두고 설명하기도 한다. 초기불교의 수행에서도 주로 단계적인 이 방법으로 지도했다.
또 하나는 순식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흔히 돈교(頓敎)라고 일컫는 <화엄경(華嚴經)> 등의 경전과 중국의 선종(禪宗)에서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삶을 통해 볼 때 대각(大覺)을 이루기 전까지 단계적으로 깨달았다는 설명은 없다. 오직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는 것이 유일한 설명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지도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무수한 세월을 수행한 후 비로소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설법을 한 번 듣고도 깨닫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지도법을 두고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나누는 것은 어느 한 점만을 본 것이다. 어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서도 마음이 활짝 열리고, 어떤 이는 대승경전을 보면서도 그저 세월만 보내는 이가 있다.
풍혈 연소 화상(風穴延沼和尙, 896~973)은 남원 혜옹 화상(南院慧和尙)의 제자이며, 임제 선사의 4대 법손(法孫)이다. 여주(汝州) 풍혈산(風穴山)에 주석했으므로 풍혈 화상이라고 한다.
본칙 원문
擧 風穴在州衙內 上堂云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住卽印破 只如不去不住印卽是不印卽是 時有盧陂長老出問 某甲有鐵牛之機請師不搭印 穴云慣釣鯨澄巨浸却嗟蛙步輾泥沙 陂佇思 穴喝云長老何不進語 陂擬議 穴打一拂子 穴云還記得話頭 試擧看 陂擬開口 穴又打一拂子 牧主云佛法與王法一般 穴云見箇什道理 牧主云當斷不斷返招其亂 穴便下座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풍혈선사께서 영주의 관아 안에서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 말씀하셨다. “조사의 마음도장은 모양이 무쇠소의 작용과 같다. 치우면 곧 도장이 나타나고 그대로 두면 곧 도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약에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두지도 않는다면, 도장이라 해야 옳은가 도장이 아니라고 해야 옳은가?”
그때 노파 장로가 자리에 있다가 나와 물었다. “제가 무쇠소의 작용을 가졌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도장을 찍지 마십시오.”
풍혈선사께서 말씀하셨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는 데는 익숙하지만, 안타깝게도 개구리가 진흙 밭을 뒹구는구나.”
노파 장로가 생각에 잠겼는데, 풍혈선사께서 꽥 고함을 지르고는 말씀하셨다. “장로는 어째서 말을 잇지 못하는가?”
노파 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는데, 풍혈선사께서 불자로 한 번 후려쳤다.
풍혈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의 참뜻을 알기는 하겠는가? 한번 말해 보시게!”
노파 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는데, 풍혈선사께서 다시 불자로 한 번 후려쳤다.
영주의 태수가 말했다. “불법과 더불어 왕법이 똑같군요.”
풍혈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도리를 보았는가?”
영주의 태수가 말했다.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합니다.”
풍혈선사께서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강설
풍혈선사께서 영주의 관청에 초청 받아 고래잡이에 나섰다. 그래서 ‘조사의 심인’이니 ‘무쇠소의 작용’이니 하며 미끼를 던졌다. 이건 낚시하는 놈을 통째로 삼킬 능력이 없다면 어설프게 물어서는 안 된다. 풍혈선사는 사실 자기를 미끼로 내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단한 자비이다.
자긍심을 가진 노파 장로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하지만 풍혈선사까지 집어삼킬 힘이 없었다. 비록 무쇠소의 작용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것을 곧바로 쓰지도 못했을 뿐더러 구걸을 하고 말았다. “스님께서는 굳이 저를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라니, 쯧쯧!
풍혈선사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려고 했더니, 어찌 개구리가 나와 진흙에서 뒹굴고 있단 말인가.” 이때라도 노파 장로가 무쇠소의 작용을 보였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 기회를 놓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여기까진 봐줄만하다. 하지만 풍혈선사의 노파심이 지나쳤다. “내 뜻을 알기는 하는가?”하고 되물어 볼 때쯤에는 이미 선사도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릇 모든 선지식이 이처럼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후학을 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파 장로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것을 어쩌랴. 괜히 매만 벌고 있다.
그러자 선사를 초청했던 영주의 태수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불법이나 나라의 법이나 매 한가지군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머뭇거리다간 큰 일 나는 것이지요.”
그랬다. 옆에 있던 태수가 적중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과녁은 맞추었다. 선사가 제법 큰 잉어를 낚아 겨우 체면치레를 하고 낚싯대를 거둘 수 있었다.
송 원문
擒得盧陂跨鐵牛 三玄戈甲未輕酬
楚王城畔朝宗水 喝下曾令却倒流
송 번역
노파 장로를 붙잡아서 무쇠소에 앉혔으나
삼현의 창 갑옷엔 함부로 대들지 못했네.
초나라 왕의 성 주변에 모여든 물줄기를
고함소리로 이미 거꾸로 흐르게 하였네.
강설
풍혈선사의 작전대로 미끼를 문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무쇠소의 등에 태우기까진 하였다. 그러나 풍혈선사의 경지가 너무나 완벽하여 노파 장로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말았다.
불교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을 접한 사람들은 우선 흥미가 발동하여 공부를 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마음공부란 결코 만만치 않다. 단순한 용기만으로는 뚫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풍혈선사의 명성을 듣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받을까하여 모여들긴 했으나, 의욕만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풍혈선사가 노파심으로 꽥 고함을 질러 일깨워 주려 하였으나, 그 고함소리에 도리어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는구나.
마음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우선 대전환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지식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힐링(healing, 치유)이니 뭐니 하며 감성적인 측면을 만족시키면 마치 자신이 공부가 된 듯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으로 접근하는 측면이다. 불교에 대한 책을 혼자서 여러 권 읽고는 마음대로 해석한 뒤에 그것으로 보호막을 삼으려 한다. 그것도 역시 가짜다.
고함소리에 물줄기가 거꾸로 흐르듯, 이제까지 감성적으로 위로받으려는 방식이나 혹은 지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겨우 보인다.
자신의 공부가 제대로 된 것인지를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편안한 마음(平常心)’으로 그 상황을 풀어갈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인정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감정에 끌려 다니며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면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