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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복음 선포의 세 원칙.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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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4 05:05
- 복음 선포의 세 원칙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의 세 가지 원칙을 이르십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무소유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왜 무소유여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단지 여행의 수월함 위해서입니까?
그런 뜻도 없지 않지만 숨어 있는 뜻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아무것도 앞에
‘집이나 장소’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집이 의미하는 것은 안정입니다.
그리고 안정 안에는 안전함과 편안함에 안주함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돌아다니다 보면 내 집이 편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점차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을 두고 떠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여행도 이런데 복음 선포를 위한 길 떠남은 오죽하겠습니까?
장소를 소유하지 말라는 것도 안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장소는 어떤 곳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과 저곳을 다니기 위해서 이곳에 안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안주는 제일 큰 적이요 장애물이기에
복음적 불안정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가 아니더라도 의존은 나쁘고 의탁은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것 없이 복음 선포는 불가능하다 해선 안 되는 겁니다.
두 번째 복음 선포 원칙은 ‘한 집에 머물기’입니다.
한 곳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지만 집은 한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이집 저집 떠돌지 말라는 뜻이고 집 투정하지 말라는 뜻이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의 세 번째 원칙은 ‘발에 먼지 털기’입니다.
어느 곳과 어느 집이 복음을 원치 않으면 미련 두지 말고 떠나라는 뜻이고,
더 나아가 원하지 않는 그들과 복음을 강요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끔 복음 선포가 거절당할 때 서운한 감정이 들 수 있고
내가 이 좋은 것을 너를 위해 주는데 왜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냐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거나 심지어 다투기도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불안정과 불편함과 거절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복음 들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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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복음선포의 삶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무소유의 자유”
누구나 원하는 바,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내적요구입니다. 오늘 지금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예수님의 원대한 평생 비전이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삶 자체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 아름답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우리가 협조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회개의 삶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삶입니다. 본연의 참나의 모습을 회복하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과 더불어 아름답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그 회개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의 에즈라입니다. 에즈라의 겸손한 회개와 더불어 감사의 기도가 참 진솔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이런 회개의 은총이요 그대로 우리가 배워 바쳐야 할 기도같습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이제 잠깐이나마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나다.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습니다.”
정말 진정성 넘치는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요, 공부하는 마음으로 옮겨 봤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철저한 회개의 삶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 파견받은 열두제자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영원히 살아 계신 파스카의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각자 고유한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어 파견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 사라지는 어둠이듯,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어둠의 세력인 마귀들은 축출되고 치유의 은혜가 뒤따릅니다.
셋째, 무소유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문자그대로의 무소유의 삶은 아니더라도 무소유의 정신은, 영성은 너무나 귀합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의 본질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집은 소유하고 싶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유머도, 또 모 유명인사의 추천사 대신 <이름 석자가 최고의 추천사>라는 유머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제자들 파견시 주신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우레같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의 과도한 소유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삶이 짐이 아닌 선물이 되기 위해 최소한도의 의식주에 만족해야 함을 배웁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러라.”
안팎의 짐을 가볍게 하고 민폐를 최소화하라는 것입니다. 진정 내적혁명의 회개는 이런 무집착과 무욕의 초연한 실제적 삶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실 본질적 복음적 삶에 충실할 때 좋은 이웃의 친절한 실질적 환대가 우리를 살립니다. 복음의 일꾼들이 굶어죽은 일은 없다는 것도 선교역사에서도 환히 들어납니다. 얼마전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며 쓴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하늘 향해
날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
잠자리가 되었나
얼마나 가벼워져야 내 영혼 하늘을 날 수 있겠나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가 되어 하늘 날고 싶은 이 소원!“ <2025.8.9.>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을 원하십니까?
1.회개하십시오.
2.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시오.
악마의 축출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이 뒤따릅니다.
3.무소유의 영성을 사랑하십시오.
4.자유롭게 사십시오.
이런 삶자체가 이웃에게는 참 좋은 선물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에 참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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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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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나가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
제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세 아들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막내 아들 하나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 아들마저 전사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단순한 군사 전략이나 전쟁 계산을 넘어, 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라이언 일병을 반드시 살려 데려오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몇 명의 병사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한 병사를 위해 여러 병사가 희생되는 것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을 살려냄으로써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고, 전쟁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생명과 사랑이 가장 큰 가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 속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왜냐하면 니네베는 이방인이었고, 요나의 눈에는 그들이 구원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다시 파견되어 니네베에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백성들은 왕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며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멸망을 거두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한 도시 전체가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즈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인간의 힘이나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셨고, 마침내 회복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저 역시 여러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달라스 본당 신부로서,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로서, 서울대교구 대표 신부로서,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일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심정으로, 또 요나가 니네베로 파견된 심정으로 감당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살려내는 것이, 한 공동체를 일으키는 것이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라이언 일병의 어머니를 위해 정부가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은 이방인을 차별하고 죄인을 내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버거워 보여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든 이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 이 파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는 일꾼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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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비폭력의 대원칙!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3일 화요일- 서른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비폭력의 삶에 투신하기
비폭력은 겁쟁이의 길이 아니라 힘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비폭력의 대원칙을 요약해 줍니다:
1. 비폭력은 겁쟁이의 길이 아니라 힘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 비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종류이 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기력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입니다;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영성입니다.
2. 비폭력의 목적은 우리가 적(상대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굴욕을 주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우정을 맺고 그들을 이해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화해의 과정, 즉 능동적인 사랑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에, 우리 자신도 희생과 용기를 통해 화해를 이루기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합니다. 킹은 이 원칙을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죽음 그리고 에페소서 2,13-22와 로마서 12,1-2를 근거로 하여 세웠습니다.
3. 상대가 악한이 아니라 훨씬 더 거대한 체제적 악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상대 역시도 이 체제적 악의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단순히 상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를 가하는 이 더 큰 악을 겨냥해야 합니다.
4. 다른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감수하는 도덕적 힘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구원하는 고통에 대한 신념"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역사 대부분은 이와는 정반대인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념"에 기반을 두고 이어져 왔습니다.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믿고 있는 거짓말은 상대방(적)의 고통을 증가시킴으로서 자신의 고통이 멈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단기적인 관점에서만 효과를 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고통은 결국 사회적, 심리적,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아 후속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들이 희생자들의 삶을 감수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픔을 견뎌내는 기꺼움이야말로 상대방은 물론이고 비폭력 저항자 자신과 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까지 변모시켜 주고 악을 흡수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는 여기에 관여된 모든 사람을 변화시켜 주며, 적어도 기존의 권력 구조를 흔들고 공적으로 "권력의 본질"이 드러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물론, 비폭력 저항자 자신도 이 행위를 통해 변모됩니다. 이것을 부활 혹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5. 이 사랑의 윤리가 늘 우리 삶 전체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이 있는 위험한 순간에 이 사랑의 윤리는 효과를 낼 수도 없고 실현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윤리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꺼내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생각과 말과 감정과 행동 속에서 훈련하여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새롭게 끌어내야 하는 삶의 중심 가치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우리는 예상치 못한 모욕이나 대립의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6. 비폭력은 우주/현실/하느님이 궁극적으로는 최종적이고 충만하게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게 되어 있다고 믿는 우주적 낙관주의(cosmic optimism)에 기반한 실천입니다. 역사는 무작위가 아니라 일정한 방향과 의미, 그리고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진리를 향한 여정입니다. 하느님/선은 악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부활이 최종적인 말씀(승리)이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사건의 핵심 메시지이자 그분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영원한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순진무구한 채 있어서는 안 되고, 현실의 복잡성과 인간의 본성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들의 안전과 공적으로 드러나는 자기들의 모습, 그리고 기존의 안락함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적극적인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싸움과 전재에 기반한 언어 사용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언어뿐 아니라 우리의 제도 역시 지배와 전쟁의 은유들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끝내고 싶거나 무너뜨리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관계성과 공동체, 그리고 정의와 존엄성 그리고 신뢰를 향한 길로 문을 열어주는 데 필요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때때로 저는 사랑의 법칙에 따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 서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또 춤을 추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비폭력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실천인 것입니다.)
—Kim V.
References
[1] King’s language for these principles may be found online at “The King Philosophy – Nonviolence365,” The King Center.
Adapted from Richard Rohr, “Martin Luther King Jr.’s Principles of Nonviolence,” ONEING 10, no. 2, Nonviolence (2022): 48–50.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oa Heftiba,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갈등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관점이나 배경은 다르지만, 힘이 아니라 용기로 공통된 가치—예를 들어 사랑, 평화,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경청하고 바뀔 수 있도록 자신들을 내맡기고자 하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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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중요한 것은 우리 생각의 열차를 멈추어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 고통과 아픔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퍼져나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단순히 의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영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대개 인정할 것입니다.
이런 사회 병리 현상은 급격하게 빠른 우리 삶의 속도와 소비 중심의 문화, 외적 성공에 대한 강박, 개인주의의 심화 등에 의해 더 박차가 가해지는 모습입니다.
진정한 가치가 아닌 껍데기뿐인 세상적 가치에 치중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우리는 대개 어떤 어떤 정신적 압박 같은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우리가 왜 갖는 것일까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런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달리 말해,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과 외적인 성공과 개인주의, 소비 중심의 분위기에 맞도록 창조된 존재라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정신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분명히 우리 내면 깊은 곳의 진정한 갈망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상과는 정반대의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정말로 바라는 것과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괴리를 느낀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지요!....
돈 미겔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우리, 언제까지 거짓에 속을 것인가 - 내면의 소음을 넘어 진정한 나를 찾는 톨텍의 지혜]에서 우리가 살아오면서 내면화한 수많은 믿음과 생각—사회적 규범, 교육, 문화적 기대—가 사실은 ‘거짓’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거짓은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외면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더 나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을 거짓이라고 규명하고 이 거짓에 속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톨텍'은 고대 멕시코의 영적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영혼의 예술가"라고 합니다.
저자는 톨텍의 지혜를 통해 내면에 대한 우리의 거짓된 인식을 식벼라고, 진실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로 안내합니다. 이 책에서 미겔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는 우리 삶의 피해자가 아니라 창조자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면의 소음'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기차와도 같은 것입니다. 미겔은 이 소음을 우리 내면의 '이야기꾼'이라고 말하는데, 이 이야기꾼은 우리가 받아들인 왜곡된 신념과 판단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소음은 자책, 수치심, 두려움, 비교, 분노 등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한 자아와의 연결을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우리는 우리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 삶의 공동 창조자임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진실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진실된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분주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사랑은 가만히 서서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깊이 바라보는 마음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이 시대가 아픈 이유는 이 진실된 이야기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 때문은 아닌지 깊이 성찰할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힘과 권한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이미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과 힘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과 권한에 집중할 때는 절대 인식할 수도 그 힘과 권한히 발휘되도록 끄집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우리)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심어 주신 이 사랑의 힘과 권한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더러운 영에게서 해방되도록 도와주라고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시편 46장 11절의 말씀을 오늘의 화두로 삼아 봅시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나는 민족들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음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합니다. 바쁘게 흐르는 생활의 리듬을 늦추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외적인 움직임만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생각의 열차를 멈추어 세우는 일입니다. '나' 중심을 어떻게든 잡아 채어 세상적 사고와 세상적 기대에 부응하도록 만드는 생각의 열차를 멈추어 세우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조화롭고 고요하게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해 주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잡다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서 '내' 주변의 모든 존재를 통해 '나'에 대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 주시는 창조주요 어버이신 하느님의 빛나는 미소를 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는 이성적인 판단과 식별을 해야 하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하느님 사랑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고, 또한 모든 존재를 통해 드러내 주시는 하느님의 빛나는 사랑의 미소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오직 사랑에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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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시다
거룩한 사도들에게 베푸신 은총은 실로 찬탄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신 분의 관대함은 그 모든 찬양과 찬탄을 넘어섭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기고만장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악마의 교만을 무참하게 꺾고, 마귀의 사악함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힘과 효력으로 불타올라, 사람들을 점령하고 있던 악마가 신음하며 그들에게서 나와 울며 떠나가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은 제자들에게 악한 영들과 질병을 제압하는 능력과 권한을 주어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영예롭게 하시고 합리적 근거 없이 그들이 이름을 떨치게 하셨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선포의 심부름꾼으로 임명된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하늘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중개자임을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확인시키려면 그래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사람들을 믿음에 의한 화해와 의로움으로 초대해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 줄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3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어머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1요한 3,1).
혼 안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인식 능력을 지난 작은 불꽃입니다.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네 정신의 가장 숭고한 부분은 물론이고, 이 작은 불꽃에도 영혼의 “상(像)"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 안에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지식, 곧 감각의 지식과 오성의 지식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개념과 관념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다른 지식을 감추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넘의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느님과 똑같은 본질을 소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껍데기 지식과 알맹이 지식을 구별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알맹이 지식은 이성을 닮은 어떤 것으로서 우리네 영혼의 본질 속에서 발견되는 지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영혼의 본질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본질속에 뿌리를 박은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영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가리켜 영혼의 삶에서 비롯된 무엇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그것은 이성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영생에 이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성적인 삶에서입니다. 이 지식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지금 여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 속에서 만물이 하나가 되고, 만물이 서로 연합하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됩니다.(47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2절: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
이러한 공격으로 에라스무스는 가장 시급한 시사문제를 파악하고, 개혁의 관심사를 복음과 결부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열망하여 온 개혁을 진행시킬 사람은 과연 그일까? 인문주의자들은 그에게 환호하였다. 전세계가 기꺼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였다. 원천. 즉 성서로부터 또한 단순하고 순수한 성서신학으로부터 전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올바로 개혁하는 그에 의하여 예고된 원칙들은, 바로 일반적인 열망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그의 실천적인 개혁의 제의는 열광적인 찬성을 얻었다.
이러한 순간에 루터가 등장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라이프치히 종교 토론회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를 인문주의적인 동맹자로 보고 그를 격려하였다. 곧 루터의 운명이 그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1520년 11월에 루터의 지방 영주인 프리드리히 현자·와 퀼른에서 만났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의견을 물었고, 에라스무스는 이 선제후에게 루터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요란스럽고 격렬한 비텐베르크의 이 수도자와 헤어졌다. 자연 안에서 선함을 인정하고, “정신의 자유”에서 모든 인간의 교육과 모든 참된 신심에 필요한 전제들을 본 인문주의적 낙관론의 민감한 이 학자는, 자연과 이성에 대한 루터의 유명론적 회의론을 간파하였다. 그는 「자유의지론」(1524)에서 이 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다. 루터는 즉시 「반자유의지론」( (1525)이라는 반박서로 매우 격렬히 응수하였다. 그후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반대자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교설의 핵심을 올바로 파악했다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다시 한번 루터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1526∼1527). 그 이후 그는 루터에 대하여 뚜렷이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대부분의 고참 인문주의지들도 그를 따랐다.
에라스무스는 1521년 이후 바젤에서 지내면서 교부들에 관한 저서를 간행하였다. 1529년에 종고개혁이 바젤에 강하게 도입되자, 그는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로 피난하였다. 여기서부터 그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의 심의(1530)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촉구하였다. 새 신앙자들에 대한 어떠한 강제적인 행동도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루터파의 운동을 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시간이 낫게
할 것이다.(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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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번화한 도시에 성공한 상인 두 명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수완으로 계속 번성하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한 상인의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상대 상인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고,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서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네 안에 있는 미움과 시기심을 보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오히려 선물을 주시겠다고 한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네가 얻는 것의 두 배를 상대 상인이 받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청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돈, 명예, 땅….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워하는 그 상대 상인은 두 배를 받는다니 말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한쪽 눈 실명은 상대에게 양쪽 눈 실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남에 대한 미움이 이런 결정을 가져온 것이지요. 하지만 함께 잘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과의 비교보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피해만 줄 수 있다면 괜찮다는 어리석음에서 머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 비교가 자기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미워하는 사람과도 함께하는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뒤에 파견하십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입니다.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여벌 옷조차도 금지됩니다. 제자들이 세속적 편안함이나 자기 보호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사람들의 환대에 의지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음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자유를 위한 조건이 됩니다. 많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 뜻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과의 비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적 기준에 또 자기 보호에만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하느님 뜻을 찾지 못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라며 제자들의 성공 사례를 증언합니다. 바로 자기 뜻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에 머물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뜻에 머물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성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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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누구나 떠날 때는 예수님만을 보면서 그분마냥 훌훌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돌보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뜰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버려라.”’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필요한 떠남의 영성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굳이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마귀를 쫓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이
자신들에게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런 기적들을 행할 때 사람들은,
제자들을 떠받들고 대우했을 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한 집에서만 떠날 때까지 머물라셨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앙심이나 애착 따위는 품지 말고,
그저 뒷일은 하느님께만 맡기고 훌훌 떠나라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내 보낼 때에 ‘떠날 때’라는 말이 세 번이나 하셨다.
지팡이, 식량 자루, 빵, 돈, 여벌 옷 등 이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인데,
그 하나라도 지니지 말라신다.
곧 주님께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일 게다.
길 떠나서 세상 것에 지배받으면 하늘의 법칙을 선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떠남의 첫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만 머물러라.’라고도 하신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그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훌훌 털어버려라.”라고 하신다.
어쩌면 한 집만이 아닌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 그만큼 더 많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게다.
그러나 예수님은 떠날 때까지 꼭 한 집에만 머물며 이웃에게 민폐를 절대 끼치지 않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두 번째 뜻이다.
또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분명한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세 번째로 말씀하신다.
이는 최선을 다해도 분명 되지 않는 게 있다는 뜻이리라.
세상사 다 그러려니 여겨 그 아쉬움은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착하란다.
이렇게 떠남의 자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무능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예수님의 당부는 그분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것일 게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고,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성모님께서도 당신을 종으로 낮추셨다.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만큼이나 낮추었기에 빈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가기에 바쁜 세상이지만,
가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종’의 마음이 필요한 때다.
철칙중의 철칙이요 당연지사인 사실인,
누구나 죽을 때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
이렇듯 삶의 끝자락은 비우면서 홀가분하게 떠나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리라.
사실 우리는 날마다 떠난다.
과거와 떠나고 자신의 현재와도 떠난다.
떠나는 것만 잘만 해되어도 늘 기쁨이 함께 한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떠남의 세 가지를 헤아려보자.
삶은 어쩜 떠남의 연속이니까.
늘 자신에게서 떠나는 삶을 살자.
우리를 구원코자 오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시고, 훌훌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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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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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하늘을 담은 빈손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 3
아침 출근길,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문을 나섰습니다. 꼭 필요하다고 믿던 것들을 몇 가지 내려놓았을 뿐인데 발걸음이 이상하리만큼 가벼웠습니다. 그때 떠오른 말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장 1–6절의 장면은 마치 오늘 내 삶의 문 앞에서 다시 시작되는 과제처럼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 권한은 밖에서 임시로 빌려온 증표가 아니라,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이미 새겨진 빛을 깨워 주는 열쇠입니다. 누군가가 내게 “이미 네 안에 있다”고 일깨워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의 그림자를 넘어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권한은 소유가 아니라 깨어남입니다. 깨어난 사람은 증명하느라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그 기억에서 흘러나오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파견의 지침은 낯설 만큼 단순합니다. 지팡이, 보따리, 빵, 돈, 여벌 옷—하나하나가 삶의 안전장치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연결고리이기도 합니다.
지팡이를 내려놓는 일은 의존의 습관을 놓는 연습이고, 보따리를 두고 가는 일은 과거의 사연을 오늘로 끌고 오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빵과 돈은 내 안의 부족감과 통제욕을 드러내고, 여벌 옷은 남 앞에서 보이고 싶은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이들을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지금 여기’의 숨결에 훨씬 가까이 다가섭니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현존의 공간을 여는 일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라.”는 무슨 의미일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비교와 최적화를 멈추는 일이 아닐까요? 더 나은 방, 더 친절한 사람, 더 빠른 길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대신, 지금 내 앞에 온 관계와 자리, 일의 조건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수용은 체념이 아닙니다. 내맡김입니다. 내가 조종하려는 충동을 내려놓고 삶의 흐름을 신뢰할 때, 머무는 자리에서 뜻밖의 열매가 익어 갑니다. 머묾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랑은 늘 “여기”에 머뭅니다.
그러나 모든 곳이 우리를 환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 가르침은 냉소의 제스처가 아니라 자유의 연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타인의 반응에 나의 가치를 담보 잡히지 않겠다는 선언, 상처가 마음속에 굳어 먼지가 되기 전에 밖으로 털어 내겠다는 지혜입니다. 거절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평안의 중심임을 기억합니다. 중심을 잃지 않을 때, 떠남도 또 하나의 축복이 됩니다.
제자들은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치유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분위기이고, 평화는 설명보다 먼저 체감되는 기운입니다. 누군가의 눈빛, 듣는 자세, 조용한 손길 하나가 말문 닫힌 영혼을 열어 줍니다. 치유는 종종 ‘하는 일’이 아니라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깨어 머물고, 자유롭게 떠날 줄 알며, 중심을 지킬 때—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하나의 복음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거창한 사명으로 내모는 대신, 일상의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기억하라고 초대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미 거룩함의 씨앗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 그 씨앗이 오늘의 선택과 표정, 호흡과 걸음에서 차분히 자라난다는 사실을. 빈손이 되어 걸을수록 손보다 큰 것이 드러납니다. 존재 자체로 건네는 위로와 치유—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신 권한이 아닐까요?
오늘 현관문을 나서며 다시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더 챙길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먼저 생각하는가?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도 내 평안을 지킬 수 있는가? 머물 자리를 사랑으로 채우고, 떠날 순간을 자유로 마무리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 걸음.
비움으로 깨어나고, 머묾으로 깊어지며, 자유로 가벼워지는 한 걸음.
그 걸음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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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는
세 공관복음서에 다 있습니다.
루카복음만의 특징이 있다면
병을 고쳐 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것을 위해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과
질병을 고치는 힘을 주십니다.
세 복음서가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른 복음보다 짧게 말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 속에 치유는 세 번 언급됩니다.
더 나아가 이야기의 시작과 마지막에 나타나면서
강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루카가 그린 하느님의 나라는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루카가 원래 의사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병자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병에서 오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병이 치유되는 것이
진정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기쁨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입을 빌려 강조하는 듯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때
우리의 모습이 그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나의 방식이 들어간다고 해서
내 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서
그 좋음을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첫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은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은 노래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전할 때
더 기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재능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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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1-6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천주교 신자들은 “야훼 이레”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그 뜻을 압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살펴 채워주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입으로는 ‘야훼 이레’를 외치면서 정작 믿음이 필요할 때가 오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합니다. 여기 저기 손을 빌리고 부탁하면서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찾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지적하면, 오히려 ‘당신은 왜 그렇게 현실적이지 못하냐’고, ‘신앙이 밥 먹여주느냐’고 반문하지요. 보잘 것 없는 내 능력을 붙들고 있느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따로 부르시어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말씀은 그 어떤 세속적인 것에도 기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는 마음조차 지니지 말고 철저하게 ‘빈 손’으로, 그리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빈 마음’이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아무 것도 바라거나 욕심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정말 ‘텅 빈’ 상태가 되어서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가 없지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항상 나를 충만한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시는 분을 내 안에 모심으로써 아무 것도 채우지 않았지만 가득 찬 상태가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히 ‘무소유’를 명령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소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사실 그런 믿음을 갖기란 참 어렵지요.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그분께서 세상을 당신 섭리로 이끌고 계심을 그저 나와 직접적인 상관 없는 ‘사실’로 믿는 게 아닙니다. 나를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나의 ‘미래’는 물론이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맡길 수 있는 결단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철저히 ‘빈 손’이 되어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기에, ‘빈 마음’으로 하느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요. 마음 속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 것들을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 걱정을 안하게 된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가지고 있는 게 많을수록 오히려 걱정할 것들이 늘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참된 믿음을 통해 걱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품 안에서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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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6
9월24일 [연중 제 2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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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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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살레시오회 이기성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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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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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 신학이 맞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저의 책 홍보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제가 쓴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정가는 22,000원입니다.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출판사에서 이 책을 가져올 때 70% 가격으로 사 와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10권 이상 구매하시는 분들께는 15,000원, 30권 이상은 14,000원, 50권 이상은 13,000원, 그리고 100권 이상을 구매하시면 12,000원에 드리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여러분이 많이 사실수록 저는 조금 더 가난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hasasy@naver.com으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겠으나, 선교를 위해 제가 조금 더 가난해지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교구 사제는 수도자들처럼 가난 서원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교구 사제는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제에게 가난은 너무나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이라 굳이 서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서품 초기에는 가난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너무 많이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아닐지라도 물질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너무 넉넉해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 저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지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이 책 판매도 그중 하나이고, 제게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토록 무방비 상태로, ‘빈손’으로 보내셨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선 가르치는 처지에서, 가난하면 겸손해집니다. 부모도 선생도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계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이 주는 돈으로 삽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사제가 되면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존재가 되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보면, 가난한 자의 선포만이 의미를 지닙니다.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가난으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이 죽지 못했습니다.
가난은 선포할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그들의 소유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거함입니다. 그들의 가난은 곧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미래를 위해 부를 축적하며, 자신도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데, 자녀가 어떻게 부모나 스승을 신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진리를 잃어버릴 때, 설교자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엘 오스틴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늘 ‘긍정의 힘’을 설파하며, 믿으면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번영신학’으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았습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세상 부와 성공을 향한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허리케인 하비가 텍사스주를 강타하여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교회는 1만 6천 석 규모의 거대한 경기장을 개조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재민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교회는 ‘침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SNS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이 폭주하자, 그는 마지못해 교회를 개방했습니다. 수십억 원짜리 호화 저택에 살면서 ‘긍정의 힘’을 외치던 그의 설교는,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웃의 고통 앞에서 힘을 잃고 위선적인 외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유함이 그의 말을 무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삶으로 가난을 증거한 이들의 말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지난 2024년 6월 선종하신 서울대교구의 유경촌 주교님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주교품에 오르신 후에도 그분은 주교관이 아닌, 사제관의 작은 방에서 지내셨습니다. 주교를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 가슴 십자가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착용하지 않으셨고, 늘 낡은 가방을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셨습니다. 받는 모든 돈을 봉투째로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월급 0원’의 주교님으로 불렸습니다.
유경촌 주교님의 강론은 특별히 화려하거나 수사학적으로 뛰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의 삶이 바로 강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청빈하고 겸손한 삶으로 증명되었기에, 그 어떤 웅변가의 말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유 주교님의 모습에서 재물이 아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빈손의 목자’를 보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삶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정규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강론 준비를 매우 힘들어했고, 설교 자체도 유창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전 유럽에서 사람들이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아르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그의 극심한 가난과 희생의 삶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하루에 삶은 감자 몇 알로 끼니를 때우고,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하루 16시간 이상을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눌한 말속에서 세상의 지혜가 아닌, 거룩한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느님의 지혜를 들었습니다. 그의 가난한 삶이 그의 말을 ‘살아있는 복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손’으로 파견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힘은 오직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울 때, 즉 ‘가난’해질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언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그중 9년을 독방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를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소유했습니다. 훗날 풀려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9년 동안 독방에서 살았지만, 그 순간들은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단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만이 줄 수 있는 말의 힘입니다. 가르치면서도 가난하지 않다면,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를 주려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가난은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혜를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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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나가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
제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세 아들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막내 아들 하나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 아들마저 전사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단순한 군사 전략이나 전쟁 계산을 넘어, 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라이언 일병을 반드시 살려 데려오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몇 명의 병사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한 병사를 위해 여러 병사가 희생되는 것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을 살려냄으로써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고, 전쟁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생명과 사랑이 가장 큰 가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 속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왜냐하면 니네베는 이방인이었고, 요나의 눈에는 그들이 구원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다시 파견되어 니네베에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백성들은 왕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며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멸망을 거두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한 도시 전체가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즈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인간의 힘이나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셨고, 마침내 회복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저 역시 여러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달라스 본당 신부로서,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로서, 서울대교구 대표 신부로서,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일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심정으로, 또 요나가 니네베로 파견된 심정으로 감당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살려내는 것이, 한 공동체를 일으키는 것이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라이언 일병의 어머니를 위해 정부가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은 이방인을 차별하고 죄인을 내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버거워 보여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든 이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 이 파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는 일꾼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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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가족과 친척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드렸지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과 친척들을 매몰차게 대하시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말하는 마르코 복음서를(3,21 참조) 보면 이 부정적인 인상은 더 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 의도하신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가족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그분 어머니와 친척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께 더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느님께서 너무나 소중하시기에,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아들과 딸, 곧 가족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직무를 수행하시고자 가족을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에 둔다면 누구나 그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제자들로 제시합니다.(사도 1,14 참조)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오늘 독서에서 에즈라는 주님께 온 백성의 죄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백성의 죄를 자기 죄처럼 여기고 하느님 앞에서 매우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이 백성은 끊임없이 주님께 반항만 하였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시편 51[50],7)라고 고백한 것처럼, 어떤 행동들에 대한 뉘우침이라기보다 죄인이며 불충실한 존재이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존재의 비참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철저한 자기 인정이고 자기 낮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믿음 아래, 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전쟁과 유배라는 벌을 내리셨음을 고백하고 그것이 옳았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에즈라의 시선은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전멸시키시지 않은 것은 백성의 죄악에 견주어 하느님의 벌이 가벼웠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에즈 9,13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살아남은 이들에게 터전을 마련하시고 되살려 주셨으며 하느님의 집을 새로이 세우도록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비록 유배로 백성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이들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물리치시지 않고 당신과 맺은 계약을 변함없이 이어 나가셨으며 이 백성을 여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로마 11,1 참조). 에즈라는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남겨 주신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 덕분이라고 고백합니다(에즈 9,15 참조). 그래서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며 구원입니다. 여기에 에즈라의 희망이,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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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1-6: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주신 말씀을 전해 준다. 주님은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어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셨다. 동시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길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삶이 물질적 보장이나 인간적 안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에 있음을 말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는 불필요한 소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제자들을 가난하게 만드심으로써, 복음을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게 하셨다.”(Homiliae in Matthaeum, 32)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권위는 물질이나 외적인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오직 그가 전하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머무는 집에서 손님 대접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초대 교회의 전통에서 나그네와 선교사를 환대하는 것은 하느님을 맞이하는 일로 여겨졌다(히브 13,2 참조). 교회 공동체가 선교사들을 맞이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복음의 열매를 함께 맺는 행위였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신다. 이는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거부한 선택에 대한 증거 행위이다. 또한 제자 자신이 그 거부의 무게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다음 사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준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도전한다.
우리 신앙의 소명: 나는 무엇에 집착하여 복음 선포를 가로막고 있는가? 나의 삶에서 불필요한 짐은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의 역할: 교회는 파견된 이들을 환대하고, 복음 전파를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 각자도 가정과 일터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집’이 되어야 한다.
거부에 대한 태도: 때때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 복음을 거절당한다. 그러나 실망이나 원망이 아니라, 발의 먼지를 털어내듯 겸손과 자유 속에서 주님께 맡기고 다음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오늘 우리도 그 부르심을 받았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 우리의 발도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어,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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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나는 걷습니다 당신의 길을>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나는 걷습니다 당신의 길을>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1-2)
당신께서
당신을 주시며
보내시는 당신과
보내어지는 나를
오롯이 보듬어
온 누리
모든 이에게
기쁨 희망 살림이 되라고
나를 보내시어
나 걷고 또 걷다가
스스로에게 물으니
걷고 있는가
멈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길을 걷고 있는가
다른 길이 아니라
내가 걷고 있는가
다른 누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걷고 있는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걷는 내가 걷고 있는가
당신 없이 나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걷는 당신이 걷고 있는가
나 없이 당신 홀로가 아니라
기쁨이 되어 기쁨 나누러 걷고 있는가
슬픔이 되어 슬프게 하지 않고
희망이 되어 희망 건네러 걷고 있는가
절망이 되어 절망하게 하지 않고
살림이 되어 살리러 걷고 있는가
죽임이 되어 죽이지 않고
오롯이 보내시는 당신과 함께
바로 보내어지는 내가
참으로 걷고 있는가
묻고 또 묻다가
나 바로 선 그 자리에서
당신께서
당신을 주시며
보내시는 당신과
보내어지는 나를
오롯이 보듬어
온 누리
모든 이에게
기쁨 희망 살림이 되라고
나를 보내시니
나는 다시 힘차게
당신의 길을 걷습니다
++++++++++++++++++++
(2)
파견받아 떠나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주어 세상에 보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믿음을 불러일으켜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곳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다가올 마지막 날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현재를 포함하지만,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병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육신이, 마음이 아픈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사람 때문에, 사회 때문에 아픈 사람입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이 시간 아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구해줄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현실적 세계를 포함하면서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병자의 치유는 현실안에서의 고통의 극복, 해방, 자유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그리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이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사명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 운동,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여타의 사회운동과는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초극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개혁과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운동가입니다. 믿는 이들은 복음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가입니다. 운동가로서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의 자세가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마라."
믿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물질적 기반에서 힘을 얻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의 힘은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능력, 물질적 기반에 의지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는 운동은 퇴색하고 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자신의 복음을 떠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꺼이 빈손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어라."
믿는 이들은 지금 주어진 것에 충실합니다. 지나간 사람, 일에 머뭇거리거나 희미한 미래를 공상하며 현재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구체적 현실에 머물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거든 떠나라."
믿는 이들은 반하느님적인 무엇, 비복음적인 무엇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함께 해서는 안되는 세력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과감한 단절이 있을 뿐입니다. 현실 안에 살아가면서도,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결단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현실 안으로 파견된 믿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 믿음을 무기로 삼아 지금 주어진 사명에 철저히 복음을 거스르는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서 신앙의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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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빈손으로 가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들에게 주신 ‘선교활동을 할 때의 행동 지침’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속의 물질적인 것들에, 즉 돈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에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일’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믿음만 있으면 누가 먹여 주나?”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먹여 준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약속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일꾼이 자기 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0,10)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약속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를 맞아들이거든”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로 믿는 것, 그것도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에 속합니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면”입니다.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예고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예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심판을 예고(경고)하는 것은,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심판’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넓은 뜻으로 해석해서, “길을 떠날 때에”라는 말을,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때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귀성 여행’과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1,13-16)
‘하느님 나라’ 라는 본향을 향해서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입니다. 세속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돈’으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생활이고, 믿음을 실천할 때 가장 중요한 실천은 ‘사랑’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의 인생은 목적지가 없는 방랑입니다. 글자 그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생입니다.>
3)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간다고 해도, 세속의 재물이나 돈을 사용해서라도 좀 더 편안하게 가면 좋지 않은가? 일부러 힘든 길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말이 ‘유혹’이고 ‘걸림돌’입니다.
만일에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그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길로, 또는 가장 쉽고 빠르고 편한 길로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겠지만, 그러나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의 뒤만 따라서 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가다 보면 ‘십자가의 길’도 만나고(아프고 슬플 때도 있고), 편안하고 쉬운 길도(기쁘고 행복할 때도) 만납니다.
만일에 세속의 재물과 돈을 사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쉽고 편안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면, 그러면서 어렵고 힘든 길은 피해버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 아니고, 돈으로 유혹하는 사탄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에 도착할 수가 없고, 멸망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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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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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본당 분위기>
본당 신부로 발령난 동료 사제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본당 분위기가 어떠냐는 말에 그 신부는 다들 노인들밖에 없다고 쓸쓸히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이제 더 이상 가톨릭 교회는 예전의 활력을 찾기 어려울 거라 말합니다. 하지만 노인들밖에 없다는 말은 아직까지 그 노인 신자분들이 계시는 가정마다 적어도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에 도취되어 들떠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선의가 꺾이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수 있음을, 거절당할 수 있음을 미리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분명 실패의 모습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고 상실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실패 예고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과 같은 대수롭지 않은 과정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공과 실패를 구분 짓고, 인기와 점수를 헤아리기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성공과 실패는 없습니다. 그저 주님을 향한 부단한 배움과 여정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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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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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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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음 선포의 세 원칙>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의 세 가지 원칙을 이르십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무소유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왜 무소유여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단지 여행의 수월함 위해서입니까? 그런 뜻도 없지 않지만 숨어 있는 뜻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아무것도 앞에 ‘집이나 장소’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집이 의미하는 것은 안정입니다. 그리고 안정 안에는 안전함과 편안함에 안주함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돌아다니다 보면 내 집이 편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점차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을 두고 떠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여행도 이런데 복음 선포를 위한 길 떠남은 오죽하겠습니까?
장소를 소유하지 말라는 것도 안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장소는 어떤 곳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과 저곳을 다니기 위해서 이곳에 안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안주는 제일 큰 적이요 장애물이기에 복음적 불안정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가 아니더라도 의존은 나쁘고 의탁은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것 없이 복음 선포는 불가능하다 해선 안 되는 겁니다.
두 번째 복음 선포 원칙은 ‘한 집에 머물기’입니다. 한 곳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지만 집은 한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이집 저집 떠돌지 말라는 뜻이고 집 투정하지 말라는 뜻이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의 세 번째 원칙은 ‘발에 먼지 털기’입니다. 어느 곳과 어느 집이 복음을 원치 않으면 미련 두지 말고 떠나라는 뜻이고, 더 나아가 원하지 않는 그들과 복음을 강요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끔 복음 선포가 거절당할 때 서운한 감정이 들 수 있고 내가 이 좋은 것을 너를 위해 주는데 왜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냐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거나 심지어 다투기도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불안정과 불편함과 거절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복음 들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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