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7: 13-24
곧 그 날에
1. 본문 13-15절은
“⑬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⑭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⑮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입니다.
여기서는 다시 반복된 묘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홍수의 역사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간결성에 대하여 상당히 특이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반복했다고 해서 절대로 무의미한 되풀이가 아닙니다. 가장 가혹한 언어로도 충분히 묘사될 수가 없는 너무 무서운 보복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매두어 심사 숙고 하시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여기서는 다른 것이 기록된 것은 전혀 없고 다만 믿기 어려운 것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더욱 더 되풀이하여 이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제 아무리 우리의 이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들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에 관한 해설들이 다음의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노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동물들이 숲 속에서와 동굴에서, 새집에서 각각 모여들어 전혀 방황하지 않고 한 곳에 모여지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신 것같이 고스란히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이 사실을 지적해서 부각시키며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지 동물들의 각 종류가 보존되었는데 우연히 인간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고 그에게 그분이 살리시고 싶은 동물들을 손에서 손으로 넘겨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특별히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16절은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입니다.
이 말은 쓸데없이 추가하여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그 문은 아마 큰 문 이었을 것입니다.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역청도 잘 굳지 않고 충분히 견고하게 붙어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의 이음매들로부터 새어들어 오는 물들의 세력을 막을 만큼 문이 잘 맞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격렬하게 닥치는 격동과 심하게 부딪치는 충격을 받을 경우에는 더욱 더 그 문이 유약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호기심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을 헛된 공상들을 야기시키는 동기를 단정해 버리려고 모세는 한 마디로 그 방주는 인간의 기술로 안전하게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렇게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새로운 능력과 영특함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건조하는 데에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이 마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호의가 무산되지 않게 하시려고 더 막대한 것을 부가시켜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판단의 역량을 가지고 방주를 보존시킨 방법을 제멋대로 헤아리지 않게 하려고 모세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를 물들이 방주에 덮쳐서 들어오지 않게 제재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청칠을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이를 잘 메꾸어서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과 그분의 손이 간섭하심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17-24절은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칭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집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에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24)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입니다.
모세는 방대하게 이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완전히 물에 잠겨버렸다는 것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상이 멸망당한 그 홍수를 무리가 하나의 운명으로 돌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 이 설명의 특별한 의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어떤 베일을 쳐놓는 것이 상례로 되어진 듯합니다.
그 결과로 그 사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심판에 대하여 아리숭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 번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멸망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으니만큼 우리는 여기에 근거하여 그 홍수는 절대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라고 하는 점을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노아가 신앙과 구원을 함의하고 있는 말씀을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이 멸망당해도 그 자신은 안전하게 보호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라는 것이 더욱 더 명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전에 우리가 언급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으니 이를테면 불경건한 자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를 당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람들의 범죄가 얼마나 지독했는가를 다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들 때문에 이 세상을 멸망시켜야 되겠다는 작정을 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에 보다 더 관대한 치료책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이 발견하셨다면 그분이 창조하신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들에게 멸망밖에는 다른 치료책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이 서로 상치되며 극단적인 것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상치되는 극단을 연결하셨으니 곧 인류가 멸망당했으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안전하게 그 멸망을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노아가 세상을 백안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결과를 안겨 주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언급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모범을 닮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많은 죄인들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을 우리가 허용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불경한 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또한 우리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을 끈기있게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들은 그런 짓들을 우리 주님이 마침내 오셔서 최종적인 판결로 우리의 순종이 그분에 의하여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까지 계속할 것이니 우리는 꾸준한 인내심으로 견디어 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교훈하기를(벧전3:21) 노아가 전 우주적인 홍수에서 구원된 것은 바로 세례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받는 구원의 방법이 노아의 이 구원과 일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그 당시와 같이 이 세상이 죄인들과 불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자신이 그 많은 죄인들과 분리되어야 하며 언제든지 주님께서 우리를 그들이 당하는 멸망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도 이 방주와 적절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상호적으로 부합되고 있는 유사성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유사성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고 자신과 아내와 아들들을 모아서 죽음이 도래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그 죽음에서 빠져 나오기 위하여 준비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시도록 세상을 포기하고 죽어야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적절한 것이며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어느 곳에도 구원을 주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정말로 우스운 짓들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말씀이 없는 방주를 조작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