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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요(9)
교회, 주님의 제자들의 공동체
요 15:5-19 / 이수영 목사
일반적으로 교회라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처음 생겨난 것은 안디옥에서입니다. 시리아 지방에 있으며 고대 로마 세계 전체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안디옥은 최초의 이방인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1:26).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세 차례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과 26장 28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이란 말은 무려 29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보다 거의 백배나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생기기 전에 교회에 모이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은 “제자” 또는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행11:25-26의 기록을 읽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공동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병 고치기 위해서 만나고 유산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만나는 등 어떤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사실 사람들 자신이 주님을 찾아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제자를 만드시려고 찾아 만나시는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다 그렇게 친히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스스로 와서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되어야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를 붙들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가 오셔서 붙들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누구이신지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만나기는 했으나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한다면 참된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입니까?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에 아주 만족해하셨습니다(마16:17-19).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 즉 유일하신 구원자로 아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고 주님으로 영접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를 따라야 그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해 보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정중히 찾아왔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고위 관리가 되었고 또 부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막10:20-22).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인 유다도 예수님 일행의 돈궤를 맡고 거기서 돈을 훔치곤 하던 도둑놈 심보를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를 은 삼십 량에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돈, 명예, 권력 등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신 말씀에 곧 이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진정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 때문에 살고 주님 위하여 사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세상에서 택하여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하기 때문에 세상과의 긴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긴장을 이길 힘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의 미움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주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8-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본문 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맺어야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5-7절을 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는 가지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잘 붙어있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원하는 대로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열매는 어떤 열매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들어봅니다. 본문 9-15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절 한 절 풀어서 들어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친구를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들으신 말씀을 다 알고 행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말씀대로 행하면 예수님의 친구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제자들에게서도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사랑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어떤 지역이나 울타리 안에 여럿이 모이기만 하면 공동체가 되는 것 아닙니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한 몸이 되어 함께 살아야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 5-6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하십니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많은 가지가 붙어있어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통에 함께 붙어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들을 풍성히 맺는 지체들을 가리켜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고 그를 떠나 있는 사람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나가 땔감으로 불에 던져지는 마른 가지에 불과한데 그런 심판에 이르지 않을 영원한 주님의 지체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그루의 포도나무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몸통에 붙어있는 가지들 같은 제자들의 공동체라면 거기 속한 모든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의 지체들끼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몸의 지체들끼리 미워하거나 싸우거나 무관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서로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픔과 아픔을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가 한 몸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각자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지 아닌지를 먼저 냉철히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주님으로 영접했는가? 내가 정말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진실로 주님 때문에 살고 주님 위하여 사는 것이 확실한가? 내가 정말 내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주님의 참된 제자들의 모습을 되찾으며 평화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이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는 교회
요 15:5-8 / 김광일 목사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2만7000평 녹지에 교회를 비롯한 8개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서울 명성교회가 의료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명성기독병원(MCM) 타운입니다. 김철수 병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티오피아는 아름다운 나라예요.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착하고 친절합니다. 아프리카 유일의 한국전쟁 참전 우방국으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 10만명당 의사비율 0.2명, 5세 이하 유아사망률이 10%가 넘는 의료사각지대입니다. 1인당 연소득 991달러로 세계 169개국 중 157위의 최빈국입니다.” 그의 첫마디에서 에티오피아를 향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났습니다. 이러한 애정과 소명이 있기에 종합병원 산부인과 과장직을 마다하고 이곳 먼 아프리카까지 날아온 것입니다. 장로이자 의사인 부친 덕분에 그의 삶은 지극히 평탄했습니다. 조부로부터 신앙의 맥을 이어받고 의사 직업이 주는 경제적 윤택함은 행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2010년 5월, 김원장은 “김 장로가 에티오피아에 가주셔야 하겠다”라는 담임목사의 말씀에 두말도 하지 않고 “예” 하며 순종하였습니다. 2010년 7월, 김철수 원장은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제게 의료선교사로 헌신할 정도의 믿음이 있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과정을 인정하고 순종할 뿐이지요. 하나님이 부르셨으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사역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그는 진료할 때마다 환자들을 위해 수시로 기도해주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MCM이 이 나라에서 차지하는 민간외교 열매는 엄청납니다. 한국인이라면 고마워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웁니다. MCM은 에티오피아가 한국을 위해 6천명의 군인을 보내준 사랑에 보답하고 있습니다.” 김 원장은 에티오피아내 외국인 및 상류층 2만명이 매년 타국에 나가 진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수용할 특급병원 설립을 구상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수익으로는 빈민층을 위한 무료병원을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부인 이명하 집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5년째인 이곳 생활이 힘들지 않고 오히려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에티오피아 영혼들을 사랑하고 또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서로 잘 협력하도록 나름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합니다. 김 원장은 강조합니다. “단순한 도움보다 스스로 일어서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드시 깔려야 합니다.”
130년 전 무지했던 조선 땅을 깨워 변화시킨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전한 의술과 교육, 신앙은 한국인의 생각을 바꾸고 습관을 변화시켜 나라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척박하게만 느껴지는 에티오피아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김철수 원장과 수 십명의 한국인들이야말로 제2의 알렌이고 언더우드요, 스크랜턴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려고 애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우리로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예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에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포도나무는 예수를 가리키고 가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고 영접하면 그와 신비한 생명적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 열매를 드려야 합니까?
첫째로 기도의 열매- 영혼을 깨우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가 한 여인의 간증을 듣게 됩니다. 소아마비로 날 때부터 불편한 다리로 힘겹게 살아가며 어려운 시간들을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에 대한 진솔한 간증이었습니다. 간증을 들은 필 박사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여인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매님! 인생을 그렇게 위대한 승리로 이끈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대답합니다. “박사님, 저에게는 비밀전화가 한 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전화는 직통전화입니다. 어렵고 암담하고 절망감이 올 때마다 직통전화를 사용합니다. 그 직통전화가 저를 우뚝 서게 했습니다.” 필 박사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다시 질문합니다. “그 직통전화를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예레미야 33장 3절의 성경말씀이 제가 소유하고 있는 비밀 전화번호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문제가 생기거나 필요할 때마다 이 번호로 직통전화를 연결하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 필요를 따라 즉각 응답해주십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이 여인의 인생이 성공으로 가는 비법이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살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기도야말로 승리의 길로 인도하고,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비결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성취해가시기 바랍니다.
필립 얀시 (Philip Yancey)는 자신의 저서 ‘기도’에서 기도라는 영어 단어 prayer는 라틴어 precarius에서 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불확실하고 위험한 순간에 더욱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삼키려는 환경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가운데 기도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시험과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만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그러므로 기도를 멈추지 말고 기도의 열매를 드리는 교회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봉사의 열매- 영혼을 살리는
스티브 린튼(Stephen W. Linton) 박사는 선교사의 삶을 나귀에 비유했습니다. 선교사는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싣고,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 짐을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일을 수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린튼 박사는 수 년 동안 사랑의 구호품을 싣고 북한에 전달하는 나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나귀로 만들어지는 데 1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1895년 4월, 스티브의 외고조부 유진 벨 목사가 미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부부는 평생을 목포, 광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묻혔습니다. 벨 선교사의 딸 사로트는 월리암 란튼 선교사와 결혼하여 일생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스티브의 부친 휴 린튼이었습니다. 스티브의 어머니 로이스는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의 원장으로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녀는 최근에 호암상을 수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선교사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따르며 봉사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봉사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고백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2절입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봉사하는 것은 헛되지 않은 수고입니다. 세상에서 수고하는 것은 투자 아니면 투기입니다. 그런데 투자와 투기는 반드시 보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거나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수고는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가 보장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로 헌신하면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하나님은 그의 봉사와 헌신을 기억하셨고, 마침내 부흥의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낌없이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봉사의 열매를 통해 정상적인 신앙으로 성장되어야 합니다. 부디 봉사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전도의 열매- 영혼을 구하는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전도에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환자들을 전도하며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존재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느 날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는 것이 좋으냐”라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말에 감동을 받고 남편이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하겠다고 합니다. 부인은 음악 전공자였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508장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런데 60세를 넘기면서 파트타임이 아닌 풀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마음을 견디지 못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은 못 벌게 되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감격으로 부임지 콜로라도 덴버의 침례교회에서 취임사 대신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장례식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되신 것에 후회가 안 되십니까? 목사가 안 되고 의사를 하셨으면 부인이 빨리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때 캐슬은 대답합니다.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서 전도자의 곁에 머문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행복이라고. 혹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하늘에서 변함없이 응원자가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장례식에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내게 부탁하신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세상 널리 전하세” 우리에게 필요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전도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5절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현재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영원하지 못한 것에 관심이 쏠려 영원한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중심적인 것, 이익에 관심이 쏠려 주변에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전혀 관심두지 못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영원하지 못한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관심이 바뀌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타까움을 회복하고, 또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희생의 모습을 통해 반드시 전도의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회에게서 전도의 열매를 찾으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삶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삶이 거룩해지면 이미 전도는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는 땅 끝까지 손을 뻗쳐야 합니다. 세상에 주어야 할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뭇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분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전도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돌리고 다녔습니다. 전도지를 주면서 그는 “그 뒷면을 보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별 내용이 씌어 있지 않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큰 글씨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결단이 없으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오는 시간이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지옥은 저절로 가게 됩니다. 열매를 맺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까?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새해에는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맺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영혼의 열매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영혼을 깨우는 기도의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봉사의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구하는 전도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요 15:5~11 / 김광일 목사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동네에 죤(John)이라고 불리는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80여 Km에 달하는 거리를 오고가며 기계적으로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오후의 한 때, 길은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뿌연 흙먼지가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전혀 뜻밖의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직업을 그만두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이 흙먼지를 마시며 살아가야할지 몰라.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쳇바퀴와도 같은 삶의 반복으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럴게 아니라 이 황폐한 길에 꽃씨를 뿌려 보자. 내게 주어진 일과 함께 한번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보자!” 그 이후 그는 주머니에 꽃씨를 가득 담아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하여 오고가는 길 양쪽에 꽃씨를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꽃씨를 뿌렸습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길 양쪽에 드디어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날이면 그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기뻤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꽃들은 쉬지 않고 피어났습니다. 80여 Km에 펼쳐진 그 꽃들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며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또한 풍요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무료하거나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주민 역시 80km의 거리에 이어진 울긋불긋한 꽃길에서 우편배달을 하는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아름다운 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들도 주머니에 꽃씨를 넣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씨 뿌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강조합니다. 포도나무는 생명력이 끈질기고 왕성합니다. 그루터기만 남아도 언젠가 가지가 돋으며, 한 그루의 나무에서 난 가지들이 많은 열매들을 맺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꽃이나 목재나 잎이 아닙니다. 오직 열매입니다. 포도나무는 가구재로 쓸 수 없고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으며, 장식품의 재료로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해 필요한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성도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열매가 그 영혼과 삶에 맺혀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주인은 나무를 살피며 열매 맺는 가지는 더 잘 맺도록 가지를 손질하여 주고 열매가 없는 가지는 잘라서 제거해 버립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매가 없어도 잘리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아직 열매 맺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가지된 자는 오로지 열매 맺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첫째로 영광을 돌리리라
18세기경 구두 만드는 실습생이었던 죤 와르(John Warr)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밑으로 다른 견습생이 고용되었고 죤은 그에게 반복하여 영적인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견습생은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실습생이 위조 화폐 1 쉴링을 진짜와 바꾸려다 붙잡혔습니다. 수치스런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죤은 그를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견습생은 예수 믿게 되었고 헌신적인 제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견습생은 후에 인도 선교사로 놀랄만한 결실을 맺은 윌리엄 캐리 (William Carrey)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선교 사업은 세계복음화 전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존 와르의 영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기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의 뜻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영혼구원을 많이 한다면’ 입니다. 영혼구원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열매를 맺을 때 제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도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넘치는 열매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에 거하리라
테레사 수녀 Madre Teresa)가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짝 야윈 83세의 마더 테레사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조찬 기도회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연설을 하기 위하여 간신히 마이크에다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미국은 이기적인 나라가 되어서 사랑의 바른 의미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입니다.” (America has become a selfish nation, in danger of losing the proper meaning of love: ‘giving until it hurts.’) 중요한 말은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프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프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준만큼 받는 물물교환식의 거래가 아닙니다. 친구를 위하여 아프기까지 피를 흘리는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니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인생의 고통은 잘못된 목표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 기쁨, 만족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 즐거움이 온 후에 길고 긴 좌절의 고통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성도의 목표는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른 이의 칭찬과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좀 더 잘나야 되고 좀 더 강하게 보여 지는 일에 힘쓴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열매를 맺는 삶이 된 이후에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부어지니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며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모쪼록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고백이 나오는 열매 맺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쁨이 넘치리라
아프리카 선교사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에게 한 부인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박사님, 당신은 위대한 학자요, 천재적인 음악가이십니다. 그런데 당신같이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아프리카 오지에서 이렇게 봉사하는 삶을 사십니까?” 이 말을 들은 슈바이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감동을 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데 말로는 잘하지 못하니까 행동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 동료,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더 기쁨이 넘치게 삽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열매 맺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었을 때 더 큰 기쁨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기쁨이지만 그리스도인 자신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여기서 ‘내 기쁨’ 이란 표현을 썼는데, 원문은 ‘나의 것인 그 기쁨’ 이란 뜻입니다. 즉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로부터 샘물처럼 솟아나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이는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맛본 사람만이 아는 지극한 기쁨입니다.
열매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찌 기쁠 수 있습니까?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되며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살라버려집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로부터 떨어진 사람, 그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수확기가 되었어도 열매 없는 포도나무 가지는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 포도나무이신 주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주와 함께 하고, 주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열매 맺는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소련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민위원이 집단농장을 시찰하고 일이 잘 돌아가는지 불평은 없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농부가 대답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확은 어떤가?” “작황이 점점 개선되고 있습니다” “감자 수확은 잘 되는가?” 농부는 “감자를 수확해 쌓으면 하나님의 발끝까지 이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민위원이 “소련에 하나님은 없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그렇습니다. 감자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하나님 없이 감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감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와 의논하지 않고, 예수와 동업하지 않고, 예수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을 하느냐가 우선이 아니라, 먼저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를 하루에 몇 번이나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예수께 간구하십니까? 예수 없는 가정, 예수 없는 사업, 예수 없는 직장, 예수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입니다.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가지 일뿐입니다. 좋은 사람이라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존귀하여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후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식이 있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줄기이신 예수께 붙어 있음으로 능력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야 할 것은 생명이신 예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결실의 계절에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열매가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주를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무엇을 해도 결국 헛수고에 그치고 마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제자로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맺는 가지
요 15:5-6 / 오창우 목사
오늘 말씀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장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 어떤 사람이 귀한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열매맺는 가지가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님이 심었고,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지에서부터 올라가는데, 처음에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포도나무입니다. 그 포도나무에는 뿌리와 생명이 있고, 거기에서 가지가 나온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심으셨고, 포도나무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지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16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예정하셨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 된 것은 성령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의인, 새로운 신분이 되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주님을 원해서도 아니고, 주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가로수 나무들이 가지치기 해서 몸통과 줄기만 남은 것을 보셨지요? 그것을 보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저것들이 잘 살수 있으려나.’ 가지도 없고, 잎도 없는데 말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게 되면 거기서 어김없이 가지가 나오더란 말입니다.
이건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데, 내가 없으면 되나? 내가 없으면 안 되지.”라고 하는데,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은 생명이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가지 된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농부이신 하나님,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 나는 그 가지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어느 수필집에 보니까, 집에서 기르는 짐승 가운데, 개는 기르기 쉽고, 고양이는 기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썻습니다. 개는 주인이 아홉 번 잘못하다가도 한번만 잘 해주면, 그 한번 잘해준 것을 기억하고, 주인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반대라고 합니다. 아홉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한 번 잘못한 것을 기억하고, 주인을 배반하기도 한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본다면, 고양이처럼 예수 믿지 말고, (미안합니다! ^^;) 개처럼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마지막 하나 남은 귀한 것을 다 잃어 버려도, 내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 된 것과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의 은혜,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이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지 않습니까?
욥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다른 것은 다 섭섭해도,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에 감동받아야 합니다. 가지는 줄기에서 나오고, 가지는 줄기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줄기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 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귀한 것입니까? 무슨 자존심으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이 자존심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가지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생깁니다. 그래서 ‘너희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내가 주님 안에 붙어 있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 가지가 이만큼 떨어져도 안 되지만, 1mm 라도 떨어져 있어도 안 됩니다. 꼭 붙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론이 아니고,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짐승 이야기만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돼지가 소에게 불평을 했답니다. “사람들은 왜 나만 보면 욕을 하지? 돼지 같은 놈 이라 하고, 그런데, 너는 왜 욕을 안 먹니? 나는 죽어서 삼겹살도 주고, 족발도 주고, 먹을 게 많은데.” 소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는 죽어서야 그 값어치를 하지 않니? 나는 살아 있을 때에 우유 주지, 밭 갈지, 죽어서도 고기를 주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에나 가치가 있지 않니?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는 거다.” 돼지의 배설물은 땅과 물을 오염시킵니다. 소의 배설물을 갖고 인도같은 나라에서는 집을 짓고 땔감으로도 씁니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 그것이 물속에 들어가면 미꾸라지 먹이가 됩니다. 먹는 것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 것이나 다 먹으니, 그 배설물이 오염시킵니다. 풀만 먹은 소는 배설물도 깨끗한 것입니다. 요즘 광우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소가 풀만 먹어야 되는데, 동물 사료를 먹으니 광우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분 가운데,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거룩한 것, 성별된 것만 먹어야 합니다. 오늘 가지가 여기에 붙어 있어야지, 아무데에 떨어져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줄기이신 예수님께 붙어서 주님의 은혜만을 빨아들일 때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열매가 부자가 되거나 권력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의 열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의 아름다운 성품은 기뻐할 줄 알고, 화평케 할 줄 알고, 인내할 줄 알고, 자비할 줄 알고, 양선하고 주님의 교회에 충성하고, 온유하고 절제할 줄 아는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과정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있는 말씀을 보면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배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여러분, 붙어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님이 심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작은 내가 잘 난 것이 아닙니다. 선함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만 갖고도 마땅히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신앙의 성품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붙어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계명, 그 사랑 안에 살아갈 때에 그런 성품과 열매가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너희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저는 신앙생활 잘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복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제 아버지가 ‘너는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 열심히 했으니.’ 라고 하시고, 저는 또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 열심히 했으니.’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으나, 하나님이 은혜 주실줄로 믿습니다. 재산 물려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재산 물려주면 그렇게 의가 좋던 형제도 싸움을 합니다. 그런 것을 너무나 많이 봐 왔고, 여러분도 봤을 것입니다. 신앙의 아름다운 성품이 축복입니다.
제가 이랜드 회장 박성수 장로님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최근에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97년 11월 외환 위기가 우리나라에 닥쳤을 때에 자기회사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8년 4월 직원 대부분이 데모를 하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까지 와서 농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길은 없고 어찌 합니까? 방법은 하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렌켈러 여사가 말했던 것처럼, 앞이 막히고, 밑이 막히면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생각이 나더랍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한국에 IMF 사태로 공장들이 헐값에 나오자, 그것을 사려고 외국 투자자들이 들어왔는데, 이 투자가가 이랜드를 찾아와서 회사를 사지 않고 투자하겠다고 해서 내놓았던 돈이 5천만불을 내놓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하면 600억 정도이고, 그 당시 돈으로 하면 800억 정도 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돈으로 회사를 사지, 왜 우리에게 투자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그 돈을 갖고 와서 회사를 사려고 했지만 믿을수가 없었답니다. 거의가 이중장부를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사만은 유일하게 장부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보고, 이랜드는 정직한 회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사는 것보다 이런 사람들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서 투자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박회장의 말이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사는 것이 힘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수많은 비바람이 불어오고, 세상사람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에 그래도 그 가운데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산다.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더하시는 축복이 언제 임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 갖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포도나무 가지, 열매맺는 좋은 가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부르는 찬송 가운데,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시니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 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으니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이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주님을 떠나면 밖에 버리워져 말라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불쏘시개밖에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주시는 은혜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응답이 잘 되는 비결
요 15:7 / 문기태 목사
꾀가 많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백만 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세요?" 하나님께서는 "백만 년이 나에게는 마치 일 초와 같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억 원이라는 돈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돈으로 느껴지세요?" 하고 다시 질문을 드리자 기대했던 대답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왔습니다. "백억 원이라는 돈도 나에게는 일 원 정도 밖에 안되지."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꾀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하나님, 그럼 저에게 일 원만 주실 수 있으세요?" 하나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주고 말고, 그런데 일 초만 기다릴 수 있겠니?"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기도는 천국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그 자녀들에게 계속 쏟아 부어주시고 싶어하시는데 그 창구로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외에도 기도 응답에 관한 약속의 말씀들이 성경에는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애송하는 말씀중에 하나입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얼마나 신납니까?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백지수표라도 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 빈 칸에다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적어라.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다 지급해주고 이루어주겠다." 라고 해석이 가능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구하여보지만 항상 내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되어 [주여, 믿씁니다. 반드시 주실 줄로 믿-씁니다.] 하고 기도해보고 작게 기도해서 그런가? 생각되어 소리를 있는대로 질러도 보지만 그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씀이야 쉬우니까 그렇게 이루어준다고 하셨지, 하나님이라도 어디 그게 쉽겠어?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좀 많아? 내가 뭐 대단하다고 나같은 보잘것 없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실 수 있겠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적인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못해서 발생된 것입니까? 사실은 하나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듣는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편리하게 해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서로 다투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고 그쪽에서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절대 없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다 듣고 명확하게 해석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슴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도 정확하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7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운데에 '그리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조건절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그리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위치하여 뒷 부분의 약속을 이끌어줍니다. 즉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뒤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의 조건에는 무관심합니다. 자기의 관심사인 뒷 부분의 약속 즉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에만 귀가 번쩍 뜨여 '정말 이루어질까? 그럼 무얼 구하지?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하는 식으로 급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무게를 두어야 할 부분은 앞 부분입니다. 조건을 충족시키면 뒷 부분의 약속은 우리가 크게 신경을 안써도 주님이 알아서 다 책임지십니다. 기도 응답이 잘 되는 비결은 주님의 약속과 함께 있는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뒤에 따라오는 다 이루어주신다는 약속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을 먼저 주시려고 기도 응답을 약속하시며 은혜의 중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이 잘 되는 비결 즉 주님이 다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전제조건은 무엇입니까?
1. 기도응답이 잘 되는 비결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말슴은 우리가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주님께 무엇을 간구하여 무엇을 얻어내는 것에는 관심이 많으나 주님과의 관계는 소홀히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과의 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은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이들도 기도는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과 무슨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정성을 많이 들여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연합을 하면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누리게 됩니다. 주님과 대화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물어가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귀, 주님의 심경을 느낄 수 있는 마음, 주님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는 판단력, 주님의 계획을 실천해 드릴 수 있는 의지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야말로 주님 안에 아주 깊이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더 깊이 알고자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주님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기꺼이 여러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여러분의 생활중에 다른 시간을 조정할 수 있습니까? 시끄러운 장소를 피하여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주님을 찾아 나아가기를 기뻐하십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주님께 나아가십니까?
예, 그렇다면 참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 안에 거할 때 기도응답은 물론이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은 물론이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밖에 버리워 말라지며 결국 모아다가 불속에 던져져 살라진다고 경고하십니다.
여러분, 응답받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주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미 들어온 사람은 더 깊이 들어오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주님과 만나고 사귀며 주님과 더불어 지내기를 힘쓰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다 이루어 주실 뿐 아니라 충만한 기쁨과 풍성한 열매를 보너스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2. 기도응답이 잘 되는 비결은 주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속에는 지금 무엇이 가득합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속에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 가득합니다. 허망한 욕심, 불필요한 시기심, 공연한 미움, 어리석은 원망, 스스로를 해치는 정욕, 스스로를 괴롭히는 열등감 또는 교만함 등등의 쓰레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중에도 만약 그런 것들로 안을 채운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은 여러분의 입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행동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여러분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멸망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단은 슬그머니 사람들의 안에 위험한 것, 더러운 것, 하나님을 아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로 채웁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온갖 쓰레기들을 주워다가 쌓아 놓습니다. 그래서 이것들로 우리 안에서 빠른 속도로 썩게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온갖 오염물질로 우리 마음을 더럽게 하고 우리 영혼을 어둡게 하며 우리의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은 마음과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기를 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관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관리하기 위해서 책을 많이 읽고 명상을 하며 마음을 비우려고 맙니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다니며 좋은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 채우고자합니다. 물론 그것도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시간을 들여서 애써 비우고 정리한 마음을 사단은 한순간에 다시 더럽힙니다. 그래서 십년공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보혈과 말씀입니다. 더럽혀진 마음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계속 거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주의 말슴으로 가득 채우면 사단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집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마음에는 더러운 욕심, 시기심, 미움과 증오, 원망과 염려, 정욕과 열등감 같은 것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리잡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말씀이 역사하여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말슴이 역사하여 주의 뜻을 잘 분별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슴이 그 안에서 계속 역사하여 성령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생각이 같아지고 주님과 소원이 같아지며 주님과 행동이 같아집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시면 들은 설교 말씀을 다시한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말씀이 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날마다 부지런히 읽고서 눈을 감고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안에 말슴이 풍성히 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외에도 공부한 말씀을, 암송한 말씀을,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안에는 염려, 두려움, 불안, 증오심, 열등감 같은 것들은 어느사이에 다 사라지고 은혜와 기쁨, 감사와 사랑, 주를 위한 열정과 하늘의 소망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느끼며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게되며 여러분의 기도가 바뀌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응답도 점차 풍성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모두 말씀이 채워지고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3. 기도응답이 잘 되는 비결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바를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20여년 전부터 즐겨 암송했습니다. 수없이 암송한 말씀인데 그리고 아주 짧은 말씀인데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신다는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무엇이든지 이루리라' 라고 되어 있지 않고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내가 네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기도로써 아뢰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지 주님께 들고 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큰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작은 문제도 들고 나가 기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복잡한 문제뿐 아니라 간단한 문제도 구하여 응답받는 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 낫는 문제입니까? 부요하게 사는 것입니까?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입니까?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까? 사업이 형통하는 것입니까?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까? 맡겨진 일을 잘하는 것입니까? 이 나라에 정의가 구현되는 것입니까? 평화가 확산되는 것입니까?
주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만 가지고 오지 말고 육신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다 가지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고상한 문제 뿐 아니라 유치한 문제도 좀 가지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여도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감이 입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다 알아서 주시겠지!'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입을 벌려 부지런히 필요를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응답받은 기도를 가지고 간증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만 말고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직접 무슨 문제든지 가지고 주님께 직접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꼭 오래믿은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시고 이제 믿은 사람의 기도는 외면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거창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만 듣고 조용하게 간구하는 기도는 외면하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신대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도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안에 거하고 사랑안에 거하며 늘 주님을 사랑하고 주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또한 기도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은 주의 말씀을 그 안에 날마다 채우는 사람입니다. 헛된 마음을 비우고 말슴으로 가득 채워 말씀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항상 바른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기도응답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직접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않고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구하기전에 채워주실 수 있으나 우리가 구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도응답의 비결을 확실히 알고 슬기롭게 간구하여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말씀과 기도
요 15:7 / 임덕순 목사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폭탄 발언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죄책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는데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막아 드릴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들은 제자 자격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주님을 지켜드리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많이 전하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고 하시는 마당에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다투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이 나를 두고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제각기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씩 주님께 “주여 내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정말로 철저하게 신앙으로 살고 싶고, 철저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면, 우리는 “아, 저 말씀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시면서도 누가 주님을 팔 사람인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지켜서 십자가에 죽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지도 않았고, 세상의 악을 너희가 박멸하라는 버거운 명령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명령을 하셨는데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만 붙들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전부였고, 그것만 지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오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지난 주일에 읽은 말씀을 보면, 주님은 유일한 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붙어있는 가지이며, 하나님 아버지는 열매를 기다리고 농사짓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나무가 병들지 않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거름은 충분히 줄까? 하는 걱정은 가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가지가 힘써야 하는 것은 오직 그 나무에 붙어있는 것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나무의 영양은 당연히 공급받게 되어있고, 열매는 맺게 되어있습니다.
또 가지는 제가 붙어있어야 하는 제 나무가 따로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만 붙어있어야 하고, 사과나무 가지는 사과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하면, 자기 나무에서는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말라죽게 될 뿐이지 좋은 열매는 꿈도 못 꿉니다. 성도는 물질이나 세상의 어떤 사상에 붙어있어도 되는 가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만 붙어있어야 하는 예수님의 가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것,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슴 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이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 가운에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들이 주님의 말씀만을 지키면서 살아만 간다면, 그들의 삶에는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이며, 그들의 구하는 모든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날에 제자들에게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헌신을 요구하시거나 우리의 생명을 바치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이웃의 가난한 사람을 너희가 다 책임지라고 하시거나 세상의 악을 다 뿌리 뽑으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다만 너희 안에 주님 말씀을 품고 살아라. 주님의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에게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거한다는 말은 거주한다, 산다는 뜻인데, 쉽게 말하자면 주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해결하려고 십자가를 지고 너희를 떠나가지만, 너희는 흩어지지 말고 계속해서 내 가르침을 붙들고 살아가라는 당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힘써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야 진짜 신자이고, 그런 신자의 삶에는 복된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렘35장에 보면 레갑족속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먼 옛날에 레갑족속의 조상인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한평생 유목민으로 살아가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후손들이 수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대접에 가득 담아서 갖다 주면서 마시라고 권해도 아무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포도주를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옛날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당시에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명령한 것도 아니라 아주 먼 조상이 말씀하셨는데도, 그리고 어긴다고 무슨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벌 줄 사람도 없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 속에는 조상의 말씀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상의 명령을 가슴에 담고,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사람 안에 거하는 상태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첫째로, 교회 출석을 잘 해야 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너희 안”이라는 말은, 그들이 무리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흩어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은 주님을 구심점으로 해서 모여 하나가 되었지만, 주님이 가시고 나면 그들이 흩어질 수 있고, 그들이 흩어져서 각기 자기의 생활을 따로 하게 되면 그동안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은 그들 기억과 삶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고 성도들과 하나 되려고 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노력을 더 많이 해도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교회에서 사람 때문에 실망했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만원버스에 타면 옆 사람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지에 가고자 한다면 버스에서 내리면 안 되듯이 구원이 목적이라면 교회에서 성도와 사소한 문제로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 말씀만 전하는 교회에 소속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람의 말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어떤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이 사람의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모두를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원래대로 간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의 주장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꾸며 속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꼬여 자기의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내가 한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르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하신 주님 말씀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그저 사람의 말일 뿐이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의 언어로 들려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려면, 말씀에 인간의 말이 섞이지 않도록 그대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가람교회의 특징은 오직 주님의 말씀만 전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찾아내고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연구하고 설교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만을 풀어주는 설교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 우리교회의 특징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교회의 사명은 말씀을 변형시키지 않고 지키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말씀만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설교는 오늘 사람들의 반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성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당장 귀에 듣기 좋고 나에게 위로가 되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이 말씀 때문에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겠는가를 생각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책에 기록하여 깊숙한 곳에 보관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해야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말을 바꾸고 생활과 인격을 바꾸게 됩니다.
요시야 때 어린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했는데, 백성들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성전의 깊은 곳에 있던 두루마리 성경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성경도 모르고 전해오는 방법대로 제사만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왕은 그 두루마리 책을 읽다가 충격을 받고 백성들을 다 모으고 읽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직까지 멸망당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울며 회개하였고, 그 사회가 변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서 활동해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서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의 일부가 되고 내 삶을 통제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언제라도 내 생각 속에 불쑥 불쑥 떠오르는 것, 말씀이 나를 죄로 가지 못하게 끌어당기고, 선한 일을 실천하도록 등을 밀어 내고,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생활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성경책을 사서 TV옆에 놔두고 주일날 교회 올 때에 먼지를 털어 들고 오는 것은 말씀을 처박아 두는 것이고 말씀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수1:6에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안에는 놀랍고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테네시의 Ruby Falls처럼, 좁은 입구로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굉장히 넓은 광장이 있는 동굴처럼, 작은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놀랍고 새로운 세계가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롭고 자유롭고 풍성하고 행복하고 영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체계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읽는 사람에게 크나큰 믿음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남들이 믿지 못하는 것을 믿게 해주고, 남들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해주고, 남들이 참을 수 없을 때에 인내하게 해주며 모든 귀한 것을 가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말씀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하나 적용해 가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보면 성경이 명령하는 것과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하면 망해버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은 교회에 와서 한번 자극을 받는 것으로 족하고, 돌아가서의 생활은 그동안 해오던 대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씩 실천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할 때 과장된 표현을 하거나 ‘절대로’라는 등의 강한 표현으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교제를 포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장사를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떼어먹은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겉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 했을 때 마음의 자유가 생기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시작되는 것이며, 비로소 참 포도나무로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해 볼 것 같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떠나지 않고 그렇게 해보라고 권면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던 에스더처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다니엘처럼, 말씀에 끌려 하나씩 순종하는 것이, 우리 가슴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활동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라는 내용과 기도하면 이루어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며 이루리라.” 뒷부분은 기도응답에 대한 약속인데,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당시의 권력은 빌라도와 헤롯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 힘이 없이 그들에게 끌려가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 말씀을 따라가야 이익이 있겠습니까? 빌라도나 헤롯왕에게 아부를 해야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지켜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래서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하라는 대로 하면 출세도 하고 영광도 얻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힘들고 고생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실상이 보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헛된 것이라는 것도 보이고, 주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도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분별력도 없고 행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 라스베가스 라는 도시가 있는데, 라스베가스의 야경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화산이 터지고 용암이 흐르는 장면이 시간마다 연출되고, 바다에서 해적들이 대포를 쏘며 싸우는 장면이 실감나게 연출됩니다. 밤의 가스베가스는 천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 도시는 탐욕의 도박과, 음란과 음모와 살인이 난무하는 타락한 도시이고, 수많은 폐인들이 살아가는 도시입니다. 밤에는 그렇게 휘황찬란했는데, 환한 대낮에 본 라스베가스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상 영광의 허무한 실상은 기도하는 사람에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물중의 보물이요, 그 말씀이 안에서 역사하는 삶은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실상은 밝은 대낮에만 보이듯이 세상의 실상은 기도해야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자기 안에서 살아있게 하려면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을 세상 것과 희석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좋은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도 하고 신앙생활도 잘 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가능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가지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소망입니다.
어느 교회는 그 둘을 다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도 오고 물질도 복을 받고 영혼도 잘 된다는 삼박자 구원이 한국교회를 휘저었습니다. 성경말씀대로만 설교하는 목사님은 현실을 모르는 무식하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할수 없이 설교하는 강단에서 세상의 철학과 처세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처세술이나 인간의 철학을 말하면 반응이 다릅니다. 인간이 연구해 낸 것이니까 인간의 취향에 맞을 수밖에 없고,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의 종은 그런 것에 시간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도인데,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설계도를 인간이 고쳐버리면 구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고, 말씀 그대로 설교를 해야만 죄인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해주며 위로해 주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만 붙들고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말씀만 가지고 설교하려면 기도해야 하고, 성도도 말씀을 붙들고 살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만 말씀의 소중함이 보이고, 세상의 허무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게 하려는 사람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실천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것 까지는 좋아하지만 실천하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억지로 말씀을 듣는 자리까지는 왔지만, 듣고 나니까 말씀이 안에서 가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니까, 들은 말씀을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서 일부러 딴 생각을 해서 말씀을 내쫓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실하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우리 안에서 가책과 거룩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런 갈등이 우선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롬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실정이 이런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은 들은 사람을 기도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고서도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잘못 알아들었거나, 말씀을 일부러 내쫓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붙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하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필요를 느끼고, 말씀대로 살려고 자기를 복종시키려고 애쓰며 기도하는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은 대단히 기뻐하시며, 소원을 다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방법을 모르고 힘이 없어서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 기도의 응답은 기적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는, 에스더의 경우처럼 자연스러운 기적도 일어나고, 다니엘의 경우처럼 특별한 기적도 일어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 붙들고 다른 대안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는 놀라운 응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잘 하지 못해서 더듬거리며 기도해도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자기의 힘이 약한 것이 안타까워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하늘이 열립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거기에 신령한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려고 말씀을 들으러 모인 사람들입니까?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보려고 다른 대안들을 이미 다 버렸습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내가 너무 약하고 벽이 너무 높아서 답답해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일 것이고,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의 삶에서는 이웃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죄를 버리게 하고 주님을 따르게 하는 영향을 끼치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느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말씀 붙들고 기도한다면, 다음에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서 이웃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의 좋은 가지들이 됩시다.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요 15:7-11 / 김창인 목사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1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오늘은 요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에서 “이것을”이라고 하는 말씀은, “이러이러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지시하시는 생활을 말합니다. 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리켜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활에나 다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모든 홈페이지 주소가 영어로만 등록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요즘은 한글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홈페이지 주인이 영어 주소를 등록하면 고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글 주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성교회라는 한글 이름을 합동측 신학생 그리고 개척교회의 전도사가 등록해 버렸습니다. 왜 개인이 광성교회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산장신대학교의 이름도, 대전신학대학교의 이름도 자신의 것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였더니 광성교회라는 한글 주소를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닌 전도사가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일을 하고도 그런 생활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생활을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기쁨이 충만해지는 생활을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생활에 기쁨이 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기도의 생활 (7-)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듣는 척도 않고 잠만 자던 베드로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평생을 두고두고 한을 남길만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를 안 할 때에는 전혀 기쁨은 없고 한으로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너희가 성령 즉, 약속된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 성령 충만함이 곧 기쁨 충만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도하는 생활의 결과는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두고도 기도할 때와 안 할 때가 밤과 낮처럼 차이가 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부부로서 금실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을 때까지 아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이 여인은 수태하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부는 낙심치 않고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남편도 기어이 자기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아기 못 낳는다는 엘리사벳도 아기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네 집에 아기가 태어날텐데 네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이의 생일이 되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며 기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통사람이 이렇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길잡이요, 앞잡이로서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을 얼마나 정확하게 증거 합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하기를,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가 곧 세례요한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굉장한 아들, 훌륭한 일꾼을 어느 가정에 보내실 것입니까? 주정뱅이의 가정에 보내겠습니까? 도둑의 가정에 보내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집을 고르고 골라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그렇게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부부사이에 금실을 좋게 가지십시오. 싸우는 집안에 훌륭한 일꾼을 보내주실리 만무합니다. 두 번째로,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기도하는 가정의 아들 딸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가 그 가정에 얼마나 큰 기쁨을 선물합니까? 기도의 생활 끝에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 끝에 주신 것입니다. 어느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부에게는 큰 영광이 되었고, 포도나무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원체에 붙어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이루리라라고 포도나무 비유 끝에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라는 말씀은 포도나무 가지가 원체에 붙어있는 것과 같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은 예를 들어, 귀신을 섬기는 사람은 무당에게 가서 점을 치지 않습니까? 지금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손이 없는 날이 어느 날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무당이 점을 치고 귀신에게 물어봐서 대답을 해주는데 어느 날, 어느 날은 손이 없으니 그 날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점을 본 사람은 죽어도 다른 날에는 이사 안 갑니다. 아무리 손해를 봐도 안 갑니다. 꼭 그 날에만 이사를 갑니다. 무당이 한 말, 귀신이 해준 말이 그 사람 마음속에 꽉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꽉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면 죽어도 하고, 하지 말라 하셨으면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쯤 되었을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내 소리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을 때 그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기도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생활 하게 되면 기도 응답의 결과가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기쁨이 날마다 새롭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Max Hendel이라고 하는 사람이 “기도는 전기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전기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전기가 흐르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고 말했습니다. 발전소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그 전기가 우리 가정까지 오도록 시설을 합니다. 우리들의 집 문턱까지 전기가 왔다고 해서 그냥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집안에 전기설비를 합니다. 모든 가전제품을 구입해 놓습니다. 그래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 때 스위치를 키면 비로소 전기가 무한정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캄캄한 밤에도 대낮같이 밝힐 수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옵니다. 온갖 가전제품이 작동합니다. 큰 공장에 있는 엄청난 기계도 작동합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내리면 당장에 모든 것이 정지됩니다. 도무지 쓸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스위치 자체가 전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도 자체가 능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통할 수 있도록, 우리 생활에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이 통하고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님 안에 죽으나 사나 거하십시오. 말씀으로 충만케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날 반드시 응답이 있고 응답의 결과는 날마다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결실의 생활 (8-)
결실의 생활이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맺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한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달란트 그대로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본래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께 드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즉, 그의 생활에는 열매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인에게 책망을 받습니까? 마지막에는 빼앗기고 저주받고 쫓겨납니다. 영원히 이를 갊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열매맺지 못하는 삶에는 이처럼 비참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다섯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열매맺은 것들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기뻐합니까? 주인께 얼마나 영광이 되었습니까? 온갖 칭찬과 축복을 다 받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내놓을 만한 열매가 있을 때 주인에게 영광이 됩니다. 동시에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사는 동안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열매가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이라는 말씀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포도원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원체가 있고, 그 다음에는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반드시 새 가지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다 거둔 후에는 그 가지를 다 잘라내야 합니다. 사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즉, 묵은 가지에서는 절대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잘라낸 후에는 또 새 가지가 나옵니다. 그 새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평생에 한번 열매를 맺고 사명이 끝나면 우리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새 가지가 나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아들, 딸들이 열매 맺으면 사명이 끝나고 손자, 손녀라는 새 가지가 나와서 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자자손손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 또는 자자손손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 바칠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23절까지 있는 말씀대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성령 받은 증거를 우리 생활속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아홉가지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가지는 찍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계속 자자손손 맺어나가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일단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이 태어나서 아장아장 걷는다고 하여 일꾼이 됩니까? 사람 축에는 들어도 일꾼 축에는 못 들어갑니다. 일꾼이 되려면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을 해야합니다.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해서,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는 스승을 배워 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을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생활 속에 맺을 때 비로소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실의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이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목으로 쓰려고 심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열길 스무길 자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재목으로 쓰려는 용재목입니다. 재목을 위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관상수입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가보면 큰 화분에 나무를 예쁘게 키우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또 화분이 아닐지라도 정원에 예쁜 나무를 가꾸어서 보기 좋게 만드는 관상수가 있지 않습니까? 관상수를 심어놓고는 재목으로 쓰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관상수는 그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목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관상수로 쓰는 것도 아닌 유실수입니다. 열매를 구해서 심는 것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심는 유실수를 재목으로 씁니까? 관상나무로 씁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직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열매만을 위해서 심어졌기 까닭에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 주인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나무는 분명히 유실수입니다.
1년, 2년, 20년, 30년 되었다는 신앙의 연조만 내세우면서 목에 힘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얼마나 성령의 열매를 맺었는가?를 돌이켜 보십시오. 이 열매가 맺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이요, 나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실의 생활에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사랑의 생활 (9-11)
가정에 사랑이 충만해 보십시오. 부부가 금실이 좋고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이 있지 않습니다. 또 어떤 집에서는 부부가 날마다 싸우고 교회에 나와서는 온갖 경건한 모습을 보입니다. 집에서는 지옥의 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와서는 천국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죽은 후에 천국가게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미움이 가득한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닙니까? 부부가 서로 미워하고, 부모 자식이 서로 미워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가는 거 같고 미움이 충만한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안데르센은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그려놓았습니다. 천국은 모두다 몸이 건강하고 웃음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식탁을 차려주었는데 그곳의 규칙이 수저가 자신의 키만한 겁니다. 키만한 수저를 어떻게 밥을 떠서 자기 입에 넣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먼저 앞에 사람을 먹여줍니다. 또 앞에 사람도 밥을 떠서 나를 먹여줍니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서로서로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이 먹으려다 보니 수저가 옆사람을 건드리고 돌아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인데 왜 천국은 감사를 연발하고 지옥은 항상 싸웁니까?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사랑과 미움에 차이입니다. 사랑의 생활에 기쁨이 있고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부터 1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 계명이 무엇인지는 12절에 나와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의 표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는 선행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사랑 밖으로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미운 짓을 하지말고 사랑 받을 짓을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 받을 짓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생활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이력은 굉장히 찬란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서재필 박사 다음으로 제2호 의사가 된 분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많은 공헌을 합니다.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 됩니다. 이분은 항상 전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한번은 퇴근길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뺏지를 달고 있는 학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얼굴이 너무 창백했습니다. 의사라면 당장 알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그 학생의 손에 쥐어주면서 어서 가서 밥을 사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거절할 겨를도 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굶으면서도 공부는 해야되겠다 싶어서 굶기를 밥먹듯 하고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교장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다음날 교장실로 찾아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찾아가 보니 추천서 한 장을 써주면서 어떤 독지가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추천서를 받은 독지가는 그 학생의 생활비와 학비 전부를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모두 그분의 도움으로 다녀왔습니다. 정말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 곳에 얼마나 기쁨이 충만합니까? 주면서도 기쁘고, 받으면서도 기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사랑, 너와의 사랑, 가정에서의 사랑, 교회에서의 사랑, 사랑이 충만한 생활에 주님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사랑의 생활이 날로 새로워지고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을 때 베드로는 큰 실수를 범하고 한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한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며 보람 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기도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결실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다면 그 성령 받은 증거가 바로 생활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열매를 알알이 많이 맺고 자자손손이 열매를 맺어서 기쁨이 충만한 가정과 가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랑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 이웃과의 사랑,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노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사랑의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천국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 제자, 참 성도
요 15:7-8 / 서화평 목사
세상엔 가짜가 많아서 참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물건을 살 때도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고 확인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참된 제자, 참된 성도는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참된 성도, 참된 제자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월드컵이 끝난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그때의 벅찬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4강신화의 대표적인 주역인 히딩크 감독은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할 때 그저 이름이나 경력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늘 배우려 하고, 열심히 뛰는 선수를 기용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잘 하는 선수보다 몸을 다 바쳐 뛰는 선수를 더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큰 일을 하실 때 어떤 성도를 선발하실까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까요? 주님은 경력에 상관없이 열매 맺는 성도를 선발하실 것입니다. 또한 배운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온 몸을 다해 실천하려는 성도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 제자요, 참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는 주님을 배우는 자요,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참 제자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참 제자, 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7절 말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훈련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필수적인 삶입니다.
사람들은 얽매인 삶이나 훈련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자유대로, 내 맘대로 하겠다"고 주장을 합니다. 참된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방종과 탈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들어도 훈련은 필요합니다.
7.8월은 가장 무더운 여름입니다. 쉽게 짜증나고 지치기 쉽습니다. 걷기만 해도 땀이 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최대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여름성경학교, 수련회 등으로 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훈련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후1:20)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아멘 하고, 아파도 아멘 하고, 실패해도 아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복과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어느 글에 보니 '개 같은 믿음을 가지면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관심을 갖고 유심히 보았습니다. 첫째, 개는 주인에게 무조건 충성합니다. 둘째,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셋째, 개는 주인에게 매를 맞아도 충성에 변함이 없습니다. 넷째, 개는 먹을 것을 안 주어도 주인만 바라봅니다. 다섯째, 개는 죽기까지 헌신을 다합니다. 마지막에 이 한 몸 다바쳐 주인의 상에 오릅니다. 사실 우리는 잘못된 믿음일 때 '개 같은 믿음'으로 표현하고, 또 잘 못된 경우를 '개떡' 같다라고 하면서 개로 비하합니다. 하지만, 실상 개의 충성심을 대단합니다. 어감은 이상하지만 개 같은 믿음과 충성만 가지면 훌륭한 것입니다.(그래서 어느 교회는 가장 주님을 잘 섬기는 충성된 집사를 "개 집사"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참 제자, 참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아멘하는 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응답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기도를 드려도 허공에 외치는 소리로 그치면 안됩니다. 기도했으면 응답 받아야 합니다. 특히 참 제자, 참 성도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응답의 기쁨과 확신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기도 응답의 기쁨을 얼마나 지니고 계십니까? 기쁨지수, 응답지수가 높은 편입니까? 낮은 편입니까? 하나님은 참 제자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십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언뜻 보면 우리가 아무 것이나 기도하면 다 주실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8절 말씀을 보면 주님의 핵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구해야 합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그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의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성공하고, 문제가 풀리고, 가정이 잘되기를 원하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 제가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 삶,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제자요 성도의 기도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주는 부와 명예와 성공은 막상 소유하게 되면 별 것 아닙니다. 세상적인 욕망의 성취에 대한 만족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얻으며, 어떻게 얻을까?" 만을 생각하기 보다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이웃을 조금 더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가진 돈으로, 건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합니다. 이러한 열매가 있는 삶을 바탕으로 하여 기도할 때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헌신하는 일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숨은 일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자로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어떻게 그런 영력 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목사님은 아무 말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해서 그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저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 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미국에 '홀리데이 인'이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이 있습니다. 전 세계 60여 개 나라에 2천 6백여 개의 호텔을 거느리고 있는 호텔 체인입니다. 이 호텔 클라이머 회장은 자기 호텔에 도박장을 안 만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빠찡코 허가를 내고 싶었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도박장을 해야 돈을 번다!"고 건의했지만 클라이머 회장은 "저는 제가 경영하는 호텔 안에 도박장을 안 두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은 고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이 호텔을 최고 호텔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손해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아무리 물질을 벌어도 뒤로 새면 끝입니다. 큰 병이라도 들면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면 우리 것이 새지 않도록 막아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열린 마음을 위해 기도하며 응답의 기쁨으로 사는 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참 제자는 인내와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참고 견디면 희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참된 승리자는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절망은 약자가 항상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항상 희망적인 생각과 결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절망은 강하지만 희망은 더 강합니다.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 인내하십시오. 믿고 견뎌보십시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귀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뒤에 예비 된 하나님의 복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교만도 사라지고, 고집도 사라집니다. 참된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고, 조금 손해가 난다고 물러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내의 신앙을 가지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열어주시고, 만나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다 떨어져도 풍성함을 느끼는 것은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열매 있는 알곡은 바람을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쭉정이는 바람을 탑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꾸준히 인내함으로 열매 맺는 알곡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참 제자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눅14: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는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두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참 성도는 어렵고 힘들 때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아니고, 책임을 감당하며 지키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는 성도는 많지만 제자는 적습니다.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기원하고 희망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책임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넘실거리지만 믿고 발을 내딛을 때 물이 갈라졌습니다. 주여 갈라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만 하면 안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나고, 물러서거나 머물면 거기에서 실패합니다. 조금 어렵다고 후퇴하거나 머무르면 안됩니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속히 돌아서야 합니다. 성도로서, 제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돌아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돌아서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도 용기이고, 제자에게는 그런 용기와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상 인생의 열매는 용기 있고, 담대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주님 안에서 열매 맺고 더욱 성장하기를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너 때문"이라는 의식보다는 "제 탓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참 제자와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응답 있는 기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의 신앙을 가지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