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에 의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 씨의 검찰조서 중 12․12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 관련 부분이다. 전두환 일당이 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진술인이 12․12 사건 당시 맡고 있던 中情부장 서리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中情부장의 본래 임무는 국가 주요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국가 정보기관을 조정,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임할 당시에는 中情의 국장, 부국장 중 대다수가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해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여서 中情의 기능이 마비상태였습니다. 당시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中情의 자금과 정보를 보존, 관리하고 조사를 받고 있던 국장, 부국장들을 빨리 석방되게 노력해 복귀시킴으로써 中情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 요원들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연행할 때 진술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필동에 있는 동보성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軍 동기생 4~5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12․12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그날 21시 30분경 일단 中情 제 사무실로 들어가서 보니 주요 정보부 간부(1차장, 2차장, 국장들을 지칭)들이 모여 있었으나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간 직후부터 경복궁 30경비단 쪽에 노태우, 전두환, 황영시 등이 모여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수경사와 30경비단이 서로 병력을 출동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우선 병력 충돌사태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수경사 장태완 사령관과 30경비단 장세동 대령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해, 아군끼리 충돌하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고 북괴가 오판할지 모르니 병력출동을 막으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병력출동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鄭昇和 연행사실을 알고 난 후 바로 진술인의 집으로 전화를 해 妻에게『공기가 수상하니 집에서 자지 말고 나가서 자라』고 한 사실이 있나요. 『예,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진도개 하나」비상 발령 사실에 대해 알았나요. 『저는 그 당시 軍에서「진도개 하나」비상 발령 사실을 보고받은 바 없습니다』
- 당시 진술인은 육군 중장 계급으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中情부장 서리로 재직 중이었는데, 국방부나 陸本으로부터 비상 발령에 대한 통보를 받지 않았나요. 『통상 軍에서 비상을 발령할 경우 中情에도 통보해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 당시에는 비상 발령에 대한 보고를 듣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장세동 30경비단장과는 언제, 어디서, 어떤 경위로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으며,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중정으로 들어와 사태를 파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중간에서 중재를 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먼저 30경비단으로 전화해 장세동 대령에게 절대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후 7~8회 이상 장대령과 통화했습니다. 당시 30경비단과 수경사령부에서는 서로 전차의 시동을 꺼야 상대방 병력을 출동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중간에서 연락할 것이 아니라 서로 직접 통화해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약속하라고까지 했습니다. 9공수여단이 출동했다고 해 제가 9공수에 전화해서 병력이 돌아온 사실을 확인한 후 다시 장대령에게 알려주는 등 쌍방 병력이 출동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진술인은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도록 요청한 사실이 있나요. 『1979년 12월 13일 0시 30분경 9공수에서 병력을 출동시켰다는 보고가 올라와 남산 제 집무실에서 윤흥기 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출동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9공수여단이 부대로 복귀한 뒤였습니다』
-다른 부대 출동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나요. 『예, 9공수가 서울로 출동한다는 보고밖에 못받았습니다』
-진술인이 中情부장으로서 권한 밖의 병력출동 자제에 대해 軍 관계자에게 요청한 경위는 무엇인가요. 『당시 제가 中情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를 위해 개인적인 판단으로 병력출동 자제를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래 軍 생활을 해 군 관계자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이유가 아니고 진술인이 합수부측에 가담해 陸本 정식 지휘계통에서 陸本과 국방부를 방어하기 위해 9공수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알고 합수부측을 위해 9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回軍을 요청한 것 아닌가요. 『저는 陸本측에서 9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양측 병력이 충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그 때는 이미 9공수 병력이 부대로 복귀한 뒤였습니다』
-진술인은 남산 집무실에 있다 밤 12시가 넘어서 삼청동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나요. 『예, 시간은 정확하지 않으나 12시 이후 병력 출동을 자제하라는 전화를 여러 곳에 한 후 내가 직접 나가봐야겠다고 생각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건 후 보안사로 가려다 총리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통화한 내용은 어떤가요. 『누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제가 全장군에게 각 부대에 전화해 병력출동을 자제해서 아군끼리 교전하는 상황은 막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더니 全장군도저에게 병력 출동을 막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이 부대 출동에 대한 지휘권이 없는데, 어떻게 全장군에게 병력 출동을 막아 달라고 했나요. 『당시 보안사에 많은 장성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부대출동을 막아 달라고 하면 그곳에 있던 다른 장성들에게 그 뜻이 전파되리라 생각해서 부대 출동을 막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 전두환 장군을 찾아간 사실이 있는가요. 『예, 시간은 정확치 않으나 12시 이후 병력출동을 자제하라는 전화를 여러 곳에 한 후, 全장군에게 전화를 건 후 보안사로 가려다 총리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습니다』
-총리 공관에서 무엇을 했나요. 『1979년 12월 13일 02시 30분경 대통령을 만났는데 崔대통령은「그날 저녁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며 연행 재가를 받으러 왔는데, 軍 상황을 잘 모르는데 국방부장관도 거치지 않는 등 계통을 밟지 않고 와서 승인을 해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당사자인 보안사령관을 만나보기로 마음먹고, 약 1백50m 떨어져 있는 보안사로 가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습니다』
-진술인은 보안사로 가서 무엇을 했나요. 『사령관실에 전두환을 비롯해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차규헌 등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불법으로 모였다는 것을 지적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두환, 유학성을 제외하고 위수지역을 이탈한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등에게「당신들은 누구 승인을 받고 모였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장군이 저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혀 있기에 불쾌해서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유학성이 제 손을 잡아 끌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도 곰곰 생각해 보니 이 난국을 수습한 후 군복을 벗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내색하지 않고, 다시 사령관실로 와서 전두환에게 盧장관을 모시러 국방부로 같이 가지고 했습니다. 그가 동행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므로, 저 혼자 총리 공관으로 돌아와 申총리를 대동하고 국방부 청사로 갔습니다』
-진술인은 盧장관으로부터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나요. 『잠시 보안사에 들렀다가 바로 中情에 가서 제 사물을 정리하고, 공금과 서류들을 차장들에게 인계해 준 후 12월 13일 09시 전후에 陸本으로 갔습니다』
-陸本으로 가서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제가 총장실로 가지 않고 접견실에서 참모들을 불러「내가 총장으로 임명됐다. 난국을 수습하는 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1979년 12월 13일 13시15분경 다시 보안사를 방문했다가 13시 25분경 돌아간 사실이 있지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는 부임 인사차 보안사를 방문해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고 왔습니다』
-12․12 사건 바로 다음날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이 교체되었는데 진술인은 그 인사에 관여한 바가 있는가요. 『수경사령관에 노태우 9사단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50 사단장을 임명한 것은 全장군의 요구에 의한 것입니다. 당시 저는 합수부측이 병력 철수 명분을 주기 위해 그들 요구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제 생각에 그들이 적임자로 판단되어 임명했습니다』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은 정식 임명장을 받기도 전에 이미 부임했다는데 어떤가요. 『그날 보안사령관실에 있을 때 합수부측 요구에 의해 노태우 장군을 수경사령관에, 정호용 장군을 특전사령관에 임명하기로 합의했으므로 그들이 바로 12월 13일자로 부임했던 것입니다. 정식 인사 발령은 12월 14일자로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의 임명과 해임 절차에 대해 진술하시오. 『육군참모총장의 건의에 의해 국방부장관을 경유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해임합니다』
-鄭柄宙 특전사령관과 張泰玩 수경사령관의 해임 사유는 무엇이었는가요. 『저는 鄭柄宙 특전사령관과 張泰玩 수경사령관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것만 알고 있었고, 대통령에게 해임 이유에 대해 설명하거나 보고한 기억이 없습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 鄭鎬溶 특전사령관 임명과정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도 관여했나요.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진술인은 그 이후 軍 인사를 단행했는데, 그 인사는 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나요. 『합수부측에서 의견을 취합해 인사안을 확정한 다음 兪學聖 장군을 통해 저한테 통보해주는 것을 감안해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했습니다』
-12․12 이후 軍 인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1979년 12월 14일부터 1980년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軍 장성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합수부측에서 요구하는 인사들을 軍內 요직에 배치했습니다. 또 12․12 사건 당시 이를 저지하거나 동조하지 않은 李建榮 3군사령관, 張泰玩 수경사령관 등을 포함해 30여명의 육군 수뇌부 장성들을 예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12․12 사건으로 全장군이 軍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요. 『1979년 12월 13일 그들 요구에 의해 제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사실이나 제가 실질적인 참모총장 권한을 행사하기에 힘이 부쳤으며,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똘똘 뭉쳐 軍을 주도한 것이 사실입니다』
-진술인이 합수부측 요구에 의해 인사안을 결재 올렸을 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이 결재를 하지 않은 사실이 있나요. 『제 기억에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이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결재를 반려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崔대통령은 민간인 출신으로 軍部 사정에 어두웠으며, 1979년 12월 14일 취임한 周永福 국방부장관도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육군 사정에 어두운 편이었기 때문에 軍 인사에는 간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보안사에 6인 위원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가요. 『보안사에 정확히 6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으나, 유학성 장군이 합수부측 의견을 저에게 말하면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해, 그들이 인사를 위함 모임을 만들어 의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인 兪學聖이 합수부측에 합세해 진술인에게 軍 인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시켰습니다. 그런데 兪學聖은 인사 문제나 합수부 임무와 무관한 자로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인사 조처는 하지 않았나요. 『국방부 차관보는 장관이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인사 조처를 단행해야 하나, 당시에는 합수측에서 전권을 장악하다시피 했습니다. 합수부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서울에 주둔해 陸本, 국방부 등을 장악했고, 서울주변의 부대는 합수부측이 장악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병력을 복귀시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어 합수부측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술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사령관으로서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그 요지는 무엇이며, 그런 담화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 앞으로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업무수행에 대한 소신을 밝혀왔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담화를 발표한 것입니다. 내용은 軍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12․12 사태 진상을 곧 발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술인은 鄭昇和가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제가 중정부장 서리로 있으면서 鄭昇和가 朴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총장이 된 후 鄭昇和 전 총장이 기소됐는데, 저는 鄭총장을 모시고 육군참모차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鄭총장이 결백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鄭昇和 총장의 인격이나 성품은 어떠했나요. 『鄭총장이 1961년 12사단 부사단장 근무시 저는 작전참모를 했고, 1979년 2월부터 10월 26일까지 육군참모총장시절에 저는 참모차장을 했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鄭총장은 성품이 온화하나 정의감이 강하고, 일하는 데는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처리하며, 군인으로서 투철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진술인은 鄭총장이 朴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생각을 했던가요. 『鄭昇和 총장이 김재규와 공모해 박대통령을 시해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습니다』
-12․12 사건 발생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鄭昇和가 워낙 곧은 사람이라 합수부측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합수부측이 鄭昇和를 김재규와 관련시켜 연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鄭昇和가 김재규의 범행과 관련이 있어 연행했다는 합수부측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鄭昇和씨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식사에 초대받아 갈 때 저에게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鄭총장은「가기 싫지만 선배가 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라며 억지로 갔습니다. 그리고 鄭昇和 총장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으로부터 듣고 난 후 바로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찌 범행에 가담하거나 방조한 사람이라고 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술인은 그 후 1979년 12월 31일자로 鄭昇和 전 총장을 내란방조죄로 구속영장을 발부한 사실이 있는가요. 『보안사 수사관이 鄭昇和 전 총장을 구속 수사하겠다면서 영장을 청구하여 어쩔 수 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지금 와서도 鄭총장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12․12 당시 鄭총장과 함께 연행되었던 李建榮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張泰玩 수경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은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이 분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영장없이 수감되어 있다가 1980년 2월경 전역지원서를 제출하고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李建榮 3군사령관 등을 불법감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긴 했으나 12․12 사건 이후부터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측에서 사실상 軍을 주도했으며, 제가 그들의 처리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개입할 입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어 육군참모총장 자격으로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나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것은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1년 1월 24일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계엄사령관의 권한은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속칭「바지」계엄사령관이라는 말인가요. 『12․12 사건으로 軍權을 장악한 전두환의 요청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고, 그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전두환이 주도하는 軍部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의사대로 참모총장을 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주요 업무는 전두환의 의도가 많이 참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저의 官舍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비겁하게 저 혼자 빠져나가는 것 같아 망설이다 사퇴 시점을 놓치고 1981년 1얼 24일까지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진술인의 계엄업무에 관여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그가 계엄사 산하 합동수사본부장이긴 하나 사실상 저로부터 결재받은 일이 거의 없습니다. 軍 인사 등 일반업무는 전두환이 저한테 직접 연락하거나, 측근인 노태우 수경사령관이나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을 통해 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습니다. 특히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 발령에 저는 전혀 관련한 사실이 없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보안사 요원들을 시켜서 포고령 원안을 만들어 계엄사 담당참모에게 건네주면 그대로 발령했습니다. 사실상 계엄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은 거의 행사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술인이 계엄사령관으로 취임한 이후 전두환이 결재를 받으러 온 사실이 있는가요. 『제 기억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엄사령관으로 계엄과 관련한 국내외 정보는 어떤 경로를 통해 파악하는가요. 『총리 공관에서 안보관계 장관들이 수시로 모여 각 부의 중요 사항을 총리에게 보고하고 그에 대한 지시를 받아 시행했습니다. 저는 계엄사령관으로 제 부속실에 내무부, 中情, 합수부로부터 보고되는 정보를 통해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중앙정보부법에 의하면 현역군인은 中情부장으로 임명될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현역 육군중장인 전두환이 임명된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中情부장 서리로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全장군이 中情부장을 겸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中情부장은 공식적으로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으며, 국내외 정보와 中情예산을 장악하기 위해 中情부장에 취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全장군의 中情부장 서리 겸직에 대해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정보기관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당시 여론이나 학생들로부터 관심을 모으게 되어 불리한 점을 알면서도 전두환이 굳이 겸직을 강행하는 것을 보고 그가 大權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이 中情부장을 겸직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영향력이 군부에 국한되지 않고 내각 등 민간부문에도 확대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16일 22시 30분 경 귀국한 최대통령에게 그 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학생소요 등 당면문제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있나요. 『예』
-그 경위를 자세히 진술하시오. 『중동지방을 나갔던 최대통령은 1980년 5월 17일 귀국예정이었는데 일정을 앞당겨 5월 16일 22시 30분경 김포공항으로 귀국해 청와대로 직행했습니다. 그날 공항에 영접하러 나갔던 申총리,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계엄사령관인 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청와대로 찾아가 그날 23시부터 24시까지 학생 소요 등 당면문제를 보고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영복 국방장관은 내일 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를 열어 대책을 협의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에 개최한 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는 어떤 대책이 논의되었나요. 『그날 11시경 국방부에서 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전인 10시경에 陸本에서 주요지휘관과 간담회를 갖고, 10시 20분 경 국방부로 갔습니다. 다른 지휘관들은 회의실로 가고 저는 국방부장관실로 갔더니 周永福 장관, 유병현 합참의장, 김종곤 해군총장, 윤자중 공군총장 등이 있었습니다. 周장관이 오늘 회의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하는 내용을 토의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병현 합참의장이 계엄확대는 軍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정치적인 것이므로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周장관이「오늘 회의에서는 계엄확대만 논의하자」고 해 계엄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을 내렸읍니다』
-周장관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실시하고 국회 해산, 특별기구 설치 등을 토의하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나중에 周장관에게 들은 바로는 회의 개최전에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 대령이 찾아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특별기구 설치 안건을 토의해 달라는 건의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1980년 5월 17일 11시경에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周永福 장관의 주재로 개최해 전국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저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데 찬성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전국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대한 찬반 토론을 했나요. 『주영복 장관이 일방적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에 대해 각 참석자들에게 찬반에 대한 의견만 물었고, 일체 토론은 없었습니다. 개인 이름을 물어 거명하면서 찬반의견을 물어 계엄 전국 확대실시에 대한 결론이 났고, 그에 따라 참석자 전원이 백지에 연서명을 했습니다』
-반대 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있었나요.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 중장과 그 외 1명이 반대 발언을 했습니다. 그때 정호용 장군이 안종훈 장군 발언에 강한 반박을 했습니다』
-당시 백지에 참석자의 연서명을 받은 이유는 무었인가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영복 장관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백지에 연서명을 받았습니다』
-회의 결과를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게 보고했나요. 『그날 16시 30분경 全軍 주요 지휘관의 결과를 저와 周永福 장관이 申총리를 방문해 보고했습니다. 그때 周장관이 申총리에게「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결과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해 강력하게 계엄을 시행해야 된다」는 결론이 났다고 보고했습니다. 申총리가 같이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을 권해 저와 周장관이 申총리와 함께 18시경 청와대로 가서 최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崔대통령에게 누가 보고했으며, 그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요. 『제가 申총리와 周장관과 같이 청와대로 갔습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이 최대통령과 함께 계셨습니다. 周장관이「全軍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국 비상계엄을 확대실시해 강력한 계엄시행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건의를 올립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최대통령은 한참 생각하고, 또 법전을 펴서 관련 조문을 찾아본 후, 申총리에게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국방부장관이 청와대를 나와 저는 제 사무실로 갔고, 장관도 자기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후 국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국무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국무회의 내용은 어떠했나요. 『申총리가 전국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주영복 장관에게 제안을 설명하도록 한 후, 바로「반대의견 있느냐」고 묻자 김옥길 문교부장관이 반대성 질의를 했을 뿐 만장일치로 가결을 선포해 금방 끝났습니다』
-진술인은 당시 국무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는데 어떻게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나요. 『저는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회의 참석대상은 아니지만 그 당시 어느 쪽인지 모르나 국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배석했습니다』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한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병력 배치는 계엄사령관인 진술인이 지시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국무회의장에 병력 배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상의해 경비병력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중앙청 정문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하고 정문, 동문, 서문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에까지 집총한 수경사 병력이 약 1m 간격으로 양측에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갔을 때는 본 기억이 없으나, 그 후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병력이 2층 계단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복도는 1m 간격으로 도열해 있었고, 김옥길 장관이 국무회의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병력이 장관인 줄 모르고 제지해 옥신각신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날 회의장 복도에 배치된 병력이 출입자를 통제하고 전화선을 절단해 외부와 차단시켰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와 동시에 진술인 명의로 계엄포고령 10호를 발령한 사실이 있나요. 『1980년 5월 18일 0시 01분을 기해 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따라, 정치활동 중지, 정치 목적의 옥내집회 금지, 언론보도 사전검열, 각 대학 휴교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10호를 발령했습니다』
-계엄포고령 10호는 어떻게 발령하게 되었나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문안을 작성해 계엄사령부로 보내와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발표했습니다』
-진술인은 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하기 전에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았나요. 『제가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포고령 10호에 대해 결재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아마 계엄사 실무자가 합수부에서 대통령 재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합수부에서 갖다주는 포고령 문안을 그대로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포고령은 진술인의 명의로 발령됐는데 사전에 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요. 『포고령이 제 명의로 발령된 것은 사실이나 포고령이 발령되기 전에 사전에 제가 결재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 후에도 제 명의로 계엄포고가 여러 번 나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전에 제가 결재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 내용 중에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포고령에서 말하는 정치활동 중지는 국회의 정상적인 활동도 포함되는 것인가요. 『그 내용에는 국회 활동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포고령 10호가 발령되기 이전인 1980년 5월 17일 22시경을 전후해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인사 26명을 강제 연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1980년 5월 17일 합수부에서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김동길,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이세호 등 주요인사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연행하겠다는 계획은 그날 합수부 수사관계자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결재한 사실이 없습니다. 나중에 연행 조사 중이라고 보고받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합수부측에서 주요 인사들을 강제 연행하기 전에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하거나 결재를 받아야 할 사안이 아닌가요.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야 할 사안이므로 사전에 계엄사령관의 결재를 받아야 할 사안이나, 전두환 장군이 제 마음대로 체포계획을 수립해 연행한 다음 사후에 보고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학봉의 진술에 의하면 1980년 5월 1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영복 장관과 진술인에게 「주요 정치인 연행보고」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런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1980년 5월 16일부터 5월 20일 사이에 김대중, 문익환 등 정치인 및 재야인사 37명을 합수부에서 연행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24명을 계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5월 20일 08시경부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자택에 M16으로 무장한 중대병력을 보내 연금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그런 사항은 전부 전두환 장군이 처리한 사항이며, 사전에 결재를 받고 시행한 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항을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사실도 없습니다. 그 당시 이런 일들이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에 신문을 보고 안 것으로 기억됩니다』
-1980년 5월 18일 12시경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수십 명을 부정축재 혐의자로 연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1980년 5월 14일 신민당 의원 66명이 비상계엄 해제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980년 5월 17일 오전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 의원 등 1백86명의 요구로 제104회 임시국회를 같은 해 5월 20일 소집하기로 공고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예, 당시 국회의사당에 배치되어 있는 부대로부터 보고받고 임시국회 소집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사당에는 어떤 부대를 배치했나요. 『국가주요시설 경비계획에 의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병력이 진주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육군 33사단 101연대 1대대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동원해 국회를 봉쇄, 점거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당시 제가 계엄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은 사실이나 5월 18일 3군사령관이나 33사단장 전주식 소장에게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 점거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지휘계통을 통해 그러한 사항을 보고받거나 결재한 사실도 없습니다』
-진술인이 33사단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려면 어떤 지휘계통을 거쳐야 하는가요. 『3군사령관 유학성, 수도군단장 박노영 중장, 33사단장 전주식 소장을 통해 지시해야 합니다』
-검찰 수사과정에 입수한 陸本 상황일지에 의하면 1980년 5월 18일 국회 봉쇄상황이 기재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진술인을 포함한 軍 고위층은 그 당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육군 33사단장 101연대 1대대가 국회를 봉쇄, 점거한 상황이 육본 상황일지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지난번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담당 검사님이 보여주는 육본 상황일지를 보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1980년 5월 20일 황낙주 총무, 손주환 의원 등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軍 병력이 물리력으로 저지해 국회가 열리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황낙주 의원이 귀에 상처를 입는 폭행을 당한 사실도 있으며, 결국 제 104회 임시국회가 개회조차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는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국회 권한에 속합니다. 따라서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해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케 한 명백한 헌정중단 조치라고 보여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지휘계통을 통해 국회를 봉쇄하거나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저지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 新軍部측의 누군가에 의해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데,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12월 12일 서울지방 검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