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⑱-2
조선정부는 특사를 파견한 일본에 대한 답례로, 10월8일 왕자 의화군(義和君)을 보빙사(답례사)로 도쿄(東京)에 보냈다.
장(張)상궁을 생모로 하는 의화군 강(堈)은 언제 태어났는가----. 『한국사 대사전』을 살펴봤으나, 그의 생년월일은 공난이었다. 또 의화군(후의 의친왕)의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의 부인 方子(마사코/梨本宮의 장녀)는, 의친왕과 친했으나, 당시의 왕가 사람들에 관하여 자세하게 쓴 그의 저서에 의해서도 의화군의 연령은 알 수 없다.
『조선근대사연표』(신동아 편집실 편, (鈴木 博 역, 三一書房) 1892년 난에 「9월10일 의화군 堈의 冠禮」라고 되어 있으나, 이 「元服式(역자주:남자의 관례식)」은 몇 살에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이것에 의해서도 그의 연령은 알 수 없다. 내가 겨우 의화군의 생년을 안 것은. 그가 1894년에 보빙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의 자료로, 거기에는 「18세」로 쓰여 있다. 이것은 세는 나이일 것이기 때문에, 만 17로 역산하면, 그는 1877년(고종14년)에 출생한 것으로 된다.
1877년은, 민비에게 어떤 해 였던가----. 민비의 책모에 의해서 대원군이 집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왕의 친정이 시작된 것은 4년 전인 1873년, 그 후에 왕세자 척(坧)이 태어나고, 왕비로서 그녀의 지위가 점점 굳어진 때였다. 이 무렵에는 이상궁이 낳은 제1왕자 완화군(完和君)도 건재할 때로, 다시 제3왕자가 탄생된 것은 민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왕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한국 작가 정비석의 장편소설 『민비』에는, 의화군 탄생에 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의화군을 낳은 장상궁은. 민찌 일족의 책모에 의한 대원군 실각사건의 와중에서, 민승호(閔升鎬)와 공모하여 큰 역할을 한 여성이다. 그 후 민비의 신임은 한층 두터워지고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는 예우를 받았다.
그 장상궁이 남몰래 남자 애를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 민비는 안색을 바꾸었으며, 칼을 들고 그녀에게 서둘러갔다.
『애 아버지 이름을 말해봐!』 하고 민비가 따지자 장상궁은 드디어 항거하지 않고,
『임금님께 물어봐 주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격분한 민비는 칼을 치켜 올리고
『아이는 살려두지만 너는 죽어!』 하고 장상궁을 참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가로마고 말려서 죽이지 못했다」
국왕에게 많은 측실이 있고, 그녀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 시대였으나, 민비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질투는 엄하게 삼가야 되는 것으로, 민비도 입지가 약한 시대에는 필요상 그것을 지켰으나,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왕세자를 낳은 후의 그녀는, 부왕(夫王)의 독점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었다고 상상된다.
민비가 일부일처제를 주장하고, 왕궁 내 옛날부터의 풍습을 고치겠다는 계획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아직 근대인이 아니고, 봉건적인 풍습을 비판할 힘도 없다. 그러나 자기만큼 모든 점에서 뛰어난 비(妃)를 가진 왕이, 측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했고, 요컨대 자부에 기인하는 질투심, 독점욕이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비는 역대 왕비 중에서, 자기만을 “특별한 품격”이라고 자리매김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왕비는 질투를 삼가고, 측실을 총애하는 임금을 온순하게 섬기는 것이 좋다.그러나 나는 이 나라에서 최고 권력자이고, 내가 없으면 왕의 권위도 지킬 수 없는 것이다>---민비는 오만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을 것이다.
의화군 출생을 마지막으로, 민비 생존중의 18년간에는 한 사람의 왕자도 왕녀도 태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만을 근거로, 민비의 질투 때문에 왕은 측실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비 사후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실이 있다.
민비가 죽은 지 2년 후에, 엄귀인(嚴貴人/훗날 엄비)을 생모로 하여 영친왕(英親王)이 태어나고, 다시 복녕당(福寧堂)을 생모로, 고종(高宗)에게는 처음으로 딸, 덕혜옹주(德惠翁主)가 태어났다. 민비 사후에, 고종은 누구에게 거리낄 것 없이 다시 “국왕다운 사생활”로 돌아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질투할 수가 있다. 민비는 고종을 사랑하고 있었을까----. 나는 한국에서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거의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결국은 부정했다. 고종은 신경정신과 의사이고 수필가인 이규동(李揆東)이 「아버지 대원군에게 거세당한 것과 같다」고 쓴 것처럼 모자라는 성격이다. 많은 사람이 「민비 정도의 여성이, 고종같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성을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과연 그랬을까. 나는, 민비는 그녀 나름으로 부왕(夫王)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녀의 사랑을 부정한 사람들과 같이, 역시 고종의 성격은 모자라는데가 있다.
결혼 직후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고종은 민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임금이었다. 그 몰아(沒我)의 기울어진 모습은 민비의 자존심을 한 없이 만족시켰고, 더욱이 모성본능도 상기시켜 <내가 보살펴 들이지 않으면> 하는 보호자와 같은 애정이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졌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민비의 가슴에 여자의 온기, 부드러움이 솟구친 것은 고종과 같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만이 아니었을까.
만일 민비의 부왕(夫王)이 의지가 강직하고 과단성 있는 남성이었다면, 그녀는 경의나 애정을 품기보다는, 반발이나 미움을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 군림하는 것을 좋아한 민비가, 조선왕조의 여자로서는 당연히, 복종만을 바라는 생활을 견디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민비는 상대가 고종이었기 때문에, 뜻대로 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왕비가 되었다.
1894년(명치27년) 10월 초, 참례지에서 제2세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과 전봉준(全琫準)이 재차 봉기했다. 그들의 부름에 응해서 호남, 호서를 중심으로 하는 교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일∙청 개전 전의 동학교도 제1차 봉기의 목적은,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부패정치의 규탄과 일본인 배척인 “척왜(斥倭)”였다. 그러나 제2차 봉기의 목적은, 일본군 배제이다. 결기의 이유는, 「일본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거하여 주권을 범하고, 일∙청전쟁을 일으켰으며,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의 질서를 파괴하였다.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우리도 무력으로 일본군을 배제하자」 라는 것이었다.
일∙청 전쟁은 그 이름이 보이는 대로 일본과 청국간의 전쟁이다. 그러나 먼저 전쟁터가 된 것은 조선의 국토였고, 민중은 자기들과는 관계가 없이 타국의 의도로 일어난 전쟁의 피해를 정면에서 뒤집어쓰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군 군율은 엄격해서, 어떤 자료에도 일본군에 의한 약탈이나 폭행 같은 기술(記述)은 없다. 그러나 전쟁물자나 인원의 조달은 “따라 다니는 것”이므로, 일본군은 각지에서 반일감정이 강한 민중의 비협력으로 고심했다. 그 결과는 탄압에 의한 강제가 되고, 그렇지 않아도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원한을 샀다.
동학군이 제2차로 봉기할 무렵의 일본군은, 평양(平壤)을 점령한 기세를 타고, 퇴각하는 청국 군을 쫓아 북상 중이었다. 전화는 점점 확대되어 갔고, 집이 불탄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유랑하고 있었다. 이것도 모두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일본 탓이라고 의분, 원망과 한탄의 소리가 온 나라에 찼다.
서울을 목표로 한 동학군은 충청도의 은진(恩津)을 거쳐 논산(論山)까지 진출했으나, 전면에 있는 공주(公州) 이북은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이 굳게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 한때 여기에 머물렀다. 머지않아 그들은 공주와 서울 간의 요충, 목천 세성산(木川細城山)에 들어가 일조연합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동학교도 재봉기를 안 일본 측은, 이를 토벌하기 위한 병력을 부산에서 북상시켰다. 이때부터 동학군 괴멸까지의 시기, 일본군은 청국 군과 싸우는 한편, 평소에 상당한 병력을 대 동학군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천 세성산의 전투는, 근대장비의 군대와 옛날 그대로 깃발을 올린 백성 무장봉기단과의 대결이었다. 인원수로는 훨씬 많은 동학군이었으나, 헛되게 사상자를 낼 뿐이어서, 불과 하루의 격전 후에 괴멸직전 상태가 되었다.
충주(忠州)에서 북상해 온 전봉준은 「외적을 물리치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자. 용기를 내라!」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호소하여, 홀연 수만의 농민이 모였다. 새로이 편성된 동학군은 초보적인 전투훈련을 받고, 각지에서 싸우면서 공주를 목표로 진격했다.
공방전은 이인(利仁)에서 시작되고, 효포(孝蒲)에서 우금치(牛金峙)에 이르기까지 격전이 되풀이되었다. 결사 항전하는 동학군은 때로는 일한연합군을 물리칠 때도 있었으나, 마침내 12월7일, 공주전투에서 괴멸적인 대패를 당했다.
그때까지 전봉준은 몇 번이나, 일본군 지휘 하에 있는 조선정부군에게 통고문을 보내, 「같은 조선민족으로서, 척왜구국을 바라는 입장은 같지 않는가. 외적에 농락당해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어리석은 일은 그만 두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강세를 아는 조선정부군은, 동학군에 대하여 이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 불린 전봉준은 공주전투에 패한 후,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피해, 최후의 반격을 꾀했으나 이것도 또한 실패했다.
이듬해 1895년(명치28년) 1월19일, 손병희(孫秉熙)가 거느리는 동학군 북접주력부대가 충주에서 완패했다. 전년 말에 전라도 순창(順昌)에서 체포된 전봉준이 서울에서 일본공사관에 인도되고, 다른 동지들과 같이 처형된 것은 4월23일이었다. 제2세 교주 최시형은 동학군 전멸 후에도 각지의 산촌을 돌면서 포교에 노력했으나, 1898년, 드디어 잡혀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동학도 집단은 괴멸되었으나, 그 정신은 변함없이 항일의병으로 계승되었으며, 다시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되어 명맥을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