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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妃暗殺>⑲-1
日本公使의 交替
大鳥 圭介(오토리 게이스케)의 후임으로, 井上 馨(이노우에 가오루)가 임명되었다.
이때 福澤 諭吉(후쿠자와 유키치)는 「井上군을 조선으로 보낸다」는 일문을, 1894년(명치27년)10월16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에 발표했다. 그는 井上에게 크게 기대한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17년에 김옥균, 박영효의 무리가 그들 자신 출중하여, 국사의 개혁을 계획한 것은, 일본정부의 힘을 후원자로 하며, 당시 우리 정부의 정략도 역시 그 개혁의 성공을 계획하고 바랐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략) 그런데 김, 박 등의 계획이, 하루 아침에 실패하자, 정부는 조선의 일을 포기하고 마치 잊은바와 같이, 완전히 支那의 간섭에 일임하고, 게다가 돌아보지도 않고, 비굴한 그 나라 사람들 눈앞에, 일본은 족히 믿을 바가 못 된다는 실례를 보이고, 더욱이 사대(事大)가 한쪽으로 기울기 용이하게, 구제되어야 할 것을 극에 빠트리는 것은, 우리들이 특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이번 개혁에 대하여 곤란의 최대원인은, 그들 정부 당국자가 여하튼 일본인을 믿지 않는 것인지, 일종의 감정에 흘러 도리어 우리를 싫어하며, 표면에는 순종을 가장하면서 내실은 다른 뜻을 생각하고, 만정(滿廷)의 관리 한사람도 진실로 일본에 마음을 접근하는 것이 아님에 다름 아니다」
나는 『민비암살』을 쓰기위해 다섯 번 한국을 방문했으나, 그 첫 번째, 1984년(소화59년) 12월 서울 체재 중에, 「만원짜리 福澤 諭吉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일부 한국인에게 강한 불쾌감을 준다」고 듣고, 창졸간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福澤에 대해서 아주 일반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 내가 머리에 떠올린 것은 --- 명치(明治)이후 일본의 근대화에 꼭 필요했던 서구문명, 문화의 이해와 이입에 공헌한 사람. 계몽가(啓蒙家). 慶應義塾(게이오 기주쿠/현 경응대학교)의 창립자.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정도였다. 이 福澤의 어디가 안 된다는 것인가? 지폐의 “얼굴”로 선정되기에 당연한 사람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福澤의 「탈아론(脫亞論)」이 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탈아론」에는 조선에 대한 강한 멸시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福澤는 「탈아론」뿐 아니라, 그밖에도 한국인이 반발할 수 있는 주지(主旨)의 논문 같은 것을 많이 썼다.....고, 이것은 그때 처음으로 들은 것이다. 귀국 후, 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 후쿠자와 연구센터에서 그런 것을 찾아 읽었다.
福澤가 조선에 관해서 처음으로 쓴 것은 1875년(명치8년) 10월7일자『우편보지신문(郵便報知新聞)』에 발표한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화전(和戰)은 우리의 영욕에 관계가 없는 설」일 것이다. 강화도사건의 발발은 그해 9월이고, 그와 더불어 일어났던 「조선 토벌론」의 여론에 반대하는 주지이다. 福澤는 조선을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 부르고 일본에 “이익”을 가져다 줄 나라가 아니며, 가령 그들이 내조(來朝)하여 우리의 속국이 된다 해도 이를 기뻐할 바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때의 福澤는 아직 조선 사람과 접한 적이 없었다.
福澤가 처음으로 만난 조선인은, 개화파의 김옥균 등으로부터 일본 근대화의 실정을 시찰하려 가고 싶다는 의뢰를 받고, 1880년(명치13년)에 일본에 온 이동인(李東仁)이라는 스님이었다. 다음은 그 이듬해, 1881년에 조선정부가 파견한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으로서, 그는 이동인의 소개로 福澤를 만났다. 그리고 수행원 중 유길준(兪吉濬)등 2사람을 유학생으로 게이오(慶應)에 입학시켰다. 福澤는 그들을 자택으로 불러 친절하게 지도했다.
福澤가 저서 『時事小言』을 출판한 것은, 1881년(명치14년) 9월이었다. 그 중에서 그는 「서양제국이 위세로써 동양을 다그치는 그 모양은, 불길이 만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정세판단 하에, 일본만이 불타지 않는 건축을 해도, 가까운 나라가 낡은 목조가옥 그대로라면 그 집에 붙은 불이 우리 집으로 옮겨 붙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들도 불연건축(不燃建築)을 하도록 일본이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무(武)로써 이를 보호하고, 문(文)으로써 이를 유도하며, 조속히 우리의 예를 본받아 가까운 시간에 문명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되어 있다.
변함없이 필(筆)은 차가우나, 「소야만국과 같은 것은 버려 두어라」고 썼던 6년 전과는, 福澤의 대 조선 자세가 매우 달라졌다. 이동인이나 어윤중과 같은 조선인과 교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국가의 의지”와 福澤와의 접근을 말하는 것일 것이리라.
福澤가 김옥균을 만난 것은 그 이듬해인 1882년(명치15년) 2월로, 「조선의 청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 동양3국의 제휴, 조선의 문명화」를 목표로 하는 김옥균을 지지한 그는, 김옥균을 소개하는 기사 중에서 「.....우리 일본의 친구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의 개화자류(流/역자 주:품위,등급)의 외에는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 「학문으로 그의 문명을 여는 유도법」을 실행에 옮긴 福澤는 많은 유학생을 게이오 의숙에 받아들이고, 1883년 초에는 조선에서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牛場 卓蔵(우시바 타쿠조우)와 井上 角五郞(이노우에 카쿠고로)의 2제자를 조선에 보냈다.
1883년1월11일부터 13일의 『時事新報』에 발표된 「牛場 卓蔵군 조선으로 가다」에 福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완전히 사심을 떠나서, 함부로 그들의 정치에 말참견 하지 말고, 하부로 그들의 습관을 깨트릴 것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일관된 목적은 군이 평생 배워서 얻은 양학의 뜻을 전하고, 그 상류인사로 하여금 스스로 개명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조선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우호의 입장에서 쓰여 지고 있으나, 그러나 井上 角五郞(이노우세 카쿠고로)에게 준 훈시는---
「어찌되었든 간에, 일본이외의 나라들로 해서, 단연코 조선에 손을 비벼서는 안 된다. 일본이 단독히 이에 임하는 것이, 일본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이다.」
이 두 사람에게 준 2가지의 훈시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福澤의 생각에 공존해 있었다.
1881년부터 84년에 걸쳐 福澤는 「거친 수단을 취하더라도, 일본은 조선을 유도해야 한다」는 주지의 문장을 몇 개인가 발표했다. 유도의 목적은 그들 자신이 쓴 것과 같이, 「진실로 隣家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또 나쁘거나 미운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집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학문으로써” 이웃나라의 근대화를 구체적으로 계획해 갔다. 그래서 1884년 12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山邊 健太郞(야마베 켄타로/조선 근대사, 일본 사회운동사 전공)는 저서『일∙한병합소사』에, 「김옥균 등의 쿠데타계획은, 그들이 福澤 諭吉, 後藤 象二郞(고토 죠지로)와 충분히 협의한 것은 福澤, 後藤에게 보낸 의견서에, 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만일 무력을 쓴다면(중략) 각하와 나와는, 변함없는 철맹(鐵盟)이 있다고는 해도, 2사람의 약속은 결국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군주의 밀약을 받아 각하와 일을 도모하고자한다.』로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고 쓰고 있다. 山邊는 김옥균의 의견서 사진을 보이고, 다시 다음과 같이 쓴다.
「井上(이노우에) 외무경도 이것을 알면서, 암암리에 이를 지지하고, 정부와 민간(福澤 諭吉, 井上 角五郞 등)이 일체가 되어 김옥균 등을 선동하여 그 쿠데타를 일으키게 한 것은, 오늘 남아있는 여러 기록으로도 밝혀진 것이다」
그때까지도 김옥균 등의 개화운동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주어온 福澤는, 그의 쿠데타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고,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해 왔다. 福澤가 문제의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3,4개월 후였다.
1885년(명치18년) 3월16일자 『시사신보』에 게재된 「탈아론」가운데, 福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의 謀를 행함에, 아국은 인국(隣國)의 개명을 기다려 같이 아시아를 일으키는 유예(猶豫)가 없이, 차라리 그들을 빠뜨리고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그 지나(支那) 조선에 접하는 법도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한 회석(會釋/역자 주:주장을 해석하여 서로 조화롭게 함)을 할 필요는 없으며, 바로서양인이 이에 접하는 식에 따라 처분해야 될 뿐. 나쁜 친구와 친한 자는 함께 악명(惡名)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하는 것이로다.」
조선을 “유도할 값어치 없는 나라”라고 단념하는 「결별의 사」 다. 福澤의 「연휴론(連携論)」은 여기에서 끝났다.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 실패가, 福澤가 변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나는, 만 원짜리 지폐에 있는 福澤의 “얼굴”에 불쾌감을 나타내는 것은 한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의 일부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내에서도, 동북지방의 도시에 사는 중국인이, 그의 중국어 클래스에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말했다고,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福澤의 「탈아론(脫亞論)」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도 있다.
「예를 들면 지나 조선의 정부가 고풍의 전제로서 법률에 의지할 만한 것이 있다면, 서양 사람은 일본도 역시 법률의 나라인가 생각하고, 지나 조선의 선비가 깊이 미혹되고 탐닉하여, 과학의 아무것도 모르면, 서양 학자는 일본도 역시 음양오행의 나라인가 생각하고, 지나인이 비굴하게 부끄러움을 모르면, 일본인의 의협도 이를 위해---.....」 요컨대 福澤는 「서양인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청국, 조선, 일본을 같은 나라라고 보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 “일대불행”」이라고 논술하고 있는 것이다.
「탈아론」발표 5개월 후, 8월13일자 『時事新報』에 게재된 「조선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 한다」는 사설에, 福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타국 정부에 의하여 망할 때는 망국의 백성으로서 매우 즐겁지 않고 비록, 전도에 희망이 없는 시회에 침몰하여 종신 내외의 치욕 중에 있다 해도 죽음보다는, 오히려 강대문명국의 보호를 받고, 적어도 생명과 사유(私有)만이라도 안전하게 하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니라」
이 논문 때문에 『時事新報』는 발행정지를 당했으며, 그 속편으로 봐야 할 「조선의 멸망은 그 나라의 대세에 따라서 면할 수 없다」는 게재되지 못했다.
光岡玄(미츠오카 겐/櫻美林大學 강사)는 『季刊三千里』(1983년 夏)에 발표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의 국권론∙아시아론」 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것(『조선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를 소개한 旗田 巍(하타다 타카시/東京都立大學 명예교수∙조선사 연구회 회장)는 『문명의 이름에 의한 침략의 긍정이며, 그 기초에는, 조선은 스스로 문명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으로 개화파에 대한 지원도, 결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의 수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한 후쿠자와(福澤)는, 그후 거의 10년간, 일청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후쿠자와(福澤)는 일청전쟁에 있어, 개전에서 다음단계로 넘긴 외교와 군대의 운용이 무리하고 체계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이것은 “문명(일본)”의 “야만(청국)”에 대한 전쟁이라고 『時事新報』에서 되풀이하여 논했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일청전쟁의 승리에 기쁨을 분출시켰다.
일청전쟁을 “불의의 전쟁”이라고 부른 勝 海舟(가쓰 가이슈/幕臣으로서 江戶성 명도의 책임을 수행, 일본의 근대해군 창설자)는, 근대 일본의 진로를 실수라고 단정하고, 이토(伊藤), 무츠(陸奧), 후쿠자와(福澤)에 대해서도 비판을 겨누고 있다. 가쓰(勝)는 일본이, “서양형 근대국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아시아의 동맹을 구상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빠져나와 서양제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아시아 제국과는 서양의 흐름에 접해 가려는 「탈아론」의 후쿠자와(福澤)에 대한 공격은 강하다. 그러나 가쓰(勝)가 가장 강한 비판을 겨누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었다.
만년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와 대원군과의 사이에는 글이 교류되었으며, 서로 경의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대원군은 그의 장기인 난을 그려서 가쓰(勝)에게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