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창밖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저녁에는 내 방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탄생할지
내기를 했다
지혜는 뱀
은민이는 식충식물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
케이크의 초를 끄면
눈앞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하루
생일이 좋았다
내게 말을 거는 자를
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타인이 건네는 말을
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
코끝에는 연기 냄새
어두워진 세상에서
다들
제 몫의 접시를 쥐고
서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
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빈 공간이 커지고
날 부르는 목소리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
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
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
겨울이 남긴 화인이라 여겼다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머리에선 재 냄새가 났다
이수연해독센터
미움은 폐에, 그리움은 쓸개에 남는다고 했다
우리는 배꼽 한가운데에 힘을 모았다
두 다리를 엇갈린 채 기지개를 폈다
누군가는
물구나무서기 또는 고꾸라지기 자세에
연달아 도전하고
센터 선생님은 친절했다
한 번쯤 죽었다 돌아온 사람 같았다
우리는 온몸에서 독소가 빠져나가길 바라며
척추 마디마디를 숨으로 채웠다
갈비뼈를 열고
뒤통수에 발꿈치를 가져다 대는 사이
창가에 놓인 몬스테라 줄기가
새로운 동작을 배우고 있었다
빛에 닿은 잎사귀마다
구멍이 나고 있다
순조롭게
총성 없이 선명하게
볕이 잘 드는
이수연해독센터에서는
무성한 여인초와 아레카야자 사이로
사람들이 웃자란 몸을 감추고
품이 넉넉한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등에 점이 많네요.
한 여자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나는 점박이 잎사귀를 하나 뗐다
창밖에선 나를
지나치게 뒤틀린 나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가지치기하러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