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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울 혜화동 로터리, 2019 출처: 한광야
대학과 도시 11. 서울 명륜동 – 혜화동
서울공대지 2019 Winter No.115
한광야 동국대학교 건축공학부 도시설계전공 교수
서울의 오래된 도시마을인 명륜동과 혜화동이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한반도의 역사적인 고등교육시설들과 근·현대기의 학교들이 그 도시마을의 형성과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의 명륜동-혜화동은 공자와 주자를 섬기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은행나무의 행단을 상징화한 성균관(1395)의 학교 마을로 형성되었고, 일본지배기에는 종교세력들이 설립한 일군의 학교들과 공업전습소(1907), 대한의원(1907), 경성제국대학(1924-1946, 서울대의 전신)과 그 주변에 도시한옥과 문화주택 군을 중심으로 지식인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이후 명륜동-혜화동은 서울대 캠퍼스가 이전해 나간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광역도시권에서 예술·연극 커뮤니티와 11개 대학교의 예술 분야 분원들이 설립되어 거대한 예술·공연·문화 클러스터로 진화해왔다.
‘인륜의 명분에 관한 학문’인 유학이 중국 산동의 취푸(Qufu 曲阜)에서 한반도로 전파된 시점은 BC 1세기 전후로 평양(樂浪郡, BC108-313)을 통해 서로 추측된다. 당시 문자로 체계화된 유학은 한반도의 지배층에게 흡수되어 그 권위를 확보하고 영토의 지배행정과 이를 책임지는 국가공무원의 선발(科擧, 958-1894)과 교육을 위해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에 설립된 태학(372), 신라 경주향교의 부지의 국학(682), 개경 방직동의 국자감(992)이 모두 그 거점이었다.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1398)이 개경의 국자감을 대신하며 서울에 조성된 시점은 수도 한양(1394-1399, 1405-1897)이 조성되던 때이다. 성균관은 유학과 주자학의 지식체계를 이용해 고급공무원을 교육했으며, 왕이 공자의 묘(文廟)를 참배하며 왕세자의 교육장소이기도 했다. 이에 성균관은 창경궁의 동쪽 담의 집춘문(현재 경학어린이공원)을 통해서 창경궁과 직접 연결되었다.
한성부 북동부인 이 곳은 ‘교육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뜻으로 ‘숭교방(崇敎坊)’으로 명명되었다. 숭교방은 멀리 북악산 진입부로 매부리의 모습을 닮은 응봉(鷹峰, 현재 와룡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반수천(泮水川)과 그 동쪽에 흥덕동천을 두어 산수가 아름다운 구릉지였다. 숭교방에 언제부터 마을이 조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개경으로부터 이전해 온 성균관의 조성은 새로운 마을 형성의 시작이었다.
특히 성균관은 반수천의 두 갈래 상류천인 동반수와 서반수(성균관 길)의 합류지에 자리잡고 반수교(현재 성균관대 교문 부지)를 통해 접근되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반수교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그 동쪽 편에 신삼문이 있고 이를 통해 공자의 위패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중국과 한국의 유학 성현을 모시는 공간들이 ‘□’ 형태의 마당을 완성했다. 또한 대성전은 문을 통해 교육공간인 명륜당(1398)과 약 200여 명 학생들의 기숙공간인 두번째의 ‘□’ 형태의 마당이 나타나고, 그 배후에 조성된 도서관인 존경각과 과거시험장인 비천당(1661)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성균관의 중심부는 명륜당과 두 그루의 은행나무(1519)로 완성된 ‘□’ 형태의 마당으로 ‘행단’이라 불렸다. 이곳은 살구나무 아래의 공자의 교육공간을 모델로 형성되었으나, 살구나무는 은행나무로 대체되었다. 이후 은행나무는 한반도 전역에서 유학의 거점인 향교와 서원에 식재되어 그 마을의 중심부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 한양과 북동부 성균관-문묘 출처: 동여전도, 교토대학 가와이문고
조선 후기 한양의 성균관-문묘 출처: 태학계첩(1747),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은 은행나무 밑에서 유학을 교육하는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서원과 향교로 그 뼈대를 완성하고, 남도의 관문으로 장성을 지나 광주와 나주로 들어가는 갈재, 단양을 지나 영주와 안동으로 들어가는 죽령고개, 영남의 관문으로 문경을 지나 대구와 경주로 향하는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기능했다.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들은 모두 이 이동경로를 통해서 성균관과 교류해온 지역 세력거점들이다.
한편 숭교방의 응봉에서 발원한 흥덕동천은 현재 올림픽 국민생활관 부지에 입지했던 연못과 군자정을 지나 혜화동로터리에서 반수천과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나갔다. 이곳부터 흥덕계곡부터 남쪽의 동숭동 낙산에는 조선 개국을 도우며 한성부윤을 지낸 박은, 조선의 대표 유학자로 효종과 현종의 스승으로 활동한 송시열, 송시열과 겨루던 세력가인 윤선도 등이 거주했던 활동거점이었다. 이는 이곳이 산수의 경관이 수려하여 한양의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한 곳으로 불렸다.
또한 주변의 계곡에는 양기와 열이 많은 앵두나무가 식재되어, 그 열매는 이른 봄의 왕궁의 행사에 사용되고 앵두청으로 담가지면서 이 마을의 상징물이 되었다. 또한 이곳은 도성의 실질적인 북문으로 기능한 혜화문에 인접하여 도성 밖의 외곽지역과 멀리 두만강 국경지인 함경도 경흥과 만주까지 연결되어 개성의 세력과 경흥의 여진족과 교류를 통한 물자와 세력이 도착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성균관의 입구에 흐르던 반수천 주변에는 개경 국자감의 노비들이 성균관과 함께 이주해오면서 정착한 마을인 ‘반천촌(泮川村)’이 형성되었다. 이에 반수천과 흥덕동천을 따라 조성된 길들은 마을과 주변지, 지방을 연결해 주었으며, 그 하천변은 행인들이 모여들며 야외활동과 상업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특히 반천촌은 당시 중국에서 유입된 주자학과 천주교에 노출되면서 실학자인 정약용과 베이징에서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의 활동거점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반천촌 주민들은 소고기 독점판매권을 획득하고 반수천으로부터 흥덕동천과의 합류구간(현재 대명거리)을 중심으로 인접한 함춘원과 경모궁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하숙, 숙박, 음식점을 운영하며 그 세력을 넓혔다. 반천촌 주민들은 또한 가면연극단의 연희자로 활동하며 본산대놀이 가면극과 줄타기(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2011)를 공연하며 한반도에서 시장의 성장에 기여했다.
한적한 숭교방에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일본지배기에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조선교육령(1911, 1922, 1938, 1943)의 실행과 그에 따른 학교의 설립이었다. 당시 서울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학교교육을 통한 기회의 땅이 되었다. 숭교방에는 지역인들이 설립한 숭정의숙(1910, 현재 혜화초교)을 시작으로 ‘사립학교 규칙 및 전문학교 규칙(1915)’의 시행과 함께 혜화동고개길 주변에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학교의 설립은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종교계들 간의 경쟁으로 가속화되었다. 특히 도시중심부의 사찰, 성당, 교회의 부속시설로 개교한 학교들은 도성 주변의 넓은 학교부지를 찾아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이 즈음 숭교방은 명륜정으로, 흥덕계곡 주변은 혜화정으로 개명되었다.
명륜동-혜화동에서 서양식 교육의 시작점은 이미 숭정의숙 이전에 박은의 소유지가 매각되어 그 위에 설립된 카톨릭계 혜화동수도원(1909)이다. 혜화동수도원은 당시 로마 카톨릭교 선교단체인 파리 외방선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1658)의 요청에 따라 뮌헨 남서쪽 장트 오틸리엔(Sankt Ottilien)에 근거지를 성베네딕토회 (Benediktinerkongregation)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후 경성대교구에게 매각되어 혜화동성당(1927)으로 조성되었다. 혜화동 성당은 한국의 첫 번째 유치원인 혜화유치원(1937)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제천에서 처음 설립된 성요셉신학교(1855)는 이후 예수성심신학교(1887)를 거쳐 혜화동수도원 부지로 이전해와 현재 카톨릭대 성심캠퍼스(1959)를 운영해 왔다.
서울 성균관의 대성전, 2019 출처: 한광야
서울의 명륜동-혜화동-동숭동-연건동, 1927 출처: 경성시가도, 1927
한편 혜화동에는 불교계 교육기관인 명진학교가 북묘 부지로 이전해와 중앙학림(1915-1922)으로 개교했다. 중앙학림은 이후 중앙불교전수학교(1928)와 혜화전문학교(1940)를 거쳐 동국대학교(1946, 1953)로 개명된 후 필동으로 이전해나갔다. 또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1922)이 인수한 보성중학교(1906)가 1927년 수송동으로부터 이전해왔다. 이후 보성중학교는 문화재의 외국유출을 막으며 직접 문화재를 매입했던 전형필에게 매입되어 보성중고교로 운영되었다.
이 즈음 혜화동과 성북동은 불교경전의 한글화를 주도한 한용운의 심우장(1933), 전형필의 북단장(1934)과 함께 한성순보의 기자이며 천도교 활동가였던 오세창 등이 설립한 구인회(1933)의 활동무대였다. 또한 문예지 ‘문장’(1939)을 창간한 소설가 이태준의 수연산방,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 최순우의 근대한옥집 등은 문예활동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특히 전형필은 북단장에 한국 최초의 민간 박물관인 보화각(1938, 현재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고고미술 동인회(이후 한국미술사학회)를 설립해 운영했다.
일본지배기에 혜화동이 학교와 지식인 마을로 성장한 또 하나의 계기는 경성제국대학(Keijō Imperial University, 1924)의 설립이다. 이미 동숭동에는 한국 최초의 기술학교인 공업전습소(1907,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 본관에 개소하여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1916)로 성장했다. 또한 경모궁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의료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대한의원(1907)과 부속 의학교(1907,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개원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동대문 근처에 건설된 동대문발전소(1898)로 인해 안정된 전기공급이 가능해지고, 뚝섬으로부터 상수가 보급되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한 4년제 대학으로서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은 먼저 청량리에 예과캠퍼스(1923)를 조성했으며, 이후 대한의원의 부지를 흡수하고 그 인접지에 대규모의 본과캠퍼스(1925)를 완성했다. 이에 따라 현재 대학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법문학부와 인문학부, 서쪽에는 의학부가 입지했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은 국립서울대학교(1946)로 개편되면서 대학 본관을 중심으로 법과대, 문리과대, 의과대, 미술대 등의 단과 대들이 대학로를 따라 도시형 블록캠퍼스를 완성했다. 서울대 캠퍼스는 이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전되는 1975년까지 대학생과 젊은이의 장소로서 기능했다. 특히 대학로의 중식점 진아춘(1933)과 학림다방(1956)은 1960-1970년대의 지식인, 예술인, 대학생의 문학과 지성의 활동거점을 구성했다.
또한 혜화동로터리의 아남아파트 부지 위의 숭절사(1725)에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하여 운영한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Takushoku University 拓殖大学)의 경성분교인 경성고등상업학교(1915, 1922-1946; 이후 서울대 상과대)가 숭인동에서 이전해 왔으며, 카톨릭계가 설립한 남대문상업학교(1907, 현재 동성중고교)가 1929년 혜화동성당의 인접부지로 이전해오면서, 당시 재계와 금융권의 일군들을 양성했다.
명륜동-혜화동은 인접한 학교들이 설립되면서 학생과 교사와 교수의 학교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특히 명륜동과 혜화동의 경계가 되어온 흥덕동천(현재 혜화로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일본지식인과 서쪽에는 정치력과 재력을 갖춘 조선인이 함께 거주하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트램전차와 버스가 운행되는 교통거점으로 성장하면서 당시 정치와 경제 활동의 중심부인 광화문, 종로, 명동과 인접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혜화동에는 서양식과 조선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주택들이 개발되었다. 특히 혜화동은 일본사회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동경했던 서양의 생활방식을 흡수하여 생산한 ‘문화주택(Bunka Mura 文化住宅)’이 도쿄로부터 직접 전파된 곳이다. 당시 문화주택은 빨간 기와지붕에 모르타르와 벽돌의 외벽, 응접실, 입식부엌, 화장실을 갖춘 서양식 주택으로 동경평화기념 박람회(東京博覽會, 1922)를 계기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명륜동-혜화동은 문화주택의 영향을 받으며 1930년대부터 기존 한옥의 특성을 갖추며 소규모 필지에 시공된 도시한옥의 개발지이기도 했다. 특히 혜화동-명륜동의 도시한옥은 정세권을 비롯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대규모 필지를 매입하여, 이를 분할해 소규모의 블록과 골목을 중심으로 입식생활을 반영하여 시공되었다.
서울 서울대 동숭동캠퍼스, 1970년대 출처: http://www.kdemo.or.kr
일본지배기의 명륜동-혜화동은 과거 한양 도성 안쪽의 북동쪽 끝 마을에서 도성을 넘어 북쪽으로 성장하는 서울의 확장거점이었다. 이 즈음 혜화동로터리는 창덕궁, 종묘, 창경궁을 가로지르는 창경궁로가 조성되고 트램전차 창경원선(1910)과 창경원선 연장선(1939)이 운행되면서 도시중심부와 직접 연결되는 대중교통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혜화동의 물길을 따라 그 주변에 곡선형의 비포장 도로가 조성되었고 불규칙한 고갯길은 차량과 트램이 운행 가능한 경사 도로로 정비되었다.
명륜동-혜화동은 현대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마을 인구가 증가하면서 보다 작은 마을들로 분화했다. 자연지형은 이러한 작은 마을의 입지를 결정했으며, 시장, 목욕탕, 약국, 한의원, 치과, 의원, 미장원, 이발소 등은 마을중심부를 구성했으며, 쓰레기 집수장이 그 경계가 되었다. 실제로 명륜동-혜화동은 성균관대 진입부의 평지에 형성된 오래된 대학상권과 대명길에 입지했던 명륜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랫동네, 초·중·고교를 중심으로 구릉에 형성된 주택지와 성균관대 하숙촌의 윗시장을 중심으로 기능한 윗동네, 혜화로 길의 양쪽으로 대형 주택과 서울의 초기 슈퍼마켓인 한남체인을 중심으로 기능한 혜화동으로 나뉘었다.
서울 대한의원 본관, 2019 출처: 한광야
서울 (옛)경성제국대 본관(문화예술진흥원, 현재 예술가의 집), 2013 출처: 한광야
명륜동-혜화동에서 마을의 얼굴로서 그 물리적인 아이덴티티를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도시교통의 종점으로서 둥근 형태를 가진 혜화동로터리와 그와 연결된 마을진입로인 헤화로길이다. 특히 혜화동로터리에서 북쪽으로 흥덕동천 구간은 1960년대 전후로 서울시가 추진한 ‘가로수길 조성사업’을 통해 복개되고 은행나무와 양버즘나무 (플라터나스)가 식재되어 현재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혜화로길은 혜화동로터리의 분수를 지나 양버즘나무(플라터나스) 가로수길인 대학로로 연결되어, 주민들은 정서적으로도 혜화동의 동숭동으로의 연결을 인지했다.
혜화동로터리의 북서쪽 변은 버스정류장과 함께 일군의 3층 건물들이 가로수들과 함께 밀도 있게 원형의 넓은 보행환경을 정의했다. 이곳에는 혜화파출소, 혜화우체국, 국민은행(현재 세븐일레븐과 롯데리아), 상업은행(현재 우리은행) 등의 공공기능과 함께 중식점 금문(1934), 성진약국, 동양서림(1953), 혜화문구사, 태극당(1972)이 입지하며 하나의 가로형 상가로서 마을의 중심부이며 유동인구의 거점을 완성했다.
특히 혜화동로터리의 상징으로 혜화동, 명륜동, 동숭동을 하나로 모아주었던 혜화동 분수가 조성된 시점은 이 즈음인 1970년대 초로서, 혜화동고가차로(1971)가 트램전차선로와 ‘꽃터널’ 구조체를 대신하던 때이다. 특히 노란색 구형의 혜화동 분수대는 마을에서 활동하는 문학가 모임의 이름으로 이용되었고, 주민들에게는 여름의 시작을 알려주는 계절시계였다.
거대한 학교마을인 명륜동-혜화동에 큰 변화가 시작된 시점은 1970-1980년대에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주도한 서울의 강남개발이다. 서울의 도시확장과정에서, 명륜동-혜화동의 거주민들과 교사들은 1980년대를 시작으로 당시 개발되는 강남과 잠실로 이사했다. 이와 함께 명륜동과 혜화동의 학교들도 신개발지의 앵커시설로서 이전해 나갔다. 결국 명륜동-혜화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젊은이와 아이들이 사라진 명절 때에만 북적대는 어르신 마을로 변화했다.
마을에서 이러한 변화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인접한 연지동의 동대부중고교와 은석초교의 장안동 이전과 정신여중고의 잠실 이전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보성중고교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연계되어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추진한 잠실의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단지로 이전해 나갔다. 또한 혜화동로터리 북서쪽에 입지했던 경성고등상업학교 부지에 입지했던 우석대 의과대학-혜화병원은 고려대 의과대-부속병원(1971)으로 흡수되었고, 이후 1991년 안암동캠퍼스로 이전해 나갔다. 비워진 고려대 의과대-부속병원 부지에는 아남아파트 단지가 이 지역의 첫 아파트단지로서 건설되었다
혜화동-명륜동에 붉은색 벽돌로 시공된 다세대주택(공동주택)과 다가구주택(단독주택, 빌라)이 등장한 시점도 이 즈음인 1980년대이다. 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강남으로 이주해 나간 명륜동-혜화동의 문화주택과 도시한옥은 마을을 중심으로 집장사를 해오던 시공업자에게 매입되어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으로 신축되어 분양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는 명륜동-혜화동의 문화주택, 도시한옥, 다세대 주택들이 합필되어 1-3동의 소규모 아파트단지로 재건축되고 있다.
서울 마로니에 공원, 2013 출처: 한광야
혜화동로터리의 남쪽에 인접한 동숭동은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로 개편되어 확장하면서 대학로를 중심으로 도시블록형의 대학마을로 기능했다. 특히 '세느강'으로 불린 흥덕동천의 수계를 따라 형성된 ‘문리대길(1966)’은 이후 지하철4호선 공사와 함께 진행된 하천 복개를 통해 넓은 대학로로 조성되었다. 이즈음 동숭동은 서울의 지성인과 젊은이의 중심부로 기능했으며, 특히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일련의 학생시민운동의 대표장소였다.
한편 서울대는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초에 추진한 서울의 인구분산 정책과 서울대학교 종합발전계획(1972) 및 대학교 이전계획에 따라 1975년 의과대를 제외한 모든 단과대들을 신림동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대한주택공사가 추진한 대규모 아파트단지 개발안이 반대여론으로 무산되었고, 서울시는 비워진 캠퍼스에 문화공간을 조성하자는 여론에 부응하여,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함께 대학로 중심의 도시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시설계의 노력은 단일 건물이 아닌 일정 구역 전체의 물리적 환경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공공의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대학로 도시설계는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로터리 사이의 구간을 ‘문화예술의 거리인 대학로’로 지정하고, 가로변의 건물 높이, 형태, 외장재의 규제를 통해 통일된 가로환경을 조성하려 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이러한 비전 하에 서울대 캠퍼스의 본관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으로 개조했으며 ‘마로니에 공원(1984)’을 중심으로 종합문화회관 미술회관(1979, 현재 아르코미술관)과 문예진흥원 예술극장(1981, 현재 아르코예술극장)을 조성했다. 그 주변에는 샘터파랑새극장(1984), 바탕골소극장(1986), 마로니에소극장(1986) 등 10여 개의 소극장들이 개장했다. 이에 따라 서울의 연극 단체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 명동, 정동, 신촌으로부터 당시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이곳으로 이전해 와서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의 창작과 실험을 주도했다. 한편 문리과대 부지는 100평 이상의 단독주택지로 분할되어 민간에게 매각되어 대형 단독주택들로 신축되어 서울의 새로운 부촌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1980년대 말부터 2-3층 단독주택들은 정원을 가진 음식점과 카페로 개조되어 서울의 새로운 카페문화를 만들었다.
혜화동로터리는 또한 인접한 지하철 혜화역(1985)이 조성되면서 확장하는 광역 서울의 지역거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혜화역은 혜화동과 인접한 명륜동과 동숭동에 약 10만 명 이상의 젊은 유동인구를 확보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새로운 도시문화와 구매패턴을 주도하며 서울문화를 정의해온 주체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혜화역을 중심으로 대학로 변의 대명거리와 이후 대학로11길에 상가들이 조성되면서, 혜화동로터리는 그 유동인구와 상업활동의 거점 기능을 잃게 되었고, 도시중심부와 서울 동북권을 연결하는 교통거점기능도 역시 홍대, 압구정, 방배 등에 잃게 되었다. 이러한 혜화동로터리의 쇠퇴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는 광역 서울권에서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마을의 정체성도 잃게 되었다.
서울 성균관과 혜화동을 연결하던 고갯길(혜화로 9길), 2019 출처: 한광야
1980년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쇠퇴하던 명륜동-혜화동에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삼성그룹이 1996년 추진한 성균관대학교의 인수였다. 삼성그룹의 성균관대 인수와 이에 따른 대학의 재원 및 시설투자는 주변의 오프캠퍼스 성균관대 기숙사의 개발과 민간 부동산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지며 마을에서 젊은 유동인구의 증가를 유도했다. 현재 성균관대는 마을에서 10개 이상의 건물들을 소유하며 거대한 기숙커뮤니티를 구성해 왔으며, 개인사업자들은 외국인 투숙을 위한 도시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명륜동-혜화동과 동숭동에는 흥미롭게도 2000년대 초부터 일군의 대학교들이 본 캠퍼스로부터 독립된 예술·공연·문화 분야의 대학커뮤니티를 완성해 왔다. 동숭동에는 2000년대 초부터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2001)을 시작으로 최근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2012)의 조성까지 총 수도권 11개 대학교들의 교육 및 공연시설들을 조성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교를 소유한 재단법인이 학교로부터 떨어진 부동산의 투자에 관심을 가지며 가속화되어 왔다.
서울 명륜동 한무숙문학관, 2019 출처: 한광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