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號 사건으로 결혼식 연기 / 有色人種 차별 싫어… / 아들이 아버지 母校 하버드에 장학금 만들어
崔회장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1년을 보낸 뒤 美 공군에 자원 입대한다. 그는 텍사스, 일본, 한국 등지에서 1963~1968년까지 복무했다.
『日本에서의 軍 복무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첫 해외임무는 그리스의 크레타섬이었는데, 내 친구가 일본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任地(임지)를 원했어요. 아버지가 전임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대학 동창에게 부탁해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는 日本 아오모리(靑森)현 미사와 미군 기지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한국에서 근무할 기회를 잡았다.
『특별정보를 다루는 자리인데 전임자가 전역을 하게 돼 자리가 났습니다. 전 한국엘 가고 싶어 했거든요. 10년 간 조국을 한 번도 방문해 보지 못했으니까요』
미국 입양 후 10년 만에 그는 오산땅을 밟았다. 그는 1955년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시켜 줬던 대한적십자사 임원을 만나기도 했다. 2년 반 동안 오산 공군기지에 머물면서 그는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 朴一慶(박일경·1960년대 초 문교부 장관을 지낸 헌법학자·1994년 작고)씨를 만난 것이다.
『당시 오산 비행장에 근무하는 공군사관학교 1기 출신인 李喜根(이희근) 前 공군참모총장(당시 대령으로 부단장)이 제 사돈벌입니다. 단장이 周永福(주영복) 준장(前 국방장관)이었습니다. 李喜根 대령이 삼촌을 찾아보라고 연락처를 주더군요』
崔회장은 또 평생 반려자인 부인 심재민씨를 만난다. 고교 때부터 테니스 선수였던 崔회장은 공군에서도 주장 선수로 뛰면서 하와이로 시합을 가기도 했다. 그는 이화여대 대학생이었던 부인을 테니스 경기장에서 만났다.
『1966년이었으니까 테니스 치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일본 연식정구보다 서양 정구가 스피드가 빠르고 신기한지 시합을 하면 사람들이 많이 구경을 와요. 어느 날 경기를 마치고 났는데, 관중석의 한 여대생을 보고 제가 반한 겁니다』崔회장은 처가댁의 반대가 심해 결혼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름이 스팩만이니까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도 하고, 제가 四顧無親(사고무친) 하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나중엔 하버드大 졸업한 것도 「하버드大를 아무나 가느냐, 순 사기꾼이니까 속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답니다』처가의 반대가 심하자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다. 『모든 게 어려우니까 재미가 있는 거지요. 집 사람이 쉬웠으면 제가 아마 안 쫓아다녔을 겁니다. 처가댁에서 제 학력을 의심하니까 「언젠가 다 밝혀지면 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밀고 나갔습니다』崔회장이 한국에서 복무한 2년 반 동안은 세계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1968년의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특히 푸에블로(Pueblo)호 납북 사건(1968년 1월23일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항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 초계정 4척에 납치된 사건-필자注)이 일어나기 2주 전 정보장교 崔씨는 美 공군 314사단장인 핑검 스미스 장군에게 미리 푸에블로호의 항로에 대한 보고를 올린 바 있었다.1968년 2월3일 결혼식이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연기됐다. 『결혼식 연기를 통보했는데 통지를 못받고 나타난 분들도 많았어요. 결혼식 당일날 제가 공군교회 정문에 나가서 바람맞은(?) 하객들에게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결혼식은 두 달쯤 연기돼 3월23일에 했습니다』崔회장은 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모든 것을 혼자서 시작했던 1955년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9명이나 되는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제 아내가 골프에서 이따금 저를 참패시키는 결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有色人種 차별 싫어 은행으로
軍 복무를 마치자마자 그는 은행으로 진로를 정했다. 25년 간 은행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은행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는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공군 대위(정보장교)로 전역을 하니까 美 CIA와 국무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러나 당시 국무부 등 관청에는 유태인이나 흑인의 차별이 존재할 때였어요. 제 유태인 친구 하나가 「네가 꿈꾸는 것은 주한 美 대사 정도일 텐데, 동양인이 들어가면 차별받는다」고 만류하더군요. 제 생각도 같았어요』
시티뱅크, 체이스 맨하탄 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 등 다섯 군데 入社 인터뷰를 했고 가장 조건이 좋은 체이스 맨하탄을 골랐다.『체이스 맨하탄은 저처럼 MBA(경영학 석사과정)를 안 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해 주는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요. 정말 MBA 코스처럼 가르쳐 줍니다. 지금도 교육체계가 외국계 은행 중에서 가장 잘 돼 있습니다』
체이스 맨하탄 은행 서울지점, 마린 미들랜드 은행 서울지점장, 홍콩 은행 한국본부장을 거친 그는 1987년 미국 푸르덴셜 파이낸셜로부터 한국法人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푸르덴셜 생명은 1989년 6월 미국 푸르덴셜 파이낸셜이 자본금 전액을 출자해 설립한 국내 법인이다. 1875년 창립된 미국 최대의 보험회사 푸르덴셜 파이낸셜(Prudential Financial, 창업자 존 F 드라이든)은 세계적 종합 금융서비스 그룹으로 세계 35개국에 280여 개의 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崔회장은 1993년 사장 취임 후 한국에 종신보험을 도입하기 위해 애를 쓴 「종신보험 개척자」다. 종신보험은 어떤 경우에도 보험금을 지급한다. 한 마디로 「종합 생명보험」인 셈이다. 심지어 보험가입 후 2년이 지나면, 자살해도 보험금을 준다.
푸르덴셜 생명은 1999년 11월23일 종신보험에 가입하고 초회 보험료로 203만원을 낸 소아과 의사 유모(당시 40세)씨가 다음날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유족에게 보험금 10억600만원을 지급하기도 했다.
崔회장의 책상 위에는 「Ethics is the only way(윤리만이 살길이다)」라는 푸르덴셜의 모토가 붙어 있다. 그의 모범적인 正道 경영 덕분에 푸르덴셜은 2000년 11월 내외경제신문이 제정한 제5회 「내경보험대상」을 수상했다.
푸르덴셜 생명의 성공적 경영사례는 국내 보험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생보업계의 효율개선과 경영혁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인정을 받은 셈이다.
1000명에 이르는 푸르덴셜 생명 라이프플래너의 평균 연봉은 1억1600만원. 보험설계사 중 수수료 수입이 연간 5600만원 이상이 되어야 가입 자격이 주어지는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ㆍ백만불원탁회의) 자격취득자는 263명이나 된다. 그 중 국내 유일의 TOT(Top of the table·MDRT 실적의 6배) 자격도 푸르덴셜 생명의 라이프 플래너가 가지고 있다.
崔회장은 회장실을 늘 개방한다. 라이프 플래너들도 고충이나 의견이 있으면 수시로 들러 이야기를 한다. 崔회장은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음식점에서 직원들과 마주치면 영수증을 슬며시 가져가는 버릇이 있다. 그가 異域(이역)에서 고국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 「못 잊겠어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의 애창곡이 됐다.
아들이 아버지 母校 하버드에 스팩만 장학금 만들어
1999년 9월, 60세의 생일을 맞은 崔회장은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딸 경희씨 내외가 비서와 합작해 崔회장의 동창들 및 은사들의 메시지와 옛날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꼭 알고 싶었던 겁니다.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데는 몇 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아이들은 심지어 플로리다에 있는 동생 제시의 집에까지 가서 옛날 편지와 사진들을 수집해 왔더군요』
崔회장은 중간 중간 『나는 행운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1998년 갑상선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요양을 위해 뉴욕市에서 보냈던 2개월 반은 나와 가족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나와 결혼해 준 아내이고, 다음은 우리에게 세 명의 손자를 안겨 준 두 아이들입니다』
崔회장의 양아버지인 스팩만씨는 1999년 10월30일 캘리포니아 선시티에서 80세를 一期로 사망했다. 스팩만씨는 리버사이드 국립묘지에 묻혔다.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헬렌 곁에 누웠다.
崔회장은 11월3일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특정한 사명을 위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스팩만씨, 당신은 많은 가족을 부양하고, 조국과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먼 전쟁터에서 싸우도록 이땅에 보내지셨습니다. 그것을 실천하며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은 한국인 아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그 자신의 가정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이 입심은 거칠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마음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모인 당신의 자손들 모두와 당신의 친구들은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고 만나고 싶어했던, 먼저 가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시는 당신을 추모하며 마지막 작별을 고합니다. 두 분의 재회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편안히 잠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崔회장의 아들 유신씨는 얼마 전 하버드大에 「스팩만」 장학금을 만들었다. 최유신씨가 12만5000달러, 하버드大에서 12만5000달러를 출연해 25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한 것.
『장학금은 한국에서 하버드大에 진학하려는 형편이 어려운 한국 학생들에게 쓰여질 겁니다. 돈을 쓰되 효율적으로 쓰자는 거지요』
崔회장은 은퇴하면 가장 먼저 자신과 양부모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그 다음 할 일은 「스팩만 장학재단」을 만들어 그 운영을 맡을 생각이다.
『저를 길러 준 양부모에 대한 은혜는 평생 갚을 길이 없지만, 그분들의 뜻을 담은 장학재단이 만들어지면 구식 해병 스팩만 상사도 하늘에서 기뻐할 겁니다』●
◈푸르덴셜 생명은…정부와 국민이 신뢰하는 최고의 보험회사
푸르덴셜 생명(사장 金遜永)은 126년 전통의 美 푸르덴셜 파이낸셜 본사가 1989년 6월 자본금 전액을 출자해 설립한 한국 현지법인이다.
푸르덴셜 생명은 전국에 29개 에이전시를 갖고 있으며, 2000년 12월 말 현재 보유계약 15조5530억원, 보유계약 건수 22만70여 건, 직전 1년 간 수입보험료 2072억원을 기록중이다.
푸르덴셜 생명은 저축성 보험이 주종이던 한국 보험시장에 보장성 보험 시대를 열었다. 푸르덴셜 생명의 종신보험시장 점유율은 37%로 업계 1위다.
푸르덴셜 생명은 보험회사의 재무건전성을 나타내는 지급여력 비율도 3741%로 업계 최고 수준이고, 고객만족의 척도가 되는 보험계약 유지율도 13개월차 기준 92.8%로 업계 1위이다. 라이프 플래너(Life Planner) 만족도를 나타내는 모집인 정착률도 88.8%에 달한다.
푸르덴셜 생명은 1996년 보험감독원 정기검사에서 보험감독원 설립 이래 처음으로 지적사항이 전혀 없는 「무결점 보험 회사」로 평가되었고, 1998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무결점 보험회사」로 선정됐다.한국생산성본부가 朝鮮日報와 공동으로 시행한 고객만족지수(NCSI:National Customer Satisfaction Index)에서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연속 고객만족도 1위사로 선정됐다.
푸르덴셜 생명은 他 보험사 경력이 없는 직장 경력 2년 이상인 정규 4년제 대졸 출신만을 선발한다. 색다른 점은 푸르덴셜 생명은 중도해약률이 높은 연고 중심의 영업을 지양하는 대신, 대졸 출신 라이프 플래너들이 고객들에게 재정계획을 전문적으로 컨설팅하는 방법으로 영업을 한다. 이 같은 푸르덴셜의 마케팅 전략은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푸르덴셜 생명은 오는 2004년 라이프 플래너수 2000명, 보유계약 건수 60만 건, 보유계약금액 60조원 이상의 건실한 중대형 생명보험회사로 성장할 마스터플랜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