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1요한 2,29―3,6 요한 1,29-34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제가 보내집니다.
“누구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보내는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집 근처 주유소에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눈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묻어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서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아름다운 뒷모습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식당을 먼저 개업했습니다.
좋은 장소도 찾았고, 손님들을 많이 끌기 위해 식당 홍보도 제대로 했습니다.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 특별한 메뉴도 계발했습니다.
백방의 노력을 다 한 결과 유명한 식당이 되었습니다.
구름처럼 손님들이 몰려왔고, 점심식사 시간에는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식당 바로 옆에 누군가가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은 얄밉게도 우리 식당 메뉴와 똑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식당 한 모퉁이에 ‘원조’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우리 식당으로만 향하던 손님들의 발길에 점점 저쪽 식당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특별 이벤트다, 경품이다, 하며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면서 결국 우리 식당은 파리만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시작한 식당 주인의 심기는 엄청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늦게 시작한 식당 사장을 찾아가서 왜 하필 여기 와서 이러느냐, 왜 남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느냐며 따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은 정말 잘 나갔습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면 백성들은 숨죽여가며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성을 터트렸습니다.
저 같았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떠받들어주고 나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인간인지라 우쭐하는 마음에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보다 더 탁월한, 나보다 더 잘나가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린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빈정이 많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메시아가 아니며, 단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이정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쪽을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감동적인 회개의 설교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당연히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 즉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저 분이시다고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봄>
2022. 01. 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봄>
믿기에
믿음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희망하기에
희망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희망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사랑하기에
사랑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사랑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