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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학문과 정치
면천지역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그는 일찍이 양반 사대부가 하는 것 없이 무위도식하는 것과 북벌론을 호언장담하면서 폭이 깊고 소매가 긴 옷을 입는 것과 무예연습을 하지 않는 점을 풍자했다. 그러나 평민들과 하층민조차 양반관료나 재력가에게는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자신보다 지체가 낮거나 미약한 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평민과 하천에 대한 동정심도 거두게 된다.
1767년 아버지 박사유가 사망했다. 백면서생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던 아버지 박사유는 늦은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지만 통덕랑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가난하게 살던 형에게 모두 넘기고 근처 반송방 내에 분가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0년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지만, 회시에 백지 답안지를 내고 나왔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근의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道德)보다 말단(實用)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있을 때 그는 물레방아를 관찰,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 그는 물레방아를 수차(水車)라 했고, 여러개의 모사본을 그렸다가 11년 뒤 안의현감이 되어 함양 땅에 물레방아를 설치한다.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일 귀국하였다.
북학파 활동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류(서자)들을 금고하는 것은, 옛날의 법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런 법이 없으며, 예률(禮律)에서 상고해 보건대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초에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틈타 앙갚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디 개국했을 때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1백 년 뒤에 선묘(宣廟)께서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인묘(仁廟) 때에 미쳐서 또 삼조(三曹)에 허통시켰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열성조에서 고치고 변통한 성대한 뜻을 단연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선대에 조광조, 이이, 송시열이 서자들도 요직에 쓸 것을 건의했던 점을 계속 지적, 상소하여 서자들에게도 관직에 나갈 길을 줄 것과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또한 평민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환경을 지적하여 평민들에게도 과거를 보도록, 나라에서 서당에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장중거와의 논쟁
박지원과 동시대 인물인 장중거(張仲擧) 역시 세상을 풍자하던 인물로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세상의 부조리를 풍자하고 조롱하기를 좋아했으며, 양반들의 무위도식을 계속 지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고 친구들 사이에도 비방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박지원만은 장중거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장중거를 상대했다. 장중거를 미워하는 사람 중에 그를 감옥에 넣으려는 자가 있자, 이 사실을 안 장중거는 '내가 아마 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모양이다'라며 세상을 피해 숨었다. 누구 보다 호방하던 그가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고 그들을 멀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세상과 담을 쌓고 집안에서 틀어박혀 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장중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을 깨끗이 쓸고 문을 닫아걸고는, 크게 '이존'(以存)이라는 글씨를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이존은 주역(周易)의 “용사지칩 이존신야(龍蛇之蟄 以存身也)”에서 따온 말로 그 뜻은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라는 의미이다. 뱀이 겨울의 혹한을 피해 또아리를 틀고 칩거하며 겨울잠을 자는데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서 장중거는 자신이 살아 나갈 방도를 구하고자 했다. 장중거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찾아오자 '자네들은 그만 물러가라. 나는 장차 내 몸을 보존하려고 한다.'며 친구들을 내쳤다. 장중거가 '이존'의 삶을 산다는 말을 들은 박지원이 하루는 장중거를 찾아갔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장중거를 본 박지원은 그를 향해 기나긴 충고를 내뱉었다.
“중거가 몸을 보존하려는 방법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화를 피하기는 어렵겠구나. 비록 독실하고 경건했던 증자(曾子)도 평생토록 외우며 실행한 것이 어떠했는가. 항상 하루아침 하루저녁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듯이 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러서야 손발을 살펴보게 하고 비로소 그 온전히 살다가 돌아감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더더구나 일반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한 집을 미루어 한 지방을 알 수 있고 한 지방을 미루어 온 세상을 알 수 있다. 온 세상이 저와 같이 크나, 일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거의 발을 용납할 땅조차 없을 지경이다. 하루 사이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스스로 살펴 보면 실상은 요행히 살고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제 중거는 세상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밀실에 칩거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 자기 몸 안에 있음을 모르고 있구나. 비록 발자취를 멈추고 그림자를 감추어 스스로 옥살이처럼 살지만 이는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분노를 모으기에 족할 뿐이니, 그 몸을 보존하는 방법이 서투르지 아니한가.
이제 중거의 과실은 술에 있는데,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잊지 못하고 몸 보존할 바를 생각한 나머지 찾아온 손님들을 사절하고 깊이 숨어 살며, 깊이 숨어 사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데 부족하게 되자 또 함부로 스스로 ‘이존’이라는 당호를 써서 남들이 보게 걸어 놓으니, 이는 술에 몸을 피한 유백륜이 자기 묻을 삽을 짊어지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박지원은 장중거에게 세상을 바꾸려고 마음먹었으면 뜻한 바대로 행동하면 되지 숨을 이유가 무엇이냐며 질타하였다. 장황한 박지원의 충고를 들은 중거는 두려워하며 한참 있다가 '그대의 충고가 맞다면 나의 팔 척 몸을 일으켜 어디로 던진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장중거에게 좀더 세상에 초연하고 담대하게 임할 것을 촉구했다.
“나는 그대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리 천지가 크고 바다가 넓다지만 그 눈구멍이나 귓구멍보다 더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치가 그러한데 그대가 이 속에 숨기를 바라는가?
마음은 귀와 눈에 비해 더욱더 넓고 크니,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마음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내 몸의 전체와 큰 쓰임이 진실로 가슴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장차 어디로 가든지 보존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끝가지 들은 장중거는 박지원의 충고에 손을 내저으며 '그대의 말은 내가 내 몸 안에 몸을 숨기고, 몸을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보존하게 하고자 하라는 충고라 보네, 그러니 내가 감히 내 몸을 보존하라는 말을 벽에 써 붙여서 돌아보고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며 거절하였다. 결국 장중거는 박지원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박지원은 그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라며, 그러한 사람은 용케 자신의 몸을 보존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결코 바꾸지는 못한다며 한탄했다.
과농소초(課農小抄) (1798년)
1776년 정조 때 여러번 학행과 문장력으로 추천되었지만 번번히 사양하고 고사하였다. 이후 여러번 천거되었는데도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집안과 주변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정조 10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7월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었다. 그는 옷소매를 줄이고, 군사훈련을 하고, 정병을 양성하며, 군사물자 비축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해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부인 이씨의 죽음을 애도한 절구 20수를 지었지만 실전되었다. 이후 재혼과 첩을 두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혼자 지냈다. 이어 형 박희원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형을 보내면서 쓴 시 '연암에서 돌아간 형님을 생각하고 (燕巖億先兄)'를 보고 친구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 한다.
1787년 정조의 명을 받아 춘추관기주관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全)》 편수에 참여하다. 이때 박지원은 우암 송시열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성토한 대목에 오해를 살 만한 뜻이 있다고 보고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하였다.
1788년(정조 12년) 전염병이 돌았다. 그해 며느리 덕수 이씨가 전염병에 걸려 의원을 불러왔지만 효험도 없이 죽고, 아들 박종의도 위독했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가족들과 하인, 주변인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후처를 얻거나 첩을 얻으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해, 반송방의 집을 처분하고, 그때마침 사촌 동생 박수원이 선산부사로 부임하면서 계산동 집을 빌려서 생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