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들에게 조반을 차려 주시고는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나 베드로 답한 사랑은 필레오(φιλέω)다. 예수께서는 아가파오(ἀγαπάω)로 묻었는데 베드로 필레오(φιλέω)로 답했다. 주님은 세 번째 물음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필레오(φιλέω)로 묻으셨다. 그러면 아가파오(ἀγαπάω) 사랑과 필레오(φιλέω)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ἀγαπᾷς)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φιλῶ)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ἀγαπᾷς)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φιλῶ)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φιλεῖς)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φιλεῖς)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φιλῶ)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아가파오(ἀγαπάω, 25)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대부분 아기파오(ἀγαπάω)다.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요 17:24)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7~12)
필레오(φιλέω, 5368)
필레오(φιλέω)는 ‘친구’를 뜻하는 단어 필로스(φίλος, 5384)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입 맞추다’, ‘좋아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가룟 유다가 입 맞출 때(눅 22:47, 마 26:48)나,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한다(마 6:5) 할 때 사용되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주 쓰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아들을(요 5:20) 친히 사랑하셨다(요 16:27) 하실 때와 또 아비나 어미를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 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다(마 10:37). 이 사랑은 본디 우정에서 비롯된 사랑이므로 ‘비밀’과 ‘친밀’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베드로는 그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필레오(φιλέω)로 답한 것은, 주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기 때문이다. 마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처럼 말이다. 전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하였지만 나중에는 주를 부인하고 말았다. 그러니 베드로가 주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예수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사(φιλεῖ)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여 주셨다고 했다(요 5:20). 주님이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니까 아버지가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요 8:27~30). 하나님의 친밀함이(쏘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고, 그에게 그의 언약을 보여 주신다 한 것처럼 말이다(시 25:14). 여기서 “친밀함”은 히브리어로 ‘쏘드’(5475)라 하는데, 이는 ‘우정’(욥 29:4~5)이나 ‘교통하심’(잠 3:32~33)을 의미한다. 본래는 ‘비밀스런 얘기를 나누는 회(會)’(암 3:7, 렘 23:18~22)란 뜻이다. 하나님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구와 사귐을 갖고 있는 사이를 “동무”(몬 1:17, 고후 8:23)라 하듯이, 하나님의 친밀함을 가진 이가 곧 하나님의 우정을 지닌 자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2~15) 하셨다. 친구는 숨길 것이 없는 사이이므로, 주님은 “내 친구 너희에게”(눅 12:4)라 말씀하신다. 친한 친구의 친밀함은 형제애보다 낫다고 했고(잠 18:24),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잠 17:17),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파오(ἀγαπάω)인데,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자 한다면 필레오(φιλέω)를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