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사자 보기 전에 먼저 죽을 결심부터 하라”
농기구는 풀무질 담금질 적당히 해 만들지만
보검은 수만배 더 거쳐야 비로소 만들어져
싯다르타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해 보라
좋은 스승 만났으면 절대 물러서지 말라
반드시 시험 통과해야만 진불을 보게 된다
미얀마 바간 쉐지곤 사리탑 아래에 있는 황금사자. 설마 이 사자를 상상하지는 않겠지.
강설
불교공부의 목적은 해탈 열반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수행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체득하고 아울러 정법으로 지도하여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마치 범이 산에 있는 것처럼 여법하고 당당하다.
반대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한다고 해서 입만 열면 영험과 복 받는 것에 대해 해가 기울도록 떠들면서 영험한 곳 찾아다닌다며 섣달그믐에 이르도록 대중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면, 이는 우리에 갇힌 원숭이가 온갖 재주를 부려도 결국 갇힌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과 같아서 해탈할 수 없다.
자기 안에 부처의 성품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좋은 스승과의 인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모진 시험이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최고의 자비임을 알아서 끝까지 잘 견뎌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농기구는 풀무질과 담금질을 적당히 하여 만들지만, 보검은 수만 배도 넘는 풀무질과 담금질을 거친 후에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농기구나 보검이나 모두 쇠로 만들지만, 두들기는 횟수에 따라 이처럼 달라진다. 만약 자신이 부처와 동등한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면, 싯다르타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해 보라. 특히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는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진불(眞佛)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석가가 평범한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그저 자기 분상에 딱 맞는 허깨비나 쫓아다니느라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옛 선지식들의 언행을 유심히 살펴야만 한다.
운문 문언선사(雲門文偃禪師, 864~949)는 어릴 때 지징율사(志澄律師)의 제자가 되어 율장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불법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자 황벽(黃檗)선사의 제자인 목주(睦州)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목주스님은 그를 보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문언스님이 열심히 문을 두드리자 목주스님이 물었다.
“넌 누구냐?” “문언입니다.” “무얼 원하느냐?” “참 성품을 깨닫고자 가르침을 받으려 합니다.”
목주스님이 문을 열고 힐끗 보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문언스님이 이틀간 계속 청했으나 거절당하다가 사흘째 문을 열어 주자 곧바로 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목주스님이 멱살을 잡고 “말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데, 문언스님이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밀어내며 세차게 문을 닫았다. 그 바람에 미처 나오지 못한 문언스님의 한쪽 발목이 부러져 버렸다. 그 순간 시원한 경계를 맛보았다.
이윽고 목주스님의 소개로 설봉스님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운문스님이 설봉스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잠꼬대 하지 마라!”
운문은 예배하고 물러나 줄곧 삼년을 지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설봉스님이 불러 물었다.
“자네 요즘 생활이 어떤가?”
“예전의 모든 성현들과 더불어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훗날 운문산에 30여년 머물며 지도하였고, 그로 인해 운문선사라 한다.
본칙 원문
擧 僧問雲門 如何是淸淨法身 門云花藥欄 僧云便恁去時如何 門云金毛獅子
화약란(花藥欄) 작약, 모란 등의 꽃밭을 에워싼 울타리. 약초밭 울타리.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선사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청정한 법신입니까?”
운문선사께서 답하셨다. “약초밭 울타리지.”
그 스님이 여쭈었다. “곧 그렇게 갈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선사께서 답하셨다. “금빛 털 사자니라.”
강설
“어떤 것이 청정한 법신입니까?” 이 질문을 던진 스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했을 것이다. 말로는 무수한 설명을 들었지만 뻥 뚫리지 않는 최후의 관문 때문에 수행자는 목숨을 건다. ‘자성청정’이니 ‘진여’니 ‘깨달음의 경지’니 하는 용어는 웬만큼 공부하면 다 아는 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수행자는 천하의 운문선사를 찾아서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약초밭 울타리지.” 선사의 답은 한편으로는 매우 자상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함정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웬만큼 걸어본 사람은 덕수궁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떠들 것이다. 그는 덕수궁의 담 모양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말할 것이고, 담 주변의 풍경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얼핏얼핏 보이는 대문 너머의 대궐지붕 등에 대해서도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덕수궁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일까?
이미 첫 번째 답에서 모든 것을 밝혔지만 질문자는 가다가 만 모양이다. 그래서 두 번째의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갈 때는 어떻습니까?” 선사께서 참으로 친절하게 답을 해 주셨다. “금빛 털 사자니라.”
덕수궁 돌담길 천만번 걸었다고 자랑하지 말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고 자랑하지 말라. 다 둘러봤다고 자랑하지 말라. 임금의 의자에 앉아 봤다고도 자랑 말라.
자! 그럼 어떻게 해야만 할까? “금빛 털 사자니라.”
송 원문
花藥欄 莫 星在秤兮不在盤
便恁 太無端 金毛獅子大家看
만한() 얼굴이 아주 큰 모양. 아주 자만하는 모양.
성(星) 저울의 눈금.
송 번역
약초밭 울타리여! 자만하지 말라.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접시에 있지 않다.
곧 그렇게 라니? 한참 어긋났구나.
금빛 털 사자를 그대들은 보라.
강설
설두스님은 운문선사 특유의 언행을 잘 꿰고 있다. ‘약초밭 울타리’라고 답한 운문선사의 눈은 결코 ‘약초밭 울타리’를 보고 있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사람들은 운문선사의 절절한 자비를 잘 모른다.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멋대로 말들을 한다. 이런 이들에게 “아는 체 자만하지 말라!”고 설두 노인이 주장자를 날렸다. 하지만 설두 노인네도 참 자비가 넘친다. 한방 먹인 뒤엔 곧바로 자상하게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물건을 담아서 저울에 다는 접시에 있지 않다”고 충고를 하는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앞 구절에 정신 차렸다가 뒤의 구절에서 옆길로 빠질 수도 있으니까.
운문선사가 자상하게 답해 주었으나 수행승은 여전히 도중의 얘기를 하고 있다. “곧 그렇게 가면(알면) 괜찮겠습니까?”라고 묻다니. 여기에 다시 설두스님의 노파심이 작동했다. “한참 어긋났구나.” 어떻게 어긋났는지를 바로 봤다면 아마도 금빛 사자를 보았겠지.
운문선사는 동쪽의 일을 묻는 수행자에게 서쪽의 얘길 해 주고 있다. “황금빛 사자니라”고 답해 주다니, 참으로 친절도 하시지. 설두노인의 노파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백수중의 왕인 사자, 그 사자들 중의 왕인 금빛 사자를 직접 보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이 노인네가 한 가지 쓴 소리를 빼 먹었다. ‘금빛 사자를 보기 전에 먼저 죽을 결심부터 해야 한다’는 한 마디를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