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3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Whoever has my commandments
말씀의 초대 바오로가 앉은뱅이의 믿음을 보고 그를 고쳐 준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그를 우상처럼 숭배하려고 하자, 바오로는 소리를 치며 자신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서도록 복음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밝힌다. 거짓 예언자는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하지만 바오로는 오로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제1독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은 입술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에서 드러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부부가 서로 닮는다고 하지요. 특별히 금슬이 좋고 사랑이 깊은 부부일수록 더욱더 닮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고 싶고, 늘 함께 있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면 함께 기쁘고, 슬퍼하면 같이 슬프고, 아파하면 그 고통이 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을 수밖에 없지요.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곧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분의 당부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와 같습니다.
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노신사가 기차에 올라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바로 옆자리에 여행용 가방을 올려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못 앉게 함으로써, 편안히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기차가 막 떠나려 할 때, 한 형제님이 같은 찻간에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노신사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노신사는 자기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자리가 있어요. 내 친구가 곧 올거요.” 이 형제님께서는 실망하셨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급하게 뛰어오느라 힘들어서 그렇거든요. 그럼 그 친구 분이 오실 때까지만 앉아있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가방을 그의 무릎에 놓고 노신사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그때 열차가 떠나려는 기적이 울리고 열차는 스팀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형제님께서는 갑자기 가방을 번쩍 들어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노신사는 깜짝 놀랐지요. 그러면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고 형제님께 따졌습니다. 이에 형제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세요. “친구 분이 늦으셨어요. 기차를 놓쳤으니 가방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드려야지요.” 편하게 가려고 거짓말을 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지요. 우리 역시도 나의 편함을 위해서, 또 나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우리들은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떨까요?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신사처럼 뜻밖의 어려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곤 합니다. 즉, 하느님과 멀어지는 행동들을 끊임없이 하지요. 이러한 행동들로 과연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결국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헛된 것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대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가정을 원만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한 나라를 통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몽테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양승국신부-
<그분을 알면 알수록>
사고뭉치인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아직 어린데도 도벽, 가출, 흡연, 음주, 폭력성...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음료수를 한잔씩 마시면서, 도대체 왜 인생 그렇게 사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의 지난 삶에 대해서, 가족들로부터의 버림받음에 대해서, 가슴깊이 아로새겨진 진한 상처에 대해서,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때 마다 부딪쳤던 한계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참으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녀석인데, 지난 삶으로 소설을 몇 권 쓸 정도였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 그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지니고 있는 깊은 상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파악하게 되니, 그 아이는 더 이상 미운 존재가 아니라 측은한 존재, 그저 토닥거려 줘야할 가련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아이의 그릇된 행동 앞에서도 미워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감싸주고 더 많이 사랑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아났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합니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려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군지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면 알수록, 그분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가르침과 계명에 더 충실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이해하고,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될 때, 우리 삶은 지금 보다 훨씬 더 당당해질 것입니다. 그 어떤 열악한 외부환경에도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십자가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하니 기쁘게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보여주는 이유 -전삼용신부-
며칠 바쁘다가 컴퓨터를 오랜만에 켜니 영화배우 설경구씨와 송윤아씨의 결혼 발표기사가 나서 읽어보았습니다. 송윤아씨는 유명한 신부님도 계신 천주교 집안 딸이고 설경구씨는 제가 알기론 결혼 했다가 이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설경구씨가 신자도 아니었고 교회에서 혼인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송윤아씨와 성당에서 혼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송윤아씨는 설경구씨의 한결같은 모습에 믿음과 사랑이 커져갔다고 했습니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설경구씨가 일기 형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은 사랑의 노트를 써서 한 권이 다 써지면 그것을 송윤아씨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벌써 자신의 마음을 담은 러브노트가 5권이 넘었다고 합니다. 설경구씨가 지극정성으로 송윤아씨의 마음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송윤아씨도 처음엔 설경구씨가 선배일 뿐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었지만 이런 정성에 마음을 준 것 같습니다. 설경구씨가 사랑의 노트를 쓰게 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도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송윤아씨가 첫 번째 노트부터 읽고 설경구씨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조금씩 지쳐가서 설경구씨도 다섯 권까지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일기를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관계는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더 자신을 보여주면서 더 깊어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셔서 아드님을 통해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지는 못합니다. 다 보여주시기는 한 것이지만 볼 수 있는 눈을 모두에게 주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실까요?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즉, 당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아버지도 알게 하실 것인데, 당신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당신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받아들여지는 만큼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여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처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 정말 당신이 불러주시는 것인지 확신을 가지고 싶어 당신을 좀 보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무리 청해도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먼저 성소를 받아들이고 신학교에 들어 간 이후였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보여주시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지를 시험하십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먼저 따르고 나서부터이지 그 분을 보고 나서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의 사랑을 키워주십니다.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더 슬픈 일은 하느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그 분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줍시다. 그러면 그 분은 당신을 더 많이 드러내 보이실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을 더 알아가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사랑이 필요했던 쪽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 봅시다. 그 분은 그만큼 당신을 더 알고 사랑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사랑함으로써 더 행복해집니다.
일념으로 -김찬선신부-
리스트라에 온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율법과 교통 신호등 -손우배 신부-
우리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매우 소중하게
성장하는 사랑 - 김태훈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며 마음 한편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못 된다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애쓰지만 자주 나약함에 져서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는 저를 위로해 줍니다. 21절에 나오는 ‘지키다’의 일차적 의미가 ‘준수하다’는 뜻보다 ‘보존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다.’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실천하는가보다 우선적으로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가 예수님의 일차적 관심사이고, 그것이 우리 사랑의 첫 번째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들음 -이정민 신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목소리에
`말씀` 대로 살라 - 이흥우-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보신 것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전해 주셨다. 그것은 곳간의 열쇠도 보물지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해졌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은 마치 이솝 우화 같은 동화를 떠올린다. 성경을 너무 글자에 맞춰 경직되게 읽으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 그대로 전달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원장님, 안 그래도 일손이 많이 부족하실 텐데, 저희 아이들 너무 많이 보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양승국신부- <감사합니다,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 며칠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요셉 의원 선우 경식(요셉) 원장님께서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실려 가셨고,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다고, 기도해달라고... 불과 한 달 전, 요셉의원 후원자, 봉사자 피정 강사로 초대해주셔서 뵈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되어 병원에 자주 나올 수 있어 행복하다며 환하게 미소 짓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오늘은 영정 사진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남아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영안실에는 대통령님을 비롯해서 국무총리님, 추기경님들, 각계각층의 요인들이 보낸 화환으로 빼곡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분들의 추모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요셉 원장님은 이제 떠나셨는데, 더 이상 우리 곁에 안계신데... 개인적으로 저는 요셉 원장님 신세를 톡톡히 진 사람입니다. 제가 하고 있던 일의 성격상 길거리를 떠돌던 아이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날락하던 청소년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체면불구하고 아이들을 요셉의원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화려한 영등포역을 뒤로하고 을씨년스런 골목길로 접어들면 보기만 해도 정겨운 요셉의원 간판이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곳은 마치 훈훈한 벽난로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들어설 때 마다 늘 들었던 느낌은 편안함이었습니다. 따뜻함이었습니다. 환대받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곳에서는 늘 문전박대 당하던 가난한 이웃들도 제 집 드나들듯이 당당히 출입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 모든 것 보다 더 좋았던 것 한 가지는 요셉 원장님께서 그곳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요셉 원장님, 돌아보니 참으로 자상했던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고왔던 분이셨습니다.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늘 무엇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지난 달 후원자 봉사자 피정을 마치고 요셉의원을 나오던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원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점심 식사 때,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뭘 그리 이것 저 것 꼼꼼히 챙겨 주시던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차 가지고 오셨냐? 차 가지고 오셨으면 아이들 먹을 것 좀 실어드릴 텐데, 다음번 오실 때는 꼭 트럭 몰고 오시라, 그래서 좀 실어가시라고. 열차 시간에 쫓겨 황급히 뛰어가는 제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시더군요. 빨리 들어가시라고 손짓해도 계속 거기 그렇게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끝이군요. 요셉 원장님. 너무나 아쉽습니다. 요셉 의원은 한 마디로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떠도는 환자들을 위한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세탁, 목욕, 무료급식 등이 함께 이루어지던 참 교회였습니다.
더욱 저를 기쁘게 한 일 한 가지가 그곳은 한마디로 ‘나눔의 교차로’였습니다. 원장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에 따르면, 생필품이나 의류, 식료품 등을 기증하겠다는 전화가 오면, 일단 사양하지 않고 모든 물품들을 접수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분류작업을 하고 잉여 분량에 대해서는 즉시 보다 가난한 시설이나 단체와 나눠 쓴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을 요셉의원에 보내곤 했기에, 그래서 원장님께 끼친 민폐가 만만치 않았기에 한번은 제가 인사치레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원장님, 안 그래도 일손이 많이 부족하실 텐데, 저희 아이들 너무 많이 보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 하신 원장님의 말씀은 정말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 그런 말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저희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 저희 병원에 안 오면 저희 병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 닫아야 합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아이들 많이 보내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사랑의 계명 준수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랑의 계명에 충실한 삶인지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요셉 원장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실천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통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것이 천상에 계신 요셉 원장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겠지요. 지난번 요셉의원 후원자 봉사자 피정 강의 갔을 때 제가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곳 요셉의원에서 봉사하시고, 또 이곳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시는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오시는데, 첫 번째 모습이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입니다. 이곳을 찾는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은 예수님의 또 다른 얼굴이 확실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고통이란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곳 요셉의원에서는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얼굴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만 들어서면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곳 요셉의원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현존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들의 작은 나눔과 봉사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봉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흐뭇한 얼굴로 별로 영양가 없던 제 강의를 듣고 계시던 원장님의 얼굴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셉 원장님. 이제 더 이상 통증도, 과로도 없는 천국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천지차이인 사랑 사랑 박사인 요한의 복음은 늘 우리로 하여금
새벽을 열며
작년 12월, 간석4동 성당에 부임한 뒤에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왜 이렇게 일들이 저를 좋아하는지……. 이것저것 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던 것도 상당히 많았고, 그리고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여유를 가지고서 다시금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그럼으로써 재충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 -김동하 신부 - 하늘에 맞닿은 달동네에는 아직도 사람내가 물큰합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변소’에서 나는 냄새, 간간히 어른들 싸우는 광경. 달동네 사람들이 버거우면서도 올망졸망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도 가깝지만 이웃이 지척이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하늘을 배운 터라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싸울 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법도 훤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내 몸의 자리를 내놓고 내 마음의 자리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라면 반은 내놓아야 하고 셋이나 넷이라면 나를 삼등분 사등분하여 두 몫이나 세 몫은 내놓아야 합니다. 많이 모이면 모인 만큼 내놓아야 하기에 내 자리는 작아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자면 전부를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부이신 분이고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1,21참조). 하늘이신 예수님께 배우고 이웃이신 예수님과 부대낄 수 있다면 그분의 향기는 우리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계명 실천으로 - 송제호 신부 - <독서강론> :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사랑은 움직이는 것 -노성호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율법의 준수를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65가지의 금령과 248가지의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가지의 율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많은 율법 조문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하고 말씀하시면서 수많은 율법 조문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배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시려고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움직여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양승국신부-
<꽃피는 봄이 오면>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마치도 한권의 서정적인 시집을 읽고 난 것 같이 머릿속이 환해져오고, 또 길고도 잔잔한 여운이 남더군요.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는 관현악단 오디션에서 거듭 고배를 마실 뿐 아니라, 떠나가는 사랑도 잡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접은 현우는 강원도 산골 한 중학교 악대부 임시 교사로 가게 됩니다.
낡은 악기, 찢어진 악보, 색 바랜 트로피와 상장들, 전국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악대부, 그러나 현우는 시골 아이들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라면을 끓이는 스승, 그 아이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라면을 먹는 스승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돕기 위해 그렇게 강하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카바레 밤무대까지 뛰는 스승, 가슴 아픈 제자와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스승, 가끔은 엄격함을 버리고 친구처럼 다가갈 줄 아는 센스를 지닌 스승의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또 다시 스승의 날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 세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제가 종사했던 일의 성격상 잘 풀린 아이들보다는 주로 늘 뭔가 꼬인 아이들, 노력해보지만 안타깝게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방황을 거듭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제도 최근 가까운 소년원에 오게 된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편지 한통을 보내왔더군요. 화가 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신부님,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편지를 드리니 정말 창피하네요. 신부님과 함께 했던 살레시오...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네요. 신부님, 보고 싶어요. 예전에 함께 외출하던 기억, 등산가서 한잔 하던 기억, 싸우면서 운동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많이 창피해하는 아이에게 빨리 답장을 써야겠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다. 다 네가 시대를 잘못타고 난 때문이다. 지난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란다. 널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잊지 말거라...”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고마우신 모든 선생님들, 잊지 못할 은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열악한 교육 풍토 안에서 우리 선생님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꼬이고 꼬인 교육제도 아래에서도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으시더군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춤을 배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교안작성에 여념 없는 선생님들, 아이들이 너무 좋아 결혼조차 포기하신 선생님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장학금을 내어놓는 선생님들...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자라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승으로부터 듬뿍 영양분을 제공받은 그 제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사랑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풍성히 나누어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스승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듯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소리 없는 눈물 앞에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 안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요한 14, 21-26)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신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세 번이나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언급하신다.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강요하지는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뜻을 밝히시고 알려주시기만 하신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내가 지키는가 아닌가? 가 그 기준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때 사용한 동사는 희랍어로 "Tereo"(떼레오)라는 단어이다. "떼레오"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돌보다, 보살피다, 지키다, 감시하다, 간직하다, 붙들다, 주시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 계명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조심스럽게 돌보고,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누가 빼앗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지키고 감시하고 붙드는 사람이다. 마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치 애인의 글을 받았을 때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누가 나의 보물을 빼앗가지 않도록 지키고 감시하듯이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말씀)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 105)라고 했듯이 등불이요, 빛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계명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나의 삶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생활했는가 아닌가를 점검하고 충실한 삶이었으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충실하지 못한 삶이 발견되면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교정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생활하니 주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 사랑 받을 일만 하고 사는데 사랑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뜻이나 계획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주님의 계명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즉 무엇을 말하고 행동할 때 주님의 계명을 먼저 생각하고 그 상황에 알 맞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명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실천하려는 생활에서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생활의 등불, 빛으로 삼고 생활하는 데에서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중요성을 두지 않는 사람이며, 무관심한 사람이며, 주님의 말씀과는 아무 관계없이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에 준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즉 삶의 기준이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다. 주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너는 너, 나는 나대로의 삶을 계속해서 살 때 점 점 더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멋대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가볍게 들릴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엄청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차이가 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예수님을 점 점 더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모르게 될 것이고사랑에 굶주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함께 생활할 때 잘 드러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 또는 대화를 할 때는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일이 잘 된다. 말이 통하고 대화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일치되고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생활할 때에는 사사건건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꺼리가 되고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힘들고 일하는 것이 힘들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일치를 이루고 알아듣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치가 안되고 자기 중심으로 일을 하고 말을 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게 된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서로 일치하기가 힘들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짊어져야할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의존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에 바탕을 두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한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려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순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코후 4, 8-11)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 -박상대신부-
우리기 익히 알고 있듯이 유독 요한복음사가만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긴 고별사를 보도한다.(13-17장)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13-14장이 요한복음의 원초적인 고별사에 속하고 15-17장은 추가로 편집된 것으로 주장한다. 요한복음 21장이 추가로 편집된 것과 같이 15-17장도 요한복음 공동체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후에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5-17장은 13-14장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14,21-26)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행하신 기나긴 고별사(13-17장)의 원초적인 첫 부분(13-14장)에 해당된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김(1-11절), 발을 씻겨줌의 의미(12-20절), 유다의 배반예고(21-30절), 새계명 선포(31-35), 베드로의 장담과 배반예고(36-38절 끝) 등을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1-14절), 성령의 약속(15-26절), 그리고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27-31절 끝)에 관한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별사를 요한복음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 ② 아들의 자기계시와 정체,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公開)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물론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14,15-26에 한정되는데, 여기에서도 사랑의 계명은 함께 언급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령의 약속과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시선을 오늘 복음(14,21-26)에 집중시켜보자. 우선 예수께서는 사랑의 테마를 재삼 언급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통하여 아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21절) 그런데 11제자 중에서 유다 타데오가 예수께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한정하여 나타내 보이려 하는 의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22절) 이 질문은 사실상 불만과 의구심을 담은 질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가 ’국가·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왜 예수께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는지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의 의도를 비켜간다. 그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세상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 메시아로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적 자기계시는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즉 적어도 제자들에게 한정되는 셈이다.(23-24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들었으며, 듣고 응답하였으며, 응답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그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살아 있는 집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26절)을 통하여 밝혀지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이미 16-17절에 걸쳐 언급되었고, 26절에 다시금 언급되는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요한복음의 특허품이다. 신약성서 전체에 ’성령’이라는 단어는 235번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용도는 ’성령’이라는 단독적인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보도된다. 요한복음사가도 처음에는 이런 맥락에서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32; 1,33; 3,5; 3,8; 3,34; 7,39; 20,22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보도되는 표현은 전혀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다소 ’비인격적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 속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엇’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그분’(14,17)이라는 인칭대명사를 부여하여 하느님의 또 다른 ’위격’(位格)으로, 나아가 ’협조자’,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진리의)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26절) - 병행구절 15,26; 16,13; 16,15 참조. 이로써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본성(本性)을 지니신 제3의 위격, 즉 ’하느님 성령’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주님승천대축일을 일주일 앞두고, 성령강림대축일을 이주일 앞둔 시점에서 오늘 부활 제5주간 월요일에 성령 하느님의 강림에 관한 약속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생명을 부지(扶持)한다면 오늘부터라도 성령강림을 잘 준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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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의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