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2일 화요일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수도회]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사랑을 배달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0,1-11
† 복음 마태 18,12-14
◈ 오늘의 묵상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이 구절은 인생의
허무함을 잘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몇 십 년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은 결국 풀같이 말라 버리고 꽃처럼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칠팔십 년의 세월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빠진 듯합니다. “우리가 정성 들여 살았던
날마다의 시간들이 그저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 구절에는 삶의 허무함을 구원으로 이끄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날마다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의 시간들이 하느님의
말씀 속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얻게
됩니다.
양을 키우는 목동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얻는 기쁨이 크다고
합니다. 길을 잃지 않은 다른 양들은 안전하고 풍성한 초원에서 은총의
풀을 뜯고 있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안전한 양들은 하느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들을 표상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는 구원이
위태로운 한 영혼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만큼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세주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구원의 빛은 매우 하찮고 허무한 일들 속에서 솟아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작은 이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전 세계적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수는 매년 약 1,000만 명이며,
약 5,000만 명이 교통사고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하더군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러한 생각을 혼자서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로 로봇이 운전을 한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지요. 프로그램에 따라 운전을 하면, 과속이나 신호위반 등
교통법규를 잘 준수할 것이고 그만큼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그러나 로봇이 운전하면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뒤로 하더라도 과연 더 나은 환경을
만들 것일까 싶습니다. 실제로 미래학자들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무인
자동차가 개발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점점 더 인간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고귀한 인간의
자유를 상실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과거보다 현재가 훨씬 더 풍요롭습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첨단과학 기술이 집약된 기계가 대신하면서 편리함과 유용함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이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서로간의 따뜻한 대화가 사라졌고, 정을 느낄 수
있는 손 편지도 볼 수 없습니다. 그밖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편리함과 유용함을 강조하면서 작은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잊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가치들이 점점 더 무시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너무나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고 느껴지고 남들과 비교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과 또한 직접 보여주신 행동들은 이
세상의 모습과는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으로
하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 봐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습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것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작은
그 하나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하시지요. 왜냐하면 작은이들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점점 더 발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법칙이 더욱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그 마음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작은 이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나누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미치 앨봄).
구유를 만들면서 주님 맞을 준비하듯, 우리 마음 안에도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행복은 Self다(‘좋은 글’ 중에서)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누리고 감사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탐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만들어 가면 그 결과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겁니다. 즉, 행복은 "셀프"입니다. 행복의
씨앗을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은 향수와 같다고도 말합니다. 자신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남에게 향기를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멋진 사람보다는 따뜻한 사람이
되세요. 멋진 사람은 눈을 즐겁게 하지만 따뜻한 사람은 마음을 데워
줍니다. 잘난 사람보다는 진실한 사람이 되세요. 잘난 사람은 피하고
싶지만 진실한 사람은 곁에 두고 싶습니다. 대단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세요. 대단한 사람은 부담을 주지만 좋은 사람은 행복을
줍니다.
행복은 정말로 ‘셀프’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저는 청주교구 금천성당에서 저녁 8시에 대림특강을 합니다.
한파경보가 내렸어요. 추위 조심하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사랑을 배달함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 40,1-11; 마태 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사랑을 배달함
오늘의 제1독서는 제2 이사야서(40-55장)의 도입부입니다. 이 부분의
배경은 다윗왕조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온 바빌론 침공과
유배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도 왕도 땅도 없이
포로가 되어 이국땅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쓰디쓴 빵을 먹고
큰 슬픔 속에 절망하며 실향의 아픔을 겪는 그들의 처지는 비참했습니다.
제2 이사야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유배의 원인이 바빌론의 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하느님을 잊고 율법준수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 근본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오심이 바로
궁극적인 위로요 희망이라고 선포합니다(40,3-5).
제2 이사야는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며 그 주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 그는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이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되돌아감으로써 해방되리라는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하러 오시어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입니다.”(40,11)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해방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비유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양을 빠짐없이 아끼시는 보편적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눈여겨보시며 아껴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분, 나이, 성별, 학식, 지위, 재산 그 어떤 것도
문제삼지 않는 평등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음 내키는대로
사랑하다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큰 죄 중에 떨어거나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더 큰
사랑으로 기다려주시고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리는 그런 사랑입니다. 목자는
문제없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보잘것없어 보이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품어주는 어머니다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견뎌내고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입니다. 목자는 늘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양들을 돌보지요. 목자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길을 잃어버린 양을 탓하지 않고 험한 지형과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찾아나서는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궁극적 이유요 목적인 하느님을 회상해야겠습니다.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시며 영혼의 어둠과 고통을 겪을 때에도
기다려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겠지요.
먼저 다가오시고 내려오시는 주님의 그 움직임으로 우리 서로에게
사랑과 희망과 위로를 배달하는 우체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분노에 더디신 하느님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 18,12-14
분노에 더디신 하느님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무신경으로 황량한 길거리로 나앉게된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한 그룹홈 운영위원회를 다녀왔습니다.
부모로부터,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친척들로부터, 이웃들로부터, 결국
우리 모두로부터 냉동댕이쳐져 살아온 상처투성이의 날들이 가져온
결과는 정녕 참담합니다.
백퍼센트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와 가족들로부터 제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삶은 늘 뭔가 허기와 갈증으로 가득합니다.
사랑은 커녕, 학대와 방임, 무관심과 폭력 등등으로 인해 야기된
애정결핍은 평생 극복하기 힘든 큰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로 인해
나이가 들고, 풍채도 당당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홀로 비맞고
서 있는 상처투성이 아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만 해도 너무 진이 빠지게 하는 한 아이 때문에, 오랜 시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하는 전형적인 문제아였습니다. 저는 그간 아이들과 살아온 제 나름의
경험을 돌아보며, ‘원판불변의 법칙’을 강조하며, 가급적 빨리 신부님·
수사님들, 큰 형들이 우리에게 보내라고 조언을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모님들은, 절대 안된다며, 한번 맺은 인연을 포기할수 없다며,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비장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남겨 둔 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아차!’ 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오 복음 18잘 12~13절)
우리는 너무 쉽게, 대(大)를 위해 소(小)는 당연히 희생되어야
마땅하다고 단정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정도면 충분히 할만큼
했다며 포기하자고 마음 먹습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너무
성급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분노에 더디십니다. 단죄를
꺼리십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성찰해보고 뒤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십니다. 언제나 큰 걸음, 큰 호흡, 큰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빠름을 원하지만 하느님은 바름을
원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 12)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쁨을 만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기쁨이란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길 잃은 우리를 간절히 찾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사랑은 길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실천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실천입니다.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대림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가고 함께 하시기 위해 길 잃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회개는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시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되찾는 행복한 대림시기 되십시오.
사랑 때문에 찾아 나서고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어 오십니다.
새로운 기쁨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착한 목자와 길잃은 양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라고 하시고 나서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착한 목자는 이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이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
이 목자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6-8) 분이시다.
백 마리의 양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모두가 한 몸’
(1코린 12,12-31 참조)이 되려면 모자라는 부분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자라거나 빠진 부분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 또한 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냉대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실 만큼 기뻐하신다. 그것은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신분의 귀천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들이,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를 한다고 하면서도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도록 노력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간 화요일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 18,12-14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면 기장은 출발 전에 안내를 합니다. 승객은
전원 탑승하였고, 비행기는 곧 출발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활주로로 향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비행기에
탑승을 했지만 4시간 동안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기장은 몇 번씩
양해의 방송을 하였습니다. 승무원들은 간단한 간식을 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동화책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를 탓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승무원에게 불평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시간이 늦어지기에 또 다른 곳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다리면서 뉴스를 검색하기도 하고,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책 한권은 가지고 탑승을 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책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기다림이 오히려
마음의 양식을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기다림’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기다림은 약속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을 기다리게 만든 약속을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씨처럼 그들 속에서 역사 하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시작된
일을 기다릴 때에만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결코 무에서 유로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어떤 것에서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가는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주어진
약속이 없다면 우리의 기다림이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주신 약속이 있으며
우리 각 개인 개인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모든
것을 이겨내며 그 때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둘째,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기다림을 매우 수동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기다리는 사람의 수동성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있는 그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어떤 모양이든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으며 기다린다면 그것은 이미 심기어졌으며
자라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의 비결은 씨가
땅에 심기어졌다는 믿음,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입니다. 능동적인
기다림이란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을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대림시기에 3가지를 묵상합니다.
첫째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둘째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바른 길을 가고자 노력합니다.
셋째는 지존하신 주님께서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심을 묵상합니다.
그 거룩하신 분께서 저렇게 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먼 옛날에 오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모시기에 우리는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나가 소중하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12일 대림 재2주간 화요일 (마태18,12-14)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 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보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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