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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성전을 지어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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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5 04:52
- 성전을 지어라!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오늘 하까이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독려하면서 성전을 짓기보다 자기 집을 먼저 잘 짓고 사는 백성을 나무라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자랑스러운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성당이 아니라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우리 공소 신자들은
공소 회장님을 중심으로 스스로 성당을 짓고 신부님을 모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없던 시절 저희는 성미 곧 성당을 짓기 위한 거룩한 쌀을 모아,
땅을 사서 같이 농사지어 그 쌀로 더 큰 논을 사고 그렇게 건축기금을 마련했고,
성당을 지을 때도 어른들은 물론 어린 저희도 학교가 끝나면 벽돌이라도 나르며
사제의 도움이나 외부의 도움 없이 몸소 성당을 지은 자랑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진정 그랬습니다.
오늘 하까이 예언자가 나무라는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저희는 자기 집은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어도 주님의 집만은 잘 지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제가 부유해지면서 나의 공간을 소유하고 잘 꾸미면서
주님의 집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있을 곳은 더 이상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 나의 집, 나의 방이 되었고,
내 마음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아니라 나뿐인 내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집이 아닌 자기 집은 자기만의 공간(Privacy)이 되었고,
이웃과는 담을 쌓고 사는 단절의 공간이 되어 자연 공동체는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간 개인주의가 요즘처럼 고립의 정신이 지배하는
혼밥, 혼술, 혼족 시대엔 점차 공간 이기주의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짐작하시듯 공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공간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공간 이기주의자가 시간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자기를 위한 시간만 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이런 저에게 하까이 예언자는 다시 주님의 집을 지으라고 예언하고,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고도
이제라도 주님의 집을 다시 짓기 시작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성전 건물이 아닙니다.
나의 벽과 집을 허묾으로써 이웃과 함께하는 주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주적 형제애로 인간 중심주의를 허묾으로서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
피조물과 함께하는 우주적 공동체인 주님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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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우정의 여정’
“회개와 겸손, 찬미와 감사, 경청과 순종, 섬김과 배움”
“춤추며 주님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시편149,3)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인생을 성찰하는데 참 좋은 거울이, 교과서가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형제자매들에게 환기시키는 진리가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 늙게 되고 죽게 됩니다. 생노병사에서 벗어나 영원히 젊게 건강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일일일생, 내 삶을 하루로 압축할 때, 아침 6시에 기상과 동시 태어났다 생각하고 오후 6시 해가 지면서 죽는다 예상할 때 지금 내 삶의 시점은, 또 일년사계, 내 삶을 일년으로 압축할 때, ‘봄-여름-가을-겨울’중 지금 내 삶의 시점은 어디에 위치해 있겠느냐?‘ 는 물음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고마운 날이요, 이런 진지한 물음이 오늘 지금 여기서 허상이나 환상, 허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수확의 계절에 하나 더하여 <감사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인생 가을에 속한 경우라면 특히 유념하고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삶은 늙어가는 <노화의 여정>임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주님을 닮아 익어가는 <성화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 중심의 우정의 여정이요, 더불어 형제들과의 우정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날로 사랑과 신뢰도 깊어지고 거룩해 지는 관계의 성화의 여정이자 우정의 여정인지 자주 자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분별의 지혜요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하느님을 으뜸 자리로 놓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어제부터 주품종인 신고배의 수확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크고 환하게 익은 황금빛 배들을 볼 때 최고의 농부이신 하느님의 은혜에 저절로 경탄하게 됩니다. 27년전 <원숙(圓熟)>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가을 열매들은 태양의 자식들
배, 사과, 복숭아, 호박,...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25.>
새삼 둥근 태양 아래 ‘둥글둥글(圓;원)’ 황금빛 찬란하게 ‘익어가는(熟;숙)’ 배 열매를 보면서 원숙(圓熟)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순간 까맣게 잊었음을 깨닫습니다. 햇빛, 공기, 물, 흙 모두가 하느님의 공짜 무상의 선물입니다. 이들 하느님의 선물들은 하느님의 것이자 모두의 공동소유임을 깨닫습니다. 복된 가난을 노래한 <들꽃 같은 삶>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살아 있음이 찬미와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물주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들
무리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 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인류가 하느님께 진 무한한 사랑과 은혜의 빚이 참으로 큽니다. 이들 무상의 선물을 독점하지 말고 골고루 나누며 살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들을 아껴쓰며 햇빛도 공기도 물도 흙도 오염되지 않도록 깨끗이 돌봐야 함을 깨닫습니다.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하느님 주신 천연의 선물을 낭비하고 무수한 쓰레기들로 자연을 오염시키는 죄가 참으로 큽니다. 하느님 중심의 우선순위를 새로이 하는 생태적 회개가 절실한 때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우정의 여정에 반드시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기본적 핵심 요소들이 있습니다.
1.회개와 겸손입니다. 하느님 앞에 진정한 회개 없이는 겸손도 없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요, 지혜와 자비입니다.
2.찬미와 감사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은혜를 알게 되면 저절로 찬미와 감사가 뒤따르며, 함께 하는 이웃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3.경청과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순종이요 이웃에도 이런 자세가 됩니다.
4.섬김과 배움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의 섬김과 배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웃에게도 이런 삶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둔 하느님 중심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하까이 예언자가 주님의 집을 우선 지어야 한다는 것도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데 있음을 봅니다.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듯 그 가시적 중심은 주님의 집인 성전입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우선순위는 회개의 실천으로 하느님 중심의 회복을 위해 성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오늘 복음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의인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전전긍긍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헤로데 영주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중심을 잃어 버렸을 때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고 약해지고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무질서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지면, 부패하면 아무도 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야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이기에 이런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먼 인생이 될 수 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우이독경의 벽같은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중세의 대 영성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에 공감합니다.
“코헬렛의 삶에 대한 전적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the highest wisdom)’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는 궁극의 결론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the service of God)에 유일한 우선성을 두기 때문이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지혜의 원천이자 생명과 빛, 사랑의 하느님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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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소문으로만 듣던 당신을 봅니다.
깨지고 부서진 아픈 이들, 작고 가련한 이들, 무능하고 힘없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어쩔 수 없어 힘없이 쫓겨 제 곁에 몰려와 있는 이들,
이들이 바로 당신입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제 곁에 와 계시고,
제 안에 숨어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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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적에 배운 동요가 하나 떠오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김 사랑.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박 장군. 그 이름 씩씩하구나.”
이 노래는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단순한 노래이지만, 사실은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묻는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상대방에게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도 자신을 괴롭히는 이에게 묻습니다. “넌 누구냐?”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했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으며,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스스로와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답하려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유혹에 흔들리고, 시기와 질투로 상처받으며, 병들고 죽어야 하는 나약한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 속에서 묻습니다. “왜 우리는 끌려왔는가? 왜 성전이 파괴되었는가? 왜 신앙은 꽃피우지 못했는가?” 그 답은 하느님께 무심하셔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회개를 기다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은 눈물 속에서 잘못을 성찰했고,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실천했습니다. 그 회개와 눈물이 결국 하느님의 자비와 만나 꽃을 피우게 되었고, 마침내 페르시아 왕의 은총 속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여도 하느님을 잊은 삶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는 것처럼 헛될 뿐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회개는 하느님을 향할 때만이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권력이나 명예,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에게 넘칠 만큼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이에게야 필요하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헤로데는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가진 것, 집착하는 것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간학적이고 동시에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지만, 동시에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약한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척도는 허무 속으로 사라집니다. 결국 인간은 질문 속에서 자기 한계를 발견하고, 그 한계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질문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답을 얻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는 주님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밝혀집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묻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이름, 권력, 재물은 잠시 빛나다 사라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참된 정체성을 찾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우리의 삶을 사랑의 계명 위에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멍 난 주머니가 아니라, 열매 맺는 밭이 될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끝까지 빛과 온기를 나누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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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평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한 "친절함"(nice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4일 수요일- 서른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비폭력의 삶에 투신하기
우리는 대부분 괜찮은(nice) 사람이길 바라지만, 때로는 그런 바람은 불편함을 피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백인으로서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로 일하는 엘르 다우드 목사(Minister Elle Dowd)는 평화 조성자가 되는 것이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을 던집니다.
우리 백인들은 우리 자신이 괜찮은(친절한)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너무 종종 이 "괜찮음(혹은 '친절함')"은 내 편리함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친절함"이 우리의 위안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통제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젊은 흑인들을 보며 그들이 친절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백인들은 병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어찌하여 저들은 친절하지 않은 거야?" 라는 불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괜찮음" 혹은 "친절함"을 가치 있게 여긴다고 말합니다만, 이런 종류의 괜찮음(친절함)은 참된 친절함이나 동정심이나 동반(accompaniment)이나 자기-희생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다른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그리스도의 본보기에도 걸맞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우리 자시을 위해 다른 이들을 침묵하게 하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다우드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는 대신 사회적 긴장을 피하려는 욕구를 가짐으로써 어떻게 진실을 외면하게 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많은 백인이 비폭력 직접 행동을 진정한 비폭력으로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본질적으로 파괴적(disruptive)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것이 "괜찮지 않게"(기분 좋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흑인들의 이런 직접 행동이 일부 백인들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직접 행동(direct action)을 일상의 흐름과 리듬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사회적 긴장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증폭시키려는 행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긴장은 어제 오늘 생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느닷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의 피붙이들인 유색 인종들에 늘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유색인종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내쳐짐에 의해 생겨난 긴장이 단지 시위나 갈등의 순간에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긴장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긴장은 단순한 감정적 불편함이 아니라, 경제적 불이익, 교육 기회 박탈, 경찰 폭력, 건강 격차 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결과를 동반합니다. 인종차별주의는 강제로 먹이는 독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직접 행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직접 행동은 그 독약을 마시라고 강요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마시기를 거부하고는 그 독약 병을, 그것을 마시라고 강요한 사람들의 문 앞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억압의 현실을 억압의 원인 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그들이 외면해온 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전략적 행동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현실을 응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라는 도덕적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직접 행동은 새로운 긴장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직접 행동은 긴장을 재분배하는 것입니다. 시위나 행동은 그 긴장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외면해온 고통을 표면화하여, 억압의 구조를 유지해온 사람들과 시스템이 그 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긴장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리는 것이지요. 즉, 억압의 원인 제공자—사회 구조, 제도, 권력자들—에게 그 긴장을 되돌려줌으로써, 책임을 묻고 변화의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 특별히 백인들 - 은 긴장을 별로 참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긴장을 피하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편함을 회피하도록 훈련되어 왔고, 긴장이나 갈등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배워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긴장이나 불편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깊이 바라보고 그것에서 배우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긴장을 피하는 대신, 그것을 직면하고 배우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고, 정의와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긴장은 혼란이 아니라, 변화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우리가 긴장을 피할 때, 우리는 그 긴장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명료함과 성장의 기회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적극적인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싸움과 전재에 기반한 언어 사용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언어뿐 아니라 우리의 제도 역시 지배와 전쟁의 은유들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끝내고 싶거나 무너뜨리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관계성과 공동체, 그리고 정의와 존엄성 그리고 신뢰를 향한 길로 문을 열어주는 데 필요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때때로 저는 사랑의 법칙에 따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 서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또 춤을 추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비폭력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실천인 것입니다.)
—Kim V.
References
Elle Dowd, Baptized in Tear Gas: From White Moderate to Abolitionist (Broadleaf Books, 2021), 41–42, 45, 48–4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oa Heftiba,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갈등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관점이나 배경은 다르지만, 힘이 아니라 용기로 공통된 가치—예를 들어 사랑, 평화,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경청하고 바뀔 수 있도록 자신들을 내맡기고자 하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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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턱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요....
루카 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의 사명을 마치시고 당신의 최종적인 사명을 이루실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시는 내용을 전합니다.
그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힘과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힘과 권한으로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돌아옵니다.(루카 9,1-6).
이렇게 자기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분의 힘과 권한으로 놀라운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외딴 곳까지 와서 그분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의 먹을거리를 걱정하며 예수님께 그들을 돌려보내 허기를 채우게 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였습니다.
예수님의 힘과 권한을 받아 사랑의 임무를 수행하고 온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는 듯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 두 이야기, 즉 예수님의 제자 파견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사이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영주 헤로데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누구신지 궁금해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양심의 가책이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단순한 구경꾼처럼 행동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읽고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삶으로 참여하고 응답해야 하는 진리라는 뜻이겠지요?!
구경꾼은 멀리서 바라보며 판단하지만, 참된 신앙인은 말씀, 즉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인격과 연결시켜 존재의 변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루카 복음 저자가 이 이야기를 여기에 넣은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눈이 뜨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때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예고하셨던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이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 안에서 예수님께서 지긋이 기다려 주시면서 당신 제자들이 당신의 인격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고 계시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아마 이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제자들은 그 감동이 더더욱 컸겠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두 제자가 한 다음의 감동적인 고백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지긋한 다가오심 안에서 서서히 그분 인격과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은총에 젖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셨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지요!
이 예수님의 마음(지극한 사랑의 성심)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고 또 새기며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비록 지금은 그분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요! 제자들에게도 그러하셨으니 말입니다.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그러하시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이 그들 마음을 계속 움직이고자 끊임없이 다가가셨다면,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이 헤매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잘잘못(너의 잘잘못은 물론이고 나의 잘잘못마저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이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저는 이 진리를 믿는 이들이 참된 신앙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칼 바르트가 말하듯이,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인격과 연결시켜 존재의 변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 만남인 것입니다.
참된 만남은 우리 서로를 참된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나'를 예수님으로 보고, 또 '나' 자신으로 상상하면서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을 관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사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눈길이 가슴 벅차게 다가와서 자기도 참으로 그윽한 사랑의 눈빛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결국 그 눈길은 하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이 만남 안에서 예수님이 '내'가 되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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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루카 9.7-8)
허영과 두려움이 어우러진 상상
해로데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이지요? 그는 감히 드러내 놓고 그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시종들에게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신경과민에 빠진 군인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요. 죽은 뒤 되살아났다고들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헤로데가 생각하듯 요한처럼 되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혜로데의 말은 허영과 두려움이 어우러진 말로 보입니다. 무분별한 사람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이런 자들은 서로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보이는 때가 많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3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어머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1요한 3,1).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는 서로 연합되어 있습나다. 따라서 우리의 눈은 발에 속하고, 발은 눈에 속합니다. 만일 발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그것은 눈이 발에 달려 있을 때보다 머리에 달려 있을 때 더 발에 속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눈도 똑같은 식으로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천사나 성인들이 받은 은혜보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더 천사에게 속해 있으며, 천사 속에 더 많이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소유한 모든 것을 성인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더욱 성인의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성인이 받은 은혜보다 더 성인을 기쁘게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영 어색하고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감을 바탕으로 한 비유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보다 명쾌하고 영적인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 안에 다 들어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이며,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47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내적 생활
깊이 생각하는 그녀의 경향은 천진난만함과 잘 조화되어 있었고 슬기롭고 민첩함도 단순과 일치되어 있었다.
‘산간에서 자란’ 이 소녀를 그렇게도 냉정하게 받아들이던 원장은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원장은 외관으로 인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까이서 잘 관찰한 결과 그녀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요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루치아는 즐겨 신심 서적을 읽었다. 그 중에서도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전」을 좋아했다. 가르멜회의 이상에 끌려 가끔가끔 그 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그 희망을 원장께 밝혔다.
“당신은 그렇게 엄격한 곳에는 맞지 않아요. 좀더 쉬운 수도회를 선택하시오"
완덕의 첫 꿈을 포기하기란 괴로운 것이었다.
얼마 지난 후 소녀는 원장께 말씀드렸다.
“원장님 전 도로테아회의 수녀가 되고 싶습니다만"
“당신은 그렇게 나이가 어린데! 무슨 이유로 수녀가 되고 싶습니까?"
“보다 더 자유로이 성당에 가고 싶어서요"
아! 이 얼마나 훌륭한 소망! 이 얼마나 눈부신 대망인가! 영광 찬란하신 예수님 곁에 있는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처럼 그녀는 숨어 계시는 성체의 예수님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이었다.
“하나 당신은 아직 너무 어려요 ! 좀더 기다렸다가"
루치아는 묵묵했다. 온순한 그녀는 일 년 이상을 기다렸고, 그녀가 18세가 되었을 때 이번에는 원장 쪽에서 루치아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수녀가 될 생각은 없는 거죠?"
“어머, 원장님 ! 저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수녀가 되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원장님께서는 제게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순명이 아닌가!(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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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BS의 ‘학교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0.1%의 비밀’ 편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비결을 탐구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 전국 석차 상위 0.1%에 들어가는 800명의 학생과 평범한 학생 700명을 비교하면서, 두 그룹 간 어떤 차이가 성적 격차를 이어지게 하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 결과는 좀 의외였습니다. 0.1%에 속하는 학생들은 지능지수가 별로 높지도 또 생활 습관이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모 경제력과 학력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실험에서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서로 연관성 없는 단어 25개를 3초씩, 75초간 보여준 뒤 얼마나 기억하는지 묻는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방금 본 단어 중 몇 개나 기억할 수 있는지’ 그 예상치를 말하게 한 다음, 실제 기억하는 단어를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실제 기억하는 단어는 상위 0.1%의 학생이나 평범한 학생이나 똑같았습니다. 단지 0.1% 그룹 학생들은 예상한 점수와 실제 기억한 단어 수가 거의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학생은 달랐습니다. 스스로 기대한 것과 달리 들쑥날쑥했습니다. 즉, 0.1% 학생들은 자기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일반 학생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만이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자연히 성적도 뛰어났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알려 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알려 하고, 그분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의 모습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와 정반대 길을 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주가 되기 위해 그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즉,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빠졌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던 그가 지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알지 못하기에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말을 합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과거 인물들과 연결하여 해석할 뿐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죄를 짓거나, 세상 삶에 파묻혀 살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주님의 활동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오늘의 명언: 자연이 어떻게 역경을 헤쳐나가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당신은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버니 S. 시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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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진리에 귀 막은 헤로데 마냥 불안에 떨지 말고 /
‘헤로데는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이는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다.’
우리도 이런 불안을 느끼는 건 아마도 지은 죄 때문일 게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렸을 때 오는 양심의 소리가 불안이리라.
그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충고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질렀다.
따라서 아무리 권력자라도, 그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공생활 내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이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탄복했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으리라.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이가 하느님을 더욱 찬양했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기고 죽일 궁리까지 했으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에게 디딤돌이 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으리라.
그러면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출현은 어떠했을까?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눈엣가시였던,
자신의 불의와 불순을 드러내 치부를 폭로했던 걸림돌 중의 걸림돌인 요한이었으리라.
요한의 정의 앞에서 헤로데가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예수님의 출현으로 다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을 게다.
헤로데는 요한이 바른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죽일 때에도 몹시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목을 베었다.
죽이고 나서도 헤로데는 요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은 죄를 되돌아보며 뉘우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데 있다.
성찰과 정화의 시간이 없이 거듭되는 죄는 양심을 무디게 한다.
문제는 우리 모두도 마지막 보루인 자신의 우러나오는 그 양심마저 내몰라하면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에서 좌표 잃은 배처럼 스스로 제 모습을 잃고 표류할 게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리라.
헤로데는 탐욕과 피비린내의 권력에 젖었기에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그는 예수님의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의 출현’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을 게다.
한때 그를 의인이라고 여겼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온 마음속에 감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두고 종말에 다시 오리라고 믿는 엘리야라 여겼고,
또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지만,
헤로데는 유독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말에 쾌나 신경을 곤두 세웠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려 한다.
어쩌면 헤로데가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는지도.
하지만 그에게는 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으리라.
우리도 문득 이전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가끔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되레 안타깝다.
믿는 이는 이런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일에는 어쩜 분노해야만 할 게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와 정의에 언제나 함께 하기에
스스로가 항상 바른 길만을 가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도 언제든 함께 해 주실 거니까.
헤로데처럼 진리에 귀 막지를 말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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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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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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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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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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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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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군중들 가운데에서 하신 모든 일들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지은 죄가 있기에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주로써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자기 입으로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은근히 눈엣가시 같은 요한을 제거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잘못을 지적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그래서 맘껏 탐욕을 채우지 못하게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명분’을 기회 삼아 그를 제거해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크나큰 권능으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군중들 사이에서 그런 그를 두고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라느니 엘리야 예언자의 ‘현신’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겁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큰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집니다.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부터 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악몽에 시달렸을 터입니다. 자신에게 안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벌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벌하시는 게 아니라, 그의 마음 속 불안감과 죄책감이 스스로를 옭죄고 괴롭히기에 상황이 나쁘게 보였을 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심판관으로 여기는 것은 그분께서 무서운 분이셔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 속에 고백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죄와 잘못들 때문입니다. 그러니 헤로데는 두려움과 불안감의 원인인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봐야겠다는 마음만 먹었을 뿐, 그 마음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건 나중에 빌라도 총독이 그에게 ‘죄인 예수’를 보냈을 때였지요. 헤로데는 자신이 구원받을 그 마지막 기회마저 헛되이 날려 버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되살아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며, 포승줄에 묶인 채 가시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을 조롱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가 자기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최대한 빨리 자기 죄를 뉘우치고 주님 앞에 고백하여 용서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입어 영적인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불편하고 힘들다고 자꾸만 고해성사를 나중으로 미루고 죄 속에 머무르다보면, 헤로데처럼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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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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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57
9월25일 [연중 제 2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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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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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의정부교구 오재우 미카엘(목동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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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성서 <듣는 소금항아리>**
[성 바오로수도회 이창항 세바스티아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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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살다 보면 몹시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당황스럽다’는 말은 의외의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둥절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 존재로 인해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게 와서 왜 그랬냐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따질 때, 정말이 당황스럽습니다.
이럴 때도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남의 재산을 갈취하고 멀리 도망간 사람이 우연히 지하철 앞 좌석에 앉은 피해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는데, 뭔가 캥기는 일이 있는 사람, 위법을 저지른 사람, 남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들은 경찰관 차량만 봐도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영주 헤로데가 그랬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내 헤로디아의 꼬임에 빠져 본의 아니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고 난 뒤 후환이 두려웠던 헤로데였습니다. 괜히 잔칫상 앞에서 우쭐하는 기분에 만용 한번 잘 못 부린 것이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참수로 이어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수백 번 후회해 봐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 뒤로 그의 꿈자리는 얼마나 뒤숭숭해졌는지 모릅니다. 잠을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의인의 목숨을 날려버린 헤로데, 큰 악행을 저지른 헤로데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살아생전부터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이은 예수님의 출현은 더욱 그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린 자신을 찾아와 보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헤로데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로데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두려움의 지배를 받아 삶이 위축되고 힘이 소진되어 힘겨운 나날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 이웃에게 저지른 과오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잊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 소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느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랑입니다. 요한 1서는 이를 잘 뒷받침 해줍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저 두려움이 사라지기만을 희망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두려움에 당당히 직면해야 하고 대처해야 하는데, 그 비결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열렬하고도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수시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끊임없이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두려움의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권고하십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희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 41장 10절)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고, 그분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신명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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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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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깨끗해질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당황합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 즉 의로운 예언자 요한의 목을 벤 기억이 그의 눈을 가립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자신의 끔찍한 죄가 그 거룩한 빛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저 ‘다시 살아난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의 죄가 그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교만이라는 죄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떻게 정화될 수 있을까요? 아이의 죄는 어떻게 사라집니까?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더 깊이 알아갈 때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갈수록 겸손해집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하실까?’ 하는 깨달음이 아이의 교만한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감사와 사랑이 싹트게 합니다. 교만이 죄라면, 겸손은 깨끗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모를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더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를 알아갈 방법이 없다면, 혹은 부모의 사랑을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을 보십시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정신 질환과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어린 시절 입양되었던 고담시의 가장 유력한 인물, 토머스 웨인이 자신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그는 토머스 웨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할 부모가, 오히려 그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막혀버린 그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신뢰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고, 그는 희대의 악당 ‘조커’로 변해갑니다. 그는 부모를 알아갈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정화되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6.25 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며,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족들을 잘 지켜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평생의 짐이자 사명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의 광부가 되고, 베트남 전쟁의 기술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돈을 법니다. 그의 평생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평생을 찾아 헤맸던 막냇동생을 기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과 막냇동생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통곡합니다. 아버지의 희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고,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고 정화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를 알아가듯이, 우리도 매일 미사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알아가지 않으면 깨끗해질 방법이 없듯이, 우리도 창조자를 알아가는 것 외에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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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적에 배운 동요가 하나 떠오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김 사랑.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박 장군. 그 이름 씩씩하구나.”
이 노래는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단순한 노래이지만, 사실은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묻는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상대방에게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도 자신을 괴롭히는 이에게 묻습니다. “넌 누구냐?”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했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으며,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스스로와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답하려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유혹에 흔들리고, 시기와 질투로 상처받으며, 병들고 죽어야 하는 나약한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 속에서 묻습니다. “왜 우리는 끌려왔는가? 왜 성전이 파괴되었는가? 왜 신앙은 꽃피우지 못했는가?” 그 답은 하느님께 무심하셔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회개를 기다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은 눈물 속에서 잘못을 성찰했고,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실천했습니다. 그 회개와 눈물이 결국 하느님의 자비와 만나 꽃을 피우게 되었고, 마침내 페르시아 왕의 은총 속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여도 하느님을 잊은 삶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는 것처럼 헛될 뿐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회개는 하느님을 향할 때만이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권력이나 명예,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에게 넘칠 만큼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이에게야 필요하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헤로데는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가진 것, 집착하는 것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간학적이고 동시에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지만, 동시에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약한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척도는 허무 속으로 사라집니다. 결국 인간은 질문 속에서 자기 한계를 발견하고, 그 한계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질문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답을 얻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는 주님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밝혀집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묻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이름, 권력, 재물은 잠시 빛나다 사라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참된 정체성을 찾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우리의 삶을 사랑의 계명 위에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멍 난 주머니가 아니라, 열매 맺는 밭이 될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끝까지 빛과 온기를 나누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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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몹시 당황하는 모습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보여 줍니다. 헤로데가 왜 당황하였을까요?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소문으로 듣고 그리 된 것인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문맥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 단락인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분부를 내리시며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셨고, 제자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정작 복음을 선포하고 병을 고쳐 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궁금해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사람들이, 심지어 이 악한 통치자마저 예수님을 뵙고 싶게, 그분을 알고 싶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알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알렸습니다. 자신은 물러나고 예수님만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도의 표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먼저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볼 때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을 드러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제자들도 그분을 닮아 갔습니다. 우리도 늘 예수님 곁에 있지만 자신은 물러나 있으며 그분을 드러내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 사람들을 이끄는 참사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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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라고 묻는 장면을 전한다. 예수님의 활동은 제자들의 파견 선교를 통해 더욱 퍼져 나갔고, 그 결과 권력자까지도 예수님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의 내적 위로에 머물지 않는다. 참된 복음 선포는 세상의 가치 질서를 흔들고, 권력과 불의 앞에 질문을 던진다. 헤로데가 느낀 불안은 바로 그 증거이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그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금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되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유가 된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41,10) 헤로데에게는 진리가 두려움으로 다가왔지만, 제자들에게는 자유와 기쁨이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단순한 삶으로 파견되었고, 바로 그 단순함이 복음의 진정성을 드러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중심이 오직 하느님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이 되어야 한다. 신앙인의 삶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할 때, 이웃은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을 믿기에 저렇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이에게 신앙을 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은 억지로 짊어지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이어야 한다. 성 바오로 6세는 회칙 “복음 선포”(Evangelii Nuntiandi)에서 강조하였다. “현대인은 스승보다도 증인을 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승이라도 증인인 사람만을 받아들인다.”(41항) 즉,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복음으로 행복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향기를 드러낼 때, 가족과 이웃이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이끌릴 것이다. 사회 안에서: 정직, 정의, 나눔의 삶은 신앙을 증거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이 의무나 습관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은 힘을 갖고 전해질 것이다.
헤로데는 두려움 속에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제자들과 우리는 믿음 속에서 “그분은 저의 주님이시며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요한 20,28)라고 고백한다. 우리의 삶이 복음의 빛을 드러내어,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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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을 살고 싶다>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삶을 살고 싶다>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주님의 빛이
나에게도 빛일 수 있는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믿음이
나에게도 믿음일 수 있는
믿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희망이
나에게도 희망일 수 있는
희망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도 사랑일 수 있는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기쁨이
나에게도 기쁨일 수 있는
기쁜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축복이
나에게도 축복일 수 있는
축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베풂이
나에게도 베풂일 수 있는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돌봄이
나에게도 돌봄일 수 있는
돌보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섬김이
나에게도 섬김일 수 있는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의 살림이
나에게도 살림일 수 있는
살리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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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날에도 헤로데처럼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1)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설교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했다는 말은, 그가 ‘미신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소문 중에는 그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미신적인 불안감’은 양심의 가책도 아니고, 죄책감도 아니고,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라는 말을 헤로데 쪽에서 생각하면, 이 말은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음을 ‘자백’하는 말과 같은데,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말은 헤로데라는 당시의 통치자가 요한을 죽였음을 확인하는 공식 기록이 됩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말은, 헤로데가 부활 자체를 안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귀신의 존재는 믿었지만, 부활은 안 믿었습니다.>
“여러 가지 소문을 종합해 볼 때, 예수라는 사람이 요한의 귀신은 아닌 것 같고, 부활 같은 것은 믿을 수 없고, 그러면 예수라는 사람은 대체 무엇인가?”가 그가 한 말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라는 말은,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 호기심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불순한 호기심’입니다. 뭔가 신기하고 색다른 것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정도의 호기심...
<헤로데 집안은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 후손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안 믿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없었고, 율법을 지키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집안은 겉으로는 유대교와 유대교의 율법과 관습 등을 존중하는 척 했지만, 그것은 신앙도 아니었고,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2) 헤로데가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과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것은 ‘구원’을 갈망했기 때문이고, 그 갈망은 헤로데의 호기심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3)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6-11)
자캐오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보잘것없는 죄수를 만났을 뿐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메시아를 조롱하는 죄만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헤로데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4) 루카복음 13장에,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헤로데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전혀 죄의식도, 죄책감도 없었음을 나타내고, 또 그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 라고 표현하셨는데, 이 말은 헤로데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의 권력은, 하느님 앞에서는 ‘하찮은 것’,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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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죗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 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더디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릴 뿐입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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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많은 이가 그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알아보았지만,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목을 베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 마찬가지로 놀라운 행보를 보이시자 일부 사람들은 헤로데가 죽인 그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한 매우 특별한 예언자였습니다.(2열왕 2,1-18 참조)
말라키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 곧 종말이 오기 전에 그가 돌아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예언합니다.(말라 3,23-24 참조) 이 말씀 때문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유다인들 사이에 강하게 생겼는데,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엘리야로 오셨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위의 세 의견은 모두 예수님을 예언자적 인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신분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그분의 본모습을 베드로 사도는 제대로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9,20)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가운데,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그분의 모든 것을 목격한 유일한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여정에 제대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따르다 말다를 되풀이하다 보면, 예수님을 띄엄띄엄 알아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대충 비슷하니까 괜찮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도 ‘옛 예언자’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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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경렬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배와 항해를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배에는 바닥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를 다 만들고 나면 맨 밑바닥에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를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바닥짐이 없다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뒤집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바닥짐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 바닥짐은, 무겁고 힘들다고 내던질 수 없는 인생의 알맹이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항해할 수도 없습니다. 항해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하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바닥짐이며 중심입니다.
슈바이처도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며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에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항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성공. 명예. 부. 정의. 평화. 진실. 나눔. 사랑, 등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항해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 많은 짐들은 배를 무겁게 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힘겹게 합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침몰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실을 저버리고, 정의에 눈감고, 나눔은 나중으로 미루고.. 항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갈까만 고심하며 마구 치달아갑니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는 빨리 나아가 목적지인 항구에 빨리 닿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 배인 것입니다.“
바닥짐과 빈 배 이야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두려워하며,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헤로데. ‘그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나의 중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끝내 붙잡으려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하까이는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 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복음은 나의 삶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중심은 올바른지 그리고 나의 삶의 태도는 성실한지? 나의 항해는 어디쯤에 와있으며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항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선한 의지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무겁다는 이유로 바닥짐을 내던지고 출렁이는 물결에 균형을 잃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는지 지난 삶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세상의 모습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덮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치는 한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중심이 있듯,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의 중심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닥짐이 없이는 항해할 수 없는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디 중심인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성실을 주시기를 청하며 마침내 다달은 항구에서 빈 배의 허무가 아닌,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남은 항해가 빈 배가 되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닥짐이란 내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과 불의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과 함께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하여 기꺼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가 빈 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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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병환 요한 신부님]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해한다. 여러 가지 일이란 복음서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일이라든지, 마귀 들린 사람한테서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신 일이라든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헤로데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이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헤로데는 어떤 사람인가? 당시 헤로데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유다 팔레스티나(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헤로데의 통치기간은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4년까지로 알려져 있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와 이두매와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면서 유다인들의 적개심을 없애고 자신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선심성 일들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증축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헤로데는 유다교로 개종한 자의 후손으로서 그 태생만 유다인이었다. 그가 한 일들을 보면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하잘 것 없는 이방인 독재자였다.
이러한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에 맛들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자주 폭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왕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당시 유다인들이 따르던 최고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도 그였다.
헤로데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가뜩이나 불안하게 생각했다. 세상의 권력이란 이처럼 진리를 외면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마저 경계하면서 죽이려 한다.
따라서 권력은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장애물이다. 권력은 왕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교만과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이웃을 지배하려 하고,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이웃을 누르려 하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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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BS의 ‘학교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0.1%의 비밀’ 편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비결을 탐구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 전국 석차 상위 0.1%에 들어가는 800명의 학생과 평범한 학생 700명을 비교하면서, 두 그룹 간 어떤 차이가 성적 격차를 이어지게 하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 결과는 좀 의외였습니다. 0.1%에 속하는 학생들은 지능지수가 별로 높지도 또 생활 습관이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모 경제력과 학력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실험에서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서로 연관성 없는 단어 25개를 3초씩, 75초간 보여준 뒤 얼마나 기억하는지 묻는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방금 본 단어 중 몇 개나 기억할 수 있는지’ 그 예상치를 말하게 한 다음, 실제 기억하는 단어를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실제 기억하는 단어는 상위 0.1%의 학생이나 평범한 학생이나 똑같았습니다. 단지 0.1% 그룹 학생들은 예상한 점수와 실제 기억한 단어 수가 거의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학생은 달랐습니다. 스스로 기대한 것과 달리 들쑥날쑥했습니다. 즉, 0.1% 학생들은 자기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일반 학생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만이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자연히 성적도 뛰어났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알려 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알려 하고, 그분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의 모습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와 정반대 길을 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주가 되기 위해 그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즉,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빠졌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던 그가 지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알지 못하기에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말을 합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과거 인물들과 연결하여 해석할 뿐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죄를 짓거나, 세상 삶에 파묻혀 살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주님의 활동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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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결국 우리에게 남아있을 것들>
+찬미예수님
유학을 위해 막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의 무질서함 이었습니다. 또한 기차역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드는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태도들이 매우 낯선 것이고 사회적 지탄을 받는 행위이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의 저를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그들과 다름없이 변했 있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호를 지키는 이들이 별로 없고 그로인한 사회적 제재가 없으니 안전해만 보이면 저도 무심코 신호를 어기기 일쑤였고 그것을 당연시 여겼던 것입니다. 사실 신호를 지키는 행위는 사회적 법규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은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아, 내가 사회의 질서를 어겼구나! 라고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어른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이 이득이되고 남들이 다 그렇게 행동하면 나 역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질서를 어기는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저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에 대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작은 잘못에도 쉽게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합니다.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한편 어른들의 모습은 이와 다릅니다. 작은 잘못은 “이정도 쯤이야”라고 넘어가기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 지나가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치기를 하느님께서 인간 모두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 있는데 그것을 “양심”이라고 이릅니다. 이처럼 종교가 있건 없건 간에 양심은 누구의 마음에나 심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 옳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좌표가 됩니다. 하지만 악행에 무뎌지면 무뎌질수록 이 좌표는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는 스스로 악인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명예욕과 물욕에 노출되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많은 이들을 학살했습니다. 요한을 죽였던 이유를 자세히 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욱 극명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의 부인은 인접국가 나바테아의 공주였는데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아 왕족 출신의 헤로디아와 재혼하게 됩니다.
이 재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정략결혼이었고 나아가 그 상대는 헤로데의 제수이면서 조카였습니다. 가족간의 혼인은 율법에 당연히 위배되는 일이었고 결국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헤로데에게 반감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반감을 잠재우기 위해 결국 헤로데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유혹에 못 이겨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헤로데 조차 마지막 양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제자 12명을 택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신 다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헤로데 영주는 오늘 복음에서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이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어떠한 심판을 받게 될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참으로 불행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코헬렛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이 말씀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은 권위를 위해 애쓰는 인간 행실의 허무함을 표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언젠가 인간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를 미워하고 깎아 내리려 한들 그 미움은 본인의 죄로만 남을 뿐 그 생애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남는 건 성실하고 선한 삶으로 주어질 하느님의 구원, 혹은 죄를 지음으로써 일어나게 될 하느님의 심판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죄는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죄를 은폐했을지라도 그 상처는 죄를 지은 본인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저마다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태양이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죄를 고백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가 죄를 고백하며 겸손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마치 아이들의 마음처럼 맑고 투명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무뎌진 나의 양심이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용서해 주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넓고 깊은 것인지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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