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7: 6-12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1. 본문 6절은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입니다.
모세가 다시 노아의 나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그의 나이가 많아지는 사이에 다음과 같은 죄악들이 있었으니 곧 그 나이 많은 시대가 나태함과 침울함을 사람들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비추어서 노아의 신앙은 더욱 돋보이게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그렇게 말년에까지도 노아를 결코 거꾸러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계속되는 수세기에 걸쳐서도 신앙이 시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로 그의 기민성은 더욱더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았을 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 후에 요약해서 첨가하기를 대홍수의 물 때문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에 그 말들은 마치 그가 물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강제로 방주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절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할 것인데 즉 말씀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가가 감동을 받아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있던 대홍수가 닥쳐오는 것을 감지하고 그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다시 여기서 찬사를 받고 있으니 그 이유는 사실상 그가 그의 눈을 하늘과 땅위를 쳐다보는 데에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2. 본문 8-10절은
“⑧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⑧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⑨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입니다.
모세는 이제 전에 의심스러웠던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어떤 방법으로 동물들이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으니 즉 그 동물들은 그들 종류들끼리 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누구에게든지 애매하다면 전에 시사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즉 태초에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자신들을 아담에게 나타냈으며 아담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멍에를 지는 것을 거부하게 됨으로 아담에게 부여된 그 동물들을 다스리는 권위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결론은 맹수들을 보게되면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의 노동과 봉사로 인하여 보존하시기로 의도하고 계시는 그 동물들을 다시 노아에게 데리고 오실 때에 사실상 이전의 상태가 회복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노아는 다시 암탉이나 거위들이 새장 안에서 보호되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방법으로 방주 안에서 길들이지 않은 동물들을 잘 제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에게 지시하신 대로 동물들이 스스로 노아에게 왔다는 사실도 그렇게 무가치하게 첨가해 준 말이 아닙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복이 노아의 순종에 근거하고 있어서 절대로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셨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말하면 잠깐 사이에 그렇게 많은 동물들의 떼가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것을 수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보답으로 그의 지각에 능력을 주셔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부속된 그분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즉 노아의 신앙은 동물들을 잡기 위한 모든 덫들이나 그물들보다 더 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와 똑같은 문으로 사자들이나 늑대나 범들이 공손하게 들어왔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암소들과 양들도 방주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들에게는 어렵고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쉬운 것이라는 사실로 설득을 받고 있으면서도 소망에서 쉽사리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일년을 신성한 면에서 3월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세상적인 면에서는 9월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사실상 그것이 동일하지만 이 두 가지 분점(分點)이(춘분과 추분)그들에게는 사실상 일년이 두 번 시작되는 격이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여기서 ‘거룩한’ 연력(年歷)이 암시되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정치적’인 연력(年歷)이 시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년수를 인정하는 전자의 방법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자연과 보다 잘 일치되고 있기 때문에 대홍수는 대략 봄철에 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3. 본문 11절은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입니다.
모세는 다시 첫 번째의 창조의 기간을 우리의 기억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땅이 원래는 물로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호의로 감소되게 되었으며 이 생물들을 위하여 일정한 공간을 깨끗하게 남겨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물이 빠지는 것은 자연의 과정에 대치되는 것이어서 지구의 어느 곳엔가는 그 물높이보다 더 높은 곳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기적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바다의 세력을 경계를 두시고 막아 버리사 사람이 사는 지구의 일부를 범람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말하기를 제일 첫 장에서 어떤 물들은 하늘에다 매달아 두셨다고 했으며 다윗은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선포하기를 물들이 마치 병 속에 있는 것처럼 꼭 봉해져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지구가운데 살 수 있는 지역에다 한 극장을 세우고 그분의 비밀하신 능력으로 인하여 지하수가 터져서 우리를 삼키지 않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물들이 우리를 삼키는 일에 지하수와 음모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홍수로 이 땅을 멸망시키시려고 작정을 하셨을 때에 그 모든 경계들과 장애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의도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도선이나 또는 지구의 지맥으로 인간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삼킬만한 충분한 물을 나오게 하실 수도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두 무덤들 사이에 두셨으니 그것은 기상천의의 안전한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이 걸려있는 그 호의를 멸시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생명의 원소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 물의 요소들은 하늘에서와 땅에서 함께 내려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제재하실 때에는 안전한 것입니다. 샘물의 근원이 터지고 폭포수같은 비가 퍼부었다고 말하면서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은유적인 것이며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 물들이 지금까지 내리던 방법으로 흐르지 않고 또한 하늘에서 어떤 증류 현상으로 방울이 되어 비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장치가 제거되어 버리고 더 이상 그 억수같이 퍼붓는 물들을 제어할 수가 없이 무섭게 쏟아지고 솟구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 본문 12절은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입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홍수의 문들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고 하지만 아직도 순식간에 그것을 완전히 열어 제쳐서 갑자기 이 땅을 삼켜버리게 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단지 비가 40일 동안 계속해서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노아가 오랫동안 생각함으로 그 전에 하나님께서 배운 모든 말씀을 더욱 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게 고정시키셨으며 하나님이 또한 기간을 길게 연장시켜서 비가 내리게 하신 것은 죽음에 직면한 악한 자들이라도 그들이 과거에 조롱했던 그런 경고들이 허황된 위협이 아니었다는 것을 진실히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멸시해 왔던 자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받아서 점차적으로 멸망해 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수백년 동안 한갖 우화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흔히 그분의 심판을 경감시키셔서 인간들이 보다 많은 유리한 점들을 가지고 갑자기 밀어닥쳐서 그들을 순간에 덮쳐버릴 그분의 심판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여유를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철저하게 잘못된 우리 성품의 타락성은 다음의 사실에서 그 자체를 잘 노출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갑자기 퍼부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어리석게 되어 완전히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분노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늦추어지면 예외 없이 우리는 곧 그것을 멸시하고 조롱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적이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목격하게 되면 다시 다른 부수적인 증세로 일어나는 무감각으로 인하여 우리는 쉽사리 마음이 굳어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