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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요(10)
주 안에 있는 사람
요 15:7-8 / 오창우 목사
12월은 참으로 바쁜 달입니다. 직장에서나 개인적으로도 많이 바쁘고 분주합니다. 우리 교회도 참 바쁩니다. 성탄절준비를 하느라고 어제도 밤 늦게까지 추리 장식하는 모습을 보니까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또 40년사 책자를 만들려고 하니까 마무리 하는 것이 힘듭니다. 마지막은 제가 썼지만 원로 장로이신 오영주 장로님께서도 밤 늦게까지 교정보느라 애쓰시고 최전도사님이 또 수정 및 보완도 해서 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교회는 셋째주일에 창립주일이고 임직식이 있어서 바쁜데요. 우리 교회만 바쁜 줄 알았더니 우리 노회 안에 임직식을 하는 교회가 12월 달에 첫째주, 둘째주, 셋째주에 꽉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노회적으로도 분주합니다. 순서를 맡으신 분들도 몇안되는 분들이 이교회 저교회 돌아가면서 하니까 정신이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선교활동 하는 것이 12월에 몰려 있어 성도님들께 죄송한 마음도 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12월이 분주한 달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속에서 다 승리하시는 한달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 좋습니다. 그럼에도 더 좋은 사람이 있어요. <좋은 아내, 나쁜 아내 >라는 글이 있어서 잠깐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누구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또 아내대신 남편이라고 해도 되고 다른 사람을 칭해도 됩니다. 잘 들어 보세요. 좋고 나쁨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좋은 아내는 천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쁜 아내는 자기가 천사라고 생각한다.
좋은 아내는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 남편에게 똑같이 대해준다.
나쁜 아내는 집안에서는 악악거리지만 밖에만 나가면 천사가 된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아픈 것 같으면 더 잘해준다.
나쁜 아내는 아프려면 혼자서 조용히 아프라고 옆에도 오지 않는다.
좋은 아내는 남편이 방귀를 뀌어도 요란을 떨지 않는다.
나쁜 아내는 차 안에서 자기가 방귀를 크게 뀌고도 남편이 창문을 열려고 하면 춥다고 못 열게 한다.
좋은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천사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사신으로 인간을 위해 일을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주는 일을 하듯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보좌하고 찬양합니다. 천사의 본분은 철저히 섬기는 자입니다. 천사의 반대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천사가 타락을 한 겁니다. 나는 천사다! 하고 일을 하지 않는 천사는 천사가 아니지요? 섬기는 자가 바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천사같이 좋은 아내는 천사가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아프면 같이 있어 주고...부족하면 채워 주는 사람... 허물이 있어도 덮어 줍니다. 어떻게요? 남편이 방귀뀌어도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방귀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사랑을 하면 방귀도 향기로 느낀답니다.
호주 ABC 방송이 지난 11월 23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영국과 스위스의 과학자들이 언어와 후각의 관계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는데 같은 냄새라도 이름 붙이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실험을 해 보았는데요. 두병에 똑같은 방귀냄새를 넣어놓고는 한병에는 치즈냄새라고 적어놓고 다른 한 병에는 방귀냄새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치즈냄새의 독한 향이 방귀냄새와 거의 비슷하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글로 적어 보았어요. 어떤 느낌을 갖는가? 똑같은 냄새를 맡게 하고는 글을 보여 주는 거지요. 방귀냄새와 체다치즈... 어떤 것이 더 구수하냐? 실험자들은 같은 냄새라고는 생각 못하고 체다치즈가 그래도 낫다! 향기롭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생각해보니 내가 보는 것에 따라 느낌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논리를 우리 현실에 적용해보면,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않은 연인의 머리에서 장미향이 난다고 말하거나, 방귀 냄새가 구수하다고 평가를 내리면 그 악취가 향기로 둔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랑으로 그 모든 허물을 덥혀 주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움이라는 글자를 놓고 보면 좋은 것도 다 미워지고 추해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어떻게 사랑하시느냐?
오늘 성경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예수님이 좋은 분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같이 성경을 봅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이곳에선 크게 세 가지로 말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로 하는 말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런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망할 자이지만 내게서 썩은 냄새가 나지만 나에게서 아무리 썩은 냄새가 나도 아무리 죄를 짓고 아무리 망할 사람이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 안에 거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생물학자 배스티언(S.L.Bastian)은 작은 나뭇가지나 덤불 속에 집을 짓고 사는 어떤 거미류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 거미는 나뭇가지나 덤불에 걸쳐 있는 울타리 속에 새끼들을 부화하는데, 새끼 거미가 자라면 호기심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새끼 거미가 이렇게 왔다갔다하면 그 곳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발생해서 새끼들이 놀라게 되면 어느 순간 어미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미 거미가 귀가 발달했나? 눈이 발달했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들의 동요를 그렇게 금방 알아채는지 궁금해진 배스티언이 보다 주의를 기울여 살펴 본 결과, 이 거미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새끼들의 잠재적 위험에 대비해서 경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즉 각 새끼 거미에게는 가는 비단 줄 같은 것이 붙어 있고 이것이 어미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데, 새끼들이 적들의 위협을 받아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그들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므로 어미가 즉시로 새끼들을 보호하러 달려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가느다란 줄을 통해서 새끼의 작은 움직임에도 쏜살같이 달려와 새끼를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미도 가느다란 비단 줄로 사랑을 하는데 성경을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붙어 있다는 겁니다. 가느다란 비단줄이 아니라 주님과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말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한 것은 주님의 보호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롭게 광야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 집니다.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야곱아,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 광야에도 하나님이 계시거늘 내가 몰랐도다.' 하면서 자기가 베고 있던 돌을 기둥으로 삼고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바로 그 제단의 이름이 벧엘,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사히 고향에 돌아오게 하시면 제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십일조의 의미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아무리 속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야곱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야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스스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을 하니까 믿음의 조상이 되고 축복을 받은 겁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도 하나님께서 그를 감옥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사자굴 속에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셨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 나를 택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시간의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죄 없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5장을 보면 레갑 자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갑 족속은 유목민으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들 조상 중에는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후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한평생 유목생활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손들이 수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 앞에 포도주를 대접에 가득 담아서 갖다 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레갑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살아있었던 조상일 뿐인데, 후손들은 그의 말을 존중히 여기며 그의 말을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삭개오는 분명 죄인입니다. 로마사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노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 가지고 로마사람을 갖다 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는 이윤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다 죄인들이라고 하고 이 사람들을 주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후에
"예수님! 내가 남의 것을 뺏은 것을 4배나 갚겠고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야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 보다도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가는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은 4배로 갚으라는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가난을 사람에게 나누겠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이 시간 어떤 상황과 어떤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 시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 성경의 정신대로 살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해주시면서 예수님은 간음하다 걸린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복 받는 인생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아시지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아니요"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 할 것이다." "아이고,, 예수님 말씀대로 내가 부인했구나" 얼마나 자기를 후회를 합니까? 그런데 이 베드로가 이 초대교회의 어른이 되어서 열심히 사역을 하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서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유명한 한의사가 가서 진맥을 하고 나더니
"삼계탕을 먹고 나면 낫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진짜 삼계탕을 끓여서 먹었더니 거뜬하게 나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아해서 그 용한 한의사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 한의사가 말하기를
"베드로가 저렇게 성령을 받아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주님을 부인한 병이 완전히 치유가 되지 않아서 닭이 울 때마다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그 놈의 닭을 잡아서 먹으로 몸과 마음이 회복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누구나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앞만 있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갈 때에 우리의 과거는 물러가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보고 우리를 복 주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 우리를 바라보는 것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어떤 사랑이냐?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들입니다.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생활을 하고 1주일에 2번 금식을 하고... 구제를 하고...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합니까? 외형적으로 보면 흠이 없습니다. 모범교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부한 자 같으나 실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자기의 신앙이 좋은 것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조심하세요.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세요... 물론 사람보고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합니다. 비판합니다. 정죄합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에게 적용이 될 때에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순종을 하고 내가 축복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 안에 내가 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실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안에 살수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함께 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제가 이 말씀에 은혜를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주안에 있는 사람은 응답을 받습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은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임의 도우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을 보니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을 내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르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고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리도 중요하지만 감당할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찬양사역자 정경주 사모의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는 간증집이 있습니다.
정경주 사모는 한국 사람으로 2002년 월드컵 6월 한국과 미국 전에서 미국의 국가를 부른 분입니다. 이 사모의 찬양을 받고 은혜를 받은 미국대사 부인께서 미국 국가를 불러 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구운동장에서 한국국가도 아니고 미국국가를 부르려니 보통 떨리는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응원소리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더랍니다. 모니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요? 기도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정경주 사모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 때 하나님께서 시편 121편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 하시리 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 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에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내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 순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 구나.. 하나님이 산 저 꼭대기에서 나를 지키시는 것을 느끼며 미국국가를 무사히 부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노래를 부릅니까?"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셨어요!”
한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집사님 한 분이 목사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권총을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답니다. 정경주 사모가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저 사람 속에 있는 악령을 쫒아 주시고 순한 양같이 만들어 주십시오.” 정말 그 집사는 아무 이유 없이 순한 양같이 되어서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 피를 흘리는 원인모를 병에 걸렸고... 시골로 이사를 갔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어요.
비행기 승무원시절,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데 동해상에서 비행기 오른 쪽 날개에 불이 나서 그만 비상착륙을 하게 되는 위급상황이 벌어 졌다고 합니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물론 승무원들도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 때 하나님의 딸 정경주의 입에서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하는데... 하나님이 그 입술로 찬송을 하게 하시더랍니다.
1.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2.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 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3.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서 다 씻으사 흰눈보다도 더 정하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런데, 정경주씨가 예수를 믿는 것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는다고 하던 남자 승무원이 쫒아 와서는 “내가 지금 너무 불안하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더래요! 그 용기 어디 갔습니까? 사람은 다 약해요. 그를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분이 이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하는 순간 기내 방송이 나오기를 “엔진의 불이 이유 없이 꺼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기도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승리의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나 합니까? 간절함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원이 있으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니 주님 안에 사는 성도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부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러면 우리가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 충만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우리의 성품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 충성해야겠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니 근심에 쌓여서 돌아갔습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에 내 놓았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충성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있음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응답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 성품이 변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만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좋은 일꾼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제가 가끔 보는데 이것은 예배당입니다. 이건 건물이지만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당 안에 들어오실 때는 경건한 모습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예배당에 들어오면 기도부터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종이 하나를 주우러 들어와도 기도먼저하고 그 종이를 주우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한 주간 동안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요 15:8 / 강성찬 목사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이 땅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신앙적 삶의 성격과 내용을 교훈하십니다. 특히 포도나무 비유는 성육신 하신 '말씀'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는 마지막 고별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운명과, 이미 연합된 제자들의 영광과 고난이 교차되는 삶의 성격을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의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속 계획안에서 유대 민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인간 세계 속에 심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의 신앙과 연합된 이방인들도 구원의 반열에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갈수록 신앙이 타락하여 들포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가장 종교적인 민족이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에 실패했다면, 이방 모든 민족들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즉 선민들의 종교적 실패는 이 지구상에 거하는 인생들 안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예입니다(롬 3:10-20). 모두 하나님의 창조와 은혜 섭리에 실패한 쓸모없는 '들포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절)고 하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계시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 2:9)였으며, 장차 신앙에 승리한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볼 '생명나무'(계 2:7)이신 것입니다.
포도나무 되시는 그리스도는 그 가지가 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생명과 심판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의 요점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강조합니다. 포도나무는 생명력이 끈질기고 왕성합니다. 그루터기만 남아도 언젠가는 가지가 돋으며(사 11:1), 한그루의 나무에서 난 가지들이 온 마당을 그늘지게 하고 수많은 열매들을 맺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강조합니다. 포도나무의 유용 가치는 꽃이나 목재나 잎이 아닙니다. 오직 '열매'입니다. 포도나무는 가구재로 쓸 수 없고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으며, 장식품의 재료로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해 필요한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성도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열매가 그 영혼과 삶에 알알이 맺혀 있는 사람입니다. 열매를 맺어야만 됩니다. 의의 열매, 전도의 열매, 궁극적으로는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방법은 깨끗 하여야 합니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열매맺는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작은 가지에 맺힌 소담스런 열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나무는 역시 열매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열매맺기를 요구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히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왜 우리에게 열매맺기를 요구합니까? 잎도 아름답습니다. 꽃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은 예쁘고 향기롭습니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합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꽃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은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꽃을 심어 꽃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꽃은 열매를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거룩한 생산성’에 집중하는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있는 열매에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또 하나의 열매를 맺음에 있습니다.
열매를 위하여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단호하게 잘라내고 열매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여야 함을 말씀 합니다.
영적인 면에서 죄로부터 깨끗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3)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은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성도들은 거룩하게 됩니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죄로부터 깨끗해진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체험한 '히윗' 여사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고 자신 있게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깨끗함 가운데 열매맺으며 영광 돌립시다.
말씀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의 씨앗을 품고 말씀 중심적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내 인생의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말씀에 비추어 시행하고, 말씀에 어긋나는 일은 설사 손해를 볼지라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준행한 자 치고 인생을 손해 본 자 없습니다. 오히려 귀하고 복된 존재가 되었고 세계와 역사 속에서 청청한 벌과 같은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을 정의하기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2)라 하였습니다.
인생을 형통하게 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수 1:8).
이러한 말씀 중심적 삶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화를 받고 변화되었습니까?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도 말씀 중심적 삶으로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루터'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의해 변화되었습니다. 이교도이며 탕자였던 '어거스틴'의 회개도 '말씀 안에서' 눈을 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결코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준행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하는 자'입니다(시 1:3).
말씀이 안에 있어 열매 맺으며 영광 돌립시다.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생활을 말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삶의 최우선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이며 예수 이름으로 시작하여 예수 이름으로 하루일과를 끝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초대 교회 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행 11:26).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향기를 피웠기에 안디옥 주민들이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즉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방인들이 똑똑히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이렇게 남에게 인정받는 자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 안에 거한 성도가 예수님과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킬 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됩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어떤 믿음 좋은 사람이 꿈에 어떤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계산대 뒤에 하나님이 서 계셨다. 깜짝 놀라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대답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팔기 위해 여기 있단다” 모든 것을 판다는 말에 그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평화, 가장 값진 행복, 가장 소중한 축복을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못 들으셨나 싶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좋은 평화, 가장 값진 행복, 가장 소중한 축복의 열매를 사고 싶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파는 것은 씨앗이지 열매가 아니란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잊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씨앗만 파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매까지 팔지 않으신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열매맺기 힘들어 하나님께 미루는 경향이 있지만 열매맺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열매맺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씨속에 모든 생명과 열매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씨를 받는 순간 우리는 열매까지 함께 받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집트의 미라에서 몇 개의 곡식 낟알이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 주었더니 얼마후 싹이 나왔고 곧 열매가 맺혔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씨는 자생력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열매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맺어야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열매맺게 되어 있는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for) 우리가 열매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through) 하나님 자신이 열매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오로지 씨를 품는 흙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오래전 생물학자인 저스터스 본비리그가 흙속에 네 가지만 있으면 씨는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질소 석회 인산 칼륨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열매는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을 때”“저절로” 맺힙니다(요 15:4). 우리의 인생은 씨에서 열매까지 온통 은혜의 축복속에 삽니다.(이윤재 서울 능동교회 담임목사)
열매의 결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8절)는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다면 다 '나의 제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베드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음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복된 길이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제자'가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가 '생명'의 관계라고 하면,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진리'의 관계임을 뜻합니다. 가지가 맺는 열매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결실한다는 말씀입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주인과 종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요 13:16). 왜냐하면 이 두 관계는 '말씀'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본 받아 선행의 열매를 맺으며 제자의 사명을 감당 할 때 더 복된 역사가 암합니다.
바론 디 로스칠드’라고 하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바론은 한 화가의 작품모델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델의 모습은 바로 거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남루한 복장을 한 바론은 그 화가 앞에 정말 초라한 옷을 입고, 얼굴은 초췌한 모습이며, 손에는 다 낡은 컵을 하나 든 모습을 하고는 앉아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거지였습니다. 그 때 그 화가의 친구가 우연한 길에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바론의 영락없는 거지 분장에 그 화가의 친구는 전혀 그 유명한 부자 바론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바론이 들고 있었던 그 컵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동전을 동냥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론의 컵에 자신의 동전을 넣었던 그 화가의 친구는 은행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게 됩니다. 그 편지에는 일만 프랑 자기앞 수표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해졌습니다. “과거 어느 날 당신은 아리 쉐펄의 화실에서 바론 디 로스칠드씨에게 동전 한 닢을 적선해 준 적이 있습니다. 로스칠드씨는 그날 받은 돈으로 투자를 해서 다음과 같은 이윤을 남겼기에 당신에게 돌려줍니다. 선한 행동은 선한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한 선한 행동이 커다란 상금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황영복 목사)
영국 웨일즈 지방의 아주 깊은 산골에 사는 한 소년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기에 그 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 부근에는 병원도 없었습니다. 걱정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5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사정했습니다. 의사는 괴로웠습니다. 의사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돈만 보고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빗속을 달려가 그 아이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치료에 큰 효험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의사는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로이드 존 경이라는 영국이 낳은 유명한 정치가가 재무상으로 등단하여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축하연이 벌어진 자리에 그 의사도 참석을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재무상은 그 옛날 자기가 치료해 주었던 바로 그 소년이 아니겠습니까? 의사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 당시 억지로 치료해 준 그 선한 일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선행이 뜻밖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바라는 바가 없이 베푸는 일에는 후에 엄청난 열매가 맺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열매 맺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써 구원 받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뜻도 '자신의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성도의 풍성한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도는 생활의 열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영광 돌리되 열매로 영광 돌리는 모두기 됩시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요 15:8 / 임덕순 목사
지난 주일에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에 붙어야만 하듯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게 되어 있으며, 그가 기도하는 기도는 다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 하신 말씀이었지요?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표현은, 주님이 하신 말씀이 듣고 난 뒤에 까맣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어서 내 생각을 지배하고 언어를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들은 말씀이 아직 여러분 마음속에 남아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사상과 언어와 행동과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눅 8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앞에 나온 사람들의 말씀 듣는 태도를 보시고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는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돌짝 밭에, 어떤 씨앗은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 앞에 와서 앉아는 있지만 생각이 딴 데 가 있어서 듣지도 않는 사람이 있고, 듣지만 깊이 새겨듣지 않고 가는 사람이 있었으며, 새겨들었으나 염려에 사로잡혀 말씀을 포기하고 마는 사람, 새겨듣고 착한 마음으로 순종하는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밭이라고 묘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들은 말씀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인 적이 있습니까? 말씀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습니까? 그렇다면 좋은 밭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맺힌 것이고 이웃에게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일 말씀을 이어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도 좋지만, 남에게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면, 그것이 내게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가져야 남에게도 줄 수가 있고 남에게 줄 수가 있어야 영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과일나무입니다. 과일나무에게는 창고가 없고 예금통장도 없습니다. 겨울에 가 보면 가지만 앙상하지 열매는 한 개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는 동안에 많은 열매가 생기고 영글어서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과일나무를 심은 농부를 기쁘게합니다.
신자가 생활 속에서 맺는 열매도 이와 같습니다. 신자는 창고에 쌓아 놓은 열매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없던 열매가 생겨서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지만 없던 열매가 달리고 커져서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다, 신자는 열매를 맺는 것이 과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대개 전도를 많이 해서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하는 것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전도가 열매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전도는 열매라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따라오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제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마23:15에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사람을 교회로 데려온 것을 열매라고 할 수가 없고 그들이 본받고 따라올 수 있게 해야 열매를 맺은 것인데, 너희는 사람을 데려와서는 그들도 너희들처럼 형식적인 위선자들을 만들었으니 너희는 화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씀하는 열매는 전도의 실적이나 다른 어떤 업적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삶 자체를 말씀한 것입니다.
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지요?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나무에 붙어있어서 뿌리에서 빨아 올린 수액으로 잎을 피우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 볕을 받아서 광합성작용을 하면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간직하고 있어서, 수시로 변하는 삶의 환경에서 받아들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녹색 잎을 가진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작용을 통해서 영양을 만들고 열매를 맺는데, 광합성이란 나무 잎에 있는 엽록소가 태양 빛을 받아 작용해서 녹말과 포도당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온 수분과 영양분이 가지와 잎에 흐르고 있어야 하고, 거기에 태양을 받아야 광합성작용이 일어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도 안에는 주님의 말씀과 은혜가 흐르고 있어야 하고, 엽록소에 태양빛이 내려쬘 때 화학작용으로 영양을 만들어 내듯이,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삶의 여러 가지 형편과 부딪힐 때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순종하면, 세상을 이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변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것이 성도가 맺는 열매입니다.
과일나무 한그루가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 맛있는 열매를 제공하듯이, 진짜 신자 한 사람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들도 의롭고 힘차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준다는 말씀이고, 그게 바로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천지와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말씀이 그 마음속에 살아있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에게 절하라고 강요하면서 만약 절하지 않으면 불에 던지겠다는 위협할 때에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불속에서 살아나게 하셨고, 그 결과 느부갓네살과 그 방백들도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영향력을 낳았습니다. 그게 다니엘이 이방에서 맺은 열매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피하여 다닐 때 도리어 자기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왔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해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살아있어서 끝까지 인내하며 피했고, 결국 사울이 전쟁에서 죽자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는 왕이 되었습니다.
욥은 10남매 자식이 하루아침에 다 죽고 전 재산을 한꺼번에 잃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 중에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그 속에 살아있었기에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분이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리라고 믿고 참았더니, 마침내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갑절의 복을 받았으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믿음의 인내를 보여준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우선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잊어버리고 무시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그의 생각과 사상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황을 만날 때, 말씀을 가지고 만났습니다. 상황을 말씀으로 해석했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속에서 기억하고 있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또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사람이 거울을 볼 때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데, 자기가 약하고 바르지 못한 존재인지를 알았다고 해도, 바르게 살아갈 힘이 없어서 죄된 습관과 세상의 유행에 이끌려가면 실패의 삶을 살 뿐 아니라 남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아들이 어릴 때 자기들이 바빠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장성한 아들에게 돈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난 후에 보니 아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부모는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 할 만큼 다 시켜 주었고, 돈도 넉넉하게 다 주었는데 왜 자식이 저렇게 되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에게는 그 돈을 가장 유익하게 쓸 줄 아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를 간수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자기 판단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으며,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들어도 거절하고 밀어내고 맙니다.
잠언 3장 5절, 7절을 보면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고장 난 존재이고, 우리의 지식이나 판단도 고장 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은 형편없고 우리의 경험은 열매 맺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말씀이어서 항상 옳고 항상 내게 유익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만 말씀을 가슴 안에 품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려면 자신을 부인해야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판단에 따라서 살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끊임없이 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품었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면 포기할 줄도 압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듣게 되어있고,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면서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 매이게 합니다.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게 하고,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했다가는 나중에 쪽박 찰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주일을 성수 하면 사업이 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십일조를 드리면 빚을 갚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며, 우선은 내 생각대로 해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우선 나부터 많은 것을 확보한 다음에, 내가 이렇게 모았다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나누어주는 게 맞다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살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만큼 지혜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만큼 의롭고 선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해봐도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고,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이것을 인정한다면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고집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지는 열매를 쌓아놓고 있다가 주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남을 돕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주님말씀을 담고 살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뿌리에서 수액이 올라오고, 하늘에서 태양이 쏟아질 때 자동적으로 광합성작용을 해서 영양이 저장되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뿐이었지만 여름이 지나면 가득한 열매가 맺혀 사람들에게 실컷 공급 됩니다. 나뭇가지가 대단한 것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수액을 머금고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내 손에 가진 것이 없으니까 우선 나부터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매여 있습니까? 가지는 겨울에는 열매 한 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열매를 무한히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해마다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먹는 과일들이 그렇게 맺힌 것 아닙니까? 열매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자동적으로 열매는 맺히게 되고 남들에게 유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뿌리로부터 자동적으로 수액을 공급받습니다. 그 가지에는 봄이 되면 잎이 나오는데, 그 잎에는 엽록소라는 것이 들어있어서 태양빛에 광합성 작용을 해서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그러니까 가지에는 우선 뿌리에서 올라온 수액이 항상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주신 말씀이 항상 채워져 있으면 됩니다. 감사와 말씀만 채워져 있으면 평화로운 날에는 감사가 더욱 넘칠 것이고 위기가 왔을 때에는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수액이 올라오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이고, 그 가지에 햇빛이 쪼이면 더욱 말라버리고 비가 오면 썩어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감사와 말씀이 살아있지 않으면 평화를 주셔도 감사가 없고 고난이 오면 원망과 절망을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우리더러 네가 믿는 사람이냐고 조롱 하는 것입니다.
가지에는 수액이 항상 흐르고 있어야 하듯이, 성도의 마음 안에는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말씀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흐르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가 가슴에 말씀을 담고 살고 있으면, 환경의 변화와 선택의 기로를 만나게 될 때, 어떻게 결정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말씀대로 순종하면 틀림없이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쉽게 믿어집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도 순종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맨 처음에 네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다면 순종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본토 친척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다가 놀라운 복을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25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믿고 기다렸더니 100살에도 아들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 왔습니다. 고민하고 주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아들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태워 바칠지라도, 하나님은 그 불탄 재를 가지고도 다시 아들을 만들어 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고 히11:19절은 기록했습니다. 그 순종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입니다. 자기에게도 유익을 주었고 우리에게도 유익을 주었습니다.
한번 순종으로 은혜를 받고,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말씀을 기억하며 살면, 큰 시험과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쉽게 말씀을 따라 결정할 수가 있고, 그런 사람의 그 행동은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축복을 나누어주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것을 보람 있어 하십니다. 그게 바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은,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 때에야 비로소 사람구실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관리자로 창조하여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낳아 기른 부모를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자식이 세상에서 성공을 한들 그게 무슨 가치 있겠으며,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인생이 아무리 잘나고 호강을 하며 산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가치 있는 인생이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여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다운 인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광야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가나안의 환경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고, 주변의 나라들이 부러워서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그런 복을 받았느냐, 그러자 대답하기를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라고 하셔서 순종한 것 밖에 없어,” 그들이 받은 복과 그 말 한마디가 이웃의 모든 나라에 하나님을 알리고 복을 전하는 열매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해서 찍혀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입증됩니다. 주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너희가 내 제자라면, 열매로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주님을 따라다닌다고 다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주일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신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훈련을 3년 혹은 5년 받았다고 해서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주님의 제자인 증명은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나고, 그것이 이웃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고 본이 되고 이웃을 감동시키는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감동을 주고 서로가 복이 되는 그런 관계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지어주셨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가 셋이 모이면 셋만큼 은혜가 더하고 다섯이 모이면 다섯만큼 복이 나누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으니까 우리가 둘이 모이면 싸우고 넷이 모이면 쪼개지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일이 없으니 경험한 은혜도 없고,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주장과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고 습관대로 살며, 누가 보아도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속에 감사도 없고 지난 주일에 들은 말씀도 살아있기는커녕 기억되는 구절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고, 신자도 아닙니다. 그냥 교인입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씀 속에는 주님께서 앞으로 제자들을 어떻게 판단하실 것인지를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너희는 이미 나의 제자로 택함을 받았다. 나는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로 선택했다. 그러나 선택을 받은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앞으로 반드시 너희가 얼마나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퍼지게 했는지 두고 볼 것이다. 세상에 축복을 전달하는 열매가 있어야 내 제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맺은 열매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제자로 인정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요 15:9-17 / 류공석 목사
지난 한 주간 잘 사셨습니까?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각별한 노력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데, 그 열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표적인 열매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왤까요? 왜 사랑이 우리가 맺어야할 대표적인 열매일까요?
지난 주에 예수님이 나무시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맺어야할 당연한 열매는 예수열매, 즉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는 것이 곧 우리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의 인격과 삶입니까? 어떠한 단어로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정의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전 생애와 인격은 곧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대표적인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오는 열매는 갈리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와도 같은 내용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잘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가 모두 누구에게서 나타납니까? 예수님에게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은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충만한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대표하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앞 내용이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내용인데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의 은사와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합니다. 방언도 받고 싶고 예언의 은사도 받고 싶고 병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들을 받길 원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도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 중에 가장 큰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아무리 봉사 잘 하고 충성되고 절제를 잘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맺되 풍성하게 맺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랑은 성령의 은사이며 동시에 열매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질문합니다. 은혜가 먼저입니까? 사랑이 먼저입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 없이도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먼저입니까? 은혜가 먼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은혜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고 받으면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은혜 받으면 생기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으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받은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깨달은 은혜로 인해서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고 해주고 싶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가 주는 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게는 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게 대할 수 있고 잘 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거나 마음이 어긋나거나 관계가 틀어지거나 상처를 받으면 금방 식어버리고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은혜가 먼저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가 너무나도 귀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단점이 있고 성격이 모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힘이고, 그 은혜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 은혜가 충만하면 기꺼이 형제 자매를 위해 희생할 수 있고 남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쳤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날마다 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엄청난 은혜의 에너지에 떠밀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은혜가 부족한 것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혹시라도 섬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불평이 나옵니까? 아까운 생각이 듭니까?
내 안에 은혜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고민하셔야 합니다.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은혜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에 불을 지를 때 형제 자매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과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미움과 원망, 앙갚음의 감정들을 다 태워 버리셔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의 힘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고 교회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랑의 섬김을 보여줄 때, 사랑의 희생을 보여줄 때 세상은 우리를 인정합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에게 손가락질 합니까? 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이 사랑을 잃어버리면 뻔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교회내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기는 커녕 서로 질시하고 미워하고 분쟁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서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힘이 있어서 세상에 대해서 사랑의 섬김을 하겠습니까? 왜 교회가 세상에 손가락질 당합니까? 왜 땅에 버려진 소금처럼 짓밟힙니까?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그것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온갖 비방과 욕을 해댑니다. 이번에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우리를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세상의 바탕이 반 기독교적인 정서이지만 그동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준 모습들이 부정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을 치유할 수 있고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냐 라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 교회가 무엇이냐라고 했을 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의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고,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참으로 감사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서 사랑을 봅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섬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거쳐간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친절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교인들 붙잡기 위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섬김과 교제가 가능한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이 정도면 되지 하는 상한선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상한선을 긋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여기까지만, 이 정도까지만 하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는 그분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 역시 지금의 사랑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의 기준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의 목표점입니다.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갈증이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사랑에 대해서 목마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르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의 능력은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순종과 동일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여기십니다.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즉 사랑이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혔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우리에게 요구하신 계명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계명의 요약이고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주님의 명령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서로를 사랑하면 그것을 주님께서는 곧 자신에게 대한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면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과 섬김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받아주시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새로워집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더 깨닫게 되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님의 사랑 안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은 더욱 기가 막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 사랑해요.”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형제, 심지어는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해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정도 아닙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특별한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예수님과 비밀이 없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듯이 사랑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가 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친구’란 서로 비밀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가 친구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알 수 있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알아주십니다. 그래서 서로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 통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와 이와 같은 우정을 나누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또 한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15:11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십자가 형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포가 예수님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게세마네 기도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공포가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면 내가 이 기쁨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채워주겠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그런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기쁨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수년 믿어도 이 기쁨이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면, 여러분은 어딘가 사랑의 감격이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나, 안 하나를 증명하는 시금석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그와 같은 기쁨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에게 그 기쁨이 없다면 그 잘못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와 같이 주님과의 깊은 우정을 누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는 사랑하기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와 같은 축복들을 우리가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엄청난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우정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사랑 안에만 그와 같은 진정한 우정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면 지금 너무나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와 같이 손해 막심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처럼 정말 형제 자매를 예수님이 우리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주고 계시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 김요석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70년대 초에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에서 처음에는 헤겔과 맑스를 공부하다가 전공을 바꾸어 신학을 하신 분입니다. 김목사님이 공부한 곳은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적인 곳이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 웃음거리가 될 정도의 학풍이었습니다. 그러한 삭막한 신학 풍토 속에서 10년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와 가지고 어느 신학교에서 교수들과 학생들, 목사님들을 앉혀 놓고 특강을 했는데, 그 강의가 다 끝난 다음에 한 노 목사님이 그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목사, 내가 당신 강의를 들으니까 머리로는 하나님을 조금 아는 것 같은데, 아직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것 같네요. 하나님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목회를 해 봐야 됩니다. 내가 주소 하나를 줄 테니까 이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서 목회를 좀 하시오.”그 주소를 보니까 전라도 어느 지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그곳은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소록도였고, 그 안에 있는 조그마한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아무도 반기는 사람도 없고, 집에 가서 이틀, 사흘이 되어도 밥을 해 주는 사람도 없고, 정말 어려운 목회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첫 시간에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쇼크를 받았습니다. 얼굴에 구멍만 5개가 딱 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코도 없고, 입술도 없고, 눈도 한쪽이 일그러지고, 손도 다 잘려가고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앉아서 은혜를 받겠다고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충격이 되었겠습니까?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도 모르게 황망하게 끝냈습니다. 그리고 광고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에 부임했으니까 여러분들하고 인사할 수 있도록 기다리십시오.” 축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예배당 안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잘 됐네. 잘 못하면 손도 잡아 봐야 되는데, 다 가고 없으니 너무 잘 됐네.’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교회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전부 일렬종대로 서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맨 처음에 악수한 사람은 얼굴에 구멍만 다섯 개 나 있는 바로 그 남자분이었습니다. 그와 손을 잡고 인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악수한 사람은 어떤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 역시 손이 없어서 손목을 가지고 악수를 하는데, 거기에는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고름 주머니 같은 것이 달려있었습니다. 무척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할머니의 손을 안 잡아주면 얼마나 섭섭해하실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얼마나 좋으셨던지, “내가 16살 때에 문둥병이 걸려 가지고 수용소에 와서 여기서 60년을 사는 동안 내가 한 번도 성한 사람 손을 잡고 악수해 본 일이 없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이렇게 손을 잡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하고 감격하면서 손을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불이 내린 것처럼 가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 때 그에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손이 바로 예수님의 손이구나! 독일에서 공부할 때 어떤 교수가 날 보고 ’너 하나님 봤냐? 하나님이 황인종이더냐? 백인종이더냐? 하나님의 손을 잡아 봤냐? 차더냐? 덥더냐?’하고 질문할 때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는데, 하나님의 손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바로 이 할머니가 예수님이시구나.’ 그만 불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동안 일하기로 하고 그곳에 갔는데, 하루에 한 끼 먹는 일이 허다한데도 지금까지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독일에서 그의 주임교수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내가 은퇴할 날이 가까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후임으로 너밖에 없다. 빨리 들어와라.” 독일에서 교수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것도 동양인 목사를 후임으로 세우겠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김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고 아무리 기도해 봐도 자기 한 몸 호강하겠다고 양떼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못 갑니다. 교수님”하고 편지를 써 보냈는데, 또 편지가 왔습니다. 아무 말 하지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떼를 버려 두고 갈 수 없노라고 또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 교수가 직접 그를 찾아 왔습니다. 와 가지고는 그가 목회하는 것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고 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김목사는 한국에서 예수님 손잡고 목회하고 있더라”하고 소문을 냈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참으로 목숨 걸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목사님처럼 자유함이 있어. 남이 모르는 기쁨이 있어. 무엇에든지 매이지 아니하는, 또 뭔가 주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경지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그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한순간도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중국에 나환자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김목사님은 중국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80년대 초반이라 아직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국교가 맺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나환자촌이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공무원들은 그저 입에 발린 대답만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상 천국인데 무슨 나환자가 있소?”하면서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도하면서 수소문했는데, 마침내 나환자촌의 업무를 감당하고 있는 고위층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그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국 공무원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습니다. “당신, 정 그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나하고 내기 하나 합시다.” “무슨 내기를 할 까요?”, “주량이 누가 센지 한번 내기합시다. 그래서 술을 놓고 당신하고 나하고 내기해서 당신이 지면 못 가는 거고, 내가 지면 안내하지요.” 그래 가지고 어느 방에 앉아서 누가 주량이 센가를 내기하기로 했습니다. 빼갈이라는 술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독한 술인지 큼직한 잔에다 가득 부어 놓고 성냥불을 탁 대니까 불꽃이 확 붙었습니다. 목사가 언제 이런 술을 입에 대보기라도 했습니까? 그는 술잔을 놓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 잔을 마셔야 되는지 아시지요?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잔에다 입을 댔는데, 잔 속에 든 것이 술이 아니고 물이었습니다. 그냥 쭉 들이켰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의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와, 대단하시네요. 한잔 더 합시다.” 그 다음에 또 한 잔을 마셨습니다. 역시 그가 마시는 것은 물이었습니다. 지기 싫었는지 상대방은 또 한 잔을 더 하자고 했습니다. 세잔 째도 동일하게 물이었습니다. 상대방은 이미 세 잔도 채 마시지 못해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기적적으로 내기에 이겨 결국 그는 나환자촌에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변방 신강성에 사는 몽고·터키 계 위구르 족 나병 환자들을 10년 가까이 돌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만 소개합니다. 하루는 김목사님이 하두 배가 고파 흙을 파 연한 모래로 만두를 빚어 먹었답니다. 너무 배고프니까 연한 모래는 괜찮겠지 싶어 그리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것 때문에 맹장염에 걸렸습니다. 동네에 병원이 하나도 없어 할 수 없이 가축 방역실을 찾아 칼을 빌려 직접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저 덧나 급기야 사경을 헤매게 됐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돋고 퉁퉁 부어오른 김목사님의 주위에 위구르족 환자 신도들이 모여들어 떨어져나간 팔과 입으로 밤새껏 주무르고 핥으며 안마를 했습니다. 김목사님의 몸뚱이는 환자들의 팔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으로 범벅이 됐고, 그 고름이 굳어져 마치 온 몸에 장화를 신겨 놓은 형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굳어진 고름을 벗기고 보니 종기가 싹 가셔있었답니다. 나병 환자들의 고름이 김목사님의 종기를 치유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김요석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정말 살아있는 성자, 살아있는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김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진정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생명 걸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이 꽉 붙들고 한순간도 놓지 않으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도와주시는구나. 필요하면 이런 놀라운 이적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시는구나.’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이상적인 사랑을 하지는 못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형제자매 하나라도 주님이 명령한 대로 사랑하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과 우정을 나누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아 누리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 않니? 네가 하는 섬김에 문제가 있지 않니? 인간 관계의 문제도 있을 거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여러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 어려울수록 더 사랑하라. 고통이 있을수록 더 사랑하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두려움을 걷어버릴 것이다. 그 사랑이 아픔을 덮어 줄 것이다. 그 사랑이 마음속의 근심을 덜어 줄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돌아갈 때 우리 가슴을 성령께서 뜨겁게 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더욱 사랑할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하던 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