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이 아니라 홧병으로 죽을 것 같다"
치료제 글리벡 생산하는 노바티스사의 횡포
2002-06-27 오후 6:36:48
"만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약값 인하 문제로 싸워온 지 1년이 넘었다. 작년 7월 이 자리에서 처음 시위를 시작했을 때 참석했던 환자 5명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백혈병 환자들에겐 시간이 곧 생명인데 글리벡을 생산하는 노바티스사는 자기들 이윤을 지키기 위해 정부 고시안까지 무시하며 버티고 있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정말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보건복지부 항의 방문, 국가인권위원회 제소, 헌법재판소 제소, 거리시위, 서명운동 등 병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다.
정말이지 백혈병이 아니라 홧병으로 죽을 것 같다."
"정말이지 백혈병이 아니라 홧병으로 죽을 것 같다"
한국 만성백혈병 환우회 강주성 회장은 27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노바티스사 앞에서 열린 '살인 기업 노바티스에 대한 글리벡 약가인하 요구 환자ㆍ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 회견'에서 "약이 없어 죽을 순 있어도 돈이 없어 죽을 순 없지 않냐"며 절규했다.
집회를 마친 뒤 백혈병 환자 7명을 비롯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김정범 대표,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최인순 부회장 등 '글리벡 문제 해결과 의약품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글리벡 공대위) 대표단은 한국 노바티스사 프랑크 보베 사장을 만나기 위해 노바티스사를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건물에 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이들은 경찰들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경찰들은 환자들을 제외한 집회 참석자는 들어갈 수 없다며 완강히 제지했다.
건물 안에 들어와서도 노바티스 측은 기자들의 취재를 거부하며 환자들이 승강기에 올라타는 것을 막는 등 계속적인 몸싸움이 있었다.
결국 환자들과 공동대책위 대표단, 기자들은 노바티스사가 있는 15층까지 걸어 올라갔으나 사무실 문은 닫혀 있었다. 1시간 가량 노바티스사 직원과 합의 끝에 대표단이 사장과 면담하는 데 기자 3명이 합석하기로 했다.
그러나 면담에 응할 것처럼 얘기하던 노바티스사 직원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장이 자리에 없다며 면담을 거부했다.
집회 도중 한 환자가 힘에 부친 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프레시안
"우리 주장 안 받아들여지면 판매중단하고 철수하겠다"
글리벡은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에서 개발해 지난해 5월 미국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은 만성 백혈병 치료약이다.
국내에 만성 백혈병 환자는 6백여명에 이른다. 방치할 경우 100% 사망에 이르는 만성 백혈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동종 골수 이식이다. 그러나 골수 이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환자의 30%에 불과하며 만 50세 이상일 경우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없는 70%의 환자들은 인터페론이 유일한 치료제이지만 인터페론은 부작용이 심하다. 따라서 만성기 환자의 약품 반응률 91%, 완치율 30%인 글리벡은 백혈병 환자들에겐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글리벡은 비싼 약값 때문에 환자들에게 다시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정부와 노바티스사는 글리벡 약값을 놓고 협상을 해왔으나 결국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2000년 11월 글리벡의 보험약가를 한알에 1만7천8백62원으로 고시했다. 반면 근 1년간 한알 당 2만5천원을 고집하던 노바티스 측은 지난 14일 열린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의 협상에서 2만3천45원의 약값을 제시했다.
노바티스 측은 이 자리에서 "이 가격 이하로 절대로 인하할 수 없다"며 "이 약값이 안 받아들여질 경우 글리벡 판매를 중단하고 철수하겠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바티스사는 그동안 2백70여명의 환자에게 무상으로 글리벡을 공급해 왔으며 최근 '환자기금'을 조성해 환자 본인 부담금 30% 중 10%를 추가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더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행정명령도 거부
하루 4-8알이 상용량이므로 노바티스 쪽 주장대로 약값이 책정되면 환자 1인당 월 2백76만원에서 5백53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보험 적용을 해 본인이 30%만 부담한다 해도 월 83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만성기-가속기-급성기로 진행되는 만성 백혈병 환자 중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만성기 환자들의 경우 전액 본인이 부담한다. 만성기 환자는 약 70%에 이른다. 게다가 글리벡은 치료 약제가 아니라 유지약제이므로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하며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노바티스 측은 "글리벡처럼 혁신성이 인정되는 신약은 미국ㆍ영국ㆍ일본 등 7개국의 평균 시판 가격을 기준으로 정한다는 것이 한국 건강보험 약가의 규정"이라면서 "최근 미국과 일본 등 선진 7개국에서 약가가 2만5천원-3만5천원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한국에서만 약값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 암시장이 형성되고 선진국으로 약이 역수출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며 정부의 행정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노바티스가 이처럼 높은 약가를 고수하는 것은 아시에서 첫 진출지인 한국에서의 보험약가 고시가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바티스사는 99년 '산디문 네오랄'이라는 이식거부 반응 억제제를 국내에 들여오면서 약값을 깎으면 약을 팔지 않겠다고 보험 등재를 거부한 바 있다.
국내 체험 약값은 영국의 21배 넘어
노바티스 측의 주장에 대해 인의협 김정범 대표는 "실제 의료에 대한 국가보장 정도와 나라별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글리벡에 대한 국내 환자들의 체감 약값은 스위스의 2.6배, 일본의 3.0배, 영국의 21.3배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또 글리벡 공대위는 글리벡 한알의 생산원가는 8백45원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바티스 측은 "약품의 가치는 단순히 생산원가로 따질 수 없다"며 "신약 개발에 따른 투자비용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글리벡 공대위는 "연구 당시부터 미국 백혈병 환자들의 노력에 의해 공적 자금이 투자되었고 세금 혜택이 주어져 연구기간이 단축되는 등 글리벡이 노바티스만의 노력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또 노바티스 경영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글리벡 시판 8개월만에 투자비를 모두 회수했다. 노바티스 측은 앞으로 20년간 특허권을 인정받는다.
"정부,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일관"
브라질에서는 정부와 노바티스가 협상을 통해 작년 9월 6개월간 무상공급과 글리벡 한알 당 1만6천원에 합의했다. 글리벡 약값 협상이 1년여 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라고 글리벡 공대위는 주장한다.
공대위는 최근 정부에 강제실시권을 발동할 것을 촉구했다. 강제실시권이란 국가가 특허권을 가진 제약회사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부가 국내 특정회사에 특허를 부여해 약품을 생산하도록 명령할 권리를 말한다. 이에 대해 노바티스 측은 "백혈병 환자들은 6백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긴급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강제실시를 불허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그러나 단 4명의 탄저병 사망자 때문에 지난해 9.11테러후 사이프로플록사신에 대한 강제실시를 시행했다.
공대위는 "정부 고시가가 일개 제약회사에 의해 6개월 동안 거부됐는데도 아무런 제재조치도 없었고 이를 강제할 만한 법적 조치가 없음이 여러 차례 지적됐는데도 시정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공대위는 "정부가 이런 태도로 일관한다면 글리벡은 글리벡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앞으로 등장할 신약의 약값은 우리 국민소득의 3-4배가 되는 선진국 약값을 기준으로 책정돼 환자들이 약을 눈앞에 둔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