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치의 광기, 마약이 가져다준 ‘완벽한 환각’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이 어떻게 600만명의 유대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폴란드인, 옛 소련군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기자 출신으로 여러 편의 소설을 쓴 노르만 올러가 5년 동안 현장을 답사하고 독일과 미국의 기록물 보관소들을 뒤져 찾아낸 자료들에 근거해 2015년에 쓴 책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열린책들)는 마약에서 열쇠를 찾았다.
역사학자 한스 몸젠이 후기를 썼는데 “이 책은 역사의 전체 그림을 바꾼다”고 했다. 원제는 ‘완벽한 환각’으로 옮길 만한 ‘Der totale Rausch’이다.
선택받은 아리아인들의 세계를 세우려 했던 나치는 겉으로야 마약 퇴치를 외쳤다. 하지만 나치가 집권했던 1930년대 독일은 이미 마약의 나라였다. 메르크, 베링거, 크놀 등 독일 제약업체들은 세계 코카인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다름슈타트의 메르크 사에서 제조된 코카인은 우수한 품질로 정평이 나 중국에서는 이 상표가 수백만 번 넘게 무단 도용됐다. 함부르크는 천연 코카인의 유럽 허브였다. 매년 수천㎏의 코카인 원료가 합법적으로 수입됐다.
19세기 초 독일 화학자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핵심 성분인 모르핀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주는 이 약물은 의학적 목적뿐 아니라 독일 제약회사의 큰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됐다.
오죽했으면 초코 견과류 과자인 프랄린에도 메스암페타민을 넣고 이를 광고로까지 홍보할 정도였다. 이 책의 62쪽에 광고 사진이 실려 있는데 문구가 상당히 충격적이다. ‘엄마의 예쁜 도우미, 항상 기쁨을 선사하는 힐데브란트 프랄린!’ 카페인과 달리 인체에 무해하다는 문구와 함께 3~9개는 먹어도 괜찮다면서 집안일이 수월해지고 살도 빠진다고 했다. 과자 하나에 메스암페타민이 무려 14㎎ 들어갔는데 독일 정부가 육군을 비롯해 공군, 해군 병사들에 배급한 헤로인과 코카인, 메스 암페타민이 주성분인 ‘페르비틴’ 알약의 다섯 배에 이르렀다.
‘열차는 정확했다’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인리히 뵐이 페르비틴을 보내달라고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약을 일상적으로 복용한 독일군은 밤낮 없이 진군했고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돌격했으며, 지나는 곳을 가차 없이 밀어버렸다. 독일 장군 중 가장 유명한 에르빈 로멜과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등 군 수뇌부도 마약을 즐겼다. 당시 독일 국방 생리학연구소장인 오토 랑케는 이 모든 상황에 눈을 감았고, 마약은 독일군에서 무차별적으로 전파됐다.
히틀러도 그 누구보다 쉽게, 원하는 때 마약을 즐겼다. 저자는 서문의 첫 문장을 ‘나는 코블렌츠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적었는데 연방 기록물보관소에서 히틀러의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의 일지에 휘갈겨 적힌 ‘Inj. w.I’와 ‘x’가 ‘매일 주사’와 ‘수상한 물질’임을 서서히 깨닫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히틀러는 헤로인보다 강한 쾌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오이코달’을 투약하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모렐은 히틀러를 뒷배 삼아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매일같이 300㎞를 운전해 고가의 도핑제와 스테로이드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손에 넣었다. 환자 A(히틀러)가 무탈함을 증명하려고 수시로 약물을 투여했다. 제정신이 돌아오게 되면 무모하고 미친 짓임을 알아차릴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책장을 들추면 히틀러의 말로를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저자는 ‘슈피겔’ 기자로 일하면서 1995년 첫 장편 ‘할당기계(Die Quotenmaschine’을 썼는데 세계 최초의 인터넷 소설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에 대해 글을 썼고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서도 머무른 적이 있다. 2008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팔레르모 슈팅’ 각본 작업에도 함께 했다. 친하게 지냈던 DJ로부터 나치들이 약물에 쩔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희귀한 자료들을 뒤져 2015년 이 책을 썼다. 파라마운트가 영화 판권을 샀다는데 넌픽션을 어떻게 영화로 엮을지 궁금하다.
책의 맨 앞 장에 ‘몰락할 운명의 정치 체제는 본능적으로 몰락을 재촉하는 일을 많이 한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경구가 인상적이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 국민 마약 메스암페타민(1933~1938), 2부 전격전은 메스암페타민 전쟁이다(1939~1941), 3부 하이 히틀러-환자 A와 주치의(1941~1944), 4부 마지막 탐닉-피와 마약(1944~1945)이다.. 앞의 두 장은 위 기사를 쓸 때 주로 참조했던 내용이며, 3부와 4부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 하며 미뤄뒀는데 요며칠 서울숲에서 꼼꼼이 읽었다. 발키레 암살, 책 '인간이하' 등을 쓰며 자연스레 관심사가 히틀러의 최후로 옮겨졌다.
가장 놀라운 점은 나치 독일이 꾸준히 패망으로 치닫던 3부 1941~1944년에도 히틀러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점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약물 칵테일'을 들이켜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사는 곳부터 요상했다. 1941년 여름부터 폴란드 동부 음침한 숲속에 마련된 늑대 요새, 우크라이나 서부 소도시 비니차 근처, 오스트리아 오베르찰츠부르크 산자락의 베르크호프 별장, 다시 늑대 요새의 새로 지은 은신처, 바트 나우하임 근처의 독수리 둥지를 거쳐 1945년 봄 최후를 맞은 베를린 총리실 근처 벙커까지 철저히 다른 이의 방해을 받지 않고 약물을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생활양식을 고집했다.
그가 전시 중에 복용한 약물 가짓수는 무려 90가지. 매일 28가지 알약을 복용했다. 누구보다 총통에 충직했던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총통 각하가 삶과 단절된 채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비극이다. 더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어떤 형태의 휴식도 취하지 않으면서 그저 벙커에 앉아 있기만 한다"고 적으며 걱정할 정도였다. 1941년부터 호르몬 주사와 스테로이드를, 1944년 후반기 초반에는 코카인을, 나중에는 오이코달을 집중적으로 맞았다. 괴벨스는 툭하면 총통이 누구보다 건강하다느니, 나이에 견줘 훨씬 활력이 넘친다느니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았는데 진솔한 일기에는 이렇게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여튼 총통은 전황과 동떨어진 작전 지시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군사 문제에 문외한이며 전황에 어두운 그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옆에서 뭐라하는 이가 없었다. 매일 그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는 뚱뚱한 주치의 모렐도 전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자신의 약물 사업 챙기는 데 급급하는 등 충직한 신하들도 자기 몫 챙기기에만 몰두했다.
"그대들은 건강해야 한다. 몸에 독이 되는 것은 모두 멀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멀쩡한 정신의 인민이 필요하다. 장차 독일인은 오직 정신력과 건강함에 따라 측정될 것"이라고 역설했던 히틀러는 "다들 나를 아픈 사람으로 만들자고 약속을 했군"이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1944년 7월 20일 모렐 박사는 늑대 요새의 한 회의실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놓고 간 가방이 폭발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는데 영화 '발키레 비밀 작전'이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히틀러의 당시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번역본 230~234쪽이다. 그 뒤 약물에의 의존이 더 심해졌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금 서구의 어느 열차역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마약중독자 팔뚝에 난 '지퍼 자국'과 비슷했다. 더 이상 주삿바늘을 꽂을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히틀러는 모렐에게 이런 얘기도 남겼다고 한다. "나는 과거 모든 인간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독일 민족 전체가 죽더라도."
1945년 4월 30일 오후 3시 30분쯤 히틀러는 발터 6.35mm 구경 권총으로 머리를 쐈다. 사흘 전 충직한 신하들에게 청산가리를 나눠 줬다. 연합군의 공세로 오이코달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어 총을 쏘기로 했는데 그 지독한 살육극을 지시했던 이답지 않게 방아쇠를 당길 때 손이 너무 떨리면 어떡하지 물었다. 서둘러 달려온 열아홉 살 연하, 그토록 격렬한 정사를 벌여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드러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에바 브라운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 뒤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로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디저트로 시안화수소 캡슐을 삼킨 뒤 총을 머리로 향했다.
총통이 자살한 뒤 독일에서만 10만명이 그의 길을 따랐다. 다음달 8일 독일 국방군은 항복했다. 같은 달 중순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기자가 바이에른 은신처에 숨어있던 모렐을 발견했다. 미군은 2년 동안 포로로 붙잡아 심문했지만 "나는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는 진술 외에는 이렇다하게 입을 여는 것이 없었다. 1947년 여름 미군은 이 초라한 남자를 뮌헨 중앙역 앞에 버렸다. 적십자사의 한 간호사가 테게른제의 한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는 이듬해 5월 26일 운명했다.
책의 결론은 단 한 줄로 요약된다. '그는 주삿바늘과 여러 다양한 줄에 매달린 인형이었다.' 현실과 유리된 채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길을 열심히 걷겠다는 누군가에게 이 교훈을 꼭 돌려주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이 던지는 경구가 소름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