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처음 학계에 보고된 장도 습지(전남 신안군 흑산면 장도리)는 육지에서 100㎞ 떨어진 섬의 정상에 조성된 민물습지이면서도 육지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식물군을 보여준다. 두개의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길다란 뱀 모양의 분지인 장도습지는 남북으로 뚫린 바람길을 통해 오랫동안 바다의 습기와 구름, 비가 지나가며 수분을 공급해 형성됐다.
멸종위기인 수달과 매를 비롯해 보호야생종인 솔개, 조롱이 등 야생동물 205종과 보춘화, 외현호색 등 습지식물 294종, 후박나무 군락과 구실잣밤나무 군락 등 26개의 식물군락이 발견되었고, 난대식물군과 냉대식물인 곰취가 함께 자라는 생물다양성의 풍부함을 보여준다. 1급수에서만 사는 옆새우, 플라나리아, 가재 등이 서식하며, 여름철새인 휘파람새와 칼새, 겨울철새인 되새도 함께 자란다.
지난해 3월 대암산 용늪, 창원 우포늪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세번째로 국제습지조약인 람사협약에 의해 람사습지로 지정됐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말아야 할까요? 마지막까지 망설여집니다.
이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긴 해야겠지만, 나중에 누군가 책임을 지라고 다그치면 어찌해야 좋을지요. 도롱뇽과 수달이 사라지고, 발에 채이던 민달팽이들이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육지에서 100㎞ 이상 떨어져 웬만해서는 가기 힘든 외진 섬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애써 자위하고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곳에 가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2시간30분 동안 멀미에 시달리며 홍도에 가서 하루를 자고, 오전에 배로 흑산도에 들어갔다. 오후에 배로 나갈 때까지 대여섯시간이 남는 동안 우리는 택시를 타고 흑산도 일주를 하기로 했던 참이었다. 약간 비가 뿌렸고, 안개가 사진촬영을 방해하긴 했지만 친절한 택시기사의 상세한 설명은 그런 대로 만족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장도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이처럼 늘 예상치 못한 어떤 우연이라는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일주도로를 달리자, 바다 건너편에 길다랗게 누워있는 큰 섬이 눈에 들어왔다. “저 섬은 뭔가요?” 무심코 택시기사에게 물은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길 장자(長)를 써서 장도라 안합뎌? 한 40가구쯤 사는디, 모두 전복이랑 우럭 양식을 하지라. 참, 그 섬 맨꼭대기는 넓은 습지로 돼얐는디, 뭐라드라, ‘람사 습지’라든가?”
“람사협약에서 지정한 습지라는 말씀이세요?”
“아 맞다. 그게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지정된 람사습지라고 하던디, 그 이상은 잘 모르고, 장도 사람들헌티 물어야 하는디….”
환경뉴스에서나 보게 되던 ‘람사 습지’라는 말은 묘하게도 우리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 길로 관광을 접고, 부두로 나가 장도가는 배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흑산수협의 도움으로 장도에 가는 배를 섭외할 수 있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모터보트로 15분 바닷길을 가자, 장도 부두에 다다랐다. 장도습지는 마치 우리가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안내인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장도 토박이인 김창식 이장(59)은 습지까지 안내를 자청했다. 장도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김이장은 긴 팔과 긴 바지, 장화를 신을 것을 권했다. 어깨까지 올라오는 수풀길을 헤치고 가려면 샌들차림은 위험하다는 거였다.
장도의 맨꼭대기 해발 225m에 위치한 민물습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앞선 김이장은 수풀 속에서 자주 멈췄다. 우리가 가시나무 덤불에 걸려 비명을 지르거나, 갑자기 독사가 지나가는 걸 발견하거나, 아니면 도롱뇽을 보고 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풀에 가려 발밑은 보이지 않았고, 혹시 뱀이 스치고 지나가지는 않을까 싶어서 발걸음은 빨라졌지만 가시나무는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 몇 번을 미끄러 넘어지면서 1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습지는 마치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줄 만큼 근사했다.
“자, 이쪽으로 와 봐요. 여기부터 2만7천평이 다 습지예요. 발이 푹 빠질 것 같지만 절대 안 빠져요. 이탄층이 다른 곳보다 두꺼워서 스펀지처럼 출렁출렁하기만 하거든요.”
김이장은 습지로 성큼성큼 들어가 두 발로 땅을 굴러댔다. 물이 진득진득 올라오는 습지는 신기하게도 발을 깊이 잡아당겨 빠뜨리지 않았다. 이탄층(물에 의해 식물체가 썩지 않은 채 퇴적된 곳)의 두께가 80~90㎝로 다른 습지보다 서너배 두껍기 때문에 절대 발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놀이기구를 탄 아이들처럼 발을 굴러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놀리듯 지저귀고, 안개는 뺨을 부드럽게 스치며 습지를 감쌌다. 개구리들은 습지의 출렁거림에 놀라서 폴짝폴짝 뛰었지만, 엄지손가락 두께만한 민달팽이는 분홍빛 살갗을 반짝반짝 빛내며 느긋하게 안개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던 장도 습지의 생물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을 오히려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고 싶었던 수달과 매, 흰꼬리 독수리는 자취를 볼 수 없었다. 장도 습지의 ‘고위층’들은 이처럼 예약없이 온 급한 손님을 만나주지는 않았다.
흑산도에서 오후 4시30분에 떠나는 뱃시간에 맞춰야 하기에 습지에 머무를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서둘러 내려오는 동안 못내 아쉬웠다.
“담에 오면 꼭 짝지골 쪽으로도 가봐요. 해안을 끼고 있는 아주 예쁜 산책로니까. 요즘처럼 장마가 지면 해안으로 흐르는 폭포가 생기거든요.”
사람좋은 김이장은 부둣가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몇시간 동안 우리를 장도의 파라다이스로 데려다준 작은 보트는 우리를 흑산도의 부둣가에 부려놓고는 사라져갔다.
만일 이곳 장도에 가시게 된다면, 겨우 몇시간이 아니라 반나절 쯤은 습지에 머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습지 생물들과 친구가 되세요. 하지만 너무 주위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지는 마세요. 술판을 벌이거나 떠들썩하게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애초 입도 뻥긋하지 마시고요. 아셨죠? 그리고 꼭 명심하세요. 장도에 간 우리는 손님일 뿐이고, 그곳의 수달과 달팽이, 도롱뇽들이 주인이라는 것을요. 주인에 대한 예의를 꼭 잊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람사협약이란 : 물새의 서식지로 국제적으로 특히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협력으로 맺어진 조약. 1971년 12월 이란의 람사르에서 열린 국제회의 때 채택되어 람사르 조약이라고도 하며 가맹국은 24개국이다.
▶장도 가는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비금·도초도~흑산도~홍도를 가는 쾌속선이 평상시엔 하루 2차례, 성수기에는 하루 5회 운항한다. 왕복요금은 1인당 7만2천원. 홍도와 흑산도에는 장급여관과 민박집이 많다. 우리테마투어(www.wrtour.com)는 서울에서 KTX로 홍도와 흑산도를 다녀오는 2박3일 여행상품을 25만원에 판매한다. (02)733-0882. 흑산도에서 갈 수 있는 장도는 개별적으로 여행사에 문의하거나 따로 흑산도에서 배편을 마련해야 한다. 장도에서는 조종암씨네(061-246-3627)서만 민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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