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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킨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 그런데 사실 조영남이 최초는 아니다. 가요계에서 최초로 성악을 접목시킨 사람은 1940~50년대에 활동했던 현인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 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곡을 조영남은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가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보통 가수들이 죽으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죽으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화개장터' 일 텐데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보니... "구경 한번 와보세요!"(...)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 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 이야기다. 당시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 는데 사실 '모란동백' 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 한 것. 그런데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치고 있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다. 이번엔 최진사댁 셋째 딸인가?
서울대학교의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연좌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라 북한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한양대학교의 성악과에 몸을 담았다가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대 음대로 이적에 성공,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양쪽의 음대를 오고가며 성악을 배우게 된다.
두 개의 학교를 번갈아가며 다닌 데다가 교수의 추천은 있었으나 장학금이나 학비 감면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 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1]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2][3]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4]) 이후 TV가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젊은 층은 '화개장터'밖에 모르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 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장을 팔았다고 하니 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영화배우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복귀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집에 소홀해졌고 부인과의 성격 문제도 거론되어 이혼을 하게 된다.
윤여정과의 이혼에 대해서 스스로 많은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나 대체적인 판단으로는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다. 사실 이유의 대부분은 결혼 생활 중의 조영남의 지나친 바람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윤여정씨의 태도는 어떤 억울함이나 조심스러움을 넘어 이 일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관련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영남의 이름 석 자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강호동도 어쩔 줄 몰라하며 진행했다.[5] 이에 관해서는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 이라며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혼 후에도 연기 활동을 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이때만 해도 여성 연예인이 이혼을 했다면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마약 복용 후 연기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윤여정은 조영남과 이혼 후 말 그대로 매장될 위기였지만 김수현과 개인적 친분으로 밑바닥부터 생활연기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니 조영남 운운하는 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셈.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현재 진행 중.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 운운하고 있지만. 결국 한국 역사상 흔치 않은 공개적인 쓰레기다. 잘생긴 놈이 그랬어도 난봉꾼이라 욕먹을 텐데 이런 사람이 그러니 대중들이 더 기분 나빠한다.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는 MBC 표준FM 16~18시 슬롯 <최유라, 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발탁이 되어 라디오로도 발을 넓혔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 를 우려먹고 있다[6]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 중 손꼽히는 부자이며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이상, 실거래가는 백억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7]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벌었으면 지금의 재산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8]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2의 명작 스캔들이란 프로그램에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하고 있다.
실향민이자 이혼남이라 자신을 속박할 것은 없다는 말을 하며 자기만 격식 안챙기는 격식 없는 방송을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인 <조영남쇼>에선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격식이 없다기 보단 안하무인을 그럴 듯하게 포장[9] 하는 것에 불과하다란 악평을 듣기도 한다.
2011년 9월 21일 방영된 빅 브라더스에서 게스트로 소녀시대가 나왔는데 멤버들을 포옹하는 과정에서 유독 태연만 강하게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는 논란이 퍼지기도 했다. 소덕들 분노타오르는 소리 들린다. 나이차가 3배(조영남 1945년생 당시 66살, 태연 1989년생 당시 22살)나 나는 후배 여가수를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비판과 오히려 나이 차이가 손녀뻘 정도 되는 만큼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 엇갈렸다. 다만 프로그램 자체가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주목도가 높지 못했는지 이후 별다른 해명이나 추가 논란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2013년에는 섹션TV 연예통신 리포터로 집에 방문한 서유리가 '친분을 통해서 작품을 더 싸게 살 수도 있느냐'라는 말에 내 여자친구나 애인이 되면 가능하다라는 말이나 장모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라는 개소리왈왈를 하기도 했다. 포옹하는 사진도 있으니 눈테러 주의. 서유리가 당시 지금에 비하면 낮은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큰 논란이 되지는 않은 듯 하다.[10]
그런가 하면 2014년 4월엔 연예가중계 촬영차 리포터자격으로 집에 찾아온 레인보우의 멤버 김지숙에게 결혼하자라는 개드립을 작렬하여 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뒤늦게 지숙의 나이를 알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이만이 문제가 아닐 텐데... 당시 촬영분을 보면 결혼 얘기에 표정이 굳으면서 슬슬 피하는 김지숙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달 후에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에 출연하여 해명을 했지만 돌아온 건 그게 그거라는 핀잔 뿐....
언젠가는 전 부인이었던 윤여정을 기회가 되면 만나겠다는 속없는발언을 했는데 아무래도 자서전과 공연 흥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여 세간에 빈축을 더하고 있다.2007년 7월엔 당시 축구국가대표 친선경기 중 한 경기였던 우즈벡전에서 애국가를 자신의 스타일로 불렀었다(...)
1970년대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신고산 타령' 을 불렀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서울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났을 무렵 자신의 공연에서 신고산 타령을 개사해서 "신고산이 우르르르르르~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라고 즉석 개사해 불렀는데 기관에서 이를 문제삼아 곤경을 치렀다. 그나마 이것도, 법조계 쪽에 아는 인사가 있어서 무마된 것이다. 군입대 하는 것으로 하고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육군본부에서 복무. 이때가 또 골때리는 것이 장군들이 잘 봐줘서 매우 편하게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 참모총장인 서종철장군(샵 출신의 가수 겸 연기자 서지영의 할아버지. 초대 KBO 총재.)의 총애를 받았다고... 훈련소에서도 훈련소 중대장이 서울대 동기여서 매우 편하게 지냈고 그를 보려고 간부 및 여군들이 행정반을 너무 기웃거려 임무 수행이 안되니 아예 일과시간 전체를 합창실에서 혼자 지내게 했다.
와중 육군본부를 1년에 한 번씩 방문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왔을 때 무대에 불려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대통령이 좋아하는 '황성옛터' 를 부르라고 지시를 받고 올라갔다가 긴장한 나머지 가사를 까먹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가사를 떠올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박대통령이 웃으며 그 노래는 됐다는 신호를 하자 그만했다. 실수를 만회해보겠다고 즉석곡을 불렀는데 이 노래가 하필 '각설이 타령(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DJ변 공연 끝내고 다음날 기상나팔과 함께 달려온 헌병차량에 실려가서 군당국의 신문을 받는 처지가 된다. 신문관은 "왜 대통령의 애창곡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무슨 의미냐" 고 추궁했다고(대통령이 육본에 1년에 한 번씩 오기 때문에 대통령을 각설이에 빗댄 것 아니냐는 말) 하지만 군법무관으로 있던 조영남의 친구들이 "걔는 평소 아무 생각이 없는 애에요. 의식화된 놈이 아니라구요. 그냥 재미있게 해보려다 실수한 겁니다" 라고 높으신 분들께 변호해준 덕분에 풀려났다고 한다.
또 한번은 청와대에 공연하러 갔는데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순간 윗옷 안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사실은 연주를 위해 하모니카를 꺼낸 것이었지만 워낙 악기 자체가 금속인 데다 권총과 크기도 얼추 비슷하니 순간적으로 경호원들이 총을 뽑으려 드는 엄청난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하모니카를 꺼내 미친 듯이 불었다고 한다(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밝힘).
그리고 2003년 국방부에서 진중문고로 명사들의 군생활 경험담을 모은 것을 책으로 내놨는데 노무현, 이인제, 손학규 등 정치인들과 이상용, 전영록 등 연예계의 거장들 및 기타 학자 및 교수들이 무지무지하게 빡신 곳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들, 교훈들을 푸는 판국에 혼자서 '나 인맥빨로 매우 꿀 빨았다!' 라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실었다.
이혼을 한 뒤로는 정기적으로 보수진영 쪽의 언론사들에 칼럼을 쓰고 있다. 평소에는 소탈한 내용의 칼럼을 적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사고를 쳐주어 미운털이 박혔다. 그러다가 음반 유통의 마진을 가수들에게 더 주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직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야스쿠니 신사가 하도 유명해서 관광 코스로 관광을 간 것인데 음반 유통 쪽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오랜 기간 동안 해온 체험 삶의 현장 MC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몇 년 뒤 대뜸 일본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 요구를 이제 그만두자는 내용의 책을 쓴다. 제목도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친일선언>... 이쯤 되면 극우일빠 인증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 언론의 거센 탄압과 관심을 받았는데 이것을 기회삼아 자신이 관광삼아 야스쿠니 신사에 다녀왔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2ch혐한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비웃음적인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데... 사실 위에서 언급된 '친일선언' 이란 책은 그 자극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단순한 일본 찬양만을 담은 내용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도 납득할 만한 일본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잘 짚어놓은 편이라 친일보다는 지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는데 자극적인 제목 탓에 비난부터 받은 것. 물론 이렇다고 해서 사과 요구를 그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저렇게 선정한 것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일 확률이 높다. 후일 조영남은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쓰면서 '진짜 맞아죽을 뻔한'이라고 서문에 적기도 했다.
그 밖에도 자신이 쓴 '예수의 샅바를 잡다' 는 일어판으로 수출도 되었다. 제목 보면 예수 까는 것같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이 외에도 자신의 바람기에 대한 비판을 남성들에 대한 풍자로 흘려버리거나 미네르바에 대한 비난 등으로 유명한 이른바 한 건 터뜨리곤 자기 기준 없이 "남이 까니까 나도 깐다" 라는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체크한 뒤에 시간을 들여 반박 자료를 모아 터뜨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신동아에 실렸던 인터뷰 중에 입양한 딸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다 큰 자기딸 가슴을 보겠다고 사정을 하는것도 이상하다 증~ 말 예뻐. 환상적이라구.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 참 여자들은 이상해. 한참 예쁠 땐 절대 안 보여주다 늙어서는 언제 그랬나 싶게 간수들을 안 하잖아. 이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 아냐자연법칙의 뜻을 모르는 듯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라고. 참고로 이 기사가 실렸을 때 입양한 딸은 11살이었다. 미쳤네무슨 목적의 입양이냐이딴 놈에게 입양을 허가?이 인터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2011년 3월 22일 KBS 희망음악회에서 일본의 도호쿠 대지진 피해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을 진행하는데 조영남이 여기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불러 비판을 받기도했다. 워낙 교과서를 통해 익숙한 시이다 보니 정작 작품 자체보다는 원작자의 사망 상황이 더 유명해서 그렇지만 서시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영남이 굳이 이 시를 노래로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일본 혐한들의 병크와 관련한 갖은 자료와 정보가 이미 국내 인터넷에 축적될 대로 축적돼온 상태였기 때문에 조영남 본인 자체도 이미 어그로 만땅인 상태에서 제대로 터졌던 것이다.
그 전에 놀러와에서 윤형주가 서시를 부르지 말라고 조영남에게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걸로 윤형주가 조영남을 싫어하네 어쩌네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40년을 같이 지낸 형에게 자기 가족 간의 일화를 이야기 한 것 뿐이다. 정말 문제가 된다 여겼다면 법적으로든 본인 선에서든 해결 못할 이유가 없다. 조영남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서시를 노래로 만들기 전에 미리 윤형주에게 양해를 구했거나 일방통보를 했는데 윤형주가 "원래 저런 형이라 내가 바꿀 수 없으니 포기하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항목을 보면 그런 생각이 안드는데?
2015년 신정아가 큐레이터를 맡은 사찰 전시전에서 신정아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고있다. 사실 이미 2007년에 "신정아씨가 학위 없이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화계에 큰 공을 세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그걸 사기라고 하고 큰 공이 아니라 젊은 작가들을 다 죽였다 민폐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업적. #
2015년 7월 KBS 신규 예능프로그램인 나를 돌아봐에 출연했는데, 제작발표회에서 돌연 하차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다. 동반 출연자인 김수미에게 시청률이 안나온다 식으로 회견장에서 입을 털자 김수미가 굉장히 분노해서 욕을 했고, 그에 되려 화를 내며 나간 것이다. 이후 이경규가 사정사정해서 둘을 다시 화해시키는데 성공했고, 뭐 지금은 40년만에 해운대에 같이 놀러가는 등 프로그램에 무사히 출연하고 있다. 뭐 그나마 이 인간 꼴 안나서 다행이지.
2015년 8월 2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2에 출연한 걸그룹 마마무에게 그룹 이름의 뜻을 묻더니 "혹시 마마無[11]란 소리에요?"라는 주옥 같은 패드립을 날려 논란이 되고 있다.노장의 패드립은 죽지않아.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게 사람이 물어볼 질문인가가 문제. 애초에 그룹 이름만 듣고 그런 드립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부터가...근데 그렇게 따지면 조영남은 고향이 없다 카더라. 실향민이니까
그리고 2015년 9월 21일 나를 돌아봐 녹화장에서 지각을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애꿎은 송해선생님의 매니저 조우종을 구박해 송해 선생님이 화를 내셨다고. 결국 송해 선생님께 무릎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송해 선생님 정의구현
10월 16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이번엔 제시에게 1년전 김지숙에게 했던 헛소리를 또다시 지껄였다.[12] 당연히 이를 접한 이들은 또 다시 조영남을 미친 듯이 깠다. 또한 제시의 생방송 무대인데 가사도 제대로 안 외워오고 직전에 말을 자꾸만 바꾸는 모습에 아무리 본인이 선배라 해도 무례하다며 욕을 들어먹고 있다. 또 바로 옆에 탈의실이 있다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서 바지지퍼를 풀고 윗옷을 다 벗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앞에 제시와 여성백댄서, 카메라가 있었다는 점이다.제시의 인성 재평가행이정도면 보살이다
11월 20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가면을 쓴 여성에게 '이혼한 남자가 어떻냐'는 질문을 던졌다. 초면에 이 말은 실례이다.
아주 뛰어난 목소리를 가졌다. 지금 나이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 박자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고난 게 워낙 좋은 것. 성악의 노장들 중에는 이보다 더한 사람도 많다지만 조영남이 그렇게 관리했을 리는 없으니(...) 더군다나 음악적 감각이 좋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인 즉석에서의 편곡, 애드립에도 능한데다가, 공연 직전에 갑자기 곡을 바꿀 일이 생기자 자기가 평소에 외우는 다른 곡의 악보를 급하게 자기 손으로 써서 밴드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탁월한 편이라는 증거다.[13] 방송이나 공연에서 그가 노래부르면서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부릴 때 자세히 들어보면 완전히 벗어날 듯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많은 가수들이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세마디 넘게 확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다. 반대로 조영남이랑 비슷한 또래의 연예인들이 특별손님의 형식으로 조영남 공연에 출연해 조영남 모창을 위해 고의로 엇박을 넣었다가 마무리까지 박자를 못잡고 날려버리기도 했다. 조영남식 창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영남이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를 감안했을 때의 이야기.
사석에서 당대의 유명 가수들(특히 트로트 쪽)을 씹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가창력에 한해서는 그럴 만하다는 게 중평이다. 특히 스탠더드 팝 시절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손꼽혔고 현미, 조영남은 당시 미군들에게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 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그의 대표곡 '딜라일라' 등의 번안곡에서도 원곡의 맛을 가장 잘 살렸다. 한국의 셰... 셱스 밤?! 톰 존스라고 불렸고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나이거나 윗세대인 어르신들은 젊은 시절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쪽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므로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본인도 (예능용 멘트긴 했지만) 자신의 음색이 대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너무 세련된, 대중가요와는 맞지 않는 창법이라고 말했다.[14] 근데 사실 그보다는 성악톤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가 파워있는 가창을 기본으로 해야 감동이 커지는데 젊을때보다 확실히 힘이 약해진 느낌으로 노래맛이 떨어진 부분이 있다. 원래 젊을때 조영남의 가창력 기반은 기교나 힘조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꾸준히 음을 질러서 울리는 방식이라 감정의 흐름을 관객석까지 온전히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그야말로 뜨겁고 굵은 노래였고, 그것이 성악톤의 스탠다드팝이라는 장르로 큰 인기를 얻은 원천이었다.[15]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는데 마라톤 대회에 나가 그 자신은 죽어라 달렸는데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리고 그 혼자만 죽어라 달리고 말았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힘내라 조영남~!' 이런 격려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놀구 있네', '너 속았어~'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다(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조영남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몇년뒤 제대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1] 원곡도 미국에서 유명한 명곡에 속한다. 톰 존스가 불렀다.[2] 딜라일라 이야기가 그리스 시대 이야기라 첫방송에서 그리스 분위기 세트에 조영남 본인이 상체가 많이 노출되는(?) 그리스 토가와 흡사하게 만든 의상을 입고 나온데다가 실제 딜라일라 역할을 한 여자배우까지 동원했다.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보수적이던 당시 방송분위기에 상상도 못할 복장으로 거의 오페라 수준으로 공연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심한 노출에 칼까지 들고 나와 실제이야기 속 딜라일라는 결국 애인에게 칼맞아 죽는다 퍼포먼스하며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히 큰 이슈가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도 그 퍼포먼스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곡이 원래 명곡이며 짧은편이지만 후렴부 임팩트가 강해서 길지 않게 듣기에 훌륭하므로 퍼포먼스와 조화가 잘 맞아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3] 그리고 당시 그는 순수 성악 스타일로 짧은 시간에 감정을 많이 싣는 칸타타처럼 부른데다가 초기 번안가사도 최근에 고쳐진 가사에 비해 더 강한 편이었다. 과거 초기 방송분량을 들어보면 반주방식, 창법, 가사가 최근보다 훨씬 더 에너지 넘치게 강한 분위기로 불렀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버전은 반주도 가사도 약화시킨 상태에 (조영남의 중년 이후 생긴)'쪼'(버릇)가 추가된 창법이라 곡 전체의 느낌이 많이 순화된 버전이다. 말하자면 그의 데뷔는 대중음악 스타일로 성공한 톰 존스의 원곡과 달리, 성악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파격적이고 수준 높은 실험성이 돋보인 무대였다.[4] 방송 데뷔 전에도 미군부대 공연에서 돈 잘 받고 잘 나가던 가수였다.[5] 예전 윤여정이 딴지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선 지면 인터뷰다 보니 아예 언급을 안 할 순 없지만 도저히 이름을 부르기도 싫어 C로 지칭하기도 했다.[6] 사실 90년대부터는 딜라일라를 방송에서 부른 적이 없었는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20여년 만에 과거 회상을 하다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다시 주목받게 되어 그 후 수년간 계속 부르게 되었다.[7] 조영남 본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팔 마음이 없다고 한다. 단 재건축 하던 시기에는 팔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8] 대신 재건축 공사를 하면서 처음 지어질 때 크기보다 두배 이상 공간이 커진 거라 확장하는 추가 비용이 크게 필요해 당시 나이와 체력에 비해 행사와 방송출연을 많이 하느라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걸고 지켰다고 한다.[9] 격식없다고 하지만 연하나 하급자에는 해당없이 본인에 대한 격식만은 꼭 있어야한다. 조영남의 발언이 어이없는 이유 중의 하나[10] 그래도 서유리가 SNL코리아 출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한게 2012년부터라 당시에 인지도가 많이 낮은 건 아니어서 게임팬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심했다.[11] 마마=엄마, 無=없다. 즉 엄마 없다.[12] 음악 관련으로 이야기를 하러온 제시에게 '결혼을 했느냐', '남자친구가 있느냐, 없다면 얼마동안 싱글이였냐', '난 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 등의 발언을 장난스럽게도 아니고 진지하고 집요하게 지껄여 제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고 진짜 전화를 한 건지는 몰라도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제시라고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전혀 재미있지도 않은드립을 쳤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시의 표정이 압권. 제시도 한 성질 하는데 40년 선배라[13] 물론 제시와의 합동 공연에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장르에다가 빠른 랩이 많이 들어간 곡이 나오는 바람에 연습 중에 리듬이 안 맞아 마찰과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14] 이 때문에 이용의 불후의 히트곡 '잊혀진 계절'을 거절했다고 한다.[15] 조영남이 그걸 다 잃어버린 건 아니나, 전체적 톤다운으로 극복하기에는 창법 자체의 가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사실 파워풀 가창으로 유명했던 가수들도 나이먹어서 톤을 다양하게 바꿔서 기교파로 가기도 하는데 조영남은 성악톤을 바꾼 게 아니라 원래 방식에서 힘만 좀더 얇게 떨어뜨린 스타일이라, 최근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미지까지 겹쳐가창력이 약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드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