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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평화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오체투지순례단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4.19혁명의 직접적 계기-김주열 열사 추모행사
농촌희망지기 추천 0 조회 13 10.04.22 19: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오늘은 4.19혁명이 일어난지 50주년이 된 날이다.

그리고 4.19혁명의 실질적 도화선이 되었던 제2차 마산 봉기와 4·19를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50주년 기념일에 김주열 열사 추모행사에 다녀왔다.

내가 사는 곡성 미실란과는 강하나 사이에 있다.

나는 곡성군 곡성읍 섬진강로 2584(장선리 981번지)와 금지면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곡성군과

전라북도 남원시가 함께 하는 곳이다.

오늘 가까운 남원시 금지면 김주열 열사 추모 행사가 있어 걸음을 재촉했다.

 

김주열사는 1943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3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영용이며, 1956년 옹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금지중학교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키우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961년 어머니의 권유로 마산상고에 진학하였는데, 그 해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대에 동참하였다가 실종이 되었고 한달후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 2백미터 떨어진 바다의 수면 위로 괴이한 형상의 시체 1구가 떠올랐다. 교복 차림의 10대 소년(김주열)이 눈에 포탄같은 쇠붙이가 박힌 채 떠오른 것이었다. 김군의 눈에서 추출된 포탄은 직경 5㎝, 길이 20㎝에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미제 고성능 최루탄으로,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었으며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대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 최루탄 겉면에는 "Don't use on the crowd" - 직접 군중을 향해서 쏘지 말라-는 주의 표지까지 적혀 있는 특수 최루탄인데, 경찰은 비무장 군중에게 직접 발사했다. 이 최루탄은 당시 경비주임 박종표가 실탄 사격 틈틈이 발사한 최루탄 10여 발 가운데 하나였다. 박종표는 3·15 데모 진압 후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하고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을 두려워하여 경찰서장 지프차에 시체를 싣고 부두로 나가 돌을 매달아 바다에 집어던져 버렸다. 김주열의 시체는 27일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묶어둔 돌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고 어부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의 주검은 제2차 마산 봉기와 4·19를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주열열사가 잠들어 있는 묘지와 기념관 전경

 진정 4.19정신을 배우고자 온 학교 학생들도 선생님도 민주투사들도 몇 보이지 않는 행사장....

 기관장이 더 많아 보이는 행사장....대한민국 교과서에서도 이 정신을 기르는 모습이 시들어가는데...

 분양헌화 하고

 아마 이 동네 어르신들의 그날 돌아온 관을 보며 함께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싸늘한 민주주의의 혼만 안고 돌아온 그에게 뒤늦게 주어진 것은

어머니의 염원이었던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이었을까? 그 졸업장도 너무 늦게 돌아왔다.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선배님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기념관 내부 전경

 

 4.19 50주년 기념일에 찾아 온 사람은 고작 이정도...

 김주열 열사 금지중학교 후배들이 "김주열, 그는 역사의 눈이다(이동재시인)"의 시를 대동했다.

이 어린 후배들은 4.19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어느정도 알고 있을까?

 남원시립합창단의 4.19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다.

 지금은 대한민국 팔도가 선거철이다. 그래도 이 기념일과 가장 잘 어울리는 복장으로 선거에 임하는 후보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복장이 참 이색적이다.

 묘비제막식을 가졌다.

 

 헌화도 이어졌다.

 내가 전에 보았던 그 묘비가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김 군 주 열 지 묘'

 50년간 당신이 누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청년 고등학생 그 모습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땅속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앞으로 또 50년 100년 1000년 후엔...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주변 묘지가 정리되었다고 한다.

 아직 하고 싶은 말씀들이 많아서인지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 당신들이 진정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걱정하시는 참 투사들일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망국적 언행들을 한다.

4.19는 정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대구에서 2.8일 항쟁, 대전 3.8학생항쟁, 그리고 마산에서 3.15항쟁 정말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평화적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학생들이 그렇게 젊음을 불살랐다.

지금 우리 사회의 학생은 어떠한가?

오직 우리가 아닌 나만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지는 않는가?

김주열 열사처럼 젊은 고등학생들이 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80년 민주화 항쟁은 대학생들이 선두에 섯다.

지금은 우리 고등학교 대학교의 청년 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한민국 정치는 썩어 그렇게 동서간 사이가 좋은 것에 금을 그었다.

이제라도 우리 대한민국은 동서남북이 하나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꿔본다.

 이 고목 아래서 친구들과 노닐며 꿈을 생각했을 것 같다.

 당신이 살아 계셨다면 아마 이 고목나무도 더 단단하게 자리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순고한 투쟁정신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켜가겠습니다.

참고로 4.19혁명을 살짝 올려 봅니다.

http://www.419revolution.org에서 캡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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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4.22 19:24

    첫댓글 우리는 너무 빨리 우리를 잊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꽃이 필때 그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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