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와 연원 그리고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논한 것으로,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핵심 사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 외에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이라고도 불리는 성혼과 이이의 논쟁, 이황과 서경덕의 논쟁 등이 있습니다만, 본 포스팅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만 다루겠습니다.
여헌 장현광은 퇴계의 문하생이자 한강 정구의 수제자이며 미수 허목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 차이는 26세(거의 할아버지 뻘)임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제자인 기대승을 존중했으며 항상 예의를 갖춰 대했습니다.
정지운이 <천명도설>을 재출간하면서 이황의 조언을 받고 내용을 수정한 것이 논쟁의 발단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이 수정이 유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1558년, 기대승이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하고 정지운을 만나 <천명도설>을 본 뒤 그 자리에서 이황의 해석에 대해 토론합니다.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은 이황을 찾아가 사단칠정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의견을 나눕니다. 이 인연을 계기로 이황의 문하생이 된 기대승은 12년에 걸쳐 스승 이황과 서신을 교환하며 사제 간의 정을 나눕니다.
그중 4번의 만남과 120여 통의 서신을 통해 나누었던 8년(1559~1566) 동안의 이야기가 바로 조선 중기 최고의 사상논쟁인 '사단칠정 논쟁'입니다.
이제 갓 벼슬에 오른 기대승이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자 선조의 스승이었던 대학자를 찾아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황의 학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던 일을 30살의 젊은 선비가 하고 말았던 것이죠.
1559년, 이황이 기대승에게 서신을 보내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집까지 찾아온 기대승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자신의 학설을 수정해서 보낸 것입니다.
서신을 본 기대승은 그 내용을 반박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이라는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합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본성(천리)과 기질(인욕)의 근원이 다름을 강조하며 이(사단)와 기(칠정)를 계속 분리합니다.
이에 기대승은 주자의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강조하며 반박하지만, 이황 역시 주자의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꺼내며 맞섭니다.
이와 기를 엄격하게 분리(구분)하는 이황에게 기대승은 논리적인 구분만 가능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합니다.또한 이와 기는 같이 발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황은 '칠대사(七對四)'를 논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기대승 역시 '칠대사(七對四)'에 맞서 '칠포사(七包四)'를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는 한편 '12조목'을 만들어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12조목’을 본 이황은
- 나의 주장과 견해가 일치하는 부분
-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있던 부분
- 나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견해가 다른 부분
으로 분류하고 자신의 주장을 또 수정을 합니다.
주자의 학문을 잘 계승하고 주자학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대학자 이황도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며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황은 제자의 이야기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이번에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지만, 사단과 칠정의 분리(구분)만큼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이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도덕적이고 원칙적인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기대승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상당히 진전된 이론으로 생각하고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으로 수정하면 어떻겠냐는 질문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은 인정하지 않고 기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합니다.
참고로 이이는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道)'라 하여 '기발이승(氣發理乘)'만 인정했습니다. 계속될 것 같았던 사칠논쟁은 기대승이 마지막 서신에서 사단과 칠정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끝나게 됩니다.
훗날 이이는 기대승의 학설을 지지하며 주기론을 완성합니다.
이황은 예안(현 안동)의 직제자들을 제쳐두고 광산(현 광주)의 기대승을 우선으로 추천합니다. 기대승을 얼마나 아끼고 존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황은 도덕적 원리를 확립하여 주체적인 인간의 확립과 사회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고,
🔺기대승은 불분명하고 모호한(관념적인) 표현으로 인한 성리학체계의 모순점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논쟁이 학파가 분열하고 붕당(朋黨, 黨爭)의 씨앗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