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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7: 1-5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1.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입니다.
노아가 확실히 그가 필요할 때에 다시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함으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가장 지독하고 가장 격렬한 공격을 받았던 일 백년의 기간을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절불굴의 무적의 용사는 이제 영원히 기억될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격렬했던 시험은 세상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것이며 이 사회를 단념하고 자신을 방주 안에다 매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지면은 사랑스러웠던 것입니다. 모세는 초목들이 싹이 나며 나무들이 무성해질 시기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기쁨을 무서리로 얽매었던 추운 겨울은 지나갔으며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때를 봄철로 선택하고 계십니다. 이 홍수의 시작이 두 번째 달에 되어졌다고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이 제목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것은 일년을 추분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세 사람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년을 인정하는 다른 방법이 더 인정을 받고 있으니 즉 일년을 3월부터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자기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도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면 아마 그것은 그가 600년 간을 접해오면서 몸에 익숙해진 생활이었을 것이며 또한 그가 그렇게 죽음의 심연에서 새로운 삶의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가벼운 시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세상을 버리고 약 1백년간이나 넘게 그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파놓은 무덤에서 살라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잠시 후에는 이 지구가 대홍수로 인하여 물 속에 잠겨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전혀 그런 멸망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잔치를 벌이고 거기에 도취되어 있으며 경축의 일색에 빠져 있으며 호화로운 집들을 짓는 데에 탐닉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호화롭고 사치스런 것만이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시대는 그들의 쾌락으로 도취되었던 것입니다(눅17:26).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의 종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새 약속을 하심으로 새롭게 보강시키셔서 그가 악화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그분이 “네가 지금까지는 참으로 많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견인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하였으나 이제는 그 사건이 너에게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네가 지금까지 했던 수고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맥에서 물이 터져서 사방으로 흘러갈 때까지 그리고 거기에 맞장구치면서 하늘의 물이 확 열려진 폭포같이 쏟아지기까지 머뭇거리며 기다리지 말아라. 오직 모든 사물들이 조용할 때에 너는 방주에 들어가거라. 그리고 거기서 일곱째 날이 되기까지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갑자기 홍수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 현재 그 말씀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이지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 말씀에 관한 계속적인 명상이 비효과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앞에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한두 가지의 다른 약속을 하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켜 주셔서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게 하시고 결국은 아무런 실패도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될 진정한 의무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성품으로 그런 생활을 배제하지도 말고 그런 일들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일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문제들을 우리 앞에 야기시키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아끼시고 또는 분발시키시며 확증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아시는 바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유약하며 시들어 있으며 약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네가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를 보존하시려고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제시하실 때에 마치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는 근거가 행위의 장점에 있는 것처럼 귀속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노아가 의로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하나님의 계획을 조심스럽게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계획은 전 세상과 대조적으로 한 사람을 향해서 두시는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그의 인격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불의를 정죄하려는 계획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모세는 다시 증거하기를 이제 세상에게 내리시려는 형벌은 공의로우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직 한사람만이 의를 추구하고 좇는 것을 보셨으며 그의 덕택으로 자기의 모든 가족들도 하나님의 호의를 받게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말씀에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데에 하나님은 행위를 중요시하신다고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은혜스런 영접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직접 종들에게 하사하신 선물들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그분은 인간을 자유롭게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에게서 전혀 다른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증오의 대상이 될 것밖에 없으니 곧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전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도 그분은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저주를 받을 상속자들로 태어나서 무가치한 존재들인 우리를 그렇게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을 자신이 직접 양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인 그분의 긍휼로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분이 인간들을 자신에게 화목시키신 후에는 또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새 생명과 의로움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결과로 선한 행위가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연적인 결과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믿는’자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행위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절대로 우리의 숭고성이나 장점들이 행위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나님이 감안하신다는 점은 우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은 여기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원된 노아의 의로움을 인정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분은 그분 자신의 선물에 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진일보된 표현을 볼 수가 있으니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마음 속의 내적인 신성이 결핍되어 있는 모든 위선적인 의를 폐지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 자신의 권위를 정당하다고 입증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마치 그분 혼자만이 의를 평가하실 수 있는 건전한 심판자이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에’라는 말은 우리가 전에 언급한 대로 확대를 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입니다 그 기대의 타락상이 아주 절망적이어서 노아와 인류 전체가 공통적으로 받는 죄의 감염에 걸리지 않고 해방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적인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절은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입니다.
그는 다시 동물에 관하여 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동물들을 숲에서나 산에서와 동굴같은 데서 그와 같이 많은 동물을 모으는 것은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으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의류들도 모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짐승 가운데는 대부분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짐승의 광포성을 똑같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거룩한 사람이 그런 어려움으로 놀라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의 모든 소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과신을 버리고 실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몇 가지의 상충된 점입니다. 그가 전에 동물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한쌍씩’ 말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일곱쌍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모세가 동물들의 수효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숫놈에 짝을 지워주는 암컷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노아 자신이 무차별하게 동물들을 모으지 말고 장차 씨를 삼을 ‘한쌍씩’을 그들 가운데서 골라내라고 명령받은 것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실질적인 수효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일곱씩’ 이라는 표현은 각 종류가 일곱 쌍씩이 아니라 세상에 한해서만 일곱쌍씩 고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하게 하려고 한 가지가 추가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여호와께서는 보존되어 있는 다른 것들보다 세배나 많은 수효로 정결한 동물들을 가려놓고 계십니다. 그것들은 인간들이 사용할 때에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용도가 큰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수효를 지정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부성애적인 선하심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하심으로 모든 일에서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3. 본문 3-4절은
“③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④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새끼를 낳아서 번식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에게 언급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비록 그대로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그분의 종에게 부여하신 의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임명된 직능에 관련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명령하여 동물들을 모아서 그들의 씨를 살아남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언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영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구절의 ‘온 지면에’ 라는 말 가운데서는 삼중적인 위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얼마동안 세상의 온 지면을 덮은 물이 다시 점점 빠지고 나면 지면이 드러나고 마른 땅이 보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노아 자신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동물들도 많이 번식될 것이며 그것이 세상 전역에 널리 퍼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황폐한 가운데서도 장차 그것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노아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이 모든 방법으로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계속 지탱하게 하시려고 돌봐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거룩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도 정성을 다하여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매우 유용한 것이며 특별히 인간이 자기들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거나 위협하실 때에 유용한 교리입니다. 창조주에 의하여 세상이 멸망되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육신의 심판과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은 여호와께서 설립해 놓으신 자연의 질서를 전복시켜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그것을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에게 조금도 상충되지 않게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하예콜)이라는 말은 ‘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기서 아마 무엇이든지 살고 번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듯합니다.
4. 본문 5절은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에 있는 문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지키면서 한결같이 순종했던 일편단심의 생활을 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그의 순종을 시험하려고 어떠한 까다로운 일에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나 한결같이 순종하며 생활했다고 말하는 듯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한두 가지만을 순종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함있는 순종을 할 때 우리는 당연히 마음대로 일축해버리는 순종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니라”고 한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약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