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⑲-2
10월28일, 이노우에는 국왕에게 신임장을 봉정했다. 이어서 11월4일, 왕은 그의 희망대로 단독알현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노우에는, 주상(奏上)내용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이유로, 왕비의 동석을 요청했다. 진짜 주권자는 왕비----라는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지만, 일본 측이 이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나타낸 것은, 아마도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이날도 민비는 왕 뒤의 병풍 안에 있었고, 왕과 이노우에의 회담을 듣고 있었다. 왕의 권고로, 민비는 병풍을 반쯤 열고 회담에 참가했다.
왕 부처는 이노우에의 자기선전과 청산유수와 같은 장광설에 난감해 하면서도, 그의 엄혹한 대원군 비판을 들었으며, 왕권부활을 의도하는 것을 살펴 추측하고 만족했다. 특히 민비는, 대원군의 출진으로 중앙에서 내쫓긴 민씨 일족이 복귀할 때도 가깝다고 마음이 설렜다.
이 무렵, 친일 개화파의 중진인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가 자택에서 암살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암투가 일어난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이노우에가 陸奧에게 보낸 보고에도 「하수인은 대원군계의 인물인 듯 하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어, 사건은 미궁으로 들어갔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평양의 청국 군이 일본 군의 맹공에 굴하고, 북쪽으로 패주를 개시한 것은 9월16일이었다. 이때 청국군은 상당히 허둥댄 듯 하여 그들이 물러난 사령부 자리에, 대원군이나 왕 부처가 보낸 밀서가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입수한 제1군 사령관 아마가타 아리토모(山縣 有朋)는, 신임공사로 서울에 부임한 이노우에에게 보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 有朋),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세 사람 모두 조오슈벌(長州閥)이다. 대원군을 실각시키려고 기도(企圖)하는 이노우에의 손에는, 처음으로 이들 “이용가치가 높은 편지” 가 쥐어졌다. 일본이 무리하게 끌어내어 정권의 자리에 앉힌 대원군을 은퇴 시키는 데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노우에는 대원군이 청국 군 지휘관 앞으로 보낸 격려의 편지를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각료들에게 보였으며, 일본에 대한 그의 배신행위를 힐책하고 책임을 추궁했다. 또 이노우에는 왕 부처의 밀서도 수중에 있다고 넌지시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원군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운현궁에 틀어박히고, 11월18일, 애손 이준용(李埈鎔)을 옆에 두고 담담한 어조로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리하여 그의 제3차집정은 끝났다. 일본에 의해서 끌려나와 일본에 의해서 낙마할 때까지 불과 4개월이 체 안 되는 허무한 권좌에 있었다.
이노우에의 뜻을 받아, 대원군에게 은퇴를 강요하는 역할을 한 것은 岡本 柳之助(오카모토 유노스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청개전 직전, 대원군에게 나서줄 것을 강요할 때의 오카모토의 설득은 전혀 효력을 낼 수 없었으나, 대원군은 다소라도 그에게 호의를 지니고 있었던지, 은퇴 후에도 오카모토를 운현궁으로 불렀다.
11월20일 국왕은 이노우에의 요청에 따라,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노우에는 제2차내정개혁요령 20개 조항을 제안했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전문 24조의 제2차 내정개혁안이 채택되었다. 국왕을 비롯하여 조선정부는 개혁안의 내용에 이의를 주장하는 일도 없이, 전부에 협력적이었다. 이노우에는 스스로의 역량을 과시했으나, 그 뒤에는 날마다 명료하게 되는 일본군의 승리가 있었다. 조선 측이 청국 군의 승리를 믿고 있던 大鳥 圭介(오토리 게이스케)공사 시대와는 달리, 일본의 입장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제2차 내정개혁의 내용은 국왕의 친재권(親裁權), 의정부 및 각 아문의 조직과 권한의 제정, 조세를 포함하는 재정, 군제 등으로부터 왕실의 조직, 제도의 제정까지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다. 민비는 그녀의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왕실에 관한 조문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대원군에게 부여된 권한을 전부 삭제하고, 국왕 스스로 친재(親裁)할 것」을 거듭 읽고, 가슴 밑바닥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듯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12월9일 군국기무처와 승지원을 폐하고, 중추원(中樞院)이 설치되었다. 군국기무처는 본래부터 대원군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제는 그 존재의의를 잃었다.
12월17일,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영의정(총리)인 김홍집(金弘集), 외부(외무)대신인 김윤식(金允植), 탁지부(대장)대신인 어윤중(魚允中)은 전대로 였으며, 중립, 공정한 정치가인 이 3사람이 신내각의 중심세력이었다. 그리고 내부(내무)대신에 박영효(朴泳孝)가, 법부(법무)대신에 서광범(徐光範)이 임명되어, 이에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2사람이 각료의 대열에 추가되었다. 서광범은 김옥균(金玉均)이나 박영효와 같이 일본으로 망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사람이다. 그들 구 개화독립당의 2사람은 근대적 정치이념을 가지고, 조선의 근대화에 진력할 것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일본을 이용하여 일문의 재흥을 꾀하는 민비가 붙어 있었다.
각료 중에는 군부대신인 조의연(趙義淵) 등, 오로지 이노우에 공사에게 협력하는 친일파도 있고, 같은 친일파로 지목되면서도 박영효 등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 그밖에 사대보수적인 경향을 지우지 못한 각료도 있었으며, 정부 내의 통일되지 않은 불화는 처음부터 에측 되는 상태였다.
신내각 성립보다 빨리, 민비는 의정부의 여러 대신에게 통고를 하지 않고 4아문의 협판(차관)을 선정하여, 국왕의 이름으로 임명했다.
민비는 제2차 내정개혁의 「왕의 친재권」해석에 따라서는 이 정도는 독단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민씨 일족이 다시 일어서기 위한 포석으로, 먼저 이것을 첫 시작으로 왕의 실력행사를 기정사실의 형태로 쌓아나가야 한다.----. 민비 로서는, 그 제일보의 시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노우에의 성격을 모르는 민비의, 강세가 불러온 실책이었다.
왕명에 의한 4인의 협판 임명을 알게 된 이노우에는 격노했다. 이제 막 채택된 개혁안 조항이 왕의 이름으로 깨뜨려진 것을 그는 자기에 대한 경시이고 모욕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노우에는 왕에게 내알현을 요구하고, 각료 배석 하에 강경한 항의를 한다.
“내정개혁안은 왕의 찬성 하에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협판을 왕 개인의 자의로 임명한다는 것은 국법을 무시하는 것이며, 월권행위입니다”
제2차 내정개혁 조항에는 「관리임면의 법규를 제정하고, 사의(私意)로 그 임면을 하지 말것」이라고 되어 있고, 또 「국왕은 정부의 친재권을 가짐과 동시에, 법령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라고 정해져 있었다.
이노우에의 흥분으로 날카로워진 소리는 다시 계속된다.
“지금까지도, 이런 종류의 음험한 수단에 의해서 내정개혁을 방해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왕은 개혁조항을 준수한다고 말했지만, 왕비 등의 이면공작에 의하여 자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암탉이 홰를 치면 나라나 집이 망한다---고 하는데 이 속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나는 동학당 토벌중인 일본 군을 철수할 복안입니다. 그 결과 조선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왕은 “네 협판의 인선은 짐의 전단이 아니지만, 사정이 그러하다면 임명을 취소한다. 또 중전의 내정간섭은 금후 절대 금지하고, 짐(朕)은 개혁조항을 실행한다”고 약속했다.
영의정인 김홍집도 또한 이노우에를 향해 “왕비의 정치관여를 엄금한다”고 신고했다.
이때 병풍 안에서 방청하고 있던 민비가, 발언을 요구했다. “왕실과 세자에 대한 우려만 없다면, 부녀자인 내가, 어째서 정치관여 같은 것을 하나요. 이런 것도 모두, 왕실과 국가의 융성을 바란다면” 하고, 그녀는 돌올한 말투로 이노우에게 말했다.
민비는 일찍이, 그런 모양으로 자기의 행위를 힐란 당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면전에서 매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노와 굴욕감이 치밀어 왔지만, 그녀는 그 울분을 참았다. 지금은 이노우에 공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의 힘을 이용하는 이외에, 민씨 일족이 재기할 길은 없다.
절대 강자로 생각했던 청국도, 일본군의 맹공에 패주를 계속하고 있다고 들린다. 일본이 우세한 동안에는, 그 세력에 보다 가까이 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머지않아 일본이 사양길에 들어서는 날이 반드시 온다. 오늘의 분통은, 그때에 만족할 때까지 참는 것이 당연하리라----.
민비가 이노우에에게 한 말에는 실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왕실의 융성을 바라고, 왕의 권위가 지켜 질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없이는 민씨 일족에 둘러싸여 “권력”이라는 미주를 계속 마실 기쁨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노우에는 공공연히 민비에게 “못을 박은 것”으로 일응 만족했다. 게다가 다섯 사람의 대신이 과오를 사죄하고, 이노우에에게 서약 문서를 냈다. 일본은 제 외국에 대하여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국왕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고, 차관을 임명한 것에 타박을 받아, 외국 사신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다.
민비에게 “못을 박았다”는 이노우에도 “박힌” 민비도 각각 이것을 기회로,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