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⑳-1
下關(시모노세키)의 李鴻章
이 무렵, 일청전국은----.
1894년(명치27년) 10월 말, 大山 巖(오오야마 이와오)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2군(제1사단 및 제6사단의 일부 기간)은 요동반도 남안에 상륙하고, 먼저 금주(金州)를 쳤으며, 대련(大連)을 점령하고, 다시 여순(旅順)항의 공격을 개시한다. 난공불락이라고 하는 청국의 중요 군항 여순(旅順)이 함락된 것은, 11월22일이었다. 구련성(九連城)에 입성한 제1군은 남만주 해성(海城)선까지 나가고, 12월, 이 지역을 공격한 후에는 청국 군의 역습을 격퇴하면서, 이듬해 봄의 행동에 대비하며 엄동을 지냈다. 1895년(명치28년) 2월 말에 행동을 개시한 제1군은, 안산(鞍山), 우장(牛莊)을 공략했다.
한편, 요동반도(遼東半島) 작전을 끝낸 제2군(제6사단 주력과 제2사단이 증원)은 1월20일부터 산동반도에 상륙하였으며, 북양함대가 도망친 위해위(威海衛)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고, 배후로부터 이를 공격했다. 베이찡(北京)을 향하는 진격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작전이었다.
연합함대는 위해위의 항내 깊이 숨어있는 북양함대를 수뢰정(水雷艇)으로 공격하고, 다대한 손해를 주어 행동불능에 빠트렸다. 2월22일, 북양수사제독 정여창(丁汝昌)은 항복하고, 부하의 구명을 청한 후, 음독으로 자결했다.
일본군은 연전연승의 기세를 타고, 나아가 근위사단, 제4사단 등을 증가하고, 직예평야에서의 결전을 준비한다. 3월 드디어 청국은 미국 공사를 통해, 이홍장을 전권대사로 하여, 일본에 강화를 제안했다.
1895년1월7일, 조선정부는 일본이 입안한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제정했다. 이것은 근대국가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용은 조선의 자주독립, 국민의 생명재산의 법적 보장, 부국강병 등이었다. 국왕 고종은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족, 중신들을 거느리고, 종묘에 독립을 보고했다. 이때의 서고문(誓告文)이 처음으로 순 국문 한글문자로 쓰여 진 것도, 종주국이었던 청국과의 절연을 나타내고 있었다.
1월8일의 관보는, 왕실에 대한 존칭 개정을 공표했다. 국왕은 「대 군주폐하」, 왕비는 「왕후폐하」, 왕세자는 「왕태자 전하」로 바뀌었지만, 고종이 대표하는 조선과 井上(이노우에)가 주 조선공사인 일본과의 관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국가재정은, 일청전쟁의 심대한 피해와 그 후의 정치공백 등에 의하여 파산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관리들의 봉급은 이미 3개월간 지불되지 못했으며, 또 군제개혁으로 해고된 군졸의 퇴직금도 미불상태였다.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면, 제2의 임오군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억측을 수군거리는 상태였다.
3월30일 일본은행과 조선정부간에 300만 엔의 차관계약이 성립되었다. 일청강화회의 개최중의 일이다.
下關(시모노세키)에서 일청강화회의가 시작된 것은 3월20일이었다.
일청강화회의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이 일청 양국에 대하여, 중재의 노고를 취하고자 발의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일본은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판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청국으로부터 미국을 중간에 세워 강화의 제의가 있어, 일본도 이를 받아들여, 2월1일, 廣島(히로시마)에서 강화회의 개최 진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청국이 파견한 2사람의 사신 인선에 불만이었다. 말하자면 “거물”이 아니다. 伊藤 博文와 陸奧 宗光 2사람은, 이 정도의 인물을 상대로 회의는 공연히 길게 끌고 가는 사이에, 일본의 강화조건을 안 여러 외국이 간섭을 하지 않을까 하는 위구(危惧)를 품었다.
2월1일, 양국 전권대신은 히로시마 현청에서 회합했다. 먼저 서로 상대국 사신의 전권위임장을 사열하고, 그것을 교환함으로써 회의는 시작된다. 伊藤, 陸奧 두 사람은, 청국 사신이 국제공법에 적합한 전권위임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청국 측이 “국서(國書)”라고 하면서 제출한 것은, 일종의 신임장에 지나지 않았고, 더욱이 그들은 “칙유(勅諭)”라고 칭하는 한통의 편지를 제출했으나, 어느 것도 정식 전권위임장이 아니다. 陸奧는 더욱더 신경을 써서, 청국 사신에게 그들이 부여받은 권한을 다만 “독단전대(獨斷專對)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伊藤가 강화회의의 정지를 고했다.
연전연승 중의 일본 국민은, 강화담판의 정지를 기뻐했다. 베이징(北京)까지도 쳐들어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자는 소리가 강했으며, 개전 전후의 “이웃나라를 돕는 의전”이라는 논의를 잊은 듯이, 영토의 할양이나 배상금의 금액만이 화재가 되고 있었다. 또 육군은 피를 흘리고 점령한 요동반도는 러시아와 청국에 있어서의 전략적 요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확보하라고 주장했으며, 해군은 일본의 남진에 대비하여 타이완(臺灣)을 영유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제 외국은 일청강화회의가 정지된 것을 알고, 한층 일본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청국의 국제공법상의 불비는 드문 일이 아닌데도, 일본은 그것을 이유로 강화회의를 중단하고, 아직도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전승에 교만해지는 일본은 어떤 과대한 요구를 제출할 것인지 경계하고, 강화조건의 내용을 탐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을 절대로 새 나가게 하지 않는다. 제3국의 간섭을 피하고, 청국만을 상대로 양국 간에 강화조약을 맺으려는 일본의 전략이었다.
3월20일부터의 시모노세키 강화회의에, 청국은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파견했다. 일본 측은 지난번과 같이, 伊藤와 陸奧가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회의의 첫날, 양국 전권은 지장 없이 전권위임장 교환을 마쳤다. 이어서 이홍장은, 강화담판을 개시하기 전에, 먼저 휴전사항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측은 “내일 회답 한다”고 약속하고 이날 회합을 끝냈다.
陸奧는 그날의 이홍장의 인상을 『건건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희(70세)이상인 노옹에 비할 수 없는 용모 우람, 언어 시원스럽고, 사람을 눌러 복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홍장(李鴻章)과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회의가 끝난 후, 이홍장은 친근하게 이토에게 말을 걸어, 일본의 근대화정책 성공을 축하하고, 그 지도자인 이토의 공을 치하하며, 청국의 개혁이 아직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재략(才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탄해 보였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청국이 오랜 동안의 미몽을 타파하게 된 것을 일본에 감사하고, 일본과 청국은 친밀한 우방이며 황색인종이 결합하여 백색인종에 대항할 대비에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들은 陸奧는 먼저「그 의견은 오늘 동방경세가의 화제로서는 극히 예사로운 말」이라고 냉정하게 평한 다음,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종횡으로 이야기 하여 일본 측의 동정(同情)을 끌어내려 하고, 때때로 好罵冷評(역자 주: 좋은 꾸지람과 냉정한 비평)을 나누면서 패전자의 굴욕적인 지위를 미봉하는데 애썼다」고 그 외교수완을 평가하고 , 「그렇기는 하지만 그 노활(老猾)은 도리어 사랑할만하고, 뭐라고 해도 청국 당대의 인물임에 부끄럽지 않다」고 적고 있다.
伊藤도 陸奧도 사교적으로 예의바르게 이홍장을 대우하였으나, 그의 장시간에 걸친 변설(辯舌)에 충동되어 연화(軟化)된 것 같은 어수룩함은 추호도 없다. 두 일본 전권대신의 냉엄한 대청정책은, 회의 속행 중 자주 이홍장을 실망, 절망의 늪에 떨어뜨렸다.
이튿날인 21일, 일본이 제시한 휴전의 조건은, 「일본군은 대고(大沽), 천진(天津),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거기에 주둔하는 청국군은 일체의 병기, 군수를 일본군에 인도하며, 천진, 산해관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하고, 휴전 중 일본군의 비용은 전부 청국의 부담으로 한다」 등,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이 각서를 묵독(黙讀)하는 이홍장의 안색은 점차 파래지고, 몇 번인가 “가혹! 너무 가혹하다!”고 내비쳤다.
연전연승의 일본 측에는 정전의 필요 같은 것은 없다. 전쟁을 계속하는 체 강화조건을 정하고 싶은 것이 본심이지만, 청국이 바라는 정전을 딱 잘라 거절해서는 여러 외국으로부터 비난받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청국이 도저히 응할 수 없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홍장은, 일본 측이 재고하고, 좀 더 관대한 별안(別案)을 제출해 주도록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伊藤는, 「청국이 본안에 대한 수정안을 내면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거부하지 않겠으나, 일본이 다른 안을 내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양국 간의 실랑이가 계속된 후, 이홍장은, 「휴전문제는 일시 중지하고, 일본의 강화조건을 보여달라」고 제안했다. 伊藤는, “강화문제에 착수하는 것은 좋으나, 청국이 휴전문제를 철거하지 않으면, 강화조건을 제출할 수 없다”고 회답했다.
이홍장은 “일본이 만약 영구적인 평화를 바란다면, 청국의 명예에 대해서도 조금은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더욱더 일본의 주장이 청국에 있어서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주장을 변하지 않고, 이홍장이 휴전문제 철거를 생각하기 위해 3일의 유예를 주었다. 이홍장은 암연(黯然)하게 회의장을 떠났다.
강화희의 회장은, 시모노세키(下關市) 아미타사정(阿彌陀寺町/현재명)의 春帆樓(슌반로우)이다. 春帆樓라고 명명한 것은 伊藤博文로, 그와는 인연이 깊은 여관이었다. 강화회의 7년 전, 1888년(명치21년)에 伊藤가 여기에서, “복(河豚)요리”를 먹은 것이 계기가 되고, 독성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한 금지가 풀려, 春帆樓는 「복어요리 공인 제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에서는 “ふぐ(후구/복河豚)”라고 하지 않고, 복을 부르는 물고기라고 하여 “ふく(후쿠/福)”라고 한다.
강화무렵의 모습으로 복원된 春帆樓는, 지금 割烹旅館(카츠포 료간)으로 영업하고 있다. 伊藤博文, 陸奧宗光가 李鴻章과 대좌한 “강화의 방”, 명치천황(明治天皇)과 황후가 쓰던 “천황의 방”도 복원되어 있으며, 어떤 방에서도 관문해협(關門海峽)이 바라보인다. 문을 들어선 우측에 일청강화기념관이 있고, 伊藤 博文가 회담장에서 쓴 원자색 포장의자, 테이블, 벼루 등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