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
종이배를 어떻게 접었더라? 복사지 한 장으로 이리 접고 저리 접어보아도 통 만들어 지질 않는다. 장난감이 없던 내 유년에 훌륭한 친구가 종이배였는데 접는 방법은 통 생각나지 않으니 내게도 망각의 시간이 찾아오는 중인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때는 아침 출근길에 차를 어디에 세워 두었는지 허둥대며 찾기도 하고, 서랍 열쇠를 어디 두었는지 몰라 오전을 공치던 날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금방 들었던 이야기도 메모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적어도 나만큼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 할 것 같은 마음이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 앞에 나도 변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어디 그 뿐인가. 거울을 보면 흰 머리카락과 없었던 검버섯이 늘어나고, 계단을 오를 때는 숨이 차오르니 체력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인생 막바지에 평생을 살아 온 기억을 잃어버렸던 어머니의 기억으로, 신체의 변화는 그렇다 치지만 기억력의 변화를 생각하면 미래의 모습이 걱정된다. 자식들이 변변치 않아 한평생 삶의 고비마다 서린 한이 짐이 되었을 삶의 무게를 말년까지 다 짊어지고 계신 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치매라는 이름의 볼품없는 노년을 보내신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소스라친다. 그러나 어이하리.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했는데 나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와 똑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올해 들어 우리 나이로 하면 50살, 옛 선인들은 나이 50을 ‘지천명’이라고 했다. 막상 내 나이가 이쯤 되고 보니, 그동안 외우기만 했던 ‘지천명’의 진짜 뜻은 무엇인지 궁금해 진다. 얼른 한자풀이를 해 보면 ‘하늘의 명을 알아듣고 인정하게 되는 나이’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무엇하나 두려움 없이 설치던 젊은 시절의 객기와 대비되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불가에서 이르는 ‘우리가 거처(居處)하는 우주의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諸行無常(제행무상)의 의미. 태어나면 죽고, 부귀영화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큰 바위도 언젠가는 모래로 변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변화를 인정하게 되는 나이라는 것으로 짐작해 본다.
변하는 것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지천명이라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실천토록 깨닫는 것도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이를테면 내 사랑 아내에게, 부모님의 은혜,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와 동료·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변하지 말아야 할 진리의 한 예(例)가 되지 싶다.
종이배 생각에 내 어릴 적 동심도 아직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동심의 세계 또한 변하지 말아야 할 진리의 하나가 여겨본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종이배를 띄어야 할 텐데, 종이 접는 방법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라도 다시 배워서, 이다음에 시냇물을 만나면 종이배에 지천명의 사연을 실어 띄어 보내고 싶다.
첫댓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종이배를 띄어야 할 텐데, 종이 접는 방법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다...'
에이...그걸 어찌 기억합니까 선생님? 당연하신거지요.
전 얼마나 심한지 남편말이 집에만 잘 찾아 오랍니다.ㅋ..좋은글 감사 합니다.
" 동심의 세계 또한 변하지 말아야 할 진리의 하나가 여겨본다."
하늘의 명을 알아듣고 인정하게 되는 나이 지천명에 동심을 붙잡고계신 선생님이 다시보입니다.
건필하시고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이하리.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했는데 나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와 똑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심의 세계 또한 변하지 말아야 할 진리의 하나가 여겨본다" 포장은 세월을 이기다 보니 허름해 져도 영혼은 갈고 닦아 단단한 빛을 내고 있다고 믿어보면 어떨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헉!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에이, 난 종이배 정도는 접을 수 있는데~'이러면서 종이를 접어보기 시작했는데...생각이...안나는 거에요. 결국 딸보고 접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생각이 나더군요. 햐~! 정말 남일이 아니네요. 동심까지 잃어버린 듯해서 마음 한 구석이 쬐끔 허탈해오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다음에 시냇물을 만나면 종이배에 지천명의 사연을 실어 띄어 보내고 싶다." 저절로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저도 어릴때 종이배 잘 접었었는데 ...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세월의 강물위에 흘러가는 우리들의 종이배..
의미를 주는 글에 머물러 아련한 생각에 잠겨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행무상'의 의미를 인정해야 하는 나이가 지천명이라면, 죽을 때까지 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의 도리(例)를 다하면서 살기 또한 어려우니 어리석은 중생이겠지요. 사색의 글에 머물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