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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무인도 시인학교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장 나쁜 해석가다.
- 소크라테스
허문재
심란한 시절이었다. 동해에서 잡히던 고기가 서해에서 잡히고, 서해에서 잡히던 고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절이었다. 그 흔하게 잡히던 동해의 오징어가 언제부턴가 잘 잡히지 않더니 주문진항에서도 오징어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시인은 지난겨울 주문진항 횟집 수족관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춘 오징어를 보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아무리 가난해도 동해의 오징어를 잡지 마라 어쩌고 읊어댔던 선배 시인의 시구절이 생각나기도 했으나 잡고 싶어도 잡을 오징어가 없고, 팔고 싶어도 팔 오징어가 없게 된 현실 앞에 시인은 절망하기도 했다. 서해에 이어 동해에서도 중국 어선들이 판을 치고 다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동해의 어항들을 중국에 팔아넘겨야 할 정도로 북녘의 가난이 심각하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그나저나 오징어가 없는 동해를 시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가난해진 동해를 시인은 한동안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섰다.
한 달 넘게 주야장천 내린 비로 심산유곡의 나무가 흘러 내려와 대처의 가로수 행세를 하고, 하수구 똥물이 역류해서 샘처럼 치솟기도 했다.
서해 NLL 부근에서 침몰한 함정이 좌초인지 어뢰에 의한 폭침인지 헷갈리게 하는 군 당국의 발표와 여전히 입을 닫고 있는 수군 병사들과 그들의 수뇌부, 그리고 속수무책인 정치인들이 한심했고,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입이 시인은 영 불쾌했다. 북한 잠수함이 엔진을 끄고 조류를 타고 디귿자로 침투하여 귀신같이 어뢰를 쏘고, 다시 디귿자로 귀신같이 달아났다는 해군 당국의 발표는 대한민국 해군의 무능을 그대로 고백한 것인지, 북한 해군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있는 이적행위인지 영 헷갈렸다. 대한민국 해군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국가정보원에 신고해야 할지, 무용지물인 해군을 해체하고 그냥 육군에 합류하라고 조언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식민지 지배의 미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한심한 족속들이 심심하면 자기 땅 내놓으라고 헛소리하는 것들도 지겨웠고, 자라나는 학동들한테 밥을 공짜로 줘야 하네 말아야 하네 떠들어대는 인간들도 시인은 짜증 났다. 길게만 느껴지는 나라님의 통치 기간도 짜증이 났고 비호감인 그의 비주얼은 더욱더 짜증이 났다. 쇠북도 아닌 친북 종북좌파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꼴통들의 주둥아리도 꼴불견이었고, 영혼도 쓸 만한 지식도 없는 인간들이 시인입네 작가입네 하고 몰려다니는 꼴도 시인에겐 영 불편하기만 했다. 자기 밥그릇만 불리느라 남의 밥그릇은 패대기치고 있는 상것들의 행태도 역겨웠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아전들의 작태도 시인은 몹시 불쾌했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시인들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설사 똥 쏟아내듯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 편의 그 시들이 불편했고, 미처 읽지도 못하고 밀려만 가는 그렇고 그런 잡지들 때문에 숨이 콱콱 막혔다. 백화점 문화 강좌란 것도 지겨웠고, 그게 뭐 중국집도 아니고, 동네 골목마다 번성하고 있는 시 창작 교실이란 것도 시인은 지겨웠다.
문학상이란 건 더욱더 가관이어서 똑같은 작가에게 오늘은 이 상처럼 소설을 썼다고 상을 주고, 내일은 김동인처럼 썼다고 상을 주며, 또 같은 시인에게 오늘은 소월처럼 시를 썼다고 상을 주고, 내일은 김수영처럼 시를 썼다고 상을 주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심지어 평생 꼬박꼬박 월급받아가며 교수 노릇을 하다가, 퇴직금 받고 겨우 연금 받아 가며 시 쓰느라 수고한다고 자기들끼리 상과 상금을 주고받고, 그것도 모자라 예술원 회원이랍시고 전관예우 식 평생 보너스까지 챙겨주는 염치없는 꼰대들의 작태에 시인은 그만 질려버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자기가 심사한 문학상을 자기가 받고, 자기한테 상을 달라고 심사위원들한테 전화나 메일을 보내기까지 해서 기필코 상을 받기도 한다는 얘기까지 나돌 땐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또한, 문학상이 올림픽 메달도 아닌데 3관왕이니 4관왕이니 떠들어대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천박한 말에 시인은 진저리가 처졌다. 한편 이름 꽤나 있다고 하는 시인들이 심사한 일간지의 신인상 당선작들이 줄줄이 지방 어딘 가에서 창작 서당을 열고 있다는 모 시인의 대필이거나 자기 표절임이 드러나 번번이 망신살이 뻗쳤을 때, 또 그 인간이 그런 식으로 이미 당선시킨 시인만도 수십 명이라는 소문이 나돌 땐, 정말이지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 어느 먼 곳으로 이민이라도 가고 싶었던 것이 시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유와 상징을 온몸에 새긴 치명적인 시인 운운하는 어느 시집의 표사를 읽다가 시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읽던 시집을 집어던졌다. 틀에 박힌 시집 해설이나 표사를 수도 없이 써재껴서 그 돈만으로 서울에 집 한 채를 샀다는 어느 교수 평론가에 관한 소문까지 공공연히 돌고 있을 때였다. 시인의 인내도 이젠 한계에 도달한 듯했다. 시인들과 그 주변 인간들의 몰염치와 자아도취, 그리고 자폐도 이젠 중증이었다. 시란 건 정말 시인이나 시인이 되려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인간들과 파렴치한 무뇌아들만이 읽고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무인도를 떠올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섬 하나가 1억 원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진즉에 지인에게서 듣기는 했으나, 10년 넘게 비정규직이나 전전하며 포의한사布衣漢士로 지내온 시인이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서울에 전셋집 값도 되지 않는 돈으로 섬 하나를 살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른 척 그냥 지나칠 수만도 없었다. 시인은 섬을 살 수 없는 자신의 현실과 포기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을 했다. 고민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더 많은 고민을 낳았다.
시인은 마침내 섬을 살 만한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이 살 수 없다면 주변 사람이라도 그 섬을 사서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 시인도 그 덕분에 자주 그 섬을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먼저 가까운 지인들부터 살펴봤다. 하지만 성질이 지랄 같아 평소에 인간관계가 워낙 협소한 시인이 문단 주변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엔 섬을 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시인의 주변에 있는 시인들은 시인처럼 백수거나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인간들뿐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섬을 살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인간들은 그들 자체가 자본의 바다에 떠 있는 섬 자체여서 굳이 섬을 살 필요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시인은 좀 더 대상자 범위를 넓혀보기로 했다. 대학 동창, 고등학교 동창, 중학교, 초등학교 동창 중에서 돈을 좀 벌었을 만한 친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시인은 일단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제외했다. 일찍부터 이재理財에 눈을 떠서 돈이 안 되는 학과는 쳐다보지도 않던 고등학교 동창들부터, 공부는 못했어도 장사 수완은 있어서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은 고향 친구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명단을 작성하고 하나하나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연락을 받은 시인의 동창들은 다짜고짜 섬을 사라는 시인의 말에 처음엔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만의 정보망과 감각을 통해 그 섬이 경제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곤 시인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섬의 경제적 가치를 먼저 저울질해볼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인은 그들에게 지금 당장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섬이 재산이다. 우리나라같이 땅덩어리가 좁은 나라가 지금처럼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나면 인간이 살 만한 곳은 곧 섬밖에 없게 된다. 갈 데가 섬밖에 더 있나?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고 도피처라는 식의 말을 하며 설득했다. 그것도 ‘다리를 이미 놓았거나 놓을 만한 가까운 섬은 안 된다. 그런 섬들은 이미 다 망가졌다’라는 사소한 사실까지 말해줬다. 그러나 눈앞의 돈에만 눈이 먼 그런 인간들에게 시인의 말은 공허한 잠꼬대처럼 들릴 뿐이었다. 시내의 모처에서 고깃집을 운영해서 돈을 좀 모았다는 시인의 고향 친구는 그런 시인의 말을 한심하다는 듯이 듣더니, 자기 애를 타이르듯 점잖게 시인을 나무랐다.
“너 아직 시인가 뭔가를 쓰고 돌아다닌다더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가 보다. 우리 집에서 갈매기살을 팔기는 판다만 그 갈매기가 그 갈매기가 아니야. 갈매기를 잡아 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런 섬을 사서 뭐 해? 그 섬에 안마시술소나 룸살롱 같은 건 있냐? 세상 얼마나 살 거라고, 너도 이젠 정신 차리고 재미 좀 보면서 살아 인마! 언제까지 그런 헛지랄이나 하고 살래? 헛소리 그만하고 언제 한번 찾아와라. 너 룸살롱은 가봤냐? 사내가 남의 살도 먹어 보고 그래야지, 집에서 너무 편식만 하면 안 된다. 지겹지도 않냐?”
시인의 고향 친구는 시인의 편식과 가정의 권태까지 걱정해주며 말했다. 시인의 친구는 고기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남의 고기를 때때로 주워 먹으며 재밌게 살고 있다는 듯이 시인에게 말했다. 시인은 할 말이 없었다. 시인은 자신의 현실적 무능력 앞에 참담한 마음이었다.
시인은 더 이상 돈 많은 동창들에게 구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살아가면서 평생 시집 한 권 사서 읽지 않는 그런 인간들에게 시인은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신세를 질 일도 없었다. 섬의 개인적인 소유가 목적이 아닌 이상 굳이 피곤하게 돈 있는 동창들에게 매달릴 이유가 시인에겐 없었다.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건 그런 거금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에 널려 있는 것이 무인도고, 그런 무인도에 들어가 며칠이나 몇 달씩 지내다 온다고 해서 안 될 일은 없을 듯했다.
우리나라엔 모두 4,198개의 섬이 있었다. 그중에 3,153개가 남한에 있는 섬이었으며 1,045개의 섬은 북한에 있었다. 남한에 있는 섬 가운데 무인도가 2,689개였고, 사람이 사는 섬은 464개였다. 또한, 남한에 있는 무인도의 68%가 전라남도에 있다고 네이버가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대부분의 무인도는 국유지나 공유지였지만 개인 소유의 섬도 1,398개나 된다고 했다. 시인은 일단 북한에 있는 1,045개의 섬은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섬 중 유인도를 제외한 2,689개의 무인도 가운데에서 대상지를 물색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느 섬이 국유지고 어느 섬이 개인 소유의 섬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사유지 침해로 고소당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시인은 마침내 대단치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국유지든 사유지든 상관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무인도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놓았을 것도 아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흔해서 남의 눈에 띌 염려도 거의 없을 거였기 때문이었다. 개인 소유의 섬이라고 하더라도 주인이란 자가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섬으로 출퇴근하면서 감시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무인도라면 어쩌다 오가는 어선이 아니면 사람의 흔적을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할 수 없을 터였다.
생각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어느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인은 가소로웠다. 한국 사람들이 제아무리 땅에 대한 욕망이 그악스럽기로서니 벌써 무인도까지 전부 누군가가 사들였으리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섬의 소유자는 그 섬의 최초 발견자거나 그 발견자의 후손일까 하는 싱거운 생각도 시인은 해봤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시인이 지금 부동산 소유의 역사와 그 타당성을 놓고 씨름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들을 상대로 재판을 할 것도 아니고 그럴 여력도 시인에겐 없었다. 시인에겐 다만 사람들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시인은 당장에 자기 생각을 현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무인도에 가서 딱 한 달만 지내보기로 했다. 한 달 동안 지낼 수 있는 식량과 식수, 텐트, 취사도구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무인도까지 갈 여비를 마련했다. 시인은 일단 평소 알고 있는 가까운 포구로 가서 어선을 빌릴 생각이었다. 어선을 빌려 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어부라면 무인도 한두 개쯤은 알고 있을 터였고, 그중에서 육지에서 가장 먼 섬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면 그뿐일 터였다.
어느 날 아침에 시인은 아무 생각 없이 폐차 직전의 엑센트 승용차에 짐을 실었다. 큰 배낭 하나에 라면 상자 하나와 식수 한 상자 그리고 쌀과 김치, 고추장과 된장 등이 담겨 있는 상자가 또 하나였다. 배낭 속엔 침낭과 간단한 취사도구와 필기도구, 민음사 번역본인 스탕달의 『적과 흑』 두 권 그리고 입을 옷가지가 들어있었다. 시인의 아내와 어린 딸은 못마땅한 얼굴로 시인을 배웅했다. 시인은 돈이 될 만한 동화나 한 편 써서 나오겠다고 했지만, 시인의 아내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시인은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낸 삼 집 시인이었지만 그가 쓴 글이 돈이 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내였다. 시인은 개의치 않고 차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시인은 밴댕이 철이면 밴댕이회를 먹으러 들르던 강화 외포리로 차를 몰았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아예 석모도로 건너갈까도 생각했으나 시인은 그냥 그곳에서 어선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국수나 먹으려고 들어간 국숫집 주인이 옆에서 국수를 먹고 있던 어선의 선주를 소개해줬다. 대명호 주인이라는 어부는 시인의 얘기를 듣더니 마침 조금 때라 그물질도 시원치 않을 때니 기름값이나 받고 시인을 자신이 알고 있는 무인도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시인은 쾌재를 불렀다.
시인과 시인의 짐을 실은 대명호는 진두강을 빠져나와 석모도 남쪽을 돌아서 어디론가 계속 향했다. 시간 반이 지났을 때쯤 주문도와 볼음도를 멀리 지난 것 같았고 두 시간쯤 지나서 말도를 본 것도 같았다. 대명호 선장이 시인을 어느 무인도에 내려준 것은 외포리 선착장을 떠난 지 세 시간이 미처 못 됐을 때였다. 선장은 그 섬을 매기섬이라고 불렀다. 갈매기들만 있는 섬이라서 어부들 사이에선 그렇게 부른다고 했으나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작은 섬이었다.
시인과 선장은 정확히 한 달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만약 선장이 약속을 잊어먹기라도 한다면 시인은 적지 않은 곤경에 처할 것이었다. 섬에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고, NLL 근처의 섬이어서 다른 안전도 장담할 순 없었다. 짐을 내려놓은 선장은 좀 걱정스러운 듯이 시인과 섬을 일별한 후 떠났다. 어선이 뒤로 포말을 남기며 사라진 후 시인은 섬에 오롯이 혼자 남게 되었다. 비로소 시인은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섬은 가장 긴 쪽이 백 보쯤 됐고 가장 짧은 쪽이 사오십 보 정도가 되는 타원형 모양의 섬이었다. 동쪽으로 사오 미터 높이의 바위와 암석 위에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끝으론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시인은 그 소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소나무가 있는 곳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으나 섬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시인은 소나무 가까이에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고 나자 시인은 드디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휴가철도 지났으니 인간들이 여기저기 들쑤시며 다니다가 그곳까지 올 염려도 없을 듯했다.
시인은 일단 섬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 저녁 시간 전까지 잠시 낮잠을 자기로 했다. 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도 미처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시인은 텐트 안에 침낭을 깔고 누웠다. 해풍을 맞으며 청하는 오수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고 온갖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와 시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상념의 반찬을 얼버무렸다. 텐트 안은 오래전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고 편안했다. 시인은 오랜만에 꿈에 절었다. 용궁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잠시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인이 깨어났을 땐 이미 일몰이 상당 부분 진행된 다음이었다. 해가 수평선 위로 조갑爪甲 반월만큼 남아 있었다. 시인이 섬에서 맞는 첫 일몰이었다. 해가 넘어가고 있는 수평선 주위로 온 산에 단풍이 들듯 빨간 물이 번지고 있었다. 시뻘겋게 번지던 바닷물은 점차 사위어가는 불꽃처럼 잦아들더니 어느 순간 아주 사라지고 이번엔 시커먼 먹물처럼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고 나자 시인은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해결해야만 했다. 랜턴이 하나 있었지만 한 달 동안 지내려면 되도록 아껴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시인은 간단히 라면을 하나 끓여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섬에서의 만찬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내일 낮이면 바닷가에 먹을 만한 해산물들이 푸짐하게 널려 있을 거였다.
시인은 라면을 끓였던 코펠을 섬의 서쪽 바닷물에 헹군 후, 다시 바닷물에 양치질했다. 시인은 마지막 입 헹굼만 생수로 했다. 가져온 생수도 되도록 아껴야만 했다. 섬에서 샘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져온 생수는 며칠이면 바닥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다도 하늘도 캄캄했다. 음력 며칠인지 달은 없었다. 어둠이 익숙해질 때쯤 하늘의 별들이 시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카시오페이아, 오리온, 거문고자리, 왕관자리 등과 같은 별자리가 어느 것인지 시인은 알 수 없었다. 시인의 머릿속에선 이름과 실제 별자리가 따로 놀았다. 그 많은 별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시인은 갑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엔 더욱 많은 별이 빛나기 시작했고, 시인은 그 별들을 일일이 호명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그러다가 북서쪽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발견하곤 미친놈처럼 환호작약했다. 시인이 실제로 알고 있는 유일한 별자리였다.
매기섬의 유일한 주민이 된 첫날 밤 시인은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잔잔하고 조용한 초가을 밤이었다.
이튿날 시인은 매기섬의 일출과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는 섬의 동쪽 바다 수평선 위에서 떠올랐다. 어제저녁 서쪽 바다 수평선 아래로 내려간 해가 하룻밤을 자고 나서 동쪽 바다의 수평선 위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내밀듯이 미끈하게 떠올랐다. 시인의 가슴속으로 뜨거운 뭔가가 뛰어들었다. 시인은 뜨거운 그 뭔가를 삼킨 듯했다. 이윽고 식도를 타고 내리는 듯한 뜨거운 그 뭔가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충전이 다 된 배터리처럼 두 눈에 파란불이 켜지고 온몸이 싱싱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시인은 동쪽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오줌발은 거셌다. 시인의 오줌발이 낙차 크게 바닷가 바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섬의 모든 것이 깨어나 비로소 아침을 맞는 듯했다.
시인은 코펠에 씻지도 않은 쌀을 한 움큼 집어넣고 물을 적당히 부은 다음 가스버너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런 다음 시인은 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바닷물은 밀물에서 썰물로 돌아섰는지 섬을 중심으로 모래와 갯벌이 뒤섞인 해변이 십여 미터 폭쯤 드러나 있었다. 시인은 바위틈에서 주먹만 한 소라 두 개와 백합 조개 세 개를 주웠다. 백합 조개론 국물을 내고 소라는 따로 삶아서 먹을 작정이었다. 그 정도면 아침거리론 충분할 듯했다. 바다는 두고두고 시인에게 싱싱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거였다. 미리 잡아두거나 모아놓을 필요를 시인은 느끼지 않았다.
시인은 평소에 집에서도 그랬지만 하루 세끼를 다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몸을 열심히 쓰는 직업도 아니고 밥벌이를 열심히 하는 처지도 아니어서 하루 두 끼면 충분했다.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아침을 먹고,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져온 식량도 절약하고 불필요한 설거짓거리를 줄여서 식수도 절약할 생각이었다. 배가 고프면 바닷가에 가서 먹을 만한 것들을 주워다가 간식으로 끓여 먹거나 구워 먹으면 그만이라고 시인은 생각했다.
싱싱한 백합 국물은 달콤했고, 연한 소라 살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술 한잔이 간절했으나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시인은 그릇들을 바닷물에 헹궈놓은 다음 산책에 나섰다. 최대한 느리게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십 분 정도가 걸렸다. 두 번짼 조금 더 천천히 걸어보았다. 이번엔 십오 분가량이 걸렸다. 세 번째는 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이십 분 정도가 걸렸다. 빙빙 둘러 바다였다. 시인은 그곳이 새삼 섬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동서남북의 바다를 다시 한번 일별한 시인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인은 배낭 안에서 스탕달의 『적과 흑』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앉아서 읽다가 힘들면 엎어져서 읽고, 엎어져 읽다가 힘들면 누워서 읽었다. 저녁을 준비해야 할 때쯤 시인은 스탕달의 『적과 흑』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잘 읽히지 않을 것 같아서 가져온 책을 하루 만에 반이나 다 읽어버리고 나자 시인은 당황했다. 한 달 내내 읽어야 할 책을 한나절 만에 반이나 읽어버린 것이었다. 고리타분하거나 유치한 젊은이의 연애 얘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책의 어디에 그토록 독자를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던 것인지 시인은 의아스러웠다. 유치한 연인의 수작에 알고도 모르면서 넘어가는 젊은 연인들처럼 소설의 내용에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귀족이나 부르주아 층의 허영이나 속물 기가 21세기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겹쳐져 나타났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시인은 의외의 독서 결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 섬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해는 중천에서 서쪽 바다 위로 기울고 있었다. 시인은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조개와 소라는 흔했다. 시인은 바위틈에 끼어있던 낙지도 한 마리 줍고 벌떡 게도 두 마리 주워서 코펠에 담았다. 그만하면 시인의 만찬으로선 손색이 없을 듯했다. 초대 손님이 없는 것이 한이고 술 한잔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느긋하게 만찬을 즐긴 시인은 두 번째 밀물로 돌아선 바닷가로 내려갔다. 섬의 해변은 썰물 때도 이십여 미터 정도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시인은 바닷가에 옷을 홀랑 벗어놓더니 바닷물과 해변이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 나갔다. 시인은 모래와 개흙이 반반쯤 섞인 해변에 웅덩이를 판 다음 거기다가 시원하게 똥을 쌌다. 그런 다음 시인은 웅덩이를 메우고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가을 초저녁의 바닷물은 차가웠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시인은 한동안 수영을 즐겼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수영장을 가진 사람인 듯 여유로웠고 즐거워 보였다. 멀리서 보면 시인의 모습이 한 마리 물범처럼 보였다.
배설과 목욕과 수영을 한꺼번에 마친 시인은 다시 섬으로 기어 올라왔다.
섬의 저녁은 고즈넉했고 천문은 순탄했다. 시인은 섬의 바닷가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텐트 밖에 모닥불을 놓았다. 시인의 모닥불은 칠흑 같은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나 있는 숨구멍처럼 보였다. 위에서 보면 그 숨구멍으로 세상의 온갖 어둠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튿날도 시인은 아침을 먹고, 섬을 각기 다른 속도로 세 바퀴를 돌았고, 스탕달의 『적과 흑』의 나머지 한 권을 다 읽어버렸고, 바다에서 똥을 쌌으며, 수영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부터 시인은 한낮에 할 일을 찾아야만 했다. 낮잠을 자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지만 그것만으론 하루를 다 보내기가 힘들었다.
시인은 바닷가에서 평평한 돌을 날라서 섬의 동쪽 끝부분에 일출을 앉아서 볼 수 있는 자리를 하나 만들었고, 서쪽 끝엔 일몰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소나무 아래에도 자리를 하나 마련하고 송하정松下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섬의 북쪽에도 자리를 또 하나 마련하고 망북대望北臺라고 했으며, 섬의 남쪽엔 우연히 고래가 물을 뿜는 걸 보고 나서 그 자리를 기념하여 망경대望鯨臺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로 오십 센티, 세로 십오 센티 정도 되는 널빤지를 주워다가 앞에다가는 ‘한유재閑遊齋’라고 쓰고 뒤에는 ‘시인의 집’이라고 사인펜으로 쓴 다음 말뚝에 티자로 묶어 텐트 옆의 땅에다 박았다. 이로써 시인의 섬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시인은 아침 산책을 하다가 섬의 남쪽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그 밑에다 코펠을 하나 받쳐놓았다. 적은 양이었지만 온종일 받으면 2리터 정도는 모일 듯했다. 그 정도의 물이라도 받아놓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했다.
시인은 또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왔던 낚싯줄에 낚싯바늘을 매고, 1m가 겨우 넘을까 말까 한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서 낚싯줄을 맸다. 미끼로는 물가에서 손으로도 쉽게 잡을 수 있는 새우를 써서 밀물 때에 맞춰서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 엉성해 보이는 낚시였지만 놀래미나 망둥이 같은 물고기들이 심심치 않게 걸려 올라왔다. 시인의 식탁은 더욱 풍성해졌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시인은 점차 뭔가 공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섬에는 술도 없었고, 친구들도 없었다. 새로 읽을 책도 없었고, 지겹던 시마저 없었다.
시인은 섬의 24시간을 꼬박 앉아서 지켜봤다. 섬의 동서남북을 각각 여섯 시간씩 나눠서 지켜보기도 했고, 바다와 하늘을 열두 시간씩 나눠서 내려다보고 올려다보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바다의 빛깔이나 하늘의 빛깔도 변했으나 바다도 하늘도 점차 시인의 마음을 잡아둘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함께 말을 할 대상이 없다는 거였다. 시인은 점차 독백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을 아무 데나 펴서 소리 내어 읽어도 보았으나 시인은 자기 목소리가 새 소리인지 개 소리인지 점차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인은 섬에서의 정해진 일과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섬 둘레를 돌았고, 저녁이면 바다에다 똥을 싸고 나서 또 헤엄을 쳤다. 시인은 매일 아침에 섬 주위를 한 바퀴씩 더 돌기 시작했고, 점차 섬에서 채취하는 소라나 조개의 양도 늘리고, 낚는 물고기의 양도 늘렸다. 그렇다고 전보다 더 먹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마 해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무료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시인이 피우는 모닥불은 구조 신호로 바뀌어 있었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웠다. 소나무 꼭대기엔 흰 속옷을 내걸었다. 완전히 조난당한 신세처럼 보였다. 시인은 점차 자신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매기섬 근처엔 어선 한 척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NLL을 넘어온 북한 어선의 나포 문제로 NLL 부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사실을 시인은 알 턱이 없었다.
3주째 월요일, 시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왜 아침마다 꼬박꼬박 일어나야 하는지 시인은 마침내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으나 시인은 먹는 것마저 귀찮아졌다. 날씨가 조금 더 쌀쌀해진 것 같았으나 섬과 바다엔 별다른 일이 없을 듯했다. 어제와 다른 동서남북의 바다도 하늘도 없을 것 같았다. 바다는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밀물과 썰물이 뒤바꿀 것이고, 하늘의 구름도 자유롭게 이합집산을 하며 흘러갈 것이었다. 시인은 모든 것이 시큰둥해서 더욱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텐트의 출입문 지퍼를 겨우 내린 시인은 침낭 속에 누운 채로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해가 이미 시인의 이마를 45도 각도로 비추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시인의 집’이라고 써서 T자로 얽어매어 놓은 말뚝 위에 앉아 있었다. 갈매기는 날아갈 생각을 잊은 듯, 한동안 먼바다와 텐트 안의 시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 듯했다. 시인은 그런 갈매기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갈매기의 똥이 시인’이라는 글자의 ‘시’자와 ‘인’자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 시원하다.”
순간 시인은 갈매기가 내뱉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시인은 그때 그 말이 갈매기가 한 말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갈매기 말이 사람의 말처럼 들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밖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시인은 이젠 환청 현상마저 생기는가 싶었다. 좋지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젠 뭐야? 아무 데나 함부로 똥이나 싸고.”
시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자 말했다. 갈매기는 사람의 기척에도 여전히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넌 뭔데, 우리 섬에 들어와 엎어져 자고 있는데?”
시인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말을 할 사람은 주위에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었다. 시인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갈매기뿐이었다. 그렇다고 갈매기가 사람 말을 하거나 자신이 갈매기 말을 알아들었다고 시인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갈매기밖에 없었다. 시인은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미치겠네. 제가 말한 건 아닐 테고.”
시인이 다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내가 맞거든.”
갈매기가 다시 말했다. 시인은 잠시 기가 막혔다. 무인도 생활 3주 만에 못 볼 꼴을 본 것만 같았다. 어디 가서 지금 이 사실을 얘기한다면 틀림없이 시인은 미친놈 취급을 당할 거였다. 시인은 자신의 머리를 싸쥐었다.
“내가 지금 이상한 거냐, 네가 원래 별종이냐?”
시인이 심각하게 물었다.
“여긴 원래 내 섬이거든. 내 소개는 차차 하기로 하고, 네 소개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남의 섬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으니까.”
갈매기가 차분하게 말했다. 시인을 데려다준 선장이 이 섬의 이름이 갈매기의 ‘매기’를 따서 매기섬이라고 한다고 했으니 섬의 주인이 갈매기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시인은 생각했다.
“그래. 그건 내가 인정하지. 난 시인이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한 달 정도 푹 쉬러 왔지.”
시인은 그냥 심드렁하게 말했다. 시인은 오랜만에 대화의 상대가 생긴 것은 반가웠으나 갈매기와 얘기한다는 것도 이상했고, 갈매기완 할 얘기도 없을 듯했다.
“시인? 그게 뭔데?
갈매기가 고개를 꺄우뚱하며 물었다. 시인은 지금의 처지가 난감했다. 사람을 피해서 도망해 온 무인도에서 갈매기를 상대로 다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인이란 자기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 주는 사람이지.”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 의심스러웠다. 뭔가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했다.
“음, 예를 들면 이런 거지. 가을을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시인이야.”
시인은 자신의 순발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말했다. 말하고 보니 가을이 바다 북쪽으로부터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바다의 빛깔이 하늘처럼 좀 더 투명해 보였다. 하지만 갈매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을은 그냥 가을이잖아. 왜 번거롭게 말하지? 시인은 간단한 것도 복잡하게 말하는 자냐?”
시인은 갈매기의 말에 다시 난감해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 그냥 가을로는 다 전달할 수 없는 정서나 분위기, 느낌이란 게 있잖아? 넌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걸 모를 수도 있겠다만, 인간들에겐 그런 게 있어. 그런 걸 좀 더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신선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란 소리야.”
시인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말하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러나 갈매기도 만만치 않았다.
“말이 많아지면 먹을 것이 더 많이 생기냐? 그게 아니라면 말이 길어져야 더 잘 이해가 되거나 소통이 잘 되는 거야?”
갈매기는 시인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시인은 갑자기 집에 있을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런 건 아냐. 시인은 먹을 것을 더 많이 얻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의 이해를 구하고자 길게 말하는 사람도 아니지. 「저팔계 여자는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었다」라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지도 않고, 남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해주지도 않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지. 안다고 해도 자신이 아는 걸 남에게 설명하는 게 무의미할 때가 많아. 그래도 어떤 시인들은 계속해서 남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소리를 해대며 사는 걸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있어. 그런 게 시인이야. 네가 뭘 알겠냐만.”
시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갈매기의 반응은 의외였다.
“뭐 그리 어려운 소리도 아니구먼. 다 알만한 소리야. 우리 갈매기들도 수천 년 동안 생선 대가리나 쫓으며 살아왔어. 갈매기가 나는 이유는 먹이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누대의 정설이었고 진리였지.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갈매기 한 마리가 나타났어. 그 갈매긴 다른 갈매기들처럼 먹기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날기 위해 날기 시작했어. 그런 그 갈매기를 다른 갈매기들은 멸시했지. 결국, 그 갈매기는 무리로부터 추방을 당했어. 하지만 그 갈매기는 다른 갈매기들이 먹기 위해 날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자신의 고집대로 나는 연습을 계속했지. 날면서 공중에서 자는 법, 바람을 가로질러 나는 법, 해가 질 무렵부터 해가 뜰 때까지 비행하는 법, 수직 비행과 수평 비행 등, 갖가지 비행 방법을 연마했어. 높이도 10m에서 20, 30, 60, 300, 600, 1,200m까지 높였다가 마침내 2,400m 높이에서 날개를 접고 시속 340㎞로 하강하는 경지에 이르게 됐지. 그리하여 마침내 완전한 속도로 나는 법을 체득하게 됐어. 당신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 갈매기 생각이 나는구먼. 당신이 말하는 시인이란 자가 꼭 그 갈매기 같아서 말이야.”
갈매기의 말에 시인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시인은 갈매기를 다시 쳐다보았다.
“혹시 그 갈매기가 내가 알고 있는 그 갈매기가 아닌지 모르겠네. 조나단이라고.”
시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번엔 갈매기가 놀라는 듯했다.
“알고 있었네?”
“응, 그럼.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조나단에 관한 전기를 읽고 자랐는걸. 조나단이야말로 갈매기 계의 시인이지. 그러고 보니 내 선배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워지자’라는 것이 그 선배의 좌우명이었잖아.”
시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많은 걸 알고 있네?”
갈매기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뭘,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읽은 지 오래돼서 그러는데, 아까 말한 ‘완전한 속도로 나는 법’이란 게 무슨 뜻이지?”
시인이 물었다.
“응, 완전한 속도란 말이야 시속 10,000㎞로 나는 것도 아니고 빛의 속도로 나는 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어. 그건 말이지 생각한 순간 이미 그 자리에 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갈매기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속도 너머의 속도로구나. 역시 조나단은 범상치 않은 갈매기였어. 우리 중에도 완벽한 언어는 언어 너머의 세계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조나단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니? 다른 갈매기들은 다 어디에 있고?”
시인은 진즉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갈매기들이 많아서 매기섬이라고 한 섬에 왜 다른 갈매기들은 보이지 않는지, 어떻게 이 갈매기는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지 시인은 궁금했던 참이었다.
“조나단이 내 고조할아버지셔. …… 다른 갈매기들은 먹이를 찾아서 다 나갔지. 지금쯤 어선들을 쫓아다니거나 유람선에서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느라 정신들이 없을 거야.”
갈매기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갈매기의 말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너도 지금 이 섬에서 혼자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니?”
“그런 셈이지. 난 아직도 조나단 할아버지가 도달한 경지에 비하면 내가 나는 건 나는 것도 아니야. 내 비행엔 그루브랄까, 뭐 그런 게 아직 없어. 그냥 거칠게 날고 있을 뿐이지. 그래도 계속 나는 연습을 해봐야지.”
갈매기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인도 갈매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너는 이 섬에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니? 시인이라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시심을 닦고 있는 거니?”
갈매기가 계속해서 말했다. 시인은 다시 난감했다. 부끄러운 뭔가가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난 시나 시인들이 지겨워서 이리로 도망 온 거야. 말도 안 되지?”
시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네. 시인이라면서 시나 시인이 지겹다니, 그러면서 ‘시인의 집’이라고 간판까지 달아 놓는 건 무슨 심리냐? 시인이 고유명사도 아닐 테고, 네가 시인을 대표하는 것도 아닐 텐데 함부로 ‘시인의 집’이라고 간판을 내걸어 놓고, 시나 시인이 지겨워서 여기까지 왔다니 이해가 안 되네. 다른 사람들은 보통 교사의 집, 화가의 집, 구멍가게 주인의 집, 환경미화원의 집,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직업을 내세워 간판을 내걸진 않잖아.”
갈매기가 자신이 앉아 있는 말뚝의 간판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건 그냥 심심해서 써놓은 거야.”
시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써놓은 거라고? 정말? 뭔가 다른 이익이나 노림수가 있는 건 아니고? 시나 시인이 지겹다면서 그냥 심심해서 써놓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시인이란 말이 하다못해 당신에게 심리적인 성취감이나 안정감조차 주지 않는 말이라면 당신이 여기서까지 혼자서 그 말을 쓸 일이 없잖아, 안 그래?”
이번엔 갈매기가 좀 더 노골적으로 시인을 몰아붙였다.
“네가 뭘 모르겠지만 시인이란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혼자서도 놀아. 자신을 희화화하면서까지 말이야. 이상 선배의 글을 보면 단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지. 이 선배의 시는 물론 소설까지도 전부 그런 식으로 혼자서 놀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희화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굳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거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곤 볼 수 없지. 다른 사람들에게 오감도 연작시 형식으로 말을 하거나 편지를 쓰지는 않잖아?”
시인이 머릿속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상의 오감도 연작이 그림처럼 떠올랐으나 아무런 구절도 생각나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글이 혼자서 노는 놀이의 방편이란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시인 이 상이 과연 자신의 글이 아무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기를 원한 걸까? 모두에게 이해가 되는 시를 원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의 글들이 이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고? 그것이 비록 당대의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말이야. 어쩌면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특화한 것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이상의 작품 행위가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행위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얘기야.”
갈매기는 먼 곳의 뭔가를 회상하듯이 수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쩌면 갈매기는 무리로부터 쫓겨났지만, 끊임없이 무리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아하니 시나 시인이 지겹다고 하면서도 시나 시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같은데, 문제는 결국 당신한테 있는 거 아냐? 조나단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기 위해 사는 거라고. 모든 해답은 이미 자신에게 있는 거라고. 잘 생각해봐.”
시인은 갈매기의 말이 시건방지다고 생각했으나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인은 말할수록 더욱더 구차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갈매기는 시인이란 단어 위로 다시 한번 걸쭉한 똥을 쌌다. 시인이란 단어가 갈매기의 똥으로 온통 뒤덮였다. 시인은 숨이 막혔다. 시인은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갈매기를 피해 텐트 출입문의 지퍼를 올리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골치가 아파왔다.
대명호 선장과 약속한 한 달이 다 지나갔으나 그날 선장의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인은 꾸렸던 짐을 다시 풀고 텐트도 다시 쳤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무인도에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바닷물은 점점 차가워져서 수영할 수도 없었다. 점점 굵어지는 망둥이를 바라보며 시인은 매기섬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인은 한 달 이십 일 동안 매기섬에 고립되어 있었다. 섬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살고 있던 소행성 B612보다 훨씬 더 컸고, 그 옆에 있던 소행성 327보다는 조금 더 작았다. 시인은 가지고 갔던 쌀과 반찬도 다 떨어지자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과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만을 가지고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나갔다.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시인이 돌아오지 않자 며칠 동안 시인의 가족들은 시인이 조금 더 섬에 있는 것인 줄 알았고,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이상하게 생각한 가족들은 실종 신고를 했다. 시인이 섬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구 일대를 수소문하고 그를 섬까지 데려다준 배의 선장을 알아내고, 시인의 행방을 알아내기까지 또 며칠이 걸렸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구조된 것은 그러한 가족과 경찰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때마침 매기섬 주변에서 새우를 잡던 어선에 의해서였다. 새우잡이 철이 된 것이었고, 매기섬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새우젓용 새우 어장이 형성되는 곳이었다.
새우 어장이 형성되면서 타지로 나갔던 매기섬의 갈매기들도 돌아왔다. 갈매기들이 무더기로 돌아오면서 시인은 조나단의 그 무리 중에서 조나단의 고손자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갈매기들은 무리 속에서 서로 행복해 보였다. 시인은 점차 저 잘난 맛에 서로 시끄럽게 떠들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떠벌리고, 물고 뜯느라 시끄러운 문단과 시답지 않게 느껴졌던 그 잡지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육지로 돌아온 시인은 그날부터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문단 안팎에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모 출판사에서 키워왔다는 소설가 신모 씨의 표절 시비로 갈매기 꽥꽥거리듯 시끄러웠고, 또 한편에선 모 백일장 심사에서 자신이 심사한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한 소설가 한모 씨에 대한 추문이 은밀히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인은 고만고만한 시인들과 다시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고, 시 낭송을 하고, 백일장 심사를 하고, 이 잡지 저 잡지에 시를 싣고,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세상과 세월을 희롱하듯 종횡무진 활보했다. 즐거운 지옥의 나날이었다. 시인은 대중 속에서 무기력했으며, 시인들 속에서나 비로소 시인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대한민국은 역시 시인들의 즐거운 지옥이었다.